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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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읽었을 때,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천명관이 '고래'를 쓰고 얻은 찬사는 김연수도 들어야 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소설 속에 묘사된 고통들이 굉장히 피상적이라는 사실이다. 왕성하게 쏟아져 내리는 이야기들에 대한 감탄과 왕성하게 쏟아져 내린 이야기에 휩쓸려 버리는 고통들에 대한 아쉬움. 번뜩 든 두 생각 중 후자를 자꾸 곱씹게 되었는데, 지금보다 좀 더 좋은 소설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 때문이었다. 소설 속 인물들의 고통은 굉장히 피상적인 영역에 고여 있다. 시대가 인물들을 옥죄고, 그 시대에서 파생된 물리적인 폭력이 인물들에게 내려앉을 때의 묘사가 굉장히 멀게만 느껴진다. 여기서 멂은 육체로부터 멂을 뜻한다. 묘사되는 고통과 그 고통을 주는 시대가, 고통을 받아들이고 그 시대를 거닐어야 하는 육체와 머니 피상적인 영역에 고여 있기만 하였다. 소설 속 고통이 육체와 멀다는 생각은, 두 번째 읽었을 때 좀더 자세히 곱씹을 수 있었다.

  소설을 두 번째 읽는 도중 김연수란 작가가 뱉은 말들을 주워들었다. 그는 남한사회에서 자신이 쓴 소설들이 후일 분단문학으로 한정되는 것을 지양하고, 그래서 자신은 세계문학을 지향한다라고 했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서도, 그의 의지의 흔적들을 볼 수 있는데, 소설 속에서 강박적을 반복되는 테마와 중후반부의 무대가 되는 독일이 바로 그것이다.

  소설에서 착실하고 꾸준히 혹은 강박적으로 반복되는 것은 history에 가려진 story를 앞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우리에게까지 도달한 역사에는 개인들의 서사가 설 자리가 없다. 김연수는 그것이 하나의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소설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역사들은 개인들을 억압하는 폭력과 핍박으로 작용한다. 작가는 개인의 서사를 그려내면서 서정성을 부각시키는 데, 그 서정성이 한껏 부풀어 오를 때쯤, 역사적 사건을 침범시켜 서정성을 붕괴시킨다. 이렇듯 역사는 개인을 억누르는 하나의 방해물로써 작용한다. 이때 역사는 사유의 대상될 수 없게 된다. 오롯이 방해물일 뿐이다. 혹은 조영일 문학비평가의 말처럼 단순한 '배경'이 되고 만다. 즉, 소설이 내세운 역사가 무엇으로 바뀌든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인물들의 고난을 부각시켜 독자의 (감정적)몰입을 부추기는 장치일 뿐이니까. 이 지점에서 소설 중후반부의 주무대인 독일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앞서, 소설의 주요 무대인 독일 또한 작가의 지향점을 드러낸다고 했다. 작가가 소설의 무대를 독일로 옮긴 것은 아마도 남한 혹은 한반도라는 로컬의 한계성을 벗어나기 위함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굳이 독일을 끌어들인 이유이다. 한반도란 로컬을 피하기 위해 독일로 무대를 바꾼 소설은, 독일이란 로컬 또한 거세해버리고 만다. 주인공은 굳이 독일까지 가서 성실하게 강시우란 남자의 과거를 읊는다. 독일까지 가서 끊임없이 과거로, 한반도로 돌아간다. 그렇다고, 이국에서 조국을 사유하는 것도 아니다. 독자에게 그려진 독일이란, 유럽의 숲, 헬무트의 집, 아우슈비츠 등의 피상적인 '이미지'들뿐이다. 작가는 한반도란 한계에서 벗어날 보편의 장인 외국이 필요했을 것이고, 만국민이 통감할 수 있는 아우슈비츠라는 스펙타클이 필요했을 것이다. 세계문학에 닿으려는 의지가 보편에 대한 강박을 낳았고, 그 강박은 모든 경계를 허물어 소설이 품은 역사와 국가를 단순한 배경수준으로 전락시킨 뒤, 원론적인 주장을 성실하게 반복한다.

  여기서 소설 속 고통이 피상적일 수밖에 없는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자신이 존재함을 반짝이며 드러내는 수많은 개인의 서사들과 쌍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역사들. 주목할 것은 양이다. 역사적 사건이 양으로써 쏟아지기 시작할 때, 각각의 역사에 대한 사유와 개인과 역사의 상관 관계 등을 전개할 수 없다. 이때, 독자는 소설이 담고 있는 역사들을 뭉뚱그려 하나의 인상 밖에 얻을 수 없게 되고, 성찰의 대상이 아니라 교양의 대상으로 받아들인다. 품고 있는 주장이 당연한 것일 때일수록, 형식에서 성찰의 흔적이 담겨 있어야만 하는 데, 형식 또한 주장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층위에서 진행되고 만다. 이런 상황에서 작품의 겹을 더하기 위해, 이런 저런 인용들을 끌어오는 데, 작가는 여기에서 자신의 독자층을 설정해버리고 만다. 그렇게 설정된 독자층이 소설에게 원하는 재미는, 소설에서 언급된 브레히트의 에피소드가 주는 재미이다.

"(한 여자와 자는 게 좋은지 두 여자와 자는 게 좋은지)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지금 이 사람과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으니까요."


  교양의 전시, 그 전시를 향유할 수 있는 이들, 그들의 향유를 충족시키기 위한 그럴싸한 목록 작성. 이때 작가가 어디에서 소설을 쓰고 있는지 드러난다. 로컬이란 경계를 삭제해버린 포부는, 작가 자신의 한계를 넘어 버려야하는 지점에서는 사라지고 만다. 과거에서 과거로만 이동하는 이야기, 피상적으로 그려진 이국 풍경, 촘촘하고 성실히 기록한 놀랍고 관심을 끄는 역사들의 나열, 적재적소 위치한 인용들. 그는 아마 서재에 고여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삶으로써 쓰여진 것이 아니라 앎으로써 쓰여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소설이 별자리를 언급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반짝이는 책들과 자료들이 한데 모인 결과물이 소설임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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