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의 식탁 - 진화론의 후예들이 펼치는 생생한 지성의 만찬
장대익 지음 / 김영사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리뷰를 쓰기 바로 조금 전에 2009년 첫번째 피셔스케이팅 대회 쇼트게임이 끝났다. 김연아는 세계 신기록으로 소띠 해 첫번째 경기를 멋지게 끝마쳤다. 차범근의 시대부터 이어진 스포츠 국민영웅의 자리는 현재 김연아의 것이다. 국민 여동생은 더 이상 문근영이 아니며 국민 요정 이효리도 불안불안하다. 이효리가 '이십대에 대한 청구서'를 정리하가 위해 시골가서 몸빼입고 마지막 불꽃을 지피는 동안 김연아는 새하얀 빙상장 위에서 한 마리 새처럼 하늘거리며 중력을 벗어난다. 

오늘 쇼트게임에서는 헤맸지만 김연아의 라이벌 아사다 마오의 프리게임도 기대된다.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 한 동안 이 라이벌전은 커다란 즐거움을 줄 것이다. 프로 스포츠가 성공하려면 이런 라이벌 구도가 명확해야 한다. <축구의 사회학>에 보면 축구가 발생한 후 초창기부터 이런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런 구도는 흥행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 한 도시내에 라이벌 구도를 만들어라' 라는 성공 원칙이 있다. 축구에서는 이런 걸 '더비'라고 말한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맨체스터 시티의 '맨체스터더비', 인테르밀란과 AC밀란의 '밀란더비', 리버풀과 에버튼의 '머지사이드 더비', 도시는 다르지만 오래된 숙적같은 FC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엘클라시코 더비' 등등...  

<다윈의 식탁>에서 'MBC 백분토론' 보다 훨씬 영양가 있고 또 열띤 진화론 토론을 펼치는 팀들의 대결을 '에볼루션 더비'라고 하면 어떨까 싶다. 양 팀은 D팀과 G팀으로 선수 구성이 조금씩 바뀐다. 하지만 양 팀의 주장은 바뀌지 않는다. 진화론의 김연아-아사다 마오다. 바로 <이기적 유전자>의 도킨스와 <풀하우스>의 굴드가 그들이다. 약간 다른 점이 있다면 김연아-아사다 마오는 서로 험한 말을 하는 사이는 아니지만 도킨스-굴드는 때로 얼굴을 붉히고 했다. 

<다윈의 식탁>은 진화론 내부 논쟁을 둘러싼 팩션이다. 다윈 이후 가장 유명한 진화생물학자라는 윌리엄 해밀턴의 장례식에 세계 유명 진화론자들이 모인다면 어떨까 라는 상상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이들은 다윈 이후 진화론을 다시 살렸다는 '근대적 종합' 이후 진화론의 4가지 거대한 쟁점들에 대해 서로 머리채 쥐어잡는 토론에 돌입한다. 그 첫번째 주제는 '자연선택의 힘'에 대한 것이다.즉 다윈의 자연선택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 것이며 무엇이 적응이고 무엇이 부산물인가 하는 논쟁들이다. 두번째 주제는 협동의 진화이다. 진화가 개인 차원이냐 집단 차원이냐의 논쟁부터 시작해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론'. '다수준 선택론' 등이 토론된다. 셋째 날은 '유전자 란 무엇인가 로 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학자마다 유전자의 이미를 다르게 사용하고 있고 이해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유전자의 영향력에 대한 문제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이보디보'라는 진화발생학의 유전자론도 도킨스의 이론에 대한 도전으로 제기된다. 네번째 날은 '점진론'과 '단속평형설' 사이의 논쟁이다. 연속성과 불연속성 문제에 있어서 쿤-포퍼 논쟁이나 푸코의 에피스테메의 단절에 대한 비판과 반비판 같은 것과 유사하다. 굴드의 넓이뛰기 비유가 등장하고 도킨스팀의 '굴드씨 오바하지 마세요. 다윈의 점진론은 그렇게 좁은 개념이 아니거든요' 하는 비판이 나온다.  다섯번째 주제는 '진화와 진보'의 관계를 말한다. 도킨스는 진화에 어느 소실점이 있다는 쪽이고 굴드는 그 유명한 말-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이다- 라는 말로 이를 비판한다. 

<다윈의 식탁>의 최고의 장점은 최강의 진화론자들 사이의 가상토론을 통해 진화론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쟁점과 논쟁, 비판과 반비판의 역사를 알기 쉽게 보여주고 있다. 토론사이를 오고 가는 비유들과 어떤 이론을 비판하기 위한 과학적 사례들은 과학이 토론의 역사임을 보여준다. 이런 이유로 이 책은 사회생물학이나 진화론 논쟁의 전체적인 지도를 그리는데 큰 도움이 된다. <다윈의 식탁>이 이런 가이드 북으로 훌륭한 점은 토론에 등장하는 학자들이 쓴 저작들을 본문은 물론이고 책 부록에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가상 토론에 등장하는 학자들은 편의상 도킨스-굴드팀으로 나누었지만 사실 각자의 영역에서 서로 보완적인 존재들이다. 같은 편에 있는 굴드와 르원틴도 어떤 면에서는 서로 의견이 같지만 또 서로 이견을 보이는 부분들도 있다. 책 부록에는 본문에서 언급한 5가지 주제별로 향후 더 읽어볼만한 책들을 가지런히 정리해 놓았다. 저자는 그렇게 하고도 아쉬웠는지 <만들어진 신>으로 이슈가 된 도킨스의 '반종교' 의 논리를 정리한다. 물론 이어서 굴드의 도킨스 비판도 이어진다.  

물론 현재 진화생물학에서 주류는 도킨스이다. 도킨스의 '유전자시각론'은 혁명적인 평가를 받는다. 물론 도킨스만의 독자이론은 아님을 말한다. 저자 역시 D팀과 G팀 사이에서 최대한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긴 하지만 굴드 쪽 골대 뒤에 서있다.(도킨스팀의 골장면을 보고 싶어한다는 뜻이다.)도킨스만을 위해 그의 3대 저작 <이기적 유전자>,<확장된 표현형>,<눈먼 시계공>을 따로 정리한다. (주를 통해서 굴드의 저작도 다루고 싶었지만 누락시켜서 아쉽다는 유감을 뜻을 전한다.그런다고 모를줄 알고..^^) 

이 책에 토론 내용들을 하나 하나 언급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대신 이 책은 사회생물학이나 진화론 논쟁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한번 빠져 볼 용기를 줄 것이다. 과학논쟁은 분과학문의 영역을 벗어나서 전 사회의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이것을 보고 '과학이 역시 최고야' 라고 할 필요는 없다. 과학자들은 어떤 최종심급을 찾아다니는게 일이고 본연의 임무이지만 그런 최종심급이 -유전학의 용어를 빌자면- 모든 표현형과 그 관계들을 이해하거나 즐기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도킨스의 유전자환원주의도 유전자 표현형의 어느정도의 일관성 관계만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지 유전자가 무슨 의도를 갖는다거나 특정 표현형을 직접 양산해낸다거나 하는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윈의 식탁>의 논쟁에 대해서 나는 결국 '절충주의적' 입장을 취할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이기적 유전자' 논쟁같은 것에서는 도킨스의 이론이 더 매력적이다. 반면 '신'에 대한 접근 방식은 '굴드'의 주장이 평소 내 지론과 같다. 굴드는 '신'을 믿는 이들의 영역 자체를 따로 놓아두는 방식을 취한다. 도킨스는 과학자로서 미신을 방치하는 옳지 못한 퇴보라고 말한다.(내게 종교는 그냥 믿음의 영역일 뿐이다. 지적 설계론 같이 종교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고 그에 대한 과학적 반론을 제기하는 것도-사명감을 가진 과학자로서 가능한 일이나- 내게는 피곤해보이는 일이다.) 9.11을 두고 '종교적 근본주의' 때문이라고만 보는 방식이 놓치게 되는 것들에 대해서 도킨스의 입장에 의문을 제기할 수 밖에 없다. 기본적으로 나는 인류가 다른 종이 되기 이전까지 '종교적 근본주의' 없어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행여 장구한 진화의 시간을 거쳐 그런 다른 종이 되었다면 그것은 더이상 '인류'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을 것 같다. 그렇지만 종교 전반에 대한 도킨스의 생각에는 별 거부감이 없다. 어린 시절에 가정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종교관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특히 그렇다. 언젠가 그런 종교관의 주입을 '폭력'이라고 쓴 글을 본 적이 있다. 나는 그래서 '모태신앙'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게 내게 어떻게 들리는지 알아?' 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을 때도 많았다. '점진론'과 '단속평형설' 같은 논쟁은 '다윈의 재해석'을 통해 충분히 해소될 수 있는 대목이다. 인문학에서도 사실 이런 논쟁이 있어왔다. 인문학에서는 '사건'이란 개념으로 어떤 불연속성을 설명한다.(이는 물론 시간적 개념으로 진화의 시간에 비하면 정말 찰나의 것이다.) 9.11 같은 것들은 세계 역사에 있어서 어떤 '사건'의 개념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미국 대륙 한 복판으로폭탄테러 비행기가 날아들었으니 말이다. 굴드가 단속평행설을 주장하기 위해 썻던 소행성과의 충돌처럼 쌍둥이 빌딩에의 충돌은 미국민들에게 과거와는 심리적으로 다른 삶의 양상을 요구했다. 생물학이라면 '진화'라고 해야 마땅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후 벌어진 부시의 도를 넘어서는 일방외교의 강경정책은 진화의 방향에 대해 다른 적응을 요구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저런 진화론 관련 이야기가 오고갔다. 그런데 창조론은 어디갔는가 궁금할 수도 있겠다. 창조론, 지적 설계론같은 것은 <다윈의 식탁>에선 크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지적 설계론'에 대해서는 책 후반부에 '진화론과 지적설계론'의 미국 내에서의 논쟁에 대해 한 편의 글이 있다.(도킨스와 같은 무신론적인 진화론자들이 왜 가만히 연구실이나 강의실에 있지 못하고 나서게 되는지에 대해서 이해가 간다. 한국의 뉴라이트와 비슷한 방식으로 지적설계론이 담론 공간에 비집고 들어온다.) 저자는 생전에 굴드와 도킨스가 숙적이었지만 서로 동의하는 것이 딱 두가지가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는 진화는 사실이라는 것, 그리고 하나는 자신들이 모두 최고의 글쟁이였다는 것이다. ^^ 나는 원론적 차원에서 무신론자이며 유물론자이다. 다윈 역시 한때 유물론자로 오해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도킨스가 '종교는 바이러스다' 라고 말했듯이 나는 오래 전부터-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종교는 인간의 정신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문학이나 예술적 차원에서 나는 범신론자에 가깝기도 하다. 내 생각에 인간 사회에서 인간은 결코 신을 쫓아낼 수 없다. 어떻게도 해도 신은 귀환한다. 신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인간은 애초부터 비이성적 존재이며(완전한 이성적 존재는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환상의 영역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과학 이성이 신의 공간을 쫓아내는 순간 과학 이성은 또 신의 자리를 차지한 일종의 '대리신'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도킨스가 열심히 무신론자로 뛰는 것은 아마 서구 사회 일반에 강력하게 존재하고 있는 종교 중심성 때문일 것이다. 한국 역시 특정 종교의 영향력이 만만치 않지만 한국은 묘한 역학적 균형을 이루어내었다. 한국에서는 교과서에 기독교의 창조론을 싣자고 주장한다면 불교계나 유림등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내 생각에 한국은 미국이나 영국보다 훨씬 덜 종교적인 나라다. 덜 특정종교적이라고 해야 맞을 지도 모르겠다.(=제갈량과 몽테스키외가 삼분지계의 함의를 인류에 건넨건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그들은 이것들이 나중에 한 통속이 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할 수 없었겠지만) 대통령 취임식만 봐도 알 수 있다. 현 대통령도 한국을 봉헌하고 싶은 마음이야 있겠으나 취임식에서 다함께 손모아 기도할 수는 없다. (그래서 한국이 하나님의 축복을 더 많이 받지 못한다는 뚜쟁이 소리를 하는 인간들과는 아예 상종하지 않는게 내 실천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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