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낙장이 많은 책과 같다.제대로 한 권이라고 쳐주기가 힘들다.

그러나 어쨋거나 한 권이 되기는 한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난쟁이 어릿광대의 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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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덩어리가 되어버린 두개의 관념을 찾아 그 접점을 음미해본다면

우리가 얼마나 수많은 거짓말에 길들여져 왔는지 발견할 수 있을것이다.

모든 고사성어는 따라서 항상 큰 문젯거리이다.

 

                                           아쿠타카와 류노스케 <난쟁이 어릿광대의 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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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쇼몽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단편집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음, 양윤옥 옮김, 박철민 그림 / 좋은생각 / 2004년 4월
평점 :
절판


'라쇼몽'을 처음 읽었던 건 대학4학년 때일이다.이문열씨가 묶은 해외 단편집 중에 수록되어 있었다.책을 넘기다 '라쇼몽'을 발견했을 때 아쿠타가와의 이름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그보다 먼저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이 생각났다.

 당시는 일본 문화개방 전이라 일본 영화를 본다는건 또 하나의 문화적 특권의 상징이었다.대학 영화동아리들 마다 무슨 무슨 영화제 하며 일본영화를 상영했다.나름대로 금지된 문화에 대한 엿보기를 기존 보수세력에 대한 저항으로 또는 대학이란 상아탑이 향유할 수 있는 문화적 우월성으로 여기는 분위기 였다. 당시 대중문화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이라면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세계 영화계에서 인정을 받은 구로자와 아키라를 모를 수 없었다. 허름한 강당에서 상영하는 조악한 구로자와 감독전은 요즘말로 '한 영화 한다'고 자부하고자 하는 이들의 놀이터였다.나 역시 자막도 없는 구로자와 감독의 영화 두어편 (<꿈>과 <7인의 사무라이> )을 그들과 함께 보았다.

<나생문>이라고 한문으로 쓰는 <라쇼몽> 역시 구로자와 감독의 영화로 세상이 널리 알려졌다.베니스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던 작품으로 기억한다.하지만 영화 <라쇼몽>과 소설 <라쇼몽>은 다른 작품이다.이 단편집에 수록된 <덤불 속으로>를 구로자와 감독이 새롭게 각색한 것이 영화<라쇼몽>이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접고 소설 <라쇼몽>을 처음 봤을 때 이야기로 돌아가야 겠다.

처음 그 짧은 글을 읽었을때 '어..뭐 벌써 끝이야.'하는 말을 내뱉을 수 밖에 없었다.영화와 소설의 차이를 모르고 있었던 시절이므로 도대체 이런 간단한 시나리오로 어떻게 장편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소설 <라쇼몽>은 각색하지 않고 장편으로 만들기에는 분명히 구성이나 소재가 짧을 듯 하다. 영화의 근간이 된 <덤불 속>은 수많은 논란을 야기 시킨 작품이다.어찌나 그 논란이 컸던지 100년이 지난 최근에도 한국 정치인들 입에서도 그 말이 나왔다. 열린 우리당의 정동영과 김근태 의원이 입각하는 문제를 가지고 서로 아전 인수식 해석을 하며 '라쇼몽'을 언급했다.(정확히는 덤불 속으로겠지만) 이 소설은 늘 진리는 없다라는 식의 주장을 펴는 사람들에게 인용된 듯 하다.세상에 절대의 진리는 없으며 단지 해석만이 있을 뿐이라는 주장들 말이다. 대개 반역사적인 행위나 야합적인 정치적 선택에 있어서 정치인들이나 지식인들이 이런 주장들을 펼쳤다.그러면서 말한다. '역사가 판단해 줄 것이다' 자신들의 행위는 구국의 결단이었다.뭐 이런식으로 말이다. <덤불 속>을 상대적인 가치관의 해석으로만 판단하면 결국 그들의 행위도 다 나름대로 인정하고 수용해주어야 하는 것이다.과연 세상은 순수한 상대성과 해석만이 존재하는가?

이 단편집에서 재미있게 본 작품은 <투도> <갓파>이다.먼저 <투도>는 이기적인 인물들의 묘사와 설정이 재미를 준다. 샤킹이란 여자를 중심으로 타로와 지로형제,그리고 샤킹과 부적절한 관계를 이루고 있는 양아버지와 할멈.이들은 샤킹의 음모에 따라 성을 털러 간다.샤킹의 음모는 타로와 지로에게 형제를 죽음으로 몰고가야할 당위를 만들어낸다.서로의 죽음을 내심 기대하며 갈등하는 두 형제의 심리묘사가 아주 뛰어나다. 아쿠타카와가 소설인물들에게 부여한 캐릭터는 인간의 이기적인 양면성이다.샤킹과 타로형제들 역시 작가의 조종(?)에 의해 선악의 문제를 쉽게 넘겨버린다.작가가 <난쟁이 어릿광대의 말>에서 언급한 '선악은 없으며 쾌불쾌'만 있다는 가치를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구한 할멈을 적의 무리속에 홀로 남겨두고 도망친 양아버지,그는 소설의 마지막 반전을 위해 중요한 인물이 된다.백치인 아코기가 낳은 아이(아코키는 지로의 아들이라 믿는다.) 가 그의 자식일 줄 이야...^^

<갓파>의 경우는 소설<점귀부>에서 알 수 있듯이 작가 가족의 정신병력에 기댄 작품이다.<갓파>를 쓸 당시 아쿠타카와 역시 심각한 신경증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작가는 <갓파>라는 일본 민담에 나오는 특이한 존재를 현재에 복각시킨다.작가는 갓파들의 세계를 인간 세계의 대응점으로 두면서 후자의 세계에 대한 신랄한 조소와 비판을 날린다.인간들의 가식과 차별,예술에 대한 검열등이 갓파세계에서 비꼬아진다.자본가에 대한 풍자는 거의 컬트수준이다.실직된 직장인은 직공 도살법에 의해 잡아먹는다는 것이다.자본이 인간을 대상화 시킨 것에 대한 아쿠타카와식 상상력이다.당시 맑시즘에 관심이 많았던 탓이 아닐까한다.그외에도 작가는 니체와 스트린드베리 등의 종교에 대한 관점등을 갓파세계에 비추어 말한다. 처음 주인공은 자신의 세계와 다른 갓파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적 시선으로 대한다.하지만 점점 갓파의 세계에 동화되어간다. 하지만 친구인 토크의 죽음이후 원래 살던 인간세계로 돌아오지만 결국 정신병원 행이다.그래도 주인공은 갓파들과 현실세계에서 즐거운 교류를 갖는다.그들이 찾아와 주니까...

아쿠타카와는 지금으로 부터 한 세기전 사람이다.당시 일본은 근대화를 이루고 후발제국주의의 나래를 펼치고 있을 때였다.아마 당시 식민지 지식인들이었더 우리의 근대문인들도 아쿠타카와의 글을 일본어로 읽었을 것이다.그때 그 사람들은 이 글을 어떤 느낌으로 읽었을까 궁금하다.아쿠타카와가 정치적으로 어떤 사람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그의 아포리즘을 읽다보면 그가 한 세기는 먼저 태어난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요즘 일본에서 뛰는 작가들은 과연 어떠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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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밤에 찬비를 맞으며 돌아온 우산이다. 아침에 나와 보니 거죽에 조그만 나뭇잎 두엇이 아직 젖은 채 붙어 있다.

아마 문간에 선 대추나무 가지를 스치고 들어온 때문이리라.

그러나 스친다고 나뭇잎이 왜 떨어지랴 하고 보니 벌써 누릇누릇 익은 낙엽이 아닌가!


가을! 젖은 우산이 자리에서 나온 손엔 얼음처럼 찬 아침이다

                                                                                         이태준 <돌>

 

......첫문장 하나로 지난밤 모든 상황을 다 말해준다.정말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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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07-19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의 글을 읽으면 유장하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시인들 저리 가라죠.
 

뉘 집에 가든지 좋은 벽면을 가진 방처럼 탐나는 것은 없다. 넓고 멀직하고 광선이 간접으로 어리는, 물 속처럼 고요한 벽면, 그런 벽면에 낡은 그림이나 한 폭 걸어놓고 혼자 바라보고 앉았는 맛, 그런 벽면 아래에서 생각을 소화하며 어정거리는 맛, 더러는 좋은 친구와 함께 바라보며 화제 없는 이야기로 날 어둡는 줄 모르는 맛, 그리고 가끔 다른 그림으로 갈아 걸어 보는 맛, 좋은 벽은 얼마나 생활이, 인생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일까!

......

벽이 그립다.

멀직하고 은은한 벽면에 장정 낡은 옛 그림이나 한 폭 걸어놓고 그 아래 고요히 앉아 보고 싶다. 배광(背光)이 없는 생활일수록 벽이 그리운가 보다.

                                                          이태준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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