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아침부터 몇 쪽 되지도 않을 논문 쓰자고
건조한 전공서적을 들쑤시며 아웅다웅 하고 있자니 머릿 속이 쾡해지더군요. 

그래도 이럴 때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조용한 하늘 바라보며
맘이라도 가다듬을 수 있으니 큰 다행인 것 같아요.
따사롭다,는 표현이 제격이다 싶을만큼 알맞은 봄볕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이끌려서 배밭을 좀 거닐게 됐답니다.

언제쯤이면 꽃망울이 터질까 했는데
이제다 싶은 모양인지 성질 급한 놈들이 먼저 세상 구경을 몰래 하고 있는 거예요.
내일이나 모레쯤이면 벗꽃만큼이나 만개하겠어요.   

가만히 몇 걸음 하다보니
제 발이 땅에서 자란 들풀들을 피해가며 걷고 있더군요.
참, 사람 변하는 게 시간 문제라더니 ...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자연의 보살핌을 받으며
그들과 공생하고 있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무지했던 거예요.
힘 없고 이름도 없어 하찮아 보이는 잡초들은
그야말로 아무 짝에도 쓸모 없거니 생각없이 밟고 꺽고 했던
미천한 저의 지난 시간들이 그저 부끄럽기만 했죠.

특별한 마음으로 살펴보지 않으면 그 존재조차 알 수 없는 여린 들꽃들,
이 녀석들도 살아있는 동안 벌이며 곤충에게 군소리 한마디 없이 먹거리를 내어주고
사나운 비라도 내리면 땅의 흐트러짐을 막으려 안간힘을 쓰잖아요.

몇 걸음 더하여 제법 탐스런 민들레를 쪼그리고 앉아 지그시 보고 있었어요.
이 녀석에게도 꿀벌 한마리, 하얀나비 한마리가 연달아 앉았다가는 총총 피어있는 배꽃에게로 들락날락 하더군요. 제딴에야 달콤한 꿀이 먹고 싶어 그러겠지만 그리 하면서 배꽃에 수분을 맺게 하여 결국엔 열매까지 달리게 하는 게지요.

그런데 요즘은 그 벌도 찾아보기 힘들어서 채 피지도 않은 꽃망울을 몇 상자 따내어 일부러 인공수분할 꽃가루를 만들어 낸답니다. 자연이 하는 일을 사람과 기계가 대신하게 된 거예요. 그것에 인력과 자본이 투입되는 것은 물론이겠죠.

벌과 나비의 수가 줄어들었다는 것, 다 인간의 잘못이잖아요. 제가 살고 있는 이곳도 행정구역상 농촌에 속하지만 실은 급격한 혼주화가 진행되어서 쓸데없이 도로를 넓히고 시끄러운 공장들이 들어서고 도로변에는 가든이니 정비공장이니 자꾸만 들어서는 통에 눈살을 찌푸리게 한답니다.

우리가 살면서 정녕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자연과의 공생, 생명의 존귀함을 사람마다의 가슴에 담고 사는 세상을 언제쯤 두 눈으로 볼 수 있을런지, 그런 생각이 심장을 찌를 때면 숨만 턱하니 막힐뿐이죠. 

이런, 괜히 너무 딱딱하고 진부한 얘길 했군요.

아무튼 꽃망울이 터지기 시작하면 재빨리 따내서 꽃가루를 받아야 해서 과수원 일을 거들었어요.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니까 꼭 새하얀 솜이불을 깔아 놓은 것처럼 눈이 즐거웠어요. 거기에 몇 몇 이웃집 뒤뜰에 분홍색 앵두꽃도 너무 예쁘더라구요. 산이며 들이며 조금씩 파릇파릇해지기 시작하니 저도 새로이 태어나는 듯한 착각이 ...

아침에 이 글을 쓰다가 빼꽃 따는 일을 마무리하고 왔답니다.
이제 점심을 하고 논문을 쓰고 책을 좀 읽던가, 어쩌면 이발을 할지도 모르겠네요.
이참에 책방에도 잠깐 다녀오는 게 좋겠죠.

요즘은 참 행복하다는 맘이 자꾸 드는 게 말도 많아지고 웃기도 잘해서 맘이 고와졌어요.
모두 다 당신에게서 비롯되었음에 고마운 맘, 헤아릴 길이 없다는 걸 알고나 계신지.
한 걸음에 뛰어가 뭐든 잘해주고 아껴주고 싶지만
당신이 있는 그곳,
지금 제게는 너무 멀기만 하잖아요.
그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 사진 한장과 음악으로 대신할게요.
사진은 지난 해 겨울 풀씨네가 남도로의 이별여행 때 갔던 보성차밭 삼나무 길인데 꼭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에요.



새날이 밝아오는 것도 잊은 채 당신과 마음 나눴던 그날의 기억,
잊지 못할 거예요.
설레이고 즐겁고 행복하여 감사했던 ...
왠지 달랐던 당신,
어느 시 구절처럼 당신 같은 사람 또 없을 거란 느낌에 한없이 소중한 ...

당신, 밤잠을 충분히 자지 못하니 걱정이에요.
일하고, 책 읽고, 글 쓰고, 공부하고 
보기 좋은 욕심이지만 건강이라도 해치는 날엔 큰일이잖아요.
그런 당신이 빨리 자라고 은근슬쩍 나만 재워놓고 말이죠.
참 못된 사람이에요, 당신은.

점심 드셔야 할 시간인데 잘 챙겨드시는 거죠?
식사하고 낮잠이라도 잠시 청하시면 맘이 놓이련만 ...

하시는 일, 힘겹다 생각 들어도
멋진 하루 보내길 바라는 한 사람이 있다는 걸,
잊지말아요, 사랑스런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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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스 2004-04-14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 길.. 얼마전에 다녀왔습니다. ^^ (음, 이런 코멘트를 근데.. 여기에.. 이렇게.. 남겨도.. 되는 .. 걸... 까.. -.-)

Laika 2004-04-14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그러게요..여흔님 글엔 코멘트 달기가....조심스러워지네요....여흔님의 행복해진 맘도, 일상도 엿보고, 좋은 노래도 듣고 갑니다.

김여흔 2004-04-14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알아요, 님들께서 조심스러워 하신다는 걸요.
뭐 어때요, 코멘트 남긴다고 제가 설마 때리기라도 하겠어요. ^^

낡은구두님, 저곳에 다녀오셨군요. 이 계절에 다녀오면 참 좋겠어요.
그리고 라이카님, 도시락 암투는 어찌 됐는지요? 저를 미워하시는 건 아니겠죠. ^^*

2004-04-14 1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4-04-14 1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04-04-14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하네요. 여흔님 계신 곳이 어딘지? 배꽃이 피는 곳이라...그곳을 거니시는 여흔님이 참 낭만적일거란 생각 드네요.^^

비로그인 2004-04-14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확실히 신록의 계절인가 보네요.
알라딘 주인장들의 서재 곳곳에서 꽃이며, 나무며....부쩍 많이 보게 되는 것 같아 참 좋아요.
아~ 그리고 보성 차밭..삼나무 길~너무 예쁘네요.

다연엉가 2004-04-14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흔님의 글은 맴을 편안하게 해 주네요///

프레이야 2004-04-14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흔님, 보성차밭 삼나무길이 사람을 빨아들이는 것 같아요.
님의 연서를 보며 왜 이리 제 맘이 벅차오르는지요. (헉, 뭔 소리를 하고 있는지)
누구이든, 그리움이 묻어나는 사랑은 보내는 이도 받는 이도, 그걸 엿보는 이도 다 행복한 꿈을 꾸게 하는 것 같아요. 깨어나지 말기를...

김여흔 2004-04-14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찌검을 안켔다는 약조 때문인가요. 여러 님들께서 코멘트를 남기셨네요. ^^

stella님, 낭만적이라 ... 그게 어떤 건지 잘 모르는지라 ... 여기 경기 안성이랍니다.
냉열사님, 저 삼나무길, 님과 함께 걸으면 기분 좋겠는 걸요. ^^*
책울타리님, 맘이 편해지셨다니 너무 감사하구요, 그 편안함 오래 오래 ...
혜경님, 또 찾아주셨네요. ^^ 님 서재, 늘 찾아가고 있어요.

superfrog 2004-04-14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저기 꼭 가봐야 겠습니다..^^ 요즘은 왜 그렇게 나무가 좋은지 .. 어서 나무 키우며 사는 삶이 돼야 할 텐데..
저도 연서 페이퍼에는 코멘트 달기가 웬지 민망해서 모올래 살짝 읽기만 한답니다..^^;;

김여흔 2004-04-14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올래 남겨져 있던 그 발자취가 금붕어님 것이었군요. ^^

2004-04-15 0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4-04-15 0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04-04-15 0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그렇군요. 저도 작년까지 안성에 자주 갔었더랬죠. 그렇게 자주 갔어도 배밭 한번 못 가봤네요. 그냥 일 때문에 버스가 실어나르는 차에 묻어가고 묻어 오고만을 반복했을 뿐. 이것이 바로 낭만이 없는 사람의 대표적 사례랍니다. 지금 생각하니 후회되는군요. 지금은 갈 일이 없어졌거든요.

김여흔 2004-04-15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 때문에 이곳에 자주 오셨었다구요, 어떤 일인지 궁금하네요. ^^

stella.K 2004-04-15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회에서 하는 연극에 관련된 일이죠. 지금은 그 교회 떠났지만 수양관이 그쪽에 있었거든요. 에그~안 밝히려고 했는데, 밝히고 말았군요. 쑥스러워라...

파란여우 2004-04-15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한제다'로 들어가는 길이군요. 저 길은 반드시 걸어서 가야 합니다. 행여나 시간 없다고 자동차로 쌩~ 다녀오지는 마세요. 마음속에 사랑을 가득 느끼며 천천히 걸어서 차밭에 오르십시요^^. 아름다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김여흔 2004-04-15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tella님, 연극을 하셨군요, 대학 시절에 연극하는 사람들이랑 좀 친분이 있었는데 참 존경스럽더라구요.
파란여우님, 처음 인사드려요. 다른 분 서제에서 흘끔흘끔 처다보기만 했었거든요. 코멘트 예뻐요. ^^

stella.K 2004-04-15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그냥 흉내만내요. 하면 할수록 어렵고, 이러면 안될텐데...그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