피아노 치는 여자 - 2004 노벨문학상
엘프리데 옐리네크 지음, 이병애 옮김 / 문학동네 / 199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미카엘 하네케의 <라 피아니스트>를 보고 생뚱맞다고 생각했다. 영화화된 소설은 잘 안 읽는 편이지만 하네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드러나지 않는데 대한 호기심이 발동했다고 할 수 있다. 하네케가 현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담담해서 섬뜩하다. 그러나 끌린다. 감정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건조하게 묘사하는 방식은 독특하면서도 통찰력이 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통찰력을 찾아 볼 수 없어서 아쉬웠고 찝찝했다. 책 읽기에 심드렁해진 와중에 책장이 술술 넘어갈 책을 고르다 피아노 치는 여자가 눈에 띄었다.

책장을 술술 넘길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 건 착각이었다. 몰입하는 데 꽤나 시간을 끌었다. 앞부분에서 책장이 넘어가질 않았다. 그러나 일단 3분의 1쯤 넘어서니 속도가 났다. 처음에 엘프리데 엘리네크의 독특한 문체에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특히 인상적인 직유법을 많이 사용한다. 처음에는 거슬리는데 익숙해지다보면 직유가 담고있는 날카로운 성찰이 두드러진다. 무엇보다고 건조하다. 기계로 채를 써는 것처럼 고르고 감정이 드러나지 않지만 리듬감이 있어서 채 써는 소리에 심장이 박자를 맞추고 있게 된다. 가령, 이런 문장이다.

"작은 상점들 안에서는 밝은 빛깔 옷을 입은 현대적 어머니들이 푄 바람이 부는 담장 뒤에서 대담한 과제나 수행하고 있는 양, 어깨를 으쓱하며 상품들 위로 몸을 굽히고 있다. 젊은 주부들이 화려한 요리잡지들에서 얻은 지식들을 애꿎은 가지 따위 이국적 채소들을 놓고 실험해보는 동안, 이들이 아이들을 당기던 줄은 좀 느슨해진다. 나쁜 품질을 만나면 이 여자들은 호박 사이로 흉한 머리를 내미는 독사 앞에서처럼 놀라서 움츠린다...."

이런 식이다. 세상을 보는 시선이 더 없이 냉정하고 차갑다. 동정이나 연민을 느끼는 게 마치 죄악처럼 여겨질 정도로 말이다. 전지적 시점에서 세 사람의 이야기를 펼친다. 피아노 선생 에리카, 그녀의 어머니, 그녀를 정복해보려고 하는 발터 클레머.

세 사람 모두 가부장적 권위를 지닌 인물인 동시에 그 권위에 서로를 억압하고 억압당한다. 이들은 몸과 마음을 옭죄는 그물망에서 빠져나오고 싶어하지만 겁이 많고 관습적이다. 이런 인물들의 이중성은 인간의 본성이 아닌가. 에리카는 어머니에게 인간적 욕망을 억압당한 채 금욕적 삶을 강요당하지만 발터의 남성성을 억압하면서 동시에 발터의 남성성에 지배당하고 싶어한다. 이런 심리가 기묘한 섹스 장면-정확히 말하자면, 가학적인-을 통해 설명된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는 상황이 그려진다. 발터의 심리 역시 흥미롭다. 전통적으로 남성의 권위라고 불려진 것을 빼았기고 나서 되찾으려는 심리는 작가의 주관적 관점이기도 하다. 이렇게 냉소적 시선은 처음인 것 같다. 어떤 애정도 없이 인물을 버려버리는 서늘함. 이 싸늘한 시선 때문에 이 소설은 명작이지만 따뜻한 시선이 그리운 건 부인할 수 없다.

에리카의 입을 빌어 예술이 최고 가치로 여기는(적어도 나는 그렇다)감정이나 열정이 무가치하다고 말한다.

"예술가라면, 감정이나 정열을 벗어던지는 것이 얼마나 더 쉽겠어요. 클레머씨가 그토록 존경한다는 극적인 것으로의 전환은 결국 예술가가 진정한 수단을 소홀히 하고 거짓 수단을 붙잡는다는 것을 의미하잖아요. 나는 교사로서 극적이지 않은 예술을 옹호하는데, 예를 들면 슈만이죠. 극이란 항상 더 쉽게 마련이지요! 감정과 정열은 항상 대용, 이지적인 것의 대용일 뿐이잖아요."

새로운 발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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