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 악법도 법인가 현대의 지성 84
강정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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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소크라테스가 남겼다는 유명한 말, "악법도 법이다." 의 딜레마는 사실 오래전에 해소되었다.  최소한 감각적으로는 그렇다. "악법은 법이 아니다. 그리고 나쁜 법은 고치면 된다." 대학 1학년 때부터 불법 시위에 대한 주요 신문의 논설에 수시로 인용되던 문구가 소크라테스가 남겼다는 저 말이다. 나는 '법대로 하자' 라는 말에 대해서도 좀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그 말은 '법의 구성적 성격' 을 외면하고 현재 있는 실정법을 최고의 가치로 놓는 견해에 이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말의 함의에는 '우리사회에서는 법대로 되지 않는게 정상이다' 라는 인식론이 깔려있다.다들 말은 안하지만 법에 대해 큰 기대를 걸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법치주의'의 실종이라는 비이성적 상황이 정상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법은 공동선을 구현하고 구성원들의 이해를 조절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하지만 법은 일종의 젤리같은 것이다.어떤 완전한 형태를 갖고 있지만 또한 유동적이다. 내게는 '법실증주의'보다는 '법구성론'이 훨씬 매력적인 주제이다. 이 말이 법규정을 임의적으로 해석하고 마음대로 공동 규약을 위반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학자는 한국사회에서 실종된 '법치주의'에 대한 소시민의 반동이 작은 형태의 위반을 일상화한다고 말한다. 즉 높은 놈들은 몇 백억원을 해먹고도 잠시 카메라 앞에 포즈 취하고 풀려나는 마당이니 내가 좀 위반한다고 뭐 그리 대수인가 하는 식이다. 앞서 말한 '법치주의의 실종' 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가치인 '법치주의'를 완성하고 또 그 너머에서 '법의 구성적 과정'과 법의 사각 지대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강정인의 <소크라테스,악법도 법인가?> 중에서 소크라테스와 관련된 논문은 권창은 교수의 논문과 함께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에 실린 듯 하다.(이 책을 살펴보지 않아서 정확하진 않다.) 강정인의 이 책은 '소크라테스'문제 만을 다루고 있진 않다. 그 뒤에는 '시민불복종'의 문제, '진보와 보수'의 문제, 정치 불참의 의미,북한에 대한 내재적 접근과 외재적 접근의 장단점 등 정치학계에서 논쟁이 되고 있는 여러 주제들을 거론한다. 책의 제목이 <소크라테스, 악법도 법인가?>여서 이 책이 온전히 소크라테스에게만 바쳐진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일단 첫 주제는 '소크라테스'다. 소크라테스의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디쯤에 '악법도 법이다' 라는 문구가 나오는지 찾아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결론은 하나다. 액면 그래도 '악법도 법이다' 라는 문장은 소크라테스의 책 어느 한 구석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가 자기의 벌어진 입으로 '악법도 법이거든' 이라고 말한 적은 단 한번도 없다는 거다.(행여 그 문장을 그대로 찾아낸다면 서양철학사가들이 깜짝 놀랄만한 세계적인 발견이 될 것이다. 그러니 유명해지고 싶으면 어서 찾아보자)  이 문구는 소크라테스의 격언이라고 해서 교과서는 물론이고 인터넷에서도 유령처럼 배회한다. 서양철학사가 김주일 교수의 말에 의하면 이것은 번역 과정의 오류에서부터 기인한다. '악법=법'이라는 번역을 국내에 통용 시킨 것은 일본의 법철학자 오다카 도모오다. 1937년에 개정한 <법철학>에서 소크라테스를 전거에 두면서 '악법도 법이기 때문에 응히 지켜야하며..' 라고 쓰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한번 굳어진 것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더우기 그것이 지배 이데올로그들로 활용하기 좋다면 말이다. 소크라테스의 후광을 뒤에 업고 싶은 정당성 없는 정권들은 반정부세력들의 실정법 위반에 대한 대중 이데올로그로 이 말을 적극 사용한다. 물론 신민 만들기에 앞장서는 국정 교과서가 소년 소녀들에게 이 말을 유포한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자...일단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은 소크라테스가 한 말은 아니다는 건 정리되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은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똑같이 그런 말을 하진 않았어도 그런 해석이 가능한 말을 한 건 아닌가요? " 빙고...그렇다. 좋은 질문이다. 이러면 이제 이야기가 좀 더 길어진다. 강정인 교수는 <소크라테스,악법도 법인가?>에서 이 좋은 질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들려준다. 중요한 것은 '악법도 법이다'는 식의 극단적 법실증주의는 전체 맥락에 대한 여러 해석 중 한가지의 해석일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소크라테스의 '금과옥조' 라고 믿는 격언은 정언명제가 아니라 소크라테스라는 텍스트의 전체적 맥락에서 논쟁이 분분한 주제라는 것이다.  

모순은 소크라테스의 저서(물론 플라톤이 썻다) <변명>과 <크리톤>에서 도출된다. 이 책을 읽어본 사람이면 누구나 소크라테스의 모순에 대해 쉽게 눈치챌 수 있다. <변명>에서 아테네인들을 꾸짖고,철학 포기 요구를 거부하고, 불복종의 가치를 내뱉던 양반이 <크리톤>에서는 인간적으로 도망 한 번 가주시오..라고 부탁하는 친구 크리톤의 말을 나무라면서 인격화된 '법률'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법이행'의 중요성을 말씀하신다. 이어 꿔온 닭을 갚아주라는 신에 대한 채무이행을 부탁하시고 독배 원샷을 하신다. 뭥미? 뭐 어쩌라는 것이여? 단도직입적으로 묻것소? 법을 따르라는 말이요, 법에 개겨보라는 말이여?   

내가 <변명>과 <크리톤>의 모순을 해결한 방식은-물론 이것도 여러 가능성 있는 해석 중 하나이다- 강정인이 요약한 바에 따르면 절충론 중에서 그린버그와 아렌트의 해석방식이다. 소제목으로 보면 이해가 쉽다. '변명과 크리톤간의 모순을 일응 인정하되' '소크라테스의 자신에 대한 약속을 중심으로 일관되게 해석하고자 하는 입장'이다. 즉 소크라테스는 법률을 지키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철학의 삶을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철학적 삶이 선한 삶이라는 점을 아테네 시민들은 물론이고 자신에게 입증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철학을 위해 죽는 길을 택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두려워했을까? 그의 저서를 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는 영혼의 불멸을 믿었고 죽음 이후에 현인들과 저승에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만큼 큰 즐거움이 없을거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좀 심심하고 너무 상식적이지 않은가? 

재미있는 해석들이 몇 가지 있는데 물론 그중에는 음모론에 해당하는 것들도 있다.그로토같은 이들의 주장인데, 후학인 플라톤이 아테네인들로 부터 폐기처분되어 버릴 위기에 놓은 소크라테스의 신원을 복원하는 차원에서 <크리톤>의 방향을 잡았다는 것이다.즉 <변명>과의 모순은 그런 집필 의도때문에 발생하는 차원이라는 것이다. 학계에서는 이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모르겠으나 에피소드정도로 읽히지 않을까 싶다. 콩클턴의 해석은 수용자의 입장에 맞춰 이야기해온 소크라테스의 방법론을 토대로 <크리톤>을 '크리톤의 문제' 로 이야기한다. 뭔 말인고 하니. 소크라테스의 습성은 대화수준의 상대에 맞춰 이야기를 끌어간다. 크리톤은 소크라테스급의 학자는 아니며 그저 스폰서나 다중지성정도에 해당한다. 콩클턴은 '고차원적 무법'과 '저차원적 무법'을 구분하여 <크리톤>이 '저차원적 무법'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즉 법철학의 근본 이념까지 가지 않고 법의 준수여부문제에 대해 그 필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콩글턴의 경우 소크라테스의 고차원적 법철학은 <크리톤>이나 <변명>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정치가>에 소개된다고 말한다.(어찌되었거나 주인공은 모두 소크라테스고 저자는 플라톤이니)  그 외에도 '부정의를 저지르는 것'과 '부정의를 행하는 것'을  나누고 '악을 악으로 행하지 말라'는 문구를 통해 해석하는 알렌의 방식, 정의와 법률을 구분하여 불복종의 전거를 구하는 맥러플린, 정치와 철학의 간극문제로 해석하여 이의 해소를 도모하는 유벤의 방식등이 요약설명된다. 

이어 등장하는 존롤즈의 <시민불복종의 정당화>문제는 따로 길게 언급하지 않겠다. 존 롤즈가 시민불복종의 문제를 지극히 자유민주주의의 개념틀 안으로 축소시킨다는 지적은 해야겠다. 또한 시민불복종을 비폭력의 문제로 협애와 시키면서 폭력과 시민불복종이 양립할 수 없다고 본 점도 '폭력/비폭력'문제에 대한 지극히 좁은 스펙트럼임을 지적한다.물론 존 롤즈가 시민불복종의 가치에 대해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시민불복종이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내실화하는데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또한 시민불복종이 발생하는 귀책 사유는 궁극적으로 자신들의 권위와 권력을 남용하는 자들에게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 

2부에 해당하는 '보수와 진보'의 문제는 사실 조금 시의가 지난 논의이긴 하다. 그렇지만 지금도 심심치 않게 '보수와 진보'에 대한 자기정초를 위한 질문이 나오고 있다는 점을 본다면 유효성은 여전히 남아있다고 본다. 재미있는 개념이 등장하는데 강정인은 '보수와 진보'의 개념에서 '진보'는 통칭 보수세력이든 진보세력이든 모두 가지고 있는 점이라고 본다. 그래서 그는 '보수'의 대립항으로 통칭되는 '진보'보다 조금 더 넓은 개념의 '혁신'이란 용어를 꺼낸다. 그렇다면 '진보/혁신'의 차이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가능하다. 몇 가지 예들이 등장하는데 일단 '혁신'을 '진보'보다 느슨하고 넓은 개념으로 설정한다. 차하순의 말을 재인용하면 이렇다. '진보는 역사의 진전 방향에 대한 일정한 인식은 물론, 역사가 어떠한 방향으로 진전되어야 한다는 가치판단을 전제한다.' 일종의 '목적론적 세계관'을 드러내는 것 같다. 아무래도 글이 집필된 시기가 90년대 초반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현재적인 의미의 '진보' 개념은 이보다 좀 더 다층적인게 아닌가 싶다. 강정인은 현상 유지 개념을 통해 '진보/혁신'을 설명한다. 단순히 현상 유지와 현상 타파의 축 위에서 사회,정치적 이념이나 운동을 구분하는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보수 대 혁신'의 구별이 정당하고, 혁신적인 이념이나 운동의 일부만이 진보적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다.'  요즘 말로 하면 '반이명박' 전선의 깃발 아래에 있는 모든 세력이 스스로 진보라고 말하지만 강정인의 표현을 빌자면 '혁신'이라는 것이 오히려 적당할 듯 하다. 강정인은 이런 틀 안에서 '역사 안에서의 구원'을 찾는 대신에 '역사로부터의 구원'을 찾는 진보적 행위 역시 진보로 보기 어렵다고 말한다. 이 말은 개인적으로 지식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포스트 담론에 대해 성찰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처럼 들린다. 이 장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버크와 보수주의 정치철학'은 정말 보수주의자들이 읽어보아야할 내용이다. 실제로 버크의 주장을 들어보면 우리나라의 양심적 세력들은 대개가 '보수주의자'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알라딘에 가장 많은 축을 구성하는 역시 진보라고 이름붙이든 혁신이라고 이름붙이던 나는 '양심적 보수세력'이라고 본다. 물론 버크의 주장에서 시대한계적인 요인들은 제외하고 봐야 한다. 귀족제의 옹호같은 것을 가지고 현재적 의미의 '버크 읽기'에서 욕하는 건 별로 의미가 없다. 버크는 계몽주의적 진보에 대해 부정하지 않았다. 또한 변화와 개혁에 대해서도 무조건 거부하지도 않았다. 사회가 잘 보존되기 위해서는 변화와 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방식에 있어서 버크는 온건한 길,체제 내적인 길을 선호했다. 프랑스 혁명의 혼동상태를 직접 경험한 그로서는 어찌보면 나올수 있을 법한 주장이다. 이런 말을 들어보자. "개혁자는 국가의 결함에 접근함에 있어서 마치 '아버지의 상처를 치료하는 심정"으로 곧 '경건한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마치 사서삼경에 나오는 말 같지 않은가. 문제는 주체의 위치에 있다. 그 지점에서 흔히 말하는 '좌파'와의 차이가 발생한다. 하지만 다분히 식상한 도덕적 담론처럼 보이는 이 말은 실천영역에서 좌파나 우파를 막론하고 모두 고개를 끄덕일만한 대목처럼 보인다. 

요약된 버크의 사상을 읽다보면 결국 한가지 답에 도달한다. "대한민국 정치판에는 진정한 의미의 보수주의자는 없다." 라는 것 말이다. 결국 우리 사회에 '보수주의자'라고 부르짖는 사람들은 대개가 '철학 없는 보수세력'일 가능성이 높다.흔히들 이런 사람들은 '수구'라고 말한다. 조금 세련된 옷을 입으면 '뉴라이트'가 된다. 정치학자 김홍명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보수주의는)자생적인 역사를 지닌 하나의 정치적 입장, 세계관이 아니라 주위 환경에 시각을 맞춘 막연한 기질 혹은 심적 태도의 성격으로 나타나고 있다. '철학없는' 이란 말을 길게 설명한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양심적 보수세력의 존재가 가끔 '좌빨'이니 '용공'이니라고 비난을 받는다. 이런 구도가 해체되고 '양심적 보수세력'이 자신의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날이 되어야 한국정치의 가능성은 열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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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아버지 1937~1974
조동환.조해준 지음 / 새만화책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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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가끔 거울을 볼 때 묘한 이물감이 든다. 거울 속에 '내'가 아닌 중년으로 향하고 있는 '전-중년'의 아저씨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 때마다 아랫배를 슬쩍 쓸어본다. 익숙해져 가는 부피감과 무게감.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물체가 담고 있는 가속도에 부딪힌 듯 가슴이 뻑뻑하다. 다시 고개를 들어 거울을 봐도 여전히 '그' 가 낯설다. 아무래도 최근 몇 년 사이에 많이 늙은 것 같다. 혼자서 거울 속에 비친 사내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도 많이 늙었구나. 흐흐" 미용실에 앉아 있는 30분이 귀찮아서 계속 기르고 있는 머리칼은 이제 은빛이 제법 많이 보인다. 지저분하게 구렛나루쪽으로 내려온 흰머리칼들을 빙빙 돌려본다. 아내는 빨리 안씻고 뭐하냐고 지청구다.  

그래 "씻어야지. 그리고 또 출근하고.."  어푸 어푸 어푸.... 

소년이 사라진 자리에는 아버지가 들어선다. 아무리 스스로 소년이라고 생각하고 싶어도 현실의 감각적 경험은 내게 '아버지'의 이름을 더 요구한다. 그래서 아버지가 된다는 건 좋은 일이면서도  슬픈, 모순적인 일이다. 내 머리칼이 하얗게 변하는 것 만큼 아이는 새로운 세계의 언어를 하나씩 배운다. 이제 아이와 함께 '대화'라는 것을 제법 길게 할 수 있다. 내가 요즘 제일 궁금한 것은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어떻게 어울려 생활하고 있을까 하는 것이다. 매일 저녁 퇴근하면 가장 먼저 아이에게 "오늘 어린이 집에서 뭐하고 놀았어?" 하고 묻는다. 아이는 가끔 길게 설명해줄 때도 있고 아닐때도 있다. 이미 아이의 세계에는 내가 침범하지 못하는 그의 세계가 생긴 거다.  

아이가 생겨서 가장 좋았던 점 중 하나는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진 시간들을 연역적으로 재구성해보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사진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 온전한 기억에 남아 있는 최초의 시간은 내다섯살 즈음이다. 수동펌프를 공동으로 사용하는 달셋집에서 아버지와 엄마와 살던 시간. 동생을 낳으러 엄마가 병원에 가고 할머니와 기다렸던 때가 아주 희미하게 기억난다. 그 이전의 시간은 내 기억 속에는 없다. 그건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시간이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나는 아이가 처음 걸었을 때 아버지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말 못하는 아이가 심하게 아팠을 때 어머니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생각해보게 된다. 사는 모습도 사람도 다르지만 세대를 넘나들며 공유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결국 나는 아이를 통해서 내 잊혀진 시간의 조각을 채워넣는다. 그 때마다 나는 왠지 내 삶이 어떤 형태로든 완전성을 갖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생각은 이제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부모들의 삶까지 이어진다. 그 분들이 20대였을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어떤 이야기들을 나누었을까? 어떤 고민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을까? 

<놀라운 아버지>는 그런 '아버지들' 의 지난 이야기다. 이 책의 주인공이자 아버지인 조동환 선생이 막내 아들인 화가 조해준의 도움을 받아 복원한 지난 시간의 이야기이다.(사회학자 조희연교수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일제 시대 징용간 아버지를 따라 북해도에 간 이야기, 그 곳에서 학교 생활, 아버지의 죽음, 부산에서 주경야독 하던 시절의 이야기, 교직 생활시의 에피소드, 그 외에 시골에서 살면서 친척이나 마을 사람들에게 들었더 이야기들이 한 컷의 만화 속에 꾸며진다. 그림 한 컷은 가끔 민화가 되기도 하고 사진이 되기도 한다. 투시도법을 이용하여 설계도가 될 때도 있고 영화의 스토리보드 그림판이 되기도 한다. 이 그림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아버지 세대들이 겪었던 삶의 한 부분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이 직면했던 역사의 소용돌이와 그것을 뚫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게된다. 일단 그들에 비해 평온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경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어떻게 저 고비들에서 쓰러지지 않고 살아내었는가 하는 점에서 말이다. 물론 그 시절을 통과했다고 모두 영웅이고 훈장을 받아야 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한 개인을 뒤흔들어 놓고도 남는 광풍을 견디어 내었다는 것에 작은 경의를 표하는것이 그리 나쁠 것 같지는 않다. 특히 그들이 역사의 마도로스를 자임하면서 이리 저리로 키를 옮겨대던 권력자들이 아닌 이상은 말이다.  거대한 흐름을 피하지는 못하지만 그 안에서 가족의 안위와 생의 희망을 위해 주체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그런 민초들의 모습은 결코 '나라 이 꼴로 만든 노인네들의 회고담'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조동환 선생의 이야기에서 나는 북해도 시절과 부산 시절 이야기가 마음을 끈다. 전자는 유년 시절의 기억이고 후자는 청년시절의 기억이다. 아무래도 북해도 시절은 우리 역사의 아픔에 대한 선험적 정보들을 가지고 있기 대문에 더 절절하게 느껴진다. 아이 엄마가 혼자 아이들을 데리고 몇 날 며칠을 기차를 타고 또 배로 갈아타고 그러면서 아버지를 찾아 북해도까지 간다. 지금처럼 편안한 여행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온가족이 함께 산다는 희망을 안고 그 탄광마을까지 도착하는 여정은 요즘 같으면 그것 자체가 하나의 다큐멘터리 주제가 될 법도 하다. 탄광마을에 도착한 아들은 마을 공동목욕탕에서 아버지의 품에 안겨 목욕을 한다. 그 따뜻한 온기를 70이 넘은 아들은 아직도 기억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해도에서 돌아가시고 만다. 그리고 아버지의 유골을 안고 아들은 다시 그 먼길을 돌아 고향으로 돌아온다. 이런 이야기를 현재에 살고 우리가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어디 드라마같은 곳에서 나오는 이야기 아니던가... 한 사람의 삶을 뒤적이면 사실 그 안에는 TV속 드라마보다 더 많은 드라마들이 숨어 있다. 부산 시절 이야기가 재미있었던 것은 현재 내가 살고 있는 곳의 지명이 수시로 나오기 때문이다. 조동환 선생은 내가 한 때 자취를 했던 부산 교대(아마 위치는 좀 옮겨진 듯 하다) 미술과를 나오셨다. 밤에 미군 부대 하역일을 도왔기 때문에 초량 근처의 산복도로쯤에 산 것 같다. 조동환선생의 기억에 의하면 거기서 전철을 타고 동래까지 오고 갔단다. 지금은 도심으로 변한 곳이지만 그 때는 온통 산이고 논이었을 것이다. 부산 시절 조동환 선생의 고생기를 보면 어른들이 '우리 때 어떻게 공부했는지 아니' 라는 말이 그냥 빈말은 아니다. 지금 아이들은 교육에 대한 필요성보다는 '사교육 과잉'의 왜곡된 교육열에 바짝 타들어가고 있지만 말이다.이런 사교육 시스템에 좀 혁명적으로 바뀌어서 현재의 아이들이 "우리 땐 어떻게 공부했는지 알아?' 라고 그 후세들에게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놀라운 아버지>를 보고 나면 누구나 자신의 가족들을 붙잡고 인터뷰를 하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내 아버지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자주 해주시는 편이었다. 내가 첫사랑에 질질거리고 있을 때 동네 놀이터에서 아버지의 첫사랑 실패 경험을 이야기 해주시기도 했다. 가정형편상 -아마 그 아주머니는 좀 사는 집이었나 보다- 연애질은 사치라고 생각한 아버지가 일방적으로 끊었나 보다. 물론 마음은 아팠겠지만 일단 가족들과의 생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외에도 내가 아버지에게 들은 당신의 작은 이야기들이 꽤 있다. 내가 아쉬운 것은 이것들을 어떤 형태로든 정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매번 마음만 정리해야지 정리해야지 하면서 귀찮음을 핑계로 늘 다음을 외친다. 올해 아버지는 고희다. 더 늦기 전에 그 분의 삶을 어떤 형태로든 정리하고 기록에 남기고 싶다. 아들로서 그 정도는 해드리고 싶다. 나도 궁금하다 어떤 이야기들이 더 나올지...그래서 <놀라운 아버지> 아닌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가장 잘 모르는 것이 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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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에 갔다가 막 돌아왔다. 오고 가고 6시간이 걸렸다. 산청에서 시장 사람들 구경 좀 하고 왔다. 시장의 막되먹은 사람들 말이다. 말로 함부로 막하고 무식하고 툭하면 쓸데없이 장난삼아 시비걸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말이다. 오늘은 산청 시장 장이 서는 날이었다. 밀주로 파는 천원짜리 동동주 집은 대낮부터 장터에 나온 사람들로 가득 찼다. 오만가지 사는 이야기가 5.1채널로 들린다. 별거 아닌 거에 '이놈 자식 저놈 자식' 하다가 서로 '크하하' 웃는다. 동동주 한 사발과 김치 한 종지에 천원이다. 대낮에 딱 한 잔을 마셨는데 발이 땅에서 5cm쯤 떳다. 시끌벅적한 장터 소리때문일지도 모른다. 오랜 만에 장터에서 뻥튀기 소리에 깜짝 깜짝 놀랐고 톱을 갈아주는 노인의 기술을 잠시 응시하기도 했다. 

장터 사람들에게서 사는 향기를 따뜻한 온기를 느낀다고... 예라 뻥치지 마라.  남들에게 그럴싸 해보이는 착한 블로그형 감상은 TV 모니터나 컴퓨터 모니터를 부여잡고 해라.  

나는 그런 생각은 했다. 최소한 이런 경험들이 내가 문자향에 빠져서 문자의 자기완결형 구도 속에 빠지지 않게는 해주는구나...아니면 최소한 그렇게라도 해야하는 거구나라고 말이다.  저들이 그렇게 도시의 지식인들에게 남획되고 연대되는 대중이고 민중이고 민초아닌가?   알튀세르가 누군지, 하워드 진이 누군지 산청 5일장에 나온 연대와 계몽하고픈 그 민중들에게 물어봐라. 단 한 명이라고 고개를 끄덕이면 천원 짜리 동동주 10잔을 내어줄 수 있겠다. 나 역시 이론을 공부하고 그런 담론의 전후를 따라가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그 작업이 탁상공론이라는 식의 '반지성주의'나 '이론 무용론'으로 가지도 않는다. 절대 그렇지 않다. 대신 학자들이나 지식인 또는 대학 졸업자들과만 노는 것의 한계를 메워줄 장치를 스스로 좀 마련할 필요는 있다. 혼자 떠나는 여행 같은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다. 하여간 6시간 동안 차타고 왔다 갔다 했더니 피곤하다. 오늘은 황사까지 있어서 문도 제대로 못열었다. 켁켁...나 지금 감기로 1주일째 고생중이고 목소리는 완전히 돌아가버렸다.         

사진같은 걸 좀 찍어서 올리는 성의라도 좀 보여주면 좋으련만...쯔...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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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가 판형을 바꾸었다. 베를리너판이라고 크기가 확 줄었다. 독자들이야 '어 뭐야 바뀌었네.영 낯선데..옛날께 좋지않아? 아닌가? ' 이정도 생각하겠지만 판형을 하나 바꾸는 거는 회사 전체가 몇 달 동안 시끄러울 일이었을게다. 실무팀들의 작업도 꽤나 늘었을 것이고 편집기자들도 새로운 판형에 맞는 효과적 레이아웃을 꾸려내느라 앞으로도 좀 고민할 것 같다. 

중앙일보에 '미네르바'의 옥중 인터뷰가 실렸다. 

요즘 안토니오 그람시의 전기와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을 읽고 있다고 한다.  

아마 이 두 권이 아닐까 싶다. 

미네르바 옥중도서로 베스트셀러가 될까?  

난 이딴짓은 좀 안했으면 좋겠다. 대통령이 최근에 읽는 책 하면 그 책은 베스트셀러가 된다. 미네르바때도 그가 추천하는 책들은 또 베스트가 되었다. 굳이 그 책이 나쁜 책들은 아니지만...유명인이 한 마디하면 어울렁 더울렁 부화뇌동하는 건 별로 아름답지 않다. 

 

개인적으로 문화주의자로서의 그람시를 먼저 알게되었다. 대개의 문화연구가들이-특히 영국의 버밍업 문화주의자들-그의 사상과 실천의 절반 도만 절체하여 강조한다고 비판을 받는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한국에서의 그람시 수용이 그런 과정을 거쳐왔기때문에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독자가 나머지 반의 부분을 따로 찾아내면서 비판,또는 첨가하면서 읽어야 한다. 잘 거론되지 않는 나머지 그람시의 반쪽은 레닌주의적 그람시와 평의회공산주의적 그람시다. 실제 우리가 경험하는 자본주의 현실에서 그람시의 헤게모니를 필두로한 문화주의적 접근의 유용성이 잊혀진 그람시보다 더 적실해 보이기때문에 아마 이런 현상이 나오지 않았나 싶다. 나 역시 그람시 책은 몇 권 봤으나 의 평전은 읽지 않았다. 심심할때..한번 

중앙일보의 미네르바 기사를 보면서 나는 옥중 미네르바에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낀다. 정말 그렇다. 

 농담이지만 설마 그가 '옥중수고'를 남기겠다고 하지는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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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아버지는 감나무를 심다 돌아가셨다. 어제, 그가 살던 창고 같은 집 뒤편 몇년 전 먼저 가신 할머니 곁에 뉘여드리고 왔다. 살아서 할머니를 그토록 아끼셨으니 이제 두 분이 함께 봄이 오는 고향 땅을 내려 보실 성 싶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이제 내게 4분의 조부모들은 모두 가신거다. 친할아버지는 아버지 20살때 돌아가셨으니 내게 그분은 처음부터 사진 속의 인물이었다. 그 다음으로 돌아가신 외할머니는 젊은 시절부터 당뇨로 고생하셨다. 사람이 앉은 자리에서 나무토막처럼 쓰러지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내게 보여주신 분이다. 쿵하고 말이다. 물론 그 때 돌아가신 건 아니다.  외할머니는 5년전쯤 돌아가셨다. 그 때 외갓집 식구들은 "외할아버지가 극진히 돌봐주었으니 여한은 없을거다." 라고 말했다. 90살은 넘기고 100세를 도모해보던 친할머니는 어처구니 없이 바지를 갈아 입으시다 옷을 밟고 넘어지셔서 그 길로 시름시름 앓으셨다. 마취자체를 해주려 하지 않았다. 설령 마취를 해도 깨어날지 확신이 없고 수술이 성공적이어도 거동하시긴 힘들다고 했다. 가족회의 결과 그냥 집으로 돌아오기로 결정했다. 집으로 모신 후 1주일정도를 의식이 오고 가는 길 위에 계시다가 돌아 가셨다. 2년전 일이다.  

외할아버지는 향년 89세셨다. 며칠 전 까지만 해도 노래방에 가서 '눈물 젖은 두만강'을 멋지게 부르실 정도로 정정하셨다.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 감나무 70수를 산에다 심으셨다. 아들들이 그렇게 말렸지만 아무도 못막았다.  "내가 죽고 나서도 너희들이 나중에 감따면서 내 생각한번 하고 좋을거구만..."이라고 하셨단다. 혼자 감나무를 심으시다가 갑자기 심장에 무리가 오신거다. '아..가슴이 답답하다.' 하시면서 구급차로 속에서 운명하셨다. 비교적 짧고 편안한 죽음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일제시대때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나오셨다. 나름 촌에서는 엘리트셨던 셈이다. 자식들도 많았고 또 농사일도 잘되어서 나름 그 동네에서는 부농축에 끼었다. 할아버지는 새로운 실험을 좋아하셨는데 대게 일본의 선진 농업기술을 자신의 밭에서 실험해 보신 거다. 딸기나 수박같은 것들을 일본 책 보고 그 동네에서 처음하셨던 분이다. 장례식장에서 알게된 사실인데 돌아가시기 몇 해 전까지 컴퓨터로 주식트레이딩까지 하셨단다. 바짝마르고 허리가 굽은 노인이 컴퓨터로 나도 못하는 트레이딩하는 걸 생각하니 괜히 웃음이 났다.  

내가 마지막으로 외할아버지를 뵌 건 아내와 결혼하고 외갓집에 인사드리러 갔을 때다. 그러니가 이미 3-4년전이다. 외할아버지는 원래 살던 집-그 곳에서 거의 한 평생을 사셨다-은 농삿일을 이어받은 자식에게 주고 당신은 1km쯤 떨어진 산 속에 창고같은 집을 짓고 사셨다. 자식들이 내려오라해도 그곳이 편하다며 식사 후에는 매번 그리로 들어가셨다. 거기서 개와 양,소 그리고 집 뒤편에 있는 할머니의 산소를 벗삼아 계절을 보내셨다. 아내와 인사드리러 갔을 때 할아버지는 '곱다' 라며 아내의 손을 꼭 잡아주셨다.아내는 외할아버지를 좋아했다. 그 분이 산 속에 있는 밭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그냥 잘 찍은 사진이나 그림 같았다. 왜 있지 않은가? 강단있게 살아온 한 농부의 굵은 주름을 찍은 그런 흑백사진들...그런데 외할아버지는 정말 그랬다. 그 분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외손자인 내가 꼼꼼히 알턱은 없다. 하지만 분명히 그런 이미지를 풍기신 건 사실이다. 그 때 사진기가 있었다면 몇 장 찍어 놓았을터인데.. 

외할아버지의 상여를 따라서 그 산을 올랐다. 할아버지 살던 집에는 주인대신 몰려온 사람들에 놀란 강아지들이 연신 짖어댔다. 외할머니 산소 옆까지 올라가는 길에 산을 깍아 놓은 밭이 있었다. 그 위에 양을 먹이기 위해선지 그냥 맨땅으로 두기가 그래선지 보리 싹이 제법 올라와있었다. 아직 이른 봄인데도 마치 봄의 중턱쯤 온 듯 초록빛이 완연했다. 보리싹 사이로 무릎 높이만한 어린 감나무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심어져있었다. 굽은 허리에 더러운 옷으로 혼자서 감나무를 심고 있는 노인의 모습이 눈에 어릿했다. 잠시 코 끝이 징해졌다. 그리고 '어린 보리싹과 어린 감나무가 한 동안 할아버지를 적적하게 해드리진 않겠구나.' 생각했다.  

우리가 어른이 된다는 것은 점점 외갓집과 멀어진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방학때면 기다려지던 외갓집.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그곳은 추억의 장소로 변한다. 내게도 그렇다. 나는 앞으로 살아생전 그곳을 몇 번이나 더 가보게 될까?  

오는 4월에 아이와 함께 가려고 했었는데 외할아버지는 이제 그곳에 계시지 않는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에나 가볼 수 있겠지.... 감나무와 외할아버지를 남겨두고 산을 내려왔다. 왠지 아내와 함께 갔던 4년전 어느날 처럼 밭 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서 할아버지가 오히려 내게 '잘 가라'고 손짓해주시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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