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느와르 - Café Noi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영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워낙 말들에 휩싸여 있는 영화다. 말들의 상당수는 평론가이기도 한 감독 본인의 평론과 인터뷰, 트윗에 걸려있다. 감독의 의도를 존중하는 것은, 영화를 볼 때 좋은 태도이긴 하지만, 감독이 정성일 같은 달변일 때, 영화를 그의 말들에서 뜯어내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한다. 쏟아낸 말들의 양이 방대하고 함의가 워낙 깊어 나같은 사람은 뭉뚱그려 그 말들을 아는 채 해버리면 답이 없다. 예를 들어 감독은 여러 인터뷰에서 '책의 리얼리즘'이란 용어를 쓰는데, 이 용어에 대해 인터뷰이가 정확한 답을 요구하여 정리한 것을 읽은 적이 없다. 이런식으로 용어들이 과잉으로 부푼 상태에서 정확하게 정리하지 않고 감독의 진심을 믿을 경우, 영화의 모든 것은 해석해야만 하는 것이 되고, 감흥은 사라진다고 생각한다. 잘 짜여진 생각과 존경할 만한 의도는 감흥이 뒤에 있어야만 하는 것이지, 앞에 있어선 안된다. 의도가 나쁜 감독은 없다. 이와 같은 이유로, 감흥과 팔짱 낀 의도만을 존중할 생각이다.

  카페 느와르를 본 사람들의 감상 중, 가장 와닿은 말이 있다. 이동진이 언급한 '영화 물리학 실험'이라는 말이다. 그는 '영화라는 매체의 물성에 대해 자연과학적인 방식으로 실험'이라는 뜻으로 그 말을 사용했는데, 그런 느낌이 영화에 진하게 베여 나온다. 그 물리학 실험이 1부와 2부에 따라 다른 태도로 이루어진다. 1부에서는 또렷한 이미지 하나하나를 배열하고, 그 배열을 통해 서스펜스를 일으킨다. 2부에서는 카메라가 담고 있는 공간이나 인물의 체험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 예를 들면, 청계천을 직접 걸어서 물리적인 거리와 그 거리를 걸을 때 겪어야 하는 시간을 담는다. 이 두가지 태도는 정성일이 필름 영화와 디지털 영화의 차이를 언급하며 말한, 이미지 메이킹과 테이킹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1부와 2부 모두 디지털로 촬영하긴 하였지만, 이미지가 축조된 모양에서 메이킹과 테이킹의 차이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전하고 싶은 효과를 위해 '만들어진' 쇼트들의 담긴 공간과 인물이 배열될 때 어떤 긴장을 발생 시키고, 우리 주변에 항상 놓여 있던 공간의 어떤 순간이 카메라에 '잡혔을' 때 어떤 느낌을 주는지, 1부와 2부가 차이를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그 차이가 영화에 담겨진 서울에 대한 감각이나 사유의 방법에 대한 겹을 만들어 낸다. 이 (영화 물리학 실험이란) 시도로 서울에서의 가능한 영화라는 (하나의) 태가 드러난다.

  재미있는건 그렇게 생긴 겹이 굉장히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2부는 마치 1부의 인물과 이미지, 대사들이 휘저어져 펼쳐진 모양새를 띄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휘저어졌다는 것인데, 1부에서 a란 인물이 b라는 말을 했다면, 2부에서 c라는 인물이 b라는 말을 한다. 대사만이 아니라, 1부에서 한 인물의 상징적인 태도나 의상 따위가, 2부에서 전혀 다른 인물의 태도가 되고 의상이 된다. 영화는 이런식의 게임을 벌이면서, (누가 언급한 것인지 잊었지만) 2부가 마치 1부의 꿈처럼 느껴지게 한다. 이런 연결들이, 1부의 중심적인 공간과 2부의 중심적인 공간 차이 속에서 상징들이 미묘한 차이를 내며, 공간에 대한 사유를 촉진시킨다. 영화 후반부, 김혜나가 예수의 부활은 보는 사람에 맡긴다는 말을 하는데, 그 말은 에필로그의 소녀의 배에 잉태된 아이의 탄생보단, 1부가 2부의 꿈인지, 아니면 그 역인지에 대한 게임에 붙어야만 한다.

  공간에 대한 사유의 촉진은 문어체 대사에서도 발생한다. 대사들이 구어가 아니라 문어이기 때문에, 배우들의 입에서 헛도는 느낌이 발생한다. 익숙치 않게 들려오는 말들에서 흥미로운 것은 불균질함이다. 배우들이 문어체 대사 전부에 어색해하는 것이 아니 점인데, 어떤 대사는 자연스럽게 뱉으면서도, 어떤 대사는 어색함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렇게 발생하는 불균질함이, 갑자기 빙의되어 방언을 쏟아내는 느낌을 준다. 마치 서울이라는 공간이 강요하는 말 같다는 느낌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카페 느와르 속 말들은, 방언과 같이 말을 뱉는 당사자의 것이라기 보단 다른 주인을 지니고 있는 뉘앙스를 준다. 예를 들면, 영화 속에 등장하는 편지 같은 경우, 그 편지의 내용과 교차하여 어긋나는 나레이션은 물론이고, 편지 앞 쇼트의 인물과 뒷 쇼트의 인물이 편지의 주인인지를 애매하게 만들어 놓는다. 영화 속 상당수의 말은 이렇게 주인 잃고 떠돌며 쏟아져 내리는데, 이런 점이 영화의 공간인 서울의 공기나 소음 같게 느껴지게 한다.

  위와 같이 영화는 2008년 서울을 흥미롭게 담아내지만 그것이 균질하지는 못하다. 최근 맥스뉴스에서 정성일이 아핏차퐁의 영화들을 일컬으며, 아이디어로써 흥미롭다는 언급을 했는데, 카페 느와르에서 느껴지는 아쉬움들이 그와 같은 것 같다. 아이디어나 의도의 아름다움은, 몇몇 쇼트의 적정 길이를 찾지 못하였는지 부분들은 아주 추한 모양새이다. 데드타임을 넘어선 장면들이 문제가 아니라, 쇼트가 지속되어야 할 시간을 참지 못하고 성급하게 끝난 미숙한 장면이 문제다. 청계천 맵핑을 위해 등장시키는 지도. 서울의 하루를 고스란히 찍거나, 청계천의 하루를 고스란히 찍어내는 장면. 이런 장면들은,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가 앞서서, 죽어 있는 텍스트는 선명하게 드러남에도 감흥은 죽어버려 고루한 인상이 짓다. 특히, 문정희의 딸이 연극의 연출 의도를 김혜나의 입으로 전하는 장면은 촌스러움의 극치였다. 데뷔작을 찍은 감독의 안절부절함의 표출이랄까? 이런 지점들이 감독이 요구하는 교양이, 영화의 고루한 지점들을 요구한 교양이 지닌 아우라로 덮으려는 인상만을 줄 뿐이다. 허우샤오시엔의 쓰리타임즈가, 1부를 통해 2부를 보고, 1부와 2부가 쌓여진 눈으로 3부를 보고, 영화가 쌓여진 눈으로 (개봉 당시) 대만의 현실을 본다는 교양이 없다고 영화의 감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사방에서 서울의 낯선 모습을 보았다고 신기해 하는데... 뭐가 낯설지? 서울이 이정도로도 이상하지 않았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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