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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악법도 법인가 ㅣ 현대의 지성 84
강정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9월
평점 :
품절
내게 소크라테스가 남겼다는 유명한 말, "악법도 법이다." 의 딜레마는 사실 오래전에 해소되었다. 최소한 감각적으로는 그렇다. "악법은 법이 아니다. 그리고 나쁜 법은 고치면 된다." 대학 1학년 때부터 불법 시위에 대한 주요 신문의 논설에 수시로 인용되던 문구가 소크라테스가 남겼다는 저 말이다. 나는 '법대로 하자' 라는 말에 대해서도 좀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그 말은 '법의 구성적 성격' 을 외면하고 현재 있는 실정법을 최고의 가치로 놓는 견해에 이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말의 함의에는 '우리사회에서는 법대로 되지 않는게 정상이다' 라는 인식론이 깔려있다.다들 말은 안하지만 법에 대해 큰 기대를 걸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법치주의'의 실종이라는 비이성적 상황이 정상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법은 공동선을 구현하고 구성원들의 이해를 조절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하지만 법은 일종의 젤리같은 것이다.어떤 완전한 형태를 갖고 있지만 또한 유동적이다. 내게는 '법실증주의'보다는 '법구성론'이 훨씬 매력적인 주제이다. 이 말이 법규정을 임의적으로 해석하고 마음대로 공동 규약을 위반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학자는 한국사회에서 실종된 '법치주의'에 대한 소시민의 반동이 작은 형태의 위반을 일상화한다고 말한다. 즉 높은 놈들은 몇 백억원을 해먹고도 잠시 카메라 앞에 포즈 취하고 풀려나는 마당이니 내가 좀 위반한다고 뭐 그리 대수인가 하는 식이다. 앞서 말한 '법치주의의 실종' 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가치인 '법치주의'를 완성하고 또 그 너머에서 '법의 구성적 과정'과 법의 사각 지대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강정인의 <소크라테스,악법도 법인가?> 중에서 소크라테스와 관련된 논문은 권창은 교수의 논문과 함께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에 실린 듯 하다.(이 책을 살펴보지 않아서 정확하진 않다.) 강정인의 이 책은 '소크라테스'문제 만을 다루고 있진 않다. 그 뒤에는 '시민불복종'의 문제, '진보와 보수'의 문제, 정치 불참의 의미,북한에 대한 내재적 접근과 외재적 접근의 장단점 등 정치학계에서 논쟁이 되고 있는 여러 주제들을 거론한다. 책의 제목이 <소크라테스, 악법도 법인가?>여서 이 책이 온전히 소크라테스에게만 바쳐진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일단 첫 주제는 '소크라테스'다. 소크라테스의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디쯤에 '악법도 법이다' 라는 문구가 나오는지 찾아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결론은 하나다. 액면 그래도 '악법도 법이다' 라는 문장은 소크라테스의 책 어느 한 구석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가 자기의 벌어진 입으로 '악법도 법이거든' 이라고 말한 적은 단 한번도 없다는 거다.(행여 그 문장을 그대로 찾아낸다면 서양철학사가들이 깜짝 놀랄만한 세계적인 발견이 될 것이다. 그러니 유명해지고 싶으면 어서 찾아보자) 이 문구는 소크라테스의 격언이라고 해서 교과서는 물론이고 인터넷에서도 유령처럼 배회한다. 서양철학사가 김주일 교수의 말에 의하면 이것은 번역 과정의 오류에서부터 기인한다. '악법=법'이라는 번역을 국내에 통용 시킨 것은 일본의 법철학자 오다카 도모오다. 1937년에 개정한 <법철학>에서 소크라테스를 전거에 두면서 '악법도 법이기 때문에 응히 지켜야하며..' 라고 쓰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한번 굳어진 것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더우기 그것이 지배 이데올로그들로 활용하기 좋다면 말이다. 소크라테스의 후광을 뒤에 업고 싶은 정당성 없는 정권들은 반정부세력들의 실정법 위반에 대한 대중 이데올로그로 이 말을 적극 사용한다. 물론 신민 만들기에 앞장서는 국정 교과서가 소년 소녀들에게 이 말을 유포한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자...일단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은 소크라테스가 한 말은 아니다는 건 정리되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은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똑같이 그런 말을 하진 않았어도 그런 해석이 가능한 말을 한 건 아닌가요? " 빙고...그렇다. 좋은 질문이다. 이러면 이제 이야기가 좀 더 길어진다. 강정인 교수는 <소크라테스,악법도 법인가?>에서 이 좋은 질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들려준다. 중요한 것은 '악법도 법이다'는 식의 극단적 법실증주의는 전체 맥락에 대한 여러 해석 중 한가지의 해석일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소크라테스의 '금과옥조' 라고 믿는 격언은 정언명제가 아니라 소크라테스라는 텍스트의 전체적 맥락에서 논쟁이 분분한 주제라는 것이다.
모순은 소크라테스의 저서(물론 플라톤이 썻다) <변명>과 <크리톤>에서 도출된다. 이 책을 읽어본 사람이면 누구나 소크라테스의 모순에 대해 쉽게 눈치챌 수 있다. <변명>에서 아테네인들을 꾸짖고,철학 포기 요구를 거부하고, 불복종의 가치를 내뱉던 양반이 <크리톤>에서는 인간적으로 도망 한 번 가주시오..라고 부탁하는 친구 크리톤의 말을 나무라면서 인격화된 '법률'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법이행'의 중요성을 말씀하신다. 이어 꿔온 닭을 갚아주라는 신에 대한 채무이행을 부탁하시고 독배 원샷을 하신다. 뭥미? 뭐 어쩌라는 것이여? 단도직입적으로 묻것소? 법을 따르라는 말이요, 법에 개겨보라는 말이여?
내가 <변명>과 <크리톤>의 모순을 해결한 방식은-물론 이것도 여러 가능성 있는 해석 중 하나이다- 강정인이 요약한 바에 따르면 절충론 중에서 그린버그와 아렌트의 해석방식이다. 소제목으로 보면 이해가 쉽다. '변명과 크리톤간의 모순을 일응 인정하되' '소크라테스의 자신에 대한 약속을 중심으로 일관되게 해석하고자 하는 입장'이다. 즉 소크라테스는 법률을 지키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철학의 삶을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철학적 삶이 선한 삶이라는 점을 아테네 시민들은 물론이고 자신에게 입증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철학을 위해 죽는 길을 택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두려워했을까? 그의 저서를 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는 영혼의 불멸을 믿었고 죽음 이후에 현인들과 저승에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만큼 큰 즐거움이 없을거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좀 심심하고 너무 상식적이지 않은가?
재미있는 해석들이 몇 가지 있는데 물론 그중에는 음모론에 해당하는 것들도 있다.그로토같은 이들의 주장인데, 후학인 플라톤이 아테네인들로 부터 폐기처분되어 버릴 위기에 놓은 소크라테스의 신원을 복원하는 차원에서 <크리톤>의 방향을 잡았다는 것이다.즉 <변명>과의 모순은 그런 집필 의도때문에 발생하는 차원이라는 것이다. 학계에서는 이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모르겠으나 에피소드정도로 읽히지 않을까 싶다. 콩클턴의 해석은 수용자의 입장에 맞춰 이야기해온 소크라테스의 방법론을 토대로 <크리톤>을 '크리톤의 문제' 로 이야기한다. 뭔 말인고 하니. 소크라테스의 습성은 대화수준의 상대에 맞춰 이야기를 끌어간다. 크리톤은 소크라테스급의 학자는 아니며 그저 스폰서나 다중지성정도에 해당한다. 콩클턴은 '고차원적 무법'과 '저차원적 무법'을 구분하여 <크리톤>이 '저차원적 무법'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즉 법철학의 근본 이념까지 가지 않고 법의 준수여부문제에 대해 그 필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콩글턴의 경우 소크라테스의 고차원적 법철학은 <크리톤>이나 <변명>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정치가>에 소개된다고 말한다.(어찌되었거나 주인공은 모두 소크라테스고 저자는 플라톤이니) 그 외에도 '부정의를 저지르는 것'과 '부정의를 행하는 것'을 나누고 '악을 악으로 행하지 말라'는 문구를 통해 해석하는 알렌의 방식, 정의와 법률을 구분하여 불복종의 전거를 구하는 맥러플린, 정치와 철학의 간극문제로 해석하여 이의 해소를 도모하는 유벤의 방식등이 요약설명된다.
이어 등장하는 존롤즈의 <시민불복종의 정당화>문제는 따로 길게 언급하지 않겠다. 존 롤즈가 시민불복종의 문제를 지극히 자유민주주의의 개념틀 안으로 축소시킨다는 지적은 해야겠다. 또한 시민불복종을 비폭력의 문제로 협애와 시키면서 폭력과 시민불복종이 양립할 수 없다고 본 점도 '폭력/비폭력'문제에 대한 지극히 좁은 스펙트럼임을 지적한다.물론 존 롤즈가 시민불복종의 가치에 대해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시민불복종이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내실화하는데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또한 시민불복종이 발생하는 귀책 사유는 궁극적으로 자신들의 권위와 권력을 남용하는 자들에게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
2부에 해당하는 '보수와 진보'의 문제는 사실 조금 시의가 지난 논의이긴 하다. 그렇지만 지금도 심심치 않게 '보수와 진보'에 대한 자기정초를 위한 질문이 나오고 있다는 점을 본다면 유효성은 여전히 남아있다고 본다. 재미있는 개념이 등장하는데 강정인은 '보수와 진보'의 개념에서 '진보'는 통칭 보수세력이든 진보세력이든 모두 가지고 있는 점이라고 본다. 그래서 그는 '보수'의 대립항으로 통칭되는 '진보'보다 조금 더 넓은 개념의 '혁신'이란 용어를 꺼낸다. 그렇다면 '진보/혁신'의 차이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가능하다. 몇 가지 예들이 등장하는데 일단 '혁신'을 '진보'보다 느슨하고 넓은 개념으로 설정한다. 차하순의 말을 재인용하면 이렇다. '진보는 역사의 진전 방향에 대한 일정한 인식은 물론, 역사가 어떠한 방향으로 진전되어야 한다는 가치판단을 전제한다.' 일종의 '목적론적 세계관'을 드러내는 것 같다. 아무래도 글이 집필된 시기가 90년대 초반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현재적인 의미의 '진보' 개념은 이보다 좀 더 다층적인게 아닌가 싶다. 강정인은 현상 유지 개념을 통해 '진보/혁신'을 설명한다. 단순히 현상 유지와 현상 타파의 축 위에서 사회,정치적 이념이나 운동을 구분하는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보수 대 혁신'의 구별이 정당하고, 혁신적인 이념이나 운동의 일부만이 진보적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다.' 요즘 말로 하면 '반이명박' 전선의 깃발 아래에 있는 모든 세력이 스스로 진보라고 말하지만 강정인의 표현을 빌자면 '혁신'이라는 것이 오히려 적당할 듯 하다. 강정인은 이런 틀 안에서 '역사 안에서의 구원'을 찾는 대신에 '역사로부터의 구원'을 찾는 진보적 행위 역시 진보로 보기 어렵다고 말한다. 이 말은 개인적으로 지식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포스트 담론에 대해 성찰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처럼 들린다. 이 장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버크와 보수주의 정치철학'은 정말 보수주의자들이 읽어보아야할 내용이다. 실제로 버크의 주장을 들어보면 우리나라의 양심적 세력들은 대개가 '보수주의자'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알라딘에 가장 많은 축을 구성하는 역시 진보라고 이름붙이든 혁신이라고 이름붙이던 나는 '양심적 보수세력'이라고 본다. 물론 버크의 주장에서 시대한계적인 요인들은 제외하고 봐야 한다. 귀족제의 옹호같은 것을 가지고 현재적 의미의 '버크 읽기'에서 욕하는 건 별로 의미가 없다. 버크는 계몽주의적 진보에 대해 부정하지 않았다. 또한 변화와 개혁에 대해서도 무조건 거부하지도 않았다. 사회가 잘 보존되기 위해서는 변화와 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방식에 있어서 버크는 온건한 길,체제 내적인 길을 선호했다. 프랑스 혁명의 혼동상태를 직접 경험한 그로서는 어찌보면 나올수 있을 법한 주장이다. 이런 말을 들어보자. "개혁자는 국가의 결함에 접근함에 있어서 마치 '아버지의 상처를 치료하는 심정"으로 곧 '경건한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마치 사서삼경에 나오는 말 같지 않은가. 문제는 주체의 위치에 있다. 그 지점에서 흔히 말하는 '좌파'와의 차이가 발생한다. 하지만 다분히 식상한 도덕적 담론처럼 보이는 이 말은 실천영역에서 좌파나 우파를 막론하고 모두 고개를 끄덕일만한 대목처럼 보인다.
요약된 버크의 사상을 읽다보면 결국 한가지 답에 도달한다. "대한민국 정치판에는 진정한 의미의 보수주의자는 없다." 라는 것 말이다. 결국 우리 사회에 '보수주의자'라고 부르짖는 사람들은 대개가 '철학 없는 보수세력'일 가능성이 높다.흔히들 이런 사람들은 '수구'라고 말한다. 조금 세련된 옷을 입으면 '뉴라이트'가 된다. 정치학자 김홍명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보수주의는)자생적인 역사를 지닌 하나의 정치적 입장, 세계관이 아니라 주위 환경에 시각을 맞춘 막연한 기질 혹은 심적 태도의 성격으로 나타나고 있다. '철학없는' 이란 말을 길게 설명한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양심적 보수세력의 존재가 가끔 '좌빨'이니 '용공'이니라고 비난을 받는다. 이런 구도가 해체되고 '양심적 보수세력'이 자신의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날이 되어야 한국정치의 가능성은 열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