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꽃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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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고,역사라는 일람표 위에 갈겨 쓴 낙서처럼 인간집단 속으로 소리도 없이 사라지는 존재,한여름에 흩날리는 눈송이와도 같은 존재,그 존재는 현실인가 꿈인가,좋은가 나쁜가,귀중한가 무가치한가?'

남진우의 해설 앞에 인용된 로베르트 무질의 글이다.남진우의 평론은 대충 큰 제목만 보았다.(수잔 손택의 '해석에 반대한다'를 읽은지 오래지 않아서 그랬나....) 사실은 책을 읽은 나름대로의 감동을 남진우의 생각에 빼앗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하지만 무질에 대한 인용은 정말 훌륭했다.이 책의 모든 걸 단 몇줄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이 책에는 20세기 전반부를 살다간 '한여름 흩날리는 눈송이와도 같은 존재'들이 수두룩하다.그가 양반이든 도둑이든 악질 통역이든 모두 꿈처럼 사라져버렸다. 일포드 호가 제물포항을 떠나 항구의 뜨내기들 눈길에서 아득해져가는 순간 부터 그들의 존재는 차즘 지워져갔다.그들의 존재를 기억하기엔 본토의 다수가 겪은 역사의 질곡 또한 녹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포드라는 인종의 용광로,붕괴되어가던 조선계급의 열가마 속에서 잊혀진 자들은 그들만의 삶이 있고 생명이 있으며 비록 금새 탄로나 버렸지만 꿈이란 것도 있었다.

그러므로 이 책은 그들,잊혀진 소수자의 이야기이며 그들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담긴 이야기이다.아래 어떤 글을 보니 이 책을 보다 외국인 노동자를 떠올렸다는 내용이 있다.논리적으로 무리가 없는 생각이다.유카탄 반도의 조선동포가 사회적 역사적 소수 였듯이 외국인노동자들 역시 그들의 본토의 역사에서 타자화 되고 있으며 꿈을 이루겠다는 이곳에서도 타자가 되고 있기때문이다.

우리가 상상은 물론이고 존재 자체를 딱히 이해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는 공간과 시간.마치 존재 이전의 무와 가깝다고 할 수 있다.통신이 발달된 요즘도 마찬가지이다.예를 들어 영국의 아일랜드 위에 극지방 가까이 '아이슬란드'란 나라가 있다.그곳에 어떤 사람이 어떤 언어를 쓰며 어떻게 사는지 아는가? 난 tv에서 한번도 본적이 없어서 전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일포드의 조선인 역시 본토의 사람들에게-그리고 지금 우리에게도- 그런 존재였다.그들은 결국 대부분 다수가 겪은 일제시대라는 역사의 줄기를 벗어나 멕시코 혁명의 줄기를 타게 되고 그 속에서 소리 없이 사라진다.작가는 이 과정에서 외국 사회에서 근대화를 겪는 조선인의 혼란을 그려나간다.

물론 당시의 조선 역시 식민지적 근대화가 추진되고 있었다.소설의 주인공들은 이런 근대화를 더 직접적이고 생존과 관련하여 취급한다.계급의 붕괴와 주체적 여성상,외래종교와 토속종교의 갈등,농민반란과 정치적 근대의식등이 그것이다.이런 주제들은 하나 하나가 지난 한국 소설의 소재가 되었던 것들이다.작가 김영하는 유카탄 반도의 조선인이 겪는 문화적 충격과 적응,생존을 위한 투쟁을 이러한 주제들과 잘 섞어서 보기 좋은 그릇을 만들고 있다.그러다 보니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근대 조선의 전형적 인물형들을 전부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소설에서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몇개의 장면은 박수무당이 파하촌에서 펼치는 굿판과 파계 신부 박광수의 죽음 장면이다.둘 다 이국적인 장면이다.메마른 에네켄농장의 밤을 밝히는 어지런 불빛과 무당의 굿소리.궁정내시 출신의 악사가 부르는 피리소리 까지 더해진다면 당시 그들의 마음이 지면을 뚫고 시간과 공간을 헤치고 이곳 까지 전해지는 듯하다. 박광수는 이정과 함께 과테말라 내전에 참가하여 마야의 피라미드 위에서 웃음과 함께 사라진다.총소리,웃음....사라진 한. 푸른 융단과 같은 밀림속 피라미드 정상에 영원히 신전과 함께 잠드는 것이다.

이 책은 모든 인물이 다 주요인물이다.이정과 이연수의 닿지 못하는 사랑이 독자를 위한 로맨스의 한요소로 힘을 발휘하지만 그들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전장을로 이정을 끌어들인 뒤 배신한 조장윤도 이연수를 끝까지 지켜주는 이발사 박정훈도,저주를 남기며 죽은 박수무당도 모두 잊혀진 역사의 주인공이다.유카탄 불볕아래 사라진 눈송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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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페미니즘
벨 훅스 지음, 박정애 옮김 / 큰나(시와시학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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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가 눈 앞에 있다.거리를 형형색색의 트리가 물들이고 있다.팬시점에도 알록달록 카드들이 주인을 기다린다.초등학교때는 예쁘고 신기한 카드를 고르는 것도 이맘때의 재미였는데 요즘은 시들하다.방학 선생님께 보내는 카드는 그 중 늘 으젓한 것이었다.학년이 올라갈수록 선생님께 카드를 보내는 일은 줄어들었다.그런데 느즈막한 대학 3학년때 한 시간강사 선생님께 카드를 보냈다.그분이 여성학 선생님이었다.한 학기동안 재미있는 강의를 들어서 고맙다는 인사였다.또 남성중심사회에 사는 가해자로써 그동안의 잘못에 대해 반성할 기회를 주신데 대한 인사였다.

벨훅스의 책은 부피가 얇다.서양에서는 이런 책을 팸플릿이라고 한단다.책의 두께가 얇다는 것은 독자에게 우선 안심이된다.마음의 부채를 안고 살듯 남은 책장 수를 헤아리는 것은 누구나에게 괴로움일테니까. 이 책은 얇은 만큼 페미니즘의 쟁점과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물론 실천적 활동가로써 작가의 활동을 반영한다.벨 훅스는 진보적 페미니스트이고 또 흑인 여성이다.그리고 미국 여성이기도하다.그러므로 책의 내용,그중에서도 페미니즘의 역사부분은 미국 페미니즘의 흐름이다.그렇다고 우리와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다.큰 틀에서 우리의 페미니즘 역사 역시 미국의 그것과 그리 다르진 않기 때문이다. 작가가 특히 강조하고 있는 인종문제와 관련된 페미니즘 역시 그 중요성을 인정하지만 우리로서는 전부 이해하기란 어렵다.단일민족이란 허구아래 유난히 미군 부대 아니면 흑인 보기 어려운 나라에서 흑백갈등,흑인차별의 역사와 한을 이해하기란 결코 쉬운일은 아니다.단지 피억압자로써 인류애적인 애정을 가지고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벨 훅스는 기존에 만연한 주류 페미니즘에 대항하는 페미니스트이다.주류의 페미니즘을 흔히들 개혁적 페미니즘 또는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이라고 한다.벨 훅스는 이런 주류페미니즘이 가부장적인 남성중심주의에 근본적인 메스를 대지 않는다고 본다.계급과 인종문제등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녀는 주류 페미니즘을 교육 받은 백인 여성들이 그들 계급의 비슷한 남성과 같은 정도의 대우를 받기 위한 투쟁이라고 바라본다.우리가 알고 있는 '성공한 여성추켜세우기'식 페미니즘 역시 근본적을 이와 유사하다.'성공한 여성 신화'는 가부장적 자본주의의 주류 미디어가 담금질한다.그렇게 함으로써 여성의 사회진출과 성공이 마치 페미니즘의 궁극적 지향인양 오해하게 한다.성공을 위해 못된 여자가 되자는 류의 책들은 결국 이런 사회적 통념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물론 여성이 자신의 권익을 찾기위해 용기를 내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지극히 권장하고 당연한 일이다.하지만 남성중심적 사고에 적응하여 그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 남성사회의 대상으로써 그 중추에 오르려는 것은 결국 또 다른 남성을 양산하는 것과 다를 바없다.목적의 정당성에 대한 질문없는 영악함이요 도구적 이성의 남발일 뿐이다.

벨 훅스의 기존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비판은 이어진다.바로 대안없는 운동의 지향성이다.초기 토론중심의 자율적 운동이 아카데미의 틀안으로 들어가면 생기는 문제부터 지적한다.페미니즘이 어렵고 학자들이나 하는 이야기라는 일반의 생각은 이때부터 나온 것이라고 본다.그리고 초기 페미니스트들이 남성을 적으로 생각했던 레즈비언이나 동성애자들에 대한 오류등이 지적된다.현대에 있어 페미니즘 역시 내거티브 전략을 취한다고 지적한다.그러므로써 지배적 남성권위 하나가 유일한 존재의 근거였던 많은 보통남자들의 등을 돌리게 했다고 아쉬워한다. 벨 훅스는 '여성화한 남성'이란 대안보다 진일보한 동일한 인간으로써의 가치를 상호인정하는 대안을 모색하길 권한다.물론 이 작업이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도 인정한다.그러므로 초기 페미니스트들이 했듯이 끊없는 설득과 토론,어린이들에 대한 교육을 강조한다.

대한민국은 전근대적 요소와 군사주의의 문화가 혼재되어있다.이 땅에서 건강하게 살기 위해선 깨어야할 알이 너무 많다.세상의 거대한 소수자인 여성문제 역시 그중 하나이다.바로 우리 어머니,아내,동생,친구의 이야기이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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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항 막걸리집의 안주는 사람 씹는 맛이제 - 찰지고 맛있는 사람들 이야기 1
박형진 지음 / 디새집(열림원)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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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전인가 혼자 변산반도에 다녀온 적이 있다.한적한 해안도로를 따라 내소사를 찾는 길이었다.시간마저 수면제를 먹은 듯 흐느적거렸다.졸음에 겨운 눈을 들어 무심한 논길을 바라보았다.흐릿한 망막 속에 어느 농부의 밀짚모자가 들어왔다.흰색 메리어스에 구리빛 종아리.푸른게 자라는 벼와 멀리보이는 섬 그림자.그 농부가 왠지 외로와 보였다. 아마 곧 비가 올 듯 한 날씨때문이었을 것이다.

모항에 가본 적은 없다.그런데 박형진 시인의 책을 보면 모항 한복판에 와있는 듯 하다.갯벌에서 살아 숨쉬는 조가비의 소리가 들리고 꽁짓배의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들린다.이런 글은 그 곳에 사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펄펄살아 있는류의 글이다.문장이 세밀하지도 날렵하지도 않다.한 문장이 대여섯줄이 넘을 만큼의 만연체에 묘사도 그다지 화려하지 않다.하지만 박형진 시인의 이 책에는 멋진 글이 가득하다.아마 흰종이위에서 본 것이 까만 글씨만은 아니였기 때문일 것이다.거기에는 구릿빛 피부에 누런이빨이 성근 모항사람들이 얼키설키 큰목소리를 내어 설레발을 펴고 있었다.

이 책은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있다. 첫 부분은 모항 사람들의 이야기이다.여기에는 시인과 동시대에 사는 현재형의 사람도 있고 또 박 시인의 기억 속에서 살아난 사람도 있다.이들이 모여 하나의 살아있는 역사를 만든다. 둘째 부분은 아이들에게 이야기하는 곡식과 농사 이야기이다.보리고개와 관련된 이야기부터 콩,고구마,녹두 등 시골에서 자랐을 사람이면 누구가 하나쯤 이야기꺼리가 있을 법한 소재에 대해서이다.

개인적으론 모항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훨씬 재미있고 흥미롭다.그들은 모항의 역사이다.그중 가장 기억남는 사람은 고막녀이다.예전 시골에는 한 마을에 꼭 누군가 한 두명쯤 모자란 사람이 있었다.그래서 동네아이들의 놀림감도 되고 또 한참 많은 나이인데도 친구도 되고 그랬다.내가 살던 동네에도 그런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내 친구의 형이었다.근데 아무도 그를 형이라 부르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그의 호칭은 꼬마에게도 조금 나이든 어린아이에게도 공히 '바보 상국'이었다.나보다 한 열살쯤 많았던 것 같다.항상 푸른 츄리닝에 콧물이 덕지덕지 묻은 소매를 하고 다녔다.영화[살인의 추억]에 보면 나오는 그 친구-향숙이는 예뻣다-하는 그 친구와 비슷했다. 왜 그렇게 다들 비슷했을까? 아마 박시인의 고막녀는 당시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지체장애우 친구들의 모습일 것이다.책을 보고 있으면 그녀의 모습이 눈에 그려지는 듯 하고 그녀의 비극에 서글픈 맘이 생기기도한다.

그외에도 이 책에는 술주사 서금용씨,눈끔적이,오징개 양반등등 재미있고도 또 한편으론 가슴 아픈 서민들의 이야기가 가득하다.이들이 엮어 놓는 삶의 씨줄과 날줄은 마치 이 책이 소설인양 착각하게 만든다.이문구나 김주영의 소설 속 주인공들이 모항에 바글바글 모여 서로 각축을 벌이는 듯 하다.그만큼 다양한 삶의 형태와 모습들이 박시인의 찰진 시심에 담겨 우러나오고 있다.

또 하나 인상적인 에피소드는 박 시인의 아들출산 이야기이다.특히 시골은 남아선호가 강하다.생산력과 관련된 생존의 문제이기에 강남 부유층의 남아선호 원정출산과는 질이 다르다.박시인을 비롯해 당시 모항사람들의 출산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재미있다.남자아이를 바라는 마음에서 생기는 웃지못할 에피소드와 시골아낙들의 말빨(?)은 진짜 살아있는 웃음이 무언지 알게한다.

박시인은 막내 아들 보리-이름이 참 예쁘고 그 의미까지 알면 더욱 예쁘다-를 길에서 낳았다.도움을 청한 시골 아낙이 시어머니를 데리고 오는데 그 시어머니가 또 박시인의 어릴 적 동네 누님이었단다.이런한 우연과 따뜻한 출산광경을 도시에서 만날 수 있을까?

하지만 요즘 부안은 핵폐기장 문제로 아주 시끄럽다.시인의 마을과 가까운지는 모르겠다.시인도 시위에 참여했는지도 모르겠다.하여간 고향을 지켰던 순한 사람들이 왜 각목과 섬뜩한 구호로 무장했는지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이 책을 덮자 자꾸만 모항사람들의 웃음과 tv속 핵페기장 반대구호가 귀를 어지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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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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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을 나는 기억한다.나는 미련곰탱이였다.학교를 조퇴하고 독산동에 있던 코카콜라 공장에 가서 어린이 회원에 등록했다.나의 OB사랑은 한 사람 때문이었다.등번호 21번 박.철.순. 야구에 관심이 떨어진 후에도 박철순은 나의 우상이었다.MY WAY.가끔 심심풀이 삼아 로또할때 그의 등번호 21번은 꼭 포함시킨다.^^

삼미슈퍼스타즈.훗훗. 그래 그런 팀이 있었다.연고를 따지자면 나 역시 삼미의 팬이었어야 한다.그런데 나는 정권의 지역연고주의에 과감하게 반발했다. 당시 가을 소풍 사진을 보면 한반의 남학생 중에 OB모자나 삼성 야구 점퍼를 입고 있던 아이들이 절반이상이다.(프로는 역시 자본력인가!) 난 매일 야구하고 주말엔 다른 팀들과 경기하고 그랬던 것 같다.우리 동네 야구팀 이름은 '보라매'-팀선수중 공군과 연관있던 사람도 없는데 왜 보라매였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그 친구들 지금은 어디서 무었을 할까?

이 소설은 깜직한 비유와 패러디로 한국 자본주의의 제반문제를 풍자한다.한국 사회의 모든 교육은 사회적 성공을 위해서다.성공한 사람들이 만드는 세상의 가치여부는 중요치않다.성공한 자들의 축에만 끼면 만사 오케이다.그래서 기를 쓰고 공부한다.그나마 계급상승의 열린길은 교육이었다.(물론 요즘은 그것도 허구일뿐이다.) 길을 가다 하수도 맨홀을 고치고 있는 노동자를 보면 어른들은 그랬다.'너도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저렇게 된다.' 아이에게 하는 이야기지만 진짜 유치찬란,짬뽕에 소주 푼 이야기 같지 않은가?

하루 12시간 이상의 중노동에 시달리는 입시공부를 했다.그리고 대학가서도 취직하겠다고 그런 노동을 했다.그랬더니 별반 새로울 것 없는 샐러리맨이다.바람불면 바닥에 배깔고 좀 살만하면 내가 난데하는... 그렇다.작가는 말한다.너희들 다 속고 있다고. 나 역시 전적으로 동의한다.속고 있는 거 맞다.속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철길 위를 달릴 수 밖에 없었다.왜냐고 묻는다면 작가의 말대로 이건 지루박 이기 때문이다.첨부터 지루박 리듬에 맞춰 우스꽝스런 춤을 추었기 때문이다.가끔 가다 지루박리듬으로 돈 벌어 가족부양하고 차도 사고 ...집은 대출받아 꾸역꾸역 사고...푸우핫핫.

사실 지루박리듬을 따라가는 우리가 더 나쁜 건 옆에서 왈츠추고 있는 노마드적 인간들에게 우리의 춤을 강요한다는 것이다.'그렇게 추면 돈이 되겠어.'너 그렇게 해가지고 언제 집사고 노후준비할래' '니 인생 어쩌다 그리 망가졌니' ....등등.어떻게든 삼미슈퍼스타즈를 키워서 프로의 세계가 뭔지 보여주려는 그 알 수 없는 집단처럼. 작가는 후기에서 아주 명쾌하게 말한다.

'관건은 그것이라고 생각한다.따라 뛰지 않는것.속지 않는 것....피곤하게 살기는 놈들도 마찬가지다.' (어록이다.밑줄 긋고 외우자.수능이나 승진시험에 반드시 나온다.밑줄 쫘-악)

소설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담겨있다. 특히 마지막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과 프로야구(직장인)팀과의 경기는 압권이다.난 이 부분을 읽으며 코 끝이 찡해졌다.그림을 그려보면 무지 웃기는 장면인데 눈가가 붉어졌다.장타를 맞아 공주으러간 외야수가 함흥차사다. 공 밑에 떨어진 작은 꽃이 너무 아름다웠단다.아....이 장면을 어찌 눈물없이 볼 수 있단 말인지. 문득 안도현의 글귀가 생각났다.매일 매일 주식 하강 곡선을 그리도 뚤어지기 바라보며 지금 창밖에 어떤 꽃이 피었는지 관심있게 보지 않는 사람들...

작가는 결국 삶의 총체적 의미에 대해 질문한다.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인가라는 클래식한 질문이다. .내가 아는 어떤 분이-자식 교육은 자유롭게라고 늘 주장하며 아이들 학원 7개 보내는 자수성가한 여자분이다-만약 이 책을 본다면 분명이랬을 거다. '거봐. 항상 열심히 앞으로 뛰어야한다니까.끝이 없이 노력해야지.안그러니까.좋은 대학 나오고도 짤리고 변변치 않은 일이나 하잖아' 라고.^^ 그녀는 역시 프로다.난 그녀에 비하면 아마인가보다.부럽진 않다. 난 아마가 좋으니까.

퇴근길에 좌판에서 노란 국화 한다발 사가야겠다.보름은 행복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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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평전 - 갈등의 삶, 초월의 예술
박홍규 지음 / 가산출판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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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 어느 봄.나른한 봄날이었다.콧물이 소매와 옷자락 끝에 덕지 덕지 묻어있는 아이들의 무리가 좁은 운동장에서 흙놀이를 하고 있었다.그 중 한 아이가 일제시대 지어진 듯한 붉은 벽돌 강당 벽에 기대어 책을 보고 있었다.위인전이다.자식을 위인반열에 올리고 싶은 부모의 가능성 없는 기대와 위인전외엔 딱히 권할만한 책이 없는 시대적 한계가 절묘하게 화학반응했던 것이다.아이가 보고 있던 책은 금성출판사판 베토벤 전기였다.아이가 아는 베토벤음악은 피아노 학원 안에서 가끔 들여오던 '엘리제를 위하여'가 전부였다. 그때까지 그 아이는 '엘리지를 위하여'만 치면 피아노를 최고로 잘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아이는 베토벤이란 사람이 참 불쌍하다고 생각했다.아버지가 너무 무섭고 강압적이었기 때문이다.그리고 귀머거리가 어떻게 음악을 만들고 세계적 음악가가 되었지하는 의구심과 감탄의 감정이 동시에 들었다.나른한 봄날,오후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언제 함께 놀았냐는 듯 먼저 교실로 들어가려고 한때의 아이들이 교사의 정문으로 달려들어갔다.욕실 배수구에 물이 빠지듯 운동장은 비어가고 있었다.강당벽에 붙어있던 아이도 비로소 책을 덮고 일어섰다.문앞은 실내화를 갈아 신는 아이들로 장사진을 치고있었다.이미 늦었으니 급할 것 없다는 마음으로 아이는 운동장을 천천히 가로질러 걸어들어갔다.

최루탄이 간간히 터지던 90년대 초반,문화의 거리 대학로에서 한편의 영화가 개봉되었다.베토벤의 <불멸의 연인>,함께 간여자친구에게 하나라도 더 아는척 하기 위해 아이는 베토벤에 대한 모든 상식을 떠올리고 있었다.영화의 스토리는 평이했다.베토벤의 괴팍한 성격과 아름다운 음악 사이에 왠지 모순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게리올드만의 연기는 좋았다.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고 달려가 누운 연못가에 떨어지던 은하수 그리고 베토벤의 <합창>교향곡, 마차가 엇갈려 맺어지지 못한 베토벤의 불멸의 사랑.뭐 이런 정도가 인상적이었다.당시 아이는 음악매니아였다.팝음악이나 메틀,프러그레시브 락등 한다면 하는 음악광이었다.그러나 클래식은 그의 분야가 아니었다.그래서 그 영화의 음악이 헝가리출신 거장 게오르그 솔티와 그의 수족 시카고 심포니가 음악을 담당했는지 알 턱도 없고 알 필요도 없었다.

시간이 흘러 그 아이는 직장인이 되었다.밤늦은 퇴근길 차안에서 브루크너의 아다지오 악장을 즐겨듣는 30대가 된 것이다.

베토벤에 대한 박홍규 교수의 글은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이 있었다.베토벤을 고난을 뚫고 승리한 위인으로 영웅화하는 것만으론 그의 진가를 파악할 수 없다는 지적엔 전적으로 동의한다.박교수의 글처럼 베토벤은 태생적 반항아요 진보의 상징이다.동시대 사람들로 부터 사랑을 받기도 했지만 그만큼의 비난도 감당해야했다.오히려 시대적 조류가 그의 음악을 조금이나마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것이 다행이다.고호나 브루크너,니체 같은 이들은 동시대에 아무도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오죽하면 말러같은 인물은 '100년후에야 내 시대가 올것이다'라는 오만을 가장한 몰이해에 대한 한탄을 내뱉었겠는가.베토벤이라는 인물이 만약 내 곁에 있다면 난 아마 친구로 삼지 않으려했을 것이다.인간 베토벤을 감당하기란.

박교수는 베토벤을 문제적 인간으로 하지만 가장 인간적인 인간으로 묘사하고 있다.그가 귀족에게 적대적이었다거나 순결한 영혼의 정수였다는 식의 신화를 과감히 반박한다.그 텍스트는 롤랑의 베토벤 전기이다.박교수는 낭만화되고 신화화된 베토벤을 땅으로 내려보내고 음악노동자로서 우리와 함께 숨쉬는 부족하지만 노력했던 인간으로 자리매김한다.이러한 작업이 의미있고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는 반가운 일이다.하지만 아쉬운점도 있다.평전형식으로 실제 읽는 재미는 그다지 뛰어나지 않다는 것,그래서 선뜻 친구에게 추천해주기 어렵다는 점 또 짧고 깔끔한 문장의 맛보다는 노동법의 이해를 듣는 듯한 건조한 문장등은 비전문 작가의 한계로 보인다. 베토벤에 대한 가장 큰 이해는 역시'읽기'보단 '듣기'이다.

흐린 토요일 오후 텅빈 사무실.아이는 제르킨이 연주하는 피아노소나타 32번이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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