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가 끝이다. 

네 입가에는 아기 동백꽃같은 혈흔이 묻어있다. 다시 울리지 않을 가르릉거리는 너의 성대. 네 입주면에 피어난 꽃잎도 흔들리지 않는다. 살아 고난스러웠던 너의 아가리는 끝나는 곳까지 너를 편안하게 두지 않는다. 너의 마지막 낙인인양. 고단함은 죽음 이후에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평생 너를 따라다녔던 얼룩에 하나가 더해졌다. 

먹이를 쫓아 비좁은 담장 사이를 헤치던 너, 쓰레기통 속에 웅크려 죽은 애인을 멀찍이 바라보던 너, 아기처럼 외로왔을 너.   

...쓰레기통에서 죽어간 네 여인처럼 너 역시.

해가 뜨고 어젯밤 숙취가 가시지 않은 이의 욕지거리가 너를 모욕적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네 운명이 마지막으로 보시할 이글거리는 붉은 아가리가  너의 육신을 탐한다. 

이번주의 관심도서는 별로 없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동하는 공포>가 가장 눈에 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꽤나 노령의 사회학자이다. 비투비 시리즈물 중 바우만이 쓴 <자유>를 예전에 읽었다. 최근에 what's up시리즈의 네번째 도서로 그의 <쓰레기가 되는 삶>이 출간되었다. what's up시리즈는 모두 볼 요량이다. 바디우의 책을 즐겁게 보았고, 지젝의 책도 대략 넘겨봤다. 아감벤의 것은 벼루고 있다가 최근 무화과 나무님의 리뷰에 다시금 자극을 받았다. 

'공포' 는 상당히 흥미가 가는 주제이다.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본원인 공포는 역시 '죽음'이다. 바우만의 첫번째 챕터가 '죽음의 공포'이기도 하다. 진화종교학에서 '종교 부산물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죽음의 불확실성'등을 감소시켜주는 요소로 종교가 발생했고 진화했다고 말한다. 앙리 르페브르 같은 이들은 대중사회를 분석하면서 '죽음'의 공포로 부터 도피하는 '일상의 반복성'에 주의를 기울인다. 쉽게 말하면 '반복된 일상' 이라는 것이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불안감'을 회피시켜준다는 것이다. 예전에 본 글이라서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바우만의 <유동하는 공포>에 대한 출판사측의 요약은 이렇다. 

'유동하는 공포’란 유동적 근대(liquid modern age)의 특징인 ‘언제 어디에서나 출렁이는 위험’ 앞에서 우리가 겪는 불확실한 불안에 붙인 이름이며, 그 위협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우리의 인식 불능성에 붙인 이름이며, 그것에 대항해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 판단할 수 없는 우리의 무력함에 붙인 이름이다.  

'공포'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같다만 '근대'라는 공간의 불확실성이 그런 '공포'의 일상적 내재화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책 서문에 보면 바우만은 1차적인 생물학적 공포를 떠난 2차적 공포, 즉 '파생적 공포'에 대해 이야기한다.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생체정치'의 개념을 도출하면서 '훈육과 통제'에 대해 언급한다. 그리고 이 논의를 확장하여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는 '전쟁'이라는 예외상황이 '생체정치' (삶정치)를 강제하는 방식에 대하여 논한다. 네그리의 <다중>과 아감벤의 <호모사케르>에도 이런 논의들의 진화가 들어있다. 결국 우리는 이런 최종적 논의의 인간적 소실점 안에서 '공포'라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그리고 모든 '공포'의 원칙은 실제보다 과장되거나 '담론'의 공포를 통해 먼저 작용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비판한 사회학자들에게 자본이 공포를 통해 작동한다는 것은 아주 오래된 격언이다. 그리고 그런 공포는 현실적으로 대중들과 접촉하기에 단지 이데올로기의 허상만은 아닌 실체이기도 하다. 

'파생적 공포'란 계속적으로 마음을 구획하는 프레임으로서, 자신이 위험에 빠지기 쉽다고 느끼는 감각이라고 보면된다. 말하자면 불안의 감각, 취약함의 감각이랄까. 

세계 경기의 침체 속에 실업이 일상화되면서 이런 '파생적 공포'에 가장 허약하게 노출되는 것은 바로 중산층이다.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는 한 순간의 낙마가 장기간 회복불가능 상태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중산층이 상류층에 편입하기란 요원하며 하류층이 된다는 것은 찰나다. 바우만의 '파생적 공포'는 현재 한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촉발되는 공포상황에 정합적이다. 

그러나 바우만은 이것이 끝이 아니라고 말한다. 항존하는 공포, 예고하지 않는 공포, 미지의 공포, 즉 '파국적인 공포'를 언급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공포'로 인해 노이로제 상태에 빠져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는 않다. 병원에 있는 사람을 제외하곤 어느 누구도 늘상 '공포 속'에서 살지 않기때문이다. 

다른 모든 인간의 공생이 그렇듯, 우리의 유동적 근대사회 역시 삶을 공포와 더불어 살만하게 만들기 위한 고안물이다. 

바우만은 공포를 '묵음화방식'하는-개인이나 구조를 통해- '지연시키기'의 방식들을 이야기한다. 리스크 부담 덜기, 신용카드와 소비주의 고찰들의 방식을 통해서말이다. 

대략 여기까지가 서론의 내용이다. 서론만 봐서는 일반인들도 쉽게 읽을 수 있을 에세이로 보인다.(피천득의 에세이와 다른 서구식 개념의 에세이말이다.) 

이번 주의 관심도서는 아니지만 <다윈의 식탁>에 언급된 책들이다. 유명한 도킨스와 굴드의 책은 제외했다. 도킨스와 굴드의 책도 몇 권이 쌓여있어서 이것들을 다 읽을리는 없지만 언제 관심이 닿으면 볼만도 하다. 나름 이 바닥에서 유명한 책들이란다. <사회생물학 논쟁>은 <다윈의 식탁>에 나오지 않는다. 부케비츠는 '절충주의'입장에서 정리한 책이다.  도서관에서 대충 넘겨봤다. 그의 최근 책이 <진화는 진화한다>이다.<빈서판>은 마립간님의 강력추천도서이다. 분량 압박이 좀 있다. 노이에자이트님과 예전이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본바탕'이란 말을 했다.<빈 서판>은 '빈 서판은 없다'라는 책이다. <왜 다윈이 중요한가?>는 창조론이나 지적 설계론이 '과학을 빙자한 사기'라는 것을 말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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