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무 상식적인 말이다. 노조는 상당히 남성중심적이다. 노동운동 조직원들의 내부를 들여다 보면 '마초'수준인 경우도 허다하다. 노동운동이 태초부터 가지고 있던 약점이다. 산업구조 내의 성비의 불균형은 노조 내의 성비 불균형을 만든다. 반드시 성립되진 않겠으나 전투적 노동조합일 수록 상대적으로 남성중심주의적 성향이 높아진다. 노동자들 역시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오히려 '남성다움'이란 모델에 대한 과도한 투사는 기타의 다른 사회집단들보다 훨씬 강하다. 전통적으로 탄광노조가 강력했던 영국에서의 이 분야에 대한 연구는 명성이 높다. 영화< 빌리엘리어트>는 몰락한 탄광촌의 모습을 그린다. 그 지역 전체를 휘어잡고 있는 정서는 '남성다움'에 대한 전통적 가치의 좋은 예가 된다. 현재 한국에서 노동시장은 정규직/비정규직으로 계층화 추세를 걷고 있다. 신자유주의하에서 자본은 그런 양극화 현상을 통해 노동세력을 파편화시킨다. 그리고 이를 '이이제이'의 전통적 수법에 따라 '비정규직의 원망'을 '정규직'에게로 향하는 수법을 쓴다. 이를 가장 그럴싸하게 이데올로기 포장하는 집단이 한국의 언론집단이다.  

하지만 자본의 그런 노력은 결과적으로 노동자 내부의 차별구조를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내부의 차별구조는 이중적이다. 하나는 정규직의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 또 다른 하나는 남성 노동자의 여성노동자에 대한 차별. 후자는 노동기회,임금등 노동 여건과 관련된 것과 심리적인 것이 결부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노동시장에서 가장 약자는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사회적 산업분화에 의해 차별당하고 전통적인 가부장적 남성조직 문화에 차별 당한다. 이중 차별의 가장 큰 피해자들이다. 내부적으로 이런 한계가 있기때문에 이 지점은 언제나 조직운동의 '약한고리'였다. '약한고리론'은 레닌이 혁명의 성공을 위한 전술로 언급한 것이지만 이것은 역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둑은 거대한 큰 파도때문에 한 번에 무너지지는 않는다. 작은 균열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진보진영은 진보/보수를 구분할 수 없는 기본적 문제에서 허둥지둥하다가 '바보' 되는거다. 최대한 낮은 자세에서 사과하고 다시 문제의 심각성을 공유하여 이 '약한고리'에 대한 재검토에 들어가야 한다. 흔한 말로 내가 다니는 별 거지 같은 회사도 형식적으로 '성추행 예방교육'을 의무적으로 실시한다.  성추행에 진보/보수는 없다. 거기에  여성주의는 진보의 평등주의가 가 먼저 끌어 안고-역사적으로도 그랬다. -수행해야 하는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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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불거진 ‘성폭력’…진보조직 ‘가부장 틀’ 깨야
진보 가치 지향해도 조직문화는 남성중심적
‘조직 우선’ 논리에 성폭력 불거져도 은폐 급급
자기성찰 위 성평등 조직으로 체질개선 필요

성폭력 가해자가 조직 간부인데, 가해 사실을 밝히면 아주 곤란해지는 상황인 거죠. 그러다가 그냥 넘어가버렸어요. 주변에 나를 도와주거나 지지해 줄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사회운동의 가부장적인 성격은 ‘운동사회’ 속의 썩은 부분들이라고 생각해요. 가부장적인 남성 운동가들에게 운동의 명예를 넘기고 싶지 않았어요.”

(전희경 <오빠는 필요없다>에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간부의 성폭력 사건을 계기로 ‘운동사회’ 또는 진보진영의 성폭력 문제가 다시 불거지고 있다. 개인이나 단체의 도덕성을 겨냥해 비판하는 데서 나아가, 단체 내부 양성평등 현실을 일궈내기 위한 근본적 성찰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확산되고 있다.

■ “남성 중심주의 벗어야” 이번 성폭력 사건과 그에 이은 민주노총의 ‘둔감한 대응’ 배경에는 뿌리깊은 ‘남성 중심주의’가 깔려 있다는 진단이 나온다. 권력을 가진 남성이 여성을 성적 대상이나 주변적 존재로만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남성 중심주의가 운동사회에도 번져 있다는 것이다. 오매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조직에서 주요 간부 지위를 가진 가해자가 피해자를 동등한 동료로 바라보지 않고 성폭력을 행사했다는 점에서, 이번 사건은 우리 사회 전반에서 일어나는 성폭력 사건의 양상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말했다.




운동사회가 진보라는 가치를 지향하는데도 조직문화나 구성원들의 시각 등은 남성 중심주의를 온전히 벗지 못했다는 비판은 요즘도 여전하다. 여성학자 전희경씨가 지난해 펴낸 <오빠는 필요없다>를 보면, 1990~2000년대 여성 운동가 21명이 전씨에게 털어놓은 경험들은 낯익으면서도 새롭다. “컵 씻고 찾아온 사람을 응대하는 일들은 주로 여성들이 했다.” “운동가로 살기 위해 여성임을 포기했다.”

노조에서 여성위원장을 맡은 적이 있다는 여성 운동가는 “조직 안에서 ‘성평등’은 유독 진보적 가치와 거리가 멀었다”며 “이 때문에 일상적인 성차별과 성폭력 문제 등이 자주 불거진다”고 말했다. 1999년 한 산별노조에서 노조 간부의 성폭력 사건이 불거졌을 때 피해자가 되레 “조직에 누를 끼치느냐”는 책망을 듣는 등, 운동사회에서 성폭력이나 성차별 문제는 ‘조직이 우선’이라는 논리에 가려지기 일쑤였다는 것이다.

■ “성 감수성 키우고 ‘진보의 가치’ 성찰해야” 이번 사건에 민주노총은 조직 전반에 걸쳐 성교육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성폭력 사건 처리 매뉴얼을 보완하겠다는 등의 대안을 내놨다. 민주노총은 이미 2003년에 ‘성폭력·폭언·폭행 금지 및 처벌 규정’을 마련해 둔 상태였다.

이 때문에 제도·규정 마련, 교육 강화에 머물러선 안 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문제는 운동사회가 추구하는 여러 진보적 가치들 가운데, ‘성평등’만큼은 시급성이 떨어지는 가치로 바라보며 뒷순위로 미루곤 하는 조직문화와 구성원들의 시각이라는 것이다. 2000년 여성 운동가들이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위원회’를 만들어,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유력 운동가들의 실명을 공개하고 비판을 제기했던 것도 이런 맥락이었다.

그런데도 성평등이나 여성주의를 말하면 ‘시끄러운 애들’이라며 비난하거나 조직에서 배제하는 행태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게 여성학자들의 진단이다. 권김현영 국민대 강사(여성학)는 “이번 사건에서 민주노총이 가장 먼저 했어야 할 일은 피해자와 여성 조합원들에 대한 사과였다”며 “그러나 외부에서 가한 도덕성 시비만을 염두에 두고 대국민 사과부터 낸 것을 보면, 깊은 자기성찰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여성운동 단체들은 10일 공동 입장을 내어 “그동안 ‘여성’은 노동운동 조직문화 속에서 변방이었다”며 “민주노총 속에서 여성운동이 이제까지와 다른 의미로 자리잡지 못하면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들 단체는 “진지한 자기반성을 통한 일상적인 조직의 체질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며 성폭력 방지를 비상대책위원회의 최우선 과제로 삼으라고 주문했다.

전희경씨는 “젠더(성) 문제 앞에선 진보와 보수가 따로 없었다”며 “진보의 가치를 추구하는 운동사회라면, 젠더 문제를 그동안 왜 소홀히 다뤄 왔는지 고민하고 토론하는 일이 매우 시급하다”고 말했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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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지해! / 큰소리치던 부장이 / 체인지됐네
우울한 日 / 애달픈 短歌 / 유행이네
도쿄=선우정 특파원 su@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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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처럼 직원들에게) '체인지(change)해!'/큰소리치던 부장이/체인지됐네."

세계적 불황으로 전대미문의 해고 사태에 직면한 일본 샐러리맨의 '애달픈' 단가(短歌)가 10일 공개됐다. 일본 다이이치(第一)생명은 이날 2008년에 응모를 받은 '샐러리맨 센류(川柳) 콩쿠르' 입선작 100수를 공개했다. '센류'는 일본어로 5·7·5의 운을 가진 전통 단시(短詩)다.

눈에 띄는 것은 역시 기업의 대량 해고 관련. "오랜만에/동창회가 열렸네/구직센터에서." "코스트(비용) 절감/의욕도/함께 절감." "취직 자리/'우리집 경비(警備)'라고/말하는 자식놈"이란 작품엔 청년실업 문제가 반영됐다.

"100년 만의 위기"라며 소란을 떠는 세상을 자조적으로 풍자한 "금융위기/늘 익숙합니다/우리 집은"이란 단시도 출품됐다. "'엔고(高)'/실감하고 싶은데/'엔'이 없네"란 작품은 엔화가치 상승으로 일본인들은 해외여행 붐이라지만, 정작 자신은 돈이 없어 가지 못하는 처지를 풍자했다.



정치 리더십이 실종된 세대와 관련한 작품도 많았다.

"아이들에게/또 가르쳐 줬네/총리 이름"이란 작품은 1년도 못 돼 총리가 바뀌는 정치를 풍자한 것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자리를 내팽개치는 총리를 아이들이 닮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담아, "넌 내던지지마/나라(國)와 다르단다/학업(學業)은"이란 단시도 나왔다.

이밖에 일본 사회에 부는 다이어트와 운동 열풍을 풍자해, "살이 빠진 건/함께 산책한/개뿐이라네'란 작품도 눈길을 끌었다.

'센류 콩쿠르'는 세태에 따라 경향이 달라진다. 그러나 공통 풍자 대상은 나이가 들수록 두려워지기만 하는 '아내'와 '회사'다. "쓰레기 버리는 날/버리러 나가지 않으면/(마누라에게) 버림받는다." "'지금 집에 갈게'/마누라의 대답/'괜찮아'."(2007년) "따뜻하게/날 맞는 건/좌변기뿐."(2006년)

기업은 늙은 샐러리맨을 절벽 아래로 밀어내는 판국에, 소방대가 절벽에 고립된 개를 구해냈다고 법석을 떠는 세태를 비꼬아 "개는 좋겠다/절벽에서도/구조되고"란 작품도 2006년 히트작이었다. "아직 자고 있네/돌아와 보니/이미 자고 있네" "담배보다/몸에 해로운 건/마누라의 구시렁" 등도 과거 히트작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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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철의 얼굴을 오랜만에 본다.  수염을 길렀나...박상민인 줄 알았다. 

신해철의 교육관은 이반 일리치같은 '탈학교론자'였나? 그의 맹독성 발언이 그의 급진성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조용 조용하시지만 알라딘에 있는 00 님 같은 경우가 훨씬 더 급진적이다.(아..유명한 글샘님은 아니다.^^ 그분은 급진적이지 않다. 반MB적일 뿐이다.) 신해철이 언젠가 자기는 그저 '상식적인 진보'라는 말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문제에서 정작 살펴봐야 하고 고찰해야 하는 것은 '상식의 재구성'문제이다. 신해철이 변절했네..충격적이네 같은 것은 내 관심 밖이다. 신해철의 교육관이 어떤지 모르겠으나 그의 답변은 그런 수준에서 나오는 것 아닐까...결국 신해철의 평소 발언으로 인해 그의 교육관이 아닌 '투사된 교육관의 신해철'이 유령처럼 존재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진보적 가치를 가진 사람들 중에서도 일부를 제외하면 대개는 현재의 교육체제가 만들어 놓은 주름을 따라간다. 그 안에서 회의하고, 반성하고 ,자기모순에 껄적지근하고, 3개 보낼꺼 2개 보내놓고 노심초사하고 그런다. 한국 사회에서 일반적인 대대수의 사람은 '사교육'의 게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안에는 상대적인 차이정도만 있을 뿐이다. 그 차이를 소중하게 여기지만 나타나는 결과는 불행히도 군비경쟁에 뒤쳐진 자들은 쳐지는 구도이다.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진보'의 이론과 현실태에 틈이 있는데 이 틈이 발생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렇지만 우파는 이 지점을 이데올로기적으로 공략한다. 진보의 이율배반이라는 식으로 '도덕가치'를 들고 나온다. 대개 우물쭈물하다보면 그렇게 당하고 집에 가서 끙끙 앓는다.  

사교육은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기 전에 없어지지 않는다. 그 안에서 보수든 진보든 살아가야만 한다. 개인적으로는 '탈주'하는 방식이 가장 명징하고 도덕적이다. 잡음이 없다. 그렇지만 그렇게 갈 수 있는 것은 소수이다. 진보는 다수를 구성하는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대중의 상식적 욕망조차 그 물질성을 인정하면서 재구성되어야 한다. '사교육 반대'를 외치는 것보다 이 길이 실제적이고 힘든 길이다. 그래서 진보도 손을 놓았다. 이 결과 우파의 이데올로기 공격에 취약한 진보 대중을 만들고, 또 앞에서 외치고 뒤에서 학원비를 넣어주어야 하는 군비경재의 게임상태에 동원되는 것이다. 

뭐 별거 아니다. '신해철의 광고'를 욕하는 사람들은 신해철이 광고한  그 학원이 어떤 학원인지,정말 잘하는지등에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신해철에게만 관심이 있다. 그래서 광고에서는 신해철만 보인다. (실제 그랬는지 아닌지 생각해보라 하지만 대중들은 두 가지 메시지를 동시에 읽는다는 것이다. 그 학원 정말 잘하나?  

상식은 여기서 재구성되어야 한다. 내가 관심이 가는 건 그것뿐이다.   

p.s) 묘하게 흥미로운 것은 오늘 부터 조선일보 1면에 '학교,공교육 이길 수 있다' 라는 특집이 나간다는 거다. 기사를 읽어보면 결국 '개인의 분발'이라는 공적문제로 사적으로 치환하는 '개인의 승리'라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일종의 눈가리고 아웅하고 닭잡아먹고 오리발 내미는 형세다. 평준화 반대와 특목고 육성에 사활을 걸듯 달려들면서도 또 한편에서 균형감을 잡는듯 모양새를 취한다. 그런데 실재 내용을 보면 아무것도 아닌 반복이다.  이데올로기적으로 마치 자기들이 공교육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있는 것처럼 선점한다. 신해철의 광고와 조선일보의 1면 타이틀을 본다면 이미지 싸움에서 이미 등이 어느쪽으로 돌지는 뻔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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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가 끝이다. 

네 입가에는 아기 동백꽃같은 혈흔이 묻어있다. 다시 울리지 않을 가르릉거리는 너의 성대. 네 입주면에 피어난 꽃잎도 흔들리지 않는다. 살아 고난스러웠던 너의 아가리는 끝나는 곳까지 너를 편안하게 두지 않는다. 너의 마지막 낙인인양. 고단함은 죽음 이후에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평생 너를 따라다녔던 얼룩에 하나가 더해졌다. 

먹이를 쫓아 비좁은 담장 사이를 헤치던 너, 쓰레기통 속에 웅크려 죽은 애인을 멀찍이 바라보던 너, 아기처럼 외로왔을 너.   

...쓰레기통에서 죽어간 네 여인처럼 너 역시.

해가 뜨고 어젯밤 숙취가 가시지 않은 이의 욕지거리가 너를 모욕적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네 운명이 마지막으로 보시할 이글거리는 붉은 아가리가  너의 육신을 탐한다. 

이번주의 관심도서는 별로 없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동하는 공포>가 가장 눈에 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꽤나 노령의 사회학자이다. 비투비 시리즈물 중 바우만이 쓴 <자유>를 예전에 읽었다. 최근에 what's up시리즈의 네번째 도서로 그의 <쓰레기가 되는 삶>이 출간되었다. what's up시리즈는 모두 볼 요량이다. 바디우의 책을 즐겁게 보았고, 지젝의 책도 대략 넘겨봤다. 아감벤의 것은 벼루고 있다가 최근 무화과 나무님의 리뷰에 다시금 자극을 받았다. 

'공포' 는 상당히 흥미가 가는 주제이다.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본원인 공포는 역시 '죽음'이다. 바우만의 첫번째 챕터가 '죽음의 공포'이기도 하다. 진화종교학에서 '종교 부산물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죽음의 불확실성'등을 감소시켜주는 요소로 종교가 발생했고 진화했다고 말한다. 앙리 르페브르 같은 이들은 대중사회를 분석하면서 '죽음'의 공포로 부터 도피하는 '일상의 반복성'에 주의를 기울인다. 쉽게 말하면 '반복된 일상' 이라는 것이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불안감'을 회피시켜준다는 것이다. 예전에 본 글이라서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바우만의 <유동하는 공포>에 대한 출판사측의 요약은 이렇다. 

'유동하는 공포’란 유동적 근대(liquid modern age)의 특징인 ‘언제 어디에서나 출렁이는 위험’ 앞에서 우리가 겪는 불확실한 불안에 붙인 이름이며, 그 위협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우리의 인식 불능성에 붙인 이름이며, 그것에 대항해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 판단할 수 없는 우리의 무력함에 붙인 이름이다.  

'공포'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같다만 '근대'라는 공간의 불확실성이 그런 '공포'의 일상적 내재화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책 서문에 보면 바우만은 1차적인 생물학적 공포를 떠난 2차적 공포, 즉 '파생적 공포'에 대해 이야기한다.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생체정치'의 개념을 도출하면서 '훈육과 통제'에 대해 언급한다. 그리고 이 논의를 확장하여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는 '전쟁'이라는 예외상황이 '생체정치' (삶정치)를 강제하는 방식에 대하여 논한다. 네그리의 <다중>과 아감벤의 <호모사케르>에도 이런 논의들의 진화가 들어있다. 결국 우리는 이런 최종적 논의의 인간적 소실점 안에서 '공포'라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그리고 모든 '공포'의 원칙은 실제보다 과장되거나 '담론'의 공포를 통해 먼저 작용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비판한 사회학자들에게 자본이 공포를 통해 작동한다는 것은 아주 오래된 격언이다. 그리고 그런 공포는 현실적으로 대중들과 접촉하기에 단지 이데올로기의 허상만은 아닌 실체이기도 하다. 

'파생적 공포'란 계속적으로 마음을 구획하는 프레임으로서, 자신이 위험에 빠지기 쉽다고 느끼는 감각이라고 보면된다. 말하자면 불안의 감각, 취약함의 감각이랄까. 

세계 경기의 침체 속에 실업이 일상화되면서 이런 '파생적 공포'에 가장 허약하게 노출되는 것은 바로 중산층이다.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는 한 순간의 낙마가 장기간 회복불가능 상태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중산층이 상류층에 편입하기란 요원하며 하류층이 된다는 것은 찰나다. 바우만의 '파생적 공포'는 현재 한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촉발되는 공포상황에 정합적이다. 

그러나 바우만은 이것이 끝이 아니라고 말한다. 항존하는 공포, 예고하지 않는 공포, 미지의 공포, 즉 '파국적인 공포'를 언급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공포'로 인해 노이로제 상태에 빠져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는 않다. 병원에 있는 사람을 제외하곤 어느 누구도 늘상 '공포 속'에서 살지 않기때문이다. 

다른 모든 인간의 공생이 그렇듯, 우리의 유동적 근대사회 역시 삶을 공포와 더불어 살만하게 만들기 위한 고안물이다. 

바우만은 공포를 '묵음화방식'하는-개인이나 구조를 통해- '지연시키기'의 방식들을 이야기한다. 리스크 부담 덜기, 신용카드와 소비주의 고찰들의 방식을 통해서말이다. 

대략 여기까지가 서론의 내용이다. 서론만 봐서는 일반인들도 쉽게 읽을 수 있을 에세이로 보인다.(피천득의 에세이와 다른 서구식 개념의 에세이말이다.) 

이번 주의 관심도서는 아니지만 <다윈의 식탁>에 언급된 책들이다. 유명한 도킨스와 굴드의 책은 제외했다. 도킨스와 굴드의 책도 몇 권이 쌓여있어서 이것들을 다 읽을리는 없지만 언제 관심이 닿으면 볼만도 하다. 나름 이 바닥에서 유명한 책들이란다. <사회생물학 논쟁>은 <다윈의 식탁>에 나오지 않는다. 부케비츠는 '절충주의'입장에서 정리한 책이다.  도서관에서 대충 넘겨봤다. 그의 최근 책이 <진화는 진화한다>이다.<빈서판>은 마립간님의 강력추천도서이다. 분량 압박이 좀 있다. 노이에자이트님과 예전이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본바탕'이란 말을 했다.<빈 서판>은 '빈 서판은 없다'라는 책이다. <왜 다윈이 중요한가?>는 창조론이나 지적 설계론이 '과학을 빙자한 사기'라는 것을 말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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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의 식탁 - 진화론의 후예들이 펼치는 생생한 지성의 만찬
장대익 지음 / 김영사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리뷰를 쓰기 바로 조금 전에 2009년 첫번째 피셔스케이팅 대회 쇼트게임이 끝났다. 김연아는 세계 신기록으로 소띠 해 첫번째 경기를 멋지게 끝마쳤다. 차범근의 시대부터 이어진 스포츠 국민영웅의 자리는 현재 김연아의 것이다. 국민 여동생은 더 이상 문근영이 아니며 국민 요정 이효리도 불안불안하다. 이효리가 '이십대에 대한 청구서'를 정리하가 위해 시골가서 몸빼입고 마지막 불꽃을 지피는 동안 김연아는 새하얀 빙상장 위에서 한 마리 새처럼 하늘거리며 중력을 벗어난다. 

오늘 쇼트게임에서는 헤맸지만 김연아의 라이벌 아사다 마오의 프리게임도 기대된다.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 한 동안 이 라이벌전은 커다란 즐거움을 줄 것이다. 프로 스포츠가 성공하려면 이런 라이벌 구도가 명확해야 한다. <축구의 사회학>에 보면 축구가 발생한 후 초창기부터 이런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런 구도는 흥행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 한 도시내에 라이벌 구도를 만들어라' 라는 성공 원칙이 있다. 축구에서는 이런 걸 '더비'라고 말한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맨체스터 시티의 '맨체스터더비', 인테르밀란과 AC밀란의 '밀란더비', 리버풀과 에버튼의 '머지사이드 더비', 도시는 다르지만 오래된 숙적같은 FC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엘클라시코 더비' 등등...  

<다윈의 식탁>에서 'MBC 백분토론' 보다 훨씬 영양가 있고 또 열띤 진화론 토론을 펼치는 팀들의 대결을 '에볼루션 더비'라고 하면 어떨까 싶다. 양 팀은 D팀과 G팀으로 선수 구성이 조금씩 바뀐다. 하지만 양 팀의 주장은 바뀌지 않는다. 진화론의 김연아-아사다 마오다. 바로 <이기적 유전자>의 도킨스와 <풀하우스>의 굴드가 그들이다. 약간 다른 점이 있다면 김연아-아사다 마오는 서로 험한 말을 하는 사이는 아니지만 도킨스-굴드는 때로 얼굴을 붉히고 했다. 

<다윈의 식탁>은 진화론 내부 논쟁을 둘러싼 팩션이다. 다윈 이후 가장 유명한 진화생물학자라는 윌리엄 해밀턴의 장례식에 세계 유명 진화론자들이 모인다면 어떨까 라는 상상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이들은 다윈 이후 진화론을 다시 살렸다는 '근대적 종합' 이후 진화론의 4가지 거대한 쟁점들에 대해 서로 머리채 쥐어잡는 토론에 돌입한다. 그 첫번째 주제는 '자연선택의 힘'에 대한 것이다.즉 다윈의 자연선택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 것이며 무엇이 적응이고 무엇이 부산물인가 하는 논쟁들이다. 두번째 주제는 협동의 진화이다. 진화가 개인 차원이냐 집단 차원이냐의 논쟁부터 시작해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론'. '다수준 선택론' 등이 토론된다. 셋째 날은 '유전자 란 무엇인가 로 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학자마다 유전자의 이미를 다르게 사용하고 있고 이해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유전자의 영향력에 대한 문제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이보디보'라는 진화발생학의 유전자론도 도킨스의 이론에 대한 도전으로 제기된다. 네번째 날은 '점진론'과 '단속평형설' 사이의 논쟁이다. 연속성과 불연속성 문제에 있어서 쿤-포퍼 논쟁이나 푸코의 에피스테메의 단절에 대한 비판과 반비판 같은 것과 유사하다. 굴드의 넓이뛰기 비유가 등장하고 도킨스팀의 '굴드씨 오바하지 마세요. 다윈의 점진론은 그렇게 좁은 개념이 아니거든요' 하는 비판이 나온다.  다섯번째 주제는 '진화와 진보'의 관계를 말한다. 도킨스는 진화에 어느 소실점이 있다는 쪽이고 굴드는 그 유명한 말-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이다- 라는 말로 이를 비판한다. 

<다윈의 식탁>의 최고의 장점은 최강의 진화론자들 사이의 가상토론을 통해 진화론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쟁점과 논쟁, 비판과 반비판의 역사를 알기 쉽게 보여주고 있다. 토론사이를 오고 가는 비유들과 어떤 이론을 비판하기 위한 과학적 사례들은 과학이 토론의 역사임을 보여준다. 이런 이유로 이 책은 사회생물학이나 진화론 논쟁의 전체적인 지도를 그리는데 큰 도움이 된다. <다윈의 식탁>이 이런 가이드 북으로 훌륭한 점은 토론에 등장하는 학자들이 쓴 저작들을 본문은 물론이고 책 부록에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가상 토론에 등장하는 학자들은 편의상 도킨스-굴드팀으로 나누었지만 사실 각자의 영역에서 서로 보완적인 존재들이다. 같은 편에 있는 굴드와 르원틴도 어떤 면에서는 서로 의견이 같지만 또 서로 이견을 보이는 부분들도 있다. 책 부록에는 본문에서 언급한 5가지 주제별로 향후 더 읽어볼만한 책들을 가지런히 정리해 놓았다. 저자는 그렇게 하고도 아쉬웠는지 <만들어진 신>으로 이슈가 된 도킨스의 '반종교' 의 논리를 정리한다. 물론 이어서 굴드의 도킨스 비판도 이어진다.  

물론 현재 진화생물학에서 주류는 도킨스이다. 도킨스의 '유전자시각론'은 혁명적인 평가를 받는다. 물론 도킨스만의 독자이론은 아님을 말한다. 저자 역시 D팀과 G팀 사이에서 최대한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긴 하지만 굴드 쪽 골대 뒤에 서있다.(도킨스팀의 골장면을 보고 싶어한다는 뜻이다.)도킨스만을 위해 그의 3대 저작 <이기적 유전자>,<확장된 표현형>,<눈먼 시계공>을 따로 정리한다. (주를 통해서 굴드의 저작도 다루고 싶었지만 누락시켜서 아쉽다는 유감을 뜻을 전한다.그런다고 모를줄 알고..^^) 

이 책에 토론 내용들을 하나 하나 언급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대신 이 책은 사회생물학이나 진화론 논쟁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한번 빠져 볼 용기를 줄 것이다. 과학논쟁은 분과학문의 영역을 벗어나서 전 사회의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이것을 보고 '과학이 역시 최고야' 라고 할 필요는 없다. 과학자들은 어떤 최종심급을 찾아다니는게 일이고 본연의 임무이지만 그런 최종심급이 -유전학의 용어를 빌자면- 모든 표현형과 그 관계들을 이해하거나 즐기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도킨스의 유전자환원주의도 유전자 표현형의 어느정도의 일관성 관계만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지 유전자가 무슨 의도를 갖는다거나 특정 표현형을 직접 양산해낸다거나 하는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윈의 식탁>의 논쟁에 대해서 나는 결국 '절충주의적' 입장을 취할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이기적 유전자' 논쟁같은 것에서는 도킨스의 이론이 더 매력적이다. 반면 '신'에 대한 접근 방식은 '굴드'의 주장이 평소 내 지론과 같다. 굴드는 '신'을 믿는 이들의 영역 자체를 따로 놓아두는 방식을 취한다. 도킨스는 과학자로서 미신을 방치하는 옳지 못한 퇴보라고 말한다.(내게 종교는 그냥 믿음의 영역일 뿐이다. 지적 설계론 같이 종교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고 그에 대한 과학적 반론을 제기하는 것도-사명감을 가진 과학자로서 가능한 일이나- 내게는 피곤해보이는 일이다.) 9.11을 두고 '종교적 근본주의' 때문이라고만 보는 방식이 놓치게 되는 것들에 대해서 도킨스의 입장에 의문을 제기할 수 밖에 없다. 기본적으로 나는 인류가 다른 종이 되기 이전까지 '종교적 근본주의' 없어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행여 장구한 진화의 시간을 거쳐 그런 다른 종이 되었다면 그것은 더이상 '인류'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을 것 같다. 그렇지만 종교 전반에 대한 도킨스의 생각에는 별 거부감이 없다. 어린 시절에 가정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종교관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특히 그렇다. 언젠가 그런 종교관의 주입을 '폭력'이라고 쓴 글을 본 적이 있다. 나는 그래서 '모태신앙'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게 내게 어떻게 들리는지 알아?' 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을 때도 많았다. '점진론'과 '단속평형설' 같은 논쟁은 '다윈의 재해석'을 통해 충분히 해소될 수 있는 대목이다. 인문학에서도 사실 이런 논쟁이 있어왔다. 인문학에서는 '사건'이란 개념으로 어떤 불연속성을 설명한다.(이는 물론 시간적 개념으로 진화의 시간에 비하면 정말 찰나의 것이다.) 9.11 같은 것들은 세계 역사에 있어서 어떤 '사건'의 개념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미국 대륙 한 복판으로폭탄테러 비행기가 날아들었으니 말이다. 굴드가 단속평행설을 주장하기 위해 썻던 소행성과의 충돌처럼 쌍둥이 빌딩에의 충돌은 미국민들에게 과거와는 심리적으로 다른 삶의 양상을 요구했다. 생물학이라면 '진화'라고 해야 마땅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후 벌어진 부시의 도를 넘어서는 일방외교의 강경정책은 진화의 방향에 대해 다른 적응을 요구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저런 진화론 관련 이야기가 오고갔다. 그런데 창조론은 어디갔는가 궁금할 수도 있겠다. 창조론, 지적 설계론같은 것은 <다윈의 식탁>에선 크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지적 설계론'에 대해서는 책 후반부에 '진화론과 지적설계론'의 미국 내에서의 논쟁에 대해 한 편의 글이 있다.(도킨스와 같은 무신론적인 진화론자들이 왜 가만히 연구실이나 강의실에 있지 못하고 나서게 되는지에 대해서 이해가 간다. 한국의 뉴라이트와 비슷한 방식으로 지적설계론이 담론 공간에 비집고 들어온다.) 저자는 생전에 굴드와 도킨스가 숙적이었지만 서로 동의하는 것이 딱 두가지가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는 진화는 사실이라는 것, 그리고 하나는 자신들이 모두 최고의 글쟁이였다는 것이다. ^^ 나는 원론적 차원에서 무신론자이며 유물론자이다. 다윈 역시 한때 유물론자로 오해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도킨스가 '종교는 바이러스다' 라고 말했듯이 나는 오래 전부터-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종교는 인간의 정신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문학이나 예술적 차원에서 나는 범신론자에 가깝기도 하다. 내 생각에 인간 사회에서 인간은 결코 신을 쫓아낼 수 없다. 어떻게도 해도 신은 귀환한다. 신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인간은 애초부터 비이성적 존재이며(완전한 이성적 존재는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환상의 영역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과학 이성이 신의 공간을 쫓아내는 순간 과학 이성은 또 신의 자리를 차지한 일종의 '대리신'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도킨스가 열심히 무신론자로 뛰는 것은 아마 서구 사회 일반에 강력하게 존재하고 있는 종교 중심성 때문일 것이다. 한국 역시 특정 종교의 영향력이 만만치 않지만 한국은 묘한 역학적 균형을 이루어내었다. 한국에서는 교과서에 기독교의 창조론을 싣자고 주장한다면 불교계나 유림등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내 생각에 한국은 미국이나 영국보다 훨씬 덜 종교적인 나라다. 덜 특정종교적이라고 해야 맞을 지도 모르겠다.(=제갈량과 몽테스키외가 삼분지계의 함의를 인류에 건넨건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그들은 이것들이 나중에 한 통속이 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할 수 없었겠지만) 대통령 취임식만 봐도 알 수 있다. 현 대통령도 한국을 봉헌하고 싶은 마음이야 있겠으나 취임식에서 다함께 손모아 기도할 수는 없다. (그래서 한국이 하나님의 축복을 더 많이 받지 못한다는 뚜쟁이 소리를 하는 인간들과는 아예 상종하지 않는게 내 실천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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