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희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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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나온건 2000년이고 지금은 2008년. 제레미 리프킨은, 그러니까 이미 2000년 후반의 상황을 예측할 수 있는 통찰력이 있었다. 할 말이 무지 많은데 일단 제목부터 적어보자. The Age of Access. 우리 말로는 접속이라고 번역했는데 '접근성'이라고 말하는 게 더 좋을 거 같다. 네이버 영영사전 정의를 정리해 보면 이렇다.

access  1.  being able or allowed to go into building ar other places

             2. having the opportunity or right to see or use something such as information or

                equipment

엑세스는 소유의 시대가 끝나고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엑세스이다. 엑세스는 또 다른 소유의 형태로 생각된다. 이미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한 소유권을 보유하고 있을 때 눈을 돌리는 게 아닌가 싶다. 물론 리프킨은 이런 의도로 개념을 전개하고 있진 않지만 그럴만한 예를 들 수 있다. 가령, 이미지를 판다는 대형 식음료 체인의 경우를 보자.

모친과 친구를 포함해서 하나 가지고 있으면 놀고 먹기에 좋을 뿐 아니라 깨끗할 것 처럼 보였던 게 도너스 체인이나 아이스크림 체인점이다. 그러나 이건 아무 것도 몰랐을 때다. 리프킨이 썼듯이 지명도 있는 브랜드의 체인점은 개인소유가 될 수 없고, 브랜드 이미지를 돈을 지불하고 사용하는 이용자에 불과하다. 사용자의 입장에서 편할 수도 있겠지만 이미지 사용료가 턱없이 비싸서 4억 정도를 투자했을 때 얻는 수익은 보잘 것 없는 것으로 계산된다. 게다가 유동인구가 많은 대박지역은 임대 사용자의 접근은 원천봉쇄되고 직영체제란다. 그러니까 이미지를 파는 모기업은 영세 임대 사용자들의 소유주가 될 수 밖에 없는 구조로 돌아가고 있다. 엑세스의 장점인 유동성과 자유 또한 보장되지 않는다. 모기업은 브랜드 이미지를 균질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철저하게 임대 사용자들을 감시하고 조종한다. 그렇담 사용자 쪽에서 얻을 수 있는 장점은 무엇인가? 모르겠다.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엑세스의 속성은, 사용자가 일정한 수준을 갖추는 것을 선호한다. 21세기에 기회나 권리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엑세스는 소유권의 변주가 아닌가. 결론에서 참여의 수준 뿐 아니라 참여 유형의 가치가  사회의 성격을 만들어갈 것이라고는 하고 있지만 썩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엑세스가 자유로운 사람들일수록 더 많은 정보력을 바탕으로 차별화된 엑세스와 서비스, 체험을 갈망할 것이다. 지난날, 대량생산의 시기를 거쳐 풍부한 물자공급이 충족된 후에 차별화가 필요했듯이 말이다. 엑세스에 취약한 사람들은 계속 취약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고착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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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자유다 - 수전 손택의 작가적 양심을 담은 유고 평론집
수잔 손택 지음, 홍한별 옮김 / 이후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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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의 감수성은 나와 맞지 않는 구석이 있다. 손택이 좋아하는 작가군을 들여다보면 내가 좋아하는 작가군과 많이 일치한다. 그리하여 손택의 책을 주문하곤 하지만 두 번은 보게 되질 않는다. 그그들에 관해 손택이 글을 쓰는 방법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녀의 유려한 문장력이 찬사를 받는다고 하는데 난 잘모르겠다. 번역본이어서 그렇다기 보다는 글을 전개해 가는 방식이 사뭇 건조하다는 생각이 앞선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이 책의 서문에서 찾을 수 있었다. 손택이 아들, 데이비드 리프David Rieff가 썼는데 이런 말이 있다. "어머니는 찬미에 뛰어났다....숭배는 어머니의 제2의 천성이나 다름없었다. 어머니가 쓴 찬미의 글은 전부 이런 맥락이다. 그랬기 때문에 어머니는 다른 어떤 일보다도 소설 쓰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으면서도 찬미하는 글도 계속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이 마지막으로, 또 다시 그 사실을 입증해 보인다."

좋아하는 작가에 대한 숭배와 찬미의 글을 읽는 것은 커다란 즐거움이다. 단 논리적이고 이론적 근거에 바탕을 둔 찬미일 경우에 즐거움이 내 몫이 된다. 이 책은 레오니드 치프킨에 대한 글 때문에 망설이지 않고 주문했다. 음...에세이라기 보다는 잡지 아티클에 가까운 느낌이랄까. 마지막 챕터에 실린 연설문들 역시, 기본적 입장에 크게 공감하지만 큰 울림을 주진 못한다.

그나저나 손택의 소설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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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atcher in the Rye (Mass Market Paperback, 미국판) - 『호밀밭의 파수꾼』원서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지음 / Little Brown & Company / 199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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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기자가 쓴 리뷰에서 이런 말을 읽은 기억이 난다. 성인이 되어서 이 책을 처.음. 읽는다면 샐린저에게 만정이 떨어질 수 있다고. 다행도 열 일곱살에 처음 읽고 나이들어 다시 읽어서 만정까지는 아니지만 정이 조금 떨어진건 사실이다. 하드보일드한 문체는 사실 조금 거슬린다. 십대의 말투라고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모든 문장에 and all을 붙이고, ..kills you라는 말이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편집증처럼 여겨진다.

또 거슬리는 부분은 여동생 피비에 관한 홀든의 시선이다. 마음 둘 곳 없는 세상에서 피비는 유일한 돌파구인데 심리적이면서도 육체적이다. 소아 성욕에 대한 희미한 그림자를 발견하게 되는 이유는, 홀든이 피비를 소통의 대상으로 삼지만 쌍방향이 아니라 일방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홀든은 단지 마음 속에 떠오르는 말을 무조건 뱉을 필요가 있었다. 상대의 조언이나 대화가 필요하기보다는 자신이 하는 말에 귀 기울여줄 상대가 필요했다. 어른도 종종 그렇듯이 말이다. 이때, 피비가 어떤 옷을 입었고, 어떤 몸짓을 하는지에 열광하는 훌든은 뭔가 꿍꿍이가 있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홀든의 삼 일간의 방황기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순수했던 열일곱 살의 기억 속에는 없던 것들이다.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홀든의 심리상태에 대해 친구와 얼마나 많이 얘기했었던가! 홀든과 같은 또래의 친구와 나 역시 세상에 이해하지 못할 것, 혐오스러운 것들로 가득했었다. 여드름 짜는 행위, 거울만 보는 멍청한 미끈이, 여자아이들이 데이트 상대를 고르는 기준 등등 우리가 나름 진지하게 주고받은 대화 속에서 홀든은 꽤 근사한 녀석이었다. 근사한 구석이 아직 있기도하다. 생각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소심한 성격을 잘 알고 자조하는 모습, 딴에는 어른인 척해보지만 누가 봐도 십대인줄 알아챌 수 있는 말과 행동...

젊음의 특징은 손쉬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그 천부의 자질일지도 모르지만 거의 낭비에 가까울 정도로 성급한 삶에 대한 충동이라고 까뮈가 말했다. 홀든의 삼일 간의 긴긴 방황은 젊음만이 누릴 수 있는 삶에 대한 격렬한 충동에 뿌리를 두고 있나니 어찌 아름답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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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위화 지음, 백원담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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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은 환경이 바뀌어서 적응하느라 심리적으로 무척 분주했다. 조용히 앉아서 한 해를 정리하는 일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을 뿐더러 시간의 흐름을 서류철에 묶어서 분류할 수도 없는 노릇이므로 똑같이 보냈다. 돌이켜보면, 여러가지 변화가 있었지만 그 변화를 마주했을 당시에는 변화인줄 모르고 지나쳤던적이 대부분이다. 오랫만에 안부를 주고 받는 지인들에게 늘 난 똑같은 대답을 한다. 난 항상 똑같아. 한 선배가 어느날 문득, 항상 변화를 꿈꾸는 네가 오늘은 부럽구나, 하는 문자를 보내왔을 때도 난 항상 제자리에 있어, 하고 답장을 보냈다.  

 
2008년 첫 주도 정신없이 지나가버렸다. 하루하루가 모여서 한 해를 이루고 한 해가 모여 우리가 인생이라고 부르는 걸 이룬다는 걸 알면서도 하루하루를 습관적으로 살고 있다는 걸, 가끔 깨닫고, 더 가끔 끔찍해하면서 더더 가끔 반성한다. 에너지는 예전만큼 왕성하지도 않아 덤덤하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든 경험을 쌓는 일이 축복받은 일이라고 가슴으로는 생각하면서도, 머리로는 포기와 체념을 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머리를 숙이면 가슴이 보이는데 머리는 앞만보고 가슴과 더 멀어지고 있다. 그래도 머리만 가진 사람들을 만나기를 저절로 피하고 싶다. 그들에게서 내 모습의 일부를 보기도 하지만 따뜻한 가슴을 가진이들과 가끔씩 기울이는 술잔이 없다면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허삼과 매혈기>에 홀딱 반해서 집어든 <인생>. 위화는 서문에 이런 말을 썼다. "나는 <인생>이 눈물의 넓고 풍부한 의미와 절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믿는다."

 위화 소설의 힘은 바로 절망의 부재다. 인생은 푸구이란 노인의 일대기이다. 아내와 두 아이, 그리고 사위와 손자까지 먼저 저세상으로 보내면서도 푸구이는 슬프지만 계속 살아야한다. 사랑하는 이를 모두 잃은 삶 속에 기쁨이 존재할까, 싶지만 푸구이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홀로 지낼 수 밖에 없었지. 늘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오래 살 줄 누가 알았겠나. 나는 여전히 그 타령이야. 허리도 자주 쑤시고 눈도 침침하지만 귀는 아직 쓸만하지...이 생각 저 생각 하다 보면, 때로는 마음이 아프지만 때로는 아주 안심이 돼. 우리 식구들 전부 내가 장례를 치러주고, 내 손으로 직접 묻어주지 않았나. 언젠가 내가 다리 뻗고 죽는 날이 와도 누구를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말일세. 나는 편히 생각하기로 했다네. 내가 죽을 차례가 되면 편안한 마음으로 죽으면 그만인 거야. "
 

모든 절망을 딛고 얻은 푸구이의 관조적 자세는 애처롭지만 살아가면서 배워야할 지혜가 아닐까. 이제 늙은 자신의 곁에 남은 건 자신을 닮은 늙은 소 한마리 밖에 없지만 푸구이는, 그래도 계속 살아갈 것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지만 포기해야하는 일을 분류하며 때로는 나 자신을 다독이며 또 때로는 어깨를 툭치며 격려하기도 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는 걸 본다. 먼 훗날 이 시간들을 되돌아보며 푸구이처럼 미소지을 수 있다면, 그러면 된거라고 되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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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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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 작가에 관한 기억은 이렇다. 어느 해(검색해보니 96년이라고 나와있다) 동아일보 1월1일자 신문에서 그녀의 등단작 <불란서 안경원>을 흥미롭게 읽었다. 안경원에서 유리문을 통해 바라 본 세상을 읽으면서 관찰자적 입장이 가질 수 있는 거리감에 끌렸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읽었던 소설은 <식빵 굽는 시간>. 식빵을 굽고 식빵의 냄새를 묘사하면서 인물의 감정을 전달하는 서술방식에 또 한 번 끌렸다. 그 후 <불란서 안경원>이란 소설집을 읽었지만 두 작품만큼 강한 인상을 주지는 못했다. 그리고는 지난 달, 알라딘이 발행하는 잡지, 스쿱에서 그녀에 관한 에세이를 읽었다. 한 화가가 말하는 그녀였다. <혀>는 이런 기억의 연상작용을 통해 궁금증을 유발했다. 어떤 소설일까. 함께 주문했던 책들 중 제일 먼저 집어들었다.

<혀>를 즐겁게 읽을 수는 없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1. 침이 고이는 소설을 쓰려고 했다는데(후기에) 내 입안의 침은 고이기는 커녕 마른다. 난 그녀의 표현대로라면 욕망이 없는 건조한 인간일거다. 먹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세상에 너무 맛있는 음식이란 없고 음식은 배고프다는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차원적 도구일 뿐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기쁨 하나는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슬프지는 않다. 고로 길게 묘사되는 요리 재료들과 레시피에 어찌 침이 고이겠는가. 소설 속 비유들은 이런 재료들에 대한 기본적 애정이 있어야 안타깝기도 하고 심장이 부풀어 오르기도 할터. 쩝.

2. 플롯. 그녀의 소설 세 편은 모두 닮아있다. 이미 헤어진 사랑에 대한 기억 조각들을 나열한다. <불란서 안경원>이 그라는 존재를 어렴풋하게 드러냈고, <식빵 굽는 시간>은 좀 더 선명하게 그를 드러냈고, <혀>에서는 노골적으로 그를 드러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작가의 생각도 바뀌고 소설을 쓰는 방식도 바뀌었듯이, 나도 변했다. 끝난 사랑에 대한 아픔과 그리움을 말하는 소설에는 더 이상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사랑은 가고 오기 마련이며 사랑이 오지 않아도 사람은 독해서 잘 살 수 있다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요리장면 사이사이에 회상 또는 이야기처럼 삽입되는 방식은 상당히 속도감있지만 그 속도감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실 단순하다. 책 한 권이 그러니까 '나'의 일기에 가깝다. 남의 일기를 읽는 건 그 사람을 알고 있고 나와 관련있을 때나 재밌다. <혀>의 그녀 '나'는 철처한 허구 속 인물처럼 다가온다.

3. 분명히 섬세하고 감각적이긴 하지만 이건 아니야, 하는 소설이다. 내겐. 오히려 난 <식빵 굽는 시간>에서의 그녀가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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