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에셔, 무한의 공간 다빈치 art 14
모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 외 지음, 김유경 옮김 / 다빈치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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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재미있게 봤던 만화영화 중 <이상한 나라의 폴>이 있다. 극적인 순간에 세상의 시간은 정지하고 4차원으로 이르는 문이 생기고 폴과 친구들은 엄청난 힘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곳에서는 인형도 말을하고 강아지도 날아다닌다. 에셔의 그림은 <이상한 나라의 폴>에서 펼쳐졌던 그런 마력magical power이 있다. 답답하기도 하면서 들여다 볼수록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려 4차원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 종이를 들여다보면서도 평면이 아닌 다른 세계의 끝자락을 감질나게 보고 있는 것 같다.  

에셔의 그림은 또한 수학적 상식에 대한 자괴감을 던져주기도 한다. 치밀하고 정교한 계산이 없다면 무한히 반복되는 것 같은 이미지들은 불가능할테니까. 에셔가 애초에 수학적 접점을 겨냥해서 창작한 게 아니라 수학자들이 나중에 접점을 찾아냈다고는 한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어쨌든, 수에 대한 개념 부실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이 책은 분석이 아니라 에셔가 직접 강의한 내용을 묶어서 잡다한 생각을 밀어내고 그림에 집중할 수 있게 도와준다. 더불어 완벽주의에 대한 한 개인의 강박증이 없었다면 우리는 에셔의 걸작들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단점을 창작 에너지로 바꿀 수 있는 법을 찾는다면 자신만의 색깔을 가질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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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눈물 - 그림 앞에서 울어본 행복한 사람들의 이야기
제임스 엘킨스 지음, 정지인 옮김 / 아트북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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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기 전에 눈물과 관련된 그림 읽어주는, 그렇고 그런 책인 줄 알았다. 연휴에 뒹굴거리며 별 기대없이 펼쳤다가 흥미진진해서 손에서 놓기 힘들었다. 표지에서 짐작할 수 있는 기대를 깨고 감상의 자세를 다루는 글이다. 첫 장을 읽으면서 나는 그림을 왜 보는가, 왜 그림을 좋아한다고 말하는가, 그림을 정말 좋아하는가,등의 질문들로 이루어진 자가 최면을 걸면서 책장을 넘기게 한다.  

그림과 눈물의 함수 관계가 존재할 수 있다는 가설을 세우고 그림을 감상하는 태도에 진지하고 깊숙하게, 그리고 지적으로 접근한다. 그리고 20세기 미술과 미술사가들의 태도에 반기를 든다.  

"20세기는 메마름의 위대한 선조인 16세기에 비교된다. .....20세기 회화는 적나라한 감정들과는 무관한, 갖가지 쟁점들을 제기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시각예술가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이레 초점을 맞췄고, 자신들의 그림을 철학과 역사와 비평, 정치, 젠더 연구와 정신분석에 연결하는 수많은 가닥의 실을 꼬아 천을 짰다. 최근 훌륭하다고 하는 작품들은 자기 인식과 자기 해석에 깊이 파고드는 것들이다. 그 모든 것을 더 잘 파악할수록 내가 여기서 상술하고 있는 감정의 힘(눈물을 동반하는 감동)에서는 더욱 멀어진다."(274-275) 

그렇다고 20세기 미술이 모두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마크 로스코의 예배당이 주는 감동의 뿌리를 찾아 내려가면서 이 책은 시작하니까. 아는 만큼보인다는 말이 있다면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저자가 취하는 관점은 바로 이런 맥락과 맞닿아 있다.  

그림이 어려운 예술 범주로 분류되는 데 미술사가들의 태도 역시 지대한 기여를 했다고 한다. 그림이 그려진 역사와 이야기 중심으로 논의되는 게 무가치하지는 않지만 감동을 앗아간다. 우리는 책에서 읽고 서술된 부분을 미술관에서 확인하는 일차원적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문화적 계급 사회에 알게모르게 동화되어 왔다. 길들여진 관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돌이켜보면, 철저하게 길들여진 관객 중 한 명이 바로 나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괴로워하고 미술사가들이 말해주지 않은 영역은 전혀 볼 줄 모르는 한심한 관객. 

관객의 입장에서 학습은 양날의 칼이다. 학습으로 즐거움과 두려움이 동시에 존재한다. 몰랐던 그림을 알게 되는 즐거움 반면에 알수록 생각이 열리는 게 아니라 닫히는 괴로움이 그것이다. 이 점에 대해 엘킨스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억 이론에 대한 반전을 통해 믿음직한, 그리고 편안한 대안을 제시한다. 기억과 시간은 여러가지 면에서 억압이란 자루에서 다뤄져왔다. 그러나 엘킨스는 "기억이 매력적인 이유는 불안정하기 때문"이니고 "인생이 바뀌면서 기억도 바뀌어서" 자신의 해석대로 그림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스탕달 신드롬에 빠질지 마크 트웨인의 해독제를 먹을지는 선택하는 건 각자의 몫으로 남지만 열정 결핍자로 살아가는 나라면, 스탕달 신드롬에 빠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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넙치 2009-01-31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그림 감상법을 실천하셨군요.^^
 
책상은 책상이다
페터 빅셀 지음, 이용숙 옮김 / 예담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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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에서 소개한 신경숙의 서재에 있는 책들 중 몇 권을 질렀다. 그 중 한 권인데 아흑, 웃기면서도 슬프다.  

일반적이지 않은 사람을 보고 우리는 독특하다, 다른 별에서 온 것 같다는 등의 말을 사용한다. 뒤집어보면 일반적이란 게 무언가. 일종의 사회적 기호다. 나무를 나무로 부르기로 하고 침대를 침대로 부르기로 하는 그런 약속에 의문을 품지않으며 복종하는 댓가로 친구와 동지를 얻는다. 이런 약속이 언제,왜, 누가 만들었는지 궁금해하기 시작하는 순간 친구나 동지 그룹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도록 프로그래밍 돼있다. 누가 프로그래밍하는가. 바로 집단이다. 집단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살 수 없는가. 어쩌면...이라고 페터 빅셀이 말한다. 그러나 또 다른 세계가 있을 수도 있다는 걸 암시한다. 사회적 기호 속에서는 사라졌지만 다른 기호체계를 받아들이는 그런 세상이 있을 수도 있다고. 

짧고 간결한 단편 속의 주인공들은 모두 공통점이 있다. 집단의 기호든, 자신만의 기호든 어쨌든 기호란 세계에 갇혀 행동하지 않는다.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 밖에 대한 호기심으로 앉아서 계획을 세우고, 기차 시간표를 외우고, 다른 언어 체계를 만든다. 호기심은 참여가 결핍됐을 때, 단절이라는 결과를 낳지만 참여가 동반될 때 전혀 다른 곳에 가있다. 비록 이전의 집단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기이하고 낯선 세계지만. 또 다른 세계에서 우리가 책상을 책상이라고 부르는 세계가 답답하고 우스운 세계일 수 있다.  

익숙한 세계의 문을 걷어차고 밖으로 나오려고 애쓰는 순간 엄청난 고통이 따라오지만 익숙한 것과의 단절로 새로운 것에 대한 즐거움 역시 찾아온다. 노력하는 한 방황하고(괴테), 자신의 궤도를 벗어나는 지점에 타인과의 교차점이 있다(에릭 로메르)는 말은, 삶의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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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깊다 - 서울의 시공간에 대한 인문학적 탐사
전우용 지음 / 돌베개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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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외국인 친구들을 서울에서 맞이할 때가 있다. 그들은 대부분 서울의 과거를 꿈꾸고 서울을 찾아온다. 서울의 현재만을 알고 있고 서울에서 사라져가는 전통의 흔적보다는 서양의 흔적을 찾는 내게, 그들이 동경하는 서울은 낯설기만하다. 친구들의 등장은 그들의 관점에서 서울을 보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익숙한 서울이 아니라 감춰진 서울의 얼굴을 그들 덕분에 발견한다.  내가 알고 있는 서울이란 내 생활 반경에 한정된 지극히 작은 부분이고 그 작은 부분조차도 왜곡있다는 걸 깨닫곤 한다.   

이 책에서 "중세 서울"이란 낯선 말을 만났다. 아, 서울에도 중세가 있었구나. 중세란 말은 아주 익숙한 말이지만 중세 유럽이란 복합명사로 익숙하다. 중세 유럽사를 찾아 읽고 십자군 전쟁까지 찾아 읽을 정도니 말이다. 그런데 중세 서울에 대해서는 말 조차도 어색하니 나, 한국인 맞나,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통사론적 시간 개념이 서양사와 한국사가 다르다. 한국사에서는 신라, 고려, 조선 등등의 왕조 중심으로 서술되기 때문에 중세사에 대한 개념이 희미하다. 여러 왕조가 흥하고 망하면서 후세에게 하나의 공통된 시간을 만들어 알려야 하는 필요에서 유럽은 중세란 말을 고착시켜야 했을 터이다. 반면에 한국은 단일 민족으로 왕조 개념으로 충분히 역사교육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교육을 위한 기술이다.

중세 유럽 도시들을 거닐다보면 전통이야 어쨌건간에 가옥이라든지 골목이 잘 보존되어 있어 감탄을 거듭하고 부러할 수밖에 없다. 서울은 늘 공사중이고 그 모습이 시시각각 변한다. 있었던 건물이 없어지고 없었던 건물이 어느 날 불쑥 솟아있다. 한동안 가지 않았던 곳에 가면 낭패하기 일쑤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이란 공간에 대한 애착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추억이 담긴 공간은 포크레인이 퍼올린 흙에 묻혀 사라지니 말이다. 서울은 추억보다는 편리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도시다. 공간은 물론 사람의 사고에서 탄생하지만 동시에 사람의 사고를 지배할 수도 있다. 지금은 우리가 공간을 현명하게 사용하기 보다는 공간에 지배당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주변의 주거조건은 배려하지않고 용적률의 확장이 마치 현명한 해결책인 것처럼 굴지는 못할 것이다.  

이런 한탄스러운 서울을, 서울에 사는 게 조금은 부끄러운데, 이런 서울을 사랑스런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글들이다. 서울의 뿌리를 찾아가면서 관심을 가져야할 것이 무엇인지 환기시킨다. 사라지고 변하는 것에 대한  저자의 시선은 타당해서 그의 한숨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왜 서울의 골목들은 막다른 골목이 주로 있는가. 평소에도 정말 제일 궁금했는데 그 답이 이 책에 있다. 왕조의 서울이었던 성 안이 아니라 성 밖의 서울, 즉 지금의 서울 공간이 된 여러 곳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미시사적 관점은 통사가 만들어내지 못하는 장점이 있다. 이런 좋은 책은 많은 사람이 함께 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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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탕달 연애론 에세이 Love
스탕달 지음, 이동진 옮김 / 해누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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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커밍 아웃하는거야?,하는 말을 농담 삼아 친구한테 듣는다. 수다 삼매경에 빠질 때, 나는 고백한다. 난 무늬만 여자고 남자인 거 같다고. 수 년 전에 한 점쟁이도 이런 말을 했다. 여성스러운 외모와 달리 남성적 기질이 강해서 이성male을 돌처럼 본다고. (아, 난 이성을 보석처럼 보고 싶다구!) 그렇다고 동성에 대한 취향이 남다르거나 한 게 아니라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가치관이 이성적이다. 이성sense이란 말을 남성과 결부시키고 있는 게 전근대적이라고 비판받을 수 있겠다. 그러나 남성의 특징으로서 이성을 말하는 게 아니라 제인 오스틴이 사용한 정의, 감성sensibility에 대한 대항어쯤으로 사용하고 있는 거다.    

감성보다는 이성이 내 삶 전반을 지배하고 있고 연애관 내지는 애정관 역시 마찬가지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런 것 같다. 운명적 사랑이란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나 존재하고 사랑의 끝은 결혼이고 사랑의 완성은 이별이란 공식을 줄줄이 댄다. 이유는? 연애에 관한 책만 읽고 연애를 하지 않아서가 아닐까, 싶다. 그럼 왜 연애를 하지 않는가 내지는 못하는가? 스탕달마저도 열정이 없어서라고 말한다. 연애 뿐 아니라 다른 일에도 열정의 이름으로 몸과 마음을 불사르는 일이 좀처럼 없다. 나를 비롯해서 연애를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바로 '열정'이다. 열정이야말로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전제조건이다.  

스탕달의 통찰력은 예리해서 글을 읽다보면 스탕달에게 애정이 샘 솟는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의 원조격이 되겠다. 아울러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등등에서 공감하고 밑줄 그었던 말들이 되풀이된다. 특히 스탕달의 미덕은 생물학적 개체의 특성을 인정하고 남성적 관점에서 연애의 심리상태를 서술한다. 그러나 생물학적으로 XY염색체를 가진 남성들은 이런 책을 읽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남성의 심리를 서술한 에세이도 여성의 전유물이되어 남성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할 것이다. 결국 여성들만 이해심이 깊어지는 결과로 이어지겠다. 

유감스러운 건 그 어느 책도 열정을 배양하는 법에 대해 말하진 않는다. 사랑을 하지 못하는 건 열정이 부족해서라고만 모두 말한다. 참으로 난감하다. 열정을 전제로 사랑의 현상에 대해서만 말하니 말이다. 열정 없는 사람은, 사랑으로 다가가기 위한 걸음을 떼기 전에 열정을 충전해야 하는데...그게 어려우니 그저 구경이나 계속할 수 밖에...쩝. 지침이 있긴하다. 여자가 한 눈에 남자에게 반하기 위해서 해야할 행동 강령은 의심과 경계를 풀어야한단다! 지루함에 지쳐 무슨 일이 일어나기만을 바라는 상태가 되면 한 눈에 반하는 사랑을 할 수 있다는데..이거 왠만큼 순수하지 않으면 실행하기 힘든 최면치료니..난 뭐냐. 계속 사랑에 빠지지않는 주문만을 외우고 있고나..

덧. 표지가 삼류스럽다. 내용은 인간 내면의 진리를 말하는 책인데 표지를 보면 사고 싶은 생각을 빼앗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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넙치 2009-01-19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오는 날 보면 참 좋은 영화같아요. 잔잔한 이야기와 아찔한 풍경. ^^
냉정은 열정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는 걸 님 덕분에 생각하네요. 열정도 좋지만 냉정도 좋아라 했는데 열정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에 제가 끌렸을 수도 있겠어요.

비로그인 2009-08-02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로 인해서 구매를 포기했을법한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군요. 저 역시 그 중 1人..;

넙치 2009-08-03 09:37   좋아요 0 | URL
ㅎㅎ이제라도 도전해보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