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 최전선
허동현·박노자 지음 / 푸른역사 / 2003년 9월
평점 :
품절


우리 역사에서 가장 역사학자들의 편애를 받는 부분이 개화기와 해방 전후 시기이다.그 이유를 나름대로 생각해보면 ,우선 다른 시대에 비해 참고자료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다음으로 당시의 역사가 현재 우리 시대의 문제와도 맥이 닿아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이 책의 중심이야기 역시 개화기 즉 19세기 말 부터 20세기 초로 집중되어있다.

<우리 역사 최전선>은 이 시기에 펼쳐진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의 사상을 근대와 탈근대라는 두가지 시각으로 두명의 학자의 필담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해방이후 우리 역사의 주류는 근대우월적인 사관이었다.대표적으로 사회진화론에 입각한 부국강병론이 그것이다.그리고 저항적 민족주의와 일제식 국가주의가 우리인식의 주류를 차지했다.이러한 흐름에 반대하며 역사속의 개인과 소수자의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는 흐름이 나온 것은 근자의 일이다.박노자 교수는 이러한 탈민족적,탈국가적인 역사해석과 소수자운동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우리 역사 최전선>에서도 박노자 교수는 탈근대적인 시각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역할을 맡았다.박노자 교수는 근본적으로 서구의 근대라는 개념 자체를 무리하게 적용하는 과정의 문제를 지적한다. 부국강병이란 이름하에 무리하게 추진되는 일본따라가기식 근대화는 인류의 보편적 정서와 진리에 처음부터 격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갑신정변이나 황서영의 백서 사건들을 인류의 보편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 그 예이다.반면 허동현 교수는 박노자교수의 생각에 많이 동의하면서도 좀더 현실적인 시각을 제시한다.역사라는 것이 개구리 뛰듯 점프할 수 없다는 것으로 단계적으로 필요불가결하게 거쳐가는 과정으로 이를 설명한다.그러면서 '인간의 얼굴을 한 근대'가 현실에 존재한적이 없음을 주장한다.하지만 두사람 다 우리의 근대화가 일본지향적이었고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함정에 빠져있다는 것에는 공감대를 형성한다.

기본적으로 지금 우리사회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개인주의자라고 생각한다.이는 그동안 우리가 반동적이었던 저항적이었던 전체라는 이름 또는 국가와 민족이란 이름에 개인의 희생을 너무 당연시 해왔기 때문이다.이러한 교육은 사실 아직도 유효하다. 예를 들어 지난 월드컵때 자신이 좋아하는 축구선수의 팀을 응원했던 한 네티즌은 수많은 네티즌들에 의해 매국노로 IMF를 몰고온 주범같은 부류로 몰렸다.(너 같은 X들이 많아서 IMF가 온 거다.라는 식의..) 얼마나 애국적인 국민인가? 다양성과 개인의 의지나 취향은 애국의 이름하에 묵살되어져야만 한다.이것이 우리들의 지배적인 역사관이고 국가관이다.

오래전에 그런 질문을 해본적이있다.만약 우리가 일본보다 강해서 일본을 침략했다면 우리는 선의를 사랑하는 민족이기때문에 '위안부'도 '일본에 대한 수탈'도 '일본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고문'도 하지 않았을까? 만약 '우리는 그러지 않았을거야 '라는 사람이있다면 교과서에 배운대로만 말하는 순진한 사람이거나 파시스트 둘 중에 하나였을것이다. 이 책의 말미에는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이 나온다. 일제시대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일한 일본인-대개 좌파거나 아나키스트 였지만-들이다.이들을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우리를 도왔기때문에 좋은 사람이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또한 잠재적 파시스트 일원이다.그들은 그들의 소신에 따라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일본에 반대한 것이다.역으로 대한민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어도 그것이 인류의 보편적 정의에 어긋나면 반대하는 것이 진정 옳은것이다.우리는 주변에 너무 많은 애국자를 갖고 있다.해외에서 뛰고 있는 스포츠 선수들도 우리에겐 한국의 국위를 떨치는 용사이다.세계적인 음악가들에게도 그런 호칭을 붙인다.어디가나 애국이고 국위선양이다.

우리에겐 해결하지 못한 근대적 과제가 많이있다.하지만 단계적 발전만 주장하며 탈근대적 질문들을 외면할 수만은 없다.특히 우리의 왜곡된 근대가 낳은 패해들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한다.지금쯤이면 우리도 민족과 국가의 짐을 잠시 내려놓고 반성할수 있는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즈를 위하여 - 새롭게 읽는 공산당 선언
황광우.장석준 지음 / 실천문학사 / 200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공산당 선언>을 처음 읽었던 것은 대학 1학년 겨울방학때이다.낭만과 자유가 가득하리라 예상했던 한 해는 대형걸개 그림과 최루탄 냄새만이 자욱한 기억을 남겼다.방학때 읽었던 <선언>에 대해 용어상의 불편함은 없었다.아마 한 해동안 지속된 의식화(?)교육의 영향이었을까.지금 생각하면 철학적 이해나 공부의 깊이에 비해 열정많이 넘쳤던 사람들과의 세미나.싫던 좋던 한 해동안의 사회과학 공부는 맑스를 1년전 공산당 수괴의 이미지에서 위대한 철학자의 반열로 옮겨놓았다. 변증법적 유물론,사적 유물론,정치경제학 등을 얽기 섥기 익히며 그 한해가 지났다.영문과 한글 번역이 함께 게재된 <공산당 선언>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 기억 중 내게 떠오르는 것은 두가지이다. 우선 <선언>이 가지고 있는 함축성이다.그다지 길지 않은 글 안에 인간의 역사와 자본의 성장과 몰락,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미지까지 명료하게 써놓을 수 있다니.(그는 역시 천재였나!!!)

그 명쾌함에 대한 감정은 1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대로이다.시간이 지난 뒤에 읽어보니 또 한가지 느끼는 바는 맑스의 문장력이다.자고로 좋은 글이란 그 내용성도 중요하지만 글쓴이의 공력에서 비롯되는 문장의 힘이 필수적이다.<선언> 역시 위의 두가지 요소를 다가지고 있다.

<선언>을 처음 읽던 당시 가졌던 또 하나의 느낌은 <선언>이 유토피아적 묵시록 같다는 감정이었다.그러한 것을 목적론적 역사관이라는 용어로 설명하는 것은 조금 뒤에 알았다.맑스의 직선적 역사관이 가지고 있는 문제와 장미빛 청사진에 대해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었다.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부정적인 나의 시각이 문제였을 수 도 있으나 맑스 비판자들도 지적하는 편협한 계급관이나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과잉기대,계급환원주의 등등이 또 다른 의문을 가지게했기 때문이다.그리고 당시에 공부가 서로 깊지 못했던 선배들의 지협적인 해석과 경직성,몰이해등도 도매급으로 맑스철학의 문제로 넘어가는 부작용을 만들기도 했었다.

어느 학자든지 시대적 상황과 환경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맑스 역시 자본주의 생산관계에 문제가 생기고 혁명의 분위기가 세계를 지배하던 시기에 주요 저작들을 썻고 또 혁명운동의 브레인이 되어 주었다.그리고 100여년이 흘렀다.그의 자본주의 분석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생각한다.특히 노동소외문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찰리 채플린이 [모던 타임즈]에서 보여준 바로 그 꼭두각시 같은 노동자의 모습.아무리 우리가 외피를 그럴싸하게 둘러친다고 해도 본질은 변하지 않고 있다.하지만 그의 철학을 우격다짐식으로 현실에 적용시키려는 것은 <선언>의 진짜 의미를 또 한번 왜곡하는 것이다.흔히들 맑스 교조주의라고 하는 이 우격다짐은 이제는 그다지 흔하지 않다.스스로는 부인하겠으나 공부가 어리고 의욕이 많았던 우리 선배세대들은 분명히 그러한 우를 범하였다.흔히들 말하는 일상적 파시즘의 영역에서 작동한 부분이 있었음을 외면할 수는 없다.물론 당시 시대의 절박성을 이야기할 수는 있으나 적과 싸우다 적을 닮아가는 부분에 대한 반성도 필요한 것이다.당시 선배세대들의 우상이었던 몇몇 사람은 그렇게 비난하던 보수정당에서 국회의원 노릇을 하고 있다.그나마 좀 다르긴 할 텐데...그래도 역시.

실업이 이 시대의 최대 인권이란 말이 나오고 있다.청년실업에 장년실업....등등. 일자리가 줄어들면 노동자가 되겠다는 실업자들도 힘들지만 현재 노동자들도 힘들긴 매한가지이다.노동의 강도는 높아가고 실업에 대한 우려로 낮은 포복자세로 출퇴근하기 십상이다.희망이 없는 듯 싶다.그래도 그래도 희망을 찾으려면 정치인이나 경제인은 아닐 듯 하다.결국 노동자만이 희망이 될 수 밖에....중산층이란 허위의식은 이제 버렸으면 한다.요사이엔 그런 의식도 많이 생겨나고 있지만 아직도 국민의 80%는 중산층이라고 답한다.그만 속자.나는 월급 받는 임금노동자다.만국의 노동자와 억압받는 이와 개인의 자유가 사회적인 자유로 확장되길 바라는 이와 사회의 변혁을 위해 목숨바친 모든 이여 단결하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의 우리 이론 어디로 가는가 - 現代 韓國의 自生理論 20
교수신문 엮음 / 생각의나무 / 2003년 10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먼저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정리한 책은 아니다.일반 독자의 지적수준을 무시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한계는 이 책의 출전이 교수신문이라는 제한된 매체에 있기 때문이다.교수신문이 우유와 함께 배달되는 조간신문도 아니고 신문가판대에서 'ooo 연애인 벗었다'란 기사를 달고 있는 옐로우 저널들과 함께 팔리는 신문도 아니기 때문이다.계급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우리 사회의 교육자본과 문화자본의 상층피라미드를 차지하고 있는 교수(님)들이 서로 논쟁하며 쓰신 글이기때문이다.이런 이야기를 하면 이론에 '이'자만 나와도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는 보통사람들은 책 표지조차 보기 싫어할 지도 모른다.
여기에는 일반인들의 '이론기피증'이라는 선입관도 있지만 또 우리의 이론생산 계층이 현실과 많이 유리된 상아탑안의 그들만의 놀이에 열중했기때문이라는 비판도 피할 수는 없다.이런 비판이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세계 인식의 보편성을 제공하고 숨겨진 세계의 1인치를 보여주는 이론의 영량을 무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서구 이론이 판치는 세상에 해방후 전개된 우리 이론들 중 굵직 굵직한 것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편집자도 들어가는 말과 나오는 말에서 분명히 정리했지만 이론의 선정작업에서 보편성이란 이론의 고유역할과 한국적 상황이라는 특수성을 상호만족시키는 것들을 골랐다고 한다.물론 이 책에 선정된 이론 중 이론이라기 보다는 선언이나 종교적 논제로 흘러버릴 위험을 가지고 있는 것들도 있다.다른 동료교수들이 이에 대해 친절히 비판해 놓았기 때문이 선정된 이론중 어떤 것이 그런 것일까는 직접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이 책에 선정된 우리 이론을 보며 이론형성의 과정뿐만이 아니라 이론생산자로써 지식인이 사회와 갖는 관계측면도 고려된 듯 한 인상이든다.그만큼 한국의 특수한 상황은 지식인에게 이론의 형성만을 요구하지 않았고 또 시대를 움직인 지식인들은 이론제시에만 머물지 않고 적극적인 참여를 병행했다.

'사구체논쟁''민족경제론'의 박현채,'분단체제론'의 백낙청,'분단사학'의 강만길,'민중신학'의 안병무 '전환시대의 논리'의 리영희,이효재,김지하 등등...늘 현실 정합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지식인으로서 사회에 대한 책임을 도외시 하지 않았던 이론가들이었다.물론 이론이 실천을 담보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이론도 예술이 그러듯 나름대로의 생명을 가지고 그 안에서 자양분을 얻고 또 비판과 반비판을 거치며 성장할 수 있다.그리고 또 그 과정을 통해 수많은 후속이론들의 모델을 양산할 수 있다.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일이다.하지만 이론도 다 세상의 일이고 사람의 일이다. 이론이 교수신문과 상아탑 안에만 머무는 강단철학 수준에 만족한다면 이론으로써 반쪽의 성공밖에 안된다고 말하고 싶다.

강준만이나 진중권의 게걸스런 글쓰기가 여기저기서 욕을 먹는다.또 속을 드러낸 정치적 성향의 글이 눈에 거슬릴 수도 있다.하지만 우리의 이론 생산자들은 그들이 갖는 대중지향을 참고하여야한다.사실 이론이 필요한 사람들은 학자만이 아니다.세상을 인식하고 1인치 깊게 넓게 보는게 왜 학자들만이 가져야하는 특권인가? 사실 현상적인 것들을 종합하고 의미를 파악하는 필요는 학자들보다 일반인에게 더 긴요하다.그렇다면 우리의 이론이 근대성의 한계넘기,탈식민지성의 한계넘기도 중요하지만 상아탑의 교문을 넘기가 더 시급한 일이 아닌가한다.개인적으로 김용옥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그의 쇼맨쉽이 좋은 것도 아니다.그리고 그의 해석이 옳은지 그른지도 모르겠다.하지만 동네아줌마들이 논어를 한번 펴보고 슈퍼아저씨들이 장자의 한구절을 인용하고 싶은 욕망을 느끼게한다면 그를 옹호하고 싶다.

우리의 이론은 20세기 한국의 고단한 역사속에서 나름대로 현실과 투쟁해가며 자생해왔다.어느덧 2004년, 미국의 패권은 나날이 기승을 부리고 세상은 자본주의의 북소리와 무한경쟁이라 깃발을 휘발리며 지구를 휘감는다.숨가쁜 이곳에서 한 줌 숨구멍을 뚫어줄수 있는 또 다른 우리이론의 탄생을 기대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열정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단 하룻밤의 이야기이다.그러면서 또 41년간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선 나는 이 소설을 보며 올 하반기 최고의 한국영화 [올드 보이]를 떠올렸다.소설과 영화가 복수를 드라마의 기본 소재로 삼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하지만 악연의 고리를 푸는 방식은 사뭇 다르다.먼저 영화[올드보이]는 15년간 영문도 몰래 갖힌 남자의 복수욕망과 그를 가둔 자의 15년이 넘는 자기파괴적 복수욕망을 상치시킨다.그리고 박찬욱감독의 스타일대로 하드보일하게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을 보여준다.반면 산도르 마라이는 훨씬 정신적이고 근원적인 방법으로 복수의 길을 찾는다.그가 찾은 복수는 삶에 대한 용서와 삶의 진실에 대한 질문이다.

가장 믿는 친구로부터의 배신을 통해 주인공은 내면의 갈등을 겪는다.그러나 분노는 점차 삶의 근원을 향한 내적질문으로 변해간다.주인공은 잊을 수 없는 배신의 날로부터 41년을 기다려 친구의 방문을 통보받는다.그 암울한 기억의 현장을 그대로 재현하며 주인공은 담담하게 친구를 맞는다.배신의 기억의 한 축을 만든 장군의 아내만이 부재하다.산도르 마라이는 이미 노인이 되버린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거역할 수 없는 삶의 열정과 그에 따른 모순을 담담하게 설명한다.

주인공 헨릭은 이렇게 말한다.
'어느 날 우리의 심장, 영혼, 육신으로 뚫고 들어와서 꺼질 줄 모르고 영원히 불타오르는 정열에 우리 삶의 의미가 있다고 자네도 생각하나? 무슨 일이 일어날 지라도? 그것을 체험했다면, 우리는 헛산 것이 아니겠지?'

주인공은 진실을 알고 싶어했고 그리고 그는 고독을 통해 진실을 이해했다.인간의 의지와 도덕,책임같은 것 만으로 제도할 수 없는 삶의 모습을 이해한 것이다.그리고 배신의 결과 죽는날까지 다시 만나길 거부했던 부인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가장 쓸쓸했던 사람은 바로 부인이었다는 것을 이해했다.자신의 분노와 친구의 비겁함으로 인해 두번의 버림을 받는 자의 고통을 안것이다.

이 소설은 서구의 이분법적 세계 인식의 논리를 근원에 깔고 있다. 멀리 그리스까지 갈 것도 없이 20세기 초 토마스 만의 소설<토니오 크뢰거>나 헤르만 헤세의 소설<지와 사랑>등에서 우리는 쉽게 세계와 인간에 대한 이분법적 구분을 찾을 수 있다.토마스 만은 예술가와 부르주아 공민세계 편입사이에서 고민하는 주인공을 그렸다.헤세는 두 수도사를 통해 디오니소스적 세계와 아폴론적 세계를 표현해냈다. 20세기 초 유럽소설의 전통이었든 플라톤을 정점으로 하는 형이상학적 전통이었던 산도르 마라이 역시 이 전통을 따르고 있다.

주인공 헨릭의 세계와 콘라드의 세계는 그들의 성장과 함께 색깔을 달리한다.헨릭의 아버지는 이를 직관적으로 파악한다.비극의 단초는 콘라드의 세계에 속한 크리스티나가 이질적 세계로 편입되면 발생한다. 세계에 대한 이분법적 구분이 과연 적확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문학적으로 매력이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그리고 경험적으로 비추어 봐도 양자의 가치관이 실재에 현존한다는 생각도 가끔은 든다.물론 대부분 사람은 세속적인 이해관계속에서 합리적이라고 가장된 속물적 근성에 기대어 산다.하지만 내면의 움직임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세계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는지 알 수 있다.그리고 결국 비슷한 사람끼리 모이게 된다.산도르 마라이도 말하듯이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과 결혼한다는 것 만큼 행운은 없다고 하지 않던가.굳이 결혼이 아니더라도 사람은 같은 가치의 세계를 살고 있는 사람을 존중하고 함께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주인공 헨릭은 내면의 색깔을 파악하기엔 너무 유복했고 행복했다.그러므로 젊은 날의 그는 다른 세계에 대한 이해도,제도로써는 막을 수 없는 삶의 열정도 이해할 수 없었다.모든 것을 다 잃고 난 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이분법적 세계에서 줄타기를 하는 평범함 나로써는 그의 선량함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삶은 그렇게 한 줄의 문장이나 한가지 변수로 측정할 수 없는 열린 다항함수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재 결혼 시키기
앤 패디먼 지음, 정영목 옮김 / 지호 / 200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의 첫장을 펼치고서야 이 책이 번역된지 2년정도 지났음을 알았다.이제서야 비로소 읽었다.나의 편견때문이었다.나는 이 책이 애서가의 책 브리핑인지 알고 있었다.그래서 책 제목에 대한 공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늘 눈길 밖에 있었던 것이다.(정말 나의 불찰이고 무지의 소산이 아닐 수 없다.)

늦었지만 이 책은 최근에 본 에세이 집 중 최고였다고 할 만하다.만약 책을 멀리하던 사람이 이 책을 본다면 잊혀졌던 책에 대한 애정이 살아날 것이다.또 책을 애인삼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그 인연이 백년은 연장될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서재 결혼 시키기>는 책을 사랑하는 한 가족의 이야기이고 책에 얽힌 수많은 에피소드와 숨은 애정을 표현한 책이다.책 읽기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한두가지쯤 공감할 이야기들이다.책의 제목이 된 에세이는 책을 둘러싼 두 애서가의 헤게모니 투쟁과 정리의 과정이 씌여있다.서로 다른 취향의 책을 어디에 배치할 것이며 같이 가지고 있는 책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책에 둔감한 사람이라면 '그것도 문제거리야'라고 할 만한 주제이다.하지만 내 책은 나의 일부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정체성의 문제이기도 하다.나 역시 이를 미루어 걱정해본봐 있어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물론 내 반쪽이 될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이야기한 적은 없다.하지만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도 어떻게 나의 지분을 넓힐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다.최근에 들어서 한가지 공유한 부분은 서로 읽는 책은 사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리고 책을 상대에게 빌릴때는 교환형식을 취한다는 것이다.어찌 그리 야박하냐고 탓할 수 있겠지만..나는 그런 비난에 '그 정도도 많이 양보한 것이다'라고 밖에 답할 수 없다.

책과 교열에 대한 패디먼 가족의 일화도 무척 흥미롭다.특히 패디먼 가족의 강박증적 교열정신은 사실 날 좀 부끄럽게 한다.이유는 알라딘 서평에 쓰는 내글에 생기는 오자와 탈자때문이다.나름대로 변명하자면 회사에서 몰래 글을 쓰다 보니 그렇다고 할 수 밖에.여기 저기 눈치 봐가며 쓰다보면 교정하기 전에 보내기 엔터바를 누르기 십상이다.그러다보면 당연히 오자와 탈자,문맥상 부자연스러움이 많이 생긴다.내 희망이 있다면 패디먼과 같은 사람이 주변에 나타나지 않길 바랄 뿐이다.

패디먼 가족의 모르는 단어찾기의 즐거움도 공감한다.최근에 이응백 선생의 우리말 관련된 책을 하나 구입했는데 이유는 숨은 우리말의 매력때문이다.알라딘의 내 서재 이름(드팀전) 순우리말인데 아주 맘에 든다.이 책 저 책보다 그냥 아무데나 펴서 책을 보고 싶을 때 이응백 선생의 책을 핀다.그리고 그 안에 내가 모르고 있는-사실 봐도 금새 잊어버린다만-아름다운 우리말을 찾아 볼때 우리말의 아름다움에 금새 감탄하게 된다.

내가 이 책을 보며 부러웠던 것은 패디먼 가족의 책 대물림이었다.물론 남편을 비롯해 온 가족이 글을 쓰는 직업과 관련이 되었던 사람들이기에 그것이 가능했을 것이다.패디먼은 아이들이 책과 가장 가깝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은 책으로 성쌓기 라고 했다.그만큼 책이라는 것이 화장실의 거울이나 집안의 시계처럼 일상적이고 보편적이었다는 것이다.그리고 선대부터 물려온 책을 다음대에 가장 큰 유산으로 넘겨주는 것은 정말이지 최고의 보물이다.대물림하는 부모나 한 권이라도 더 챙기려는 자식이나 너무 멋있다.나 역시 수백억을 물려주긴 힘들겠지만 멋진 책들을 내 후세에게 물려주어야 겠다는 소망이 생겼다.아직 모르는 그/그녀가 패디먼처럼 행동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이 책은 책과 관련되 그동안 내가 소홀히 했던 부분에 대해 많은 것을 일깨워준다.그리고 패디먼의 글쓰기는 유머가 항상 가득하다.이 두가지 때문에 읽는 내내 즐거웠다고 말할 수 있다.애정이 가면 더 많은 것이 보인다고 했던가.나 역시 책에 대한 소소한 애정을 더 많이 쌓아가야겠다는 다짐이 생긴다.그래서 우선 거금들여 만년필을 하나 살까한다.평생 쓸 생각하고 좋은 걸로 고를 생각이다.그리고 친구들에게 책 선물할때 꼭 그 펜으로 헌사를 써주어야겠다.언제든 나의 향기가 그곳에 함께 할 것이므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