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아버지는 감나무를 심다 돌아가셨다. 어제, 그가 살던 창고 같은 집 뒤편 몇년 전 먼저 가신 할머니 곁에 뉘여드리고 왔다. 살아서 할머니를 그토록 아끼셨으니 이제 두 분이 함께 봄이 오는 고향 땅을 내려 보실 성 싶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이제 내게 4분의 조부모들은 모두 가신거다. 친할아버지는 아버지 20살때 돌아가셨으니 내게 그분은 처음부터 사진 속의 인물이었다. 그 다음으로 돌아가신 외할머니는 젊은 시절부터 당뇨로 고생하셨다. 사람이 앉은 자리에서 나무토막처럼 쓰러지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내게 보여주신 분이다. 쿵하고 말이다. 물론 그 때 돌아가신 건 아니다.  외할머니는 5년전쯤 돌아가셨다. 그 때 외갓집 식구들은 "외할아버지가 극진히 돌봐주었으니 여한은 없을거다." 라고 말했다. 90살은 넘기고 100세를 도모해보던 친할머니는 어처구니 없이 바지를 갈아 입으시다 옷을 밟고 넘어지셔서 그 길로 시름시름 앓으셨다. 마취자체를 해주려 하지 않았다. 설령 마취를 해도 깨어날지 확신이 없고 수술이 성공적이어도 거동하시긴 힘들다고 했다. 가족회의 결과 그냥 집으로 돌아오기로 결정했다. 집으로 모신 후 1주일정도를 의식이 오고 가는 길 위에 계시다가 돌아 가셨다. 2년전 일이다.  

외할아버지는 향년 89세셨다. 며칠 전 까지만 해도 노래방에 가서 '눈물 젖은 두만강'을 멋지게 부르실 정도로 정정하셨다.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 감나무 70수를 산에다 심으셨다. 아들들이 그렇게 말렸지만 아무도 못막았다.  "내가 죽고 나서도 너희들이 나중에 감따면서 내 생각한번 하고 좋을거구만..."이라고 하셨단다. 혼자 감나무를 심으시다가 갑자기 심장에 무리가 오신거다. '아..가슴이 답답하다.' 하시면서 구급차로 속에서 운명하셨다. 비교적 짧고 편안한 죽음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일제시대때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나오셨다. 나름 촌에서는 엘리트셨던 셈이다. 자식들도 많았고 또 농사일도 잘되어서 나름 그 동네에서는 부농축에 끼었다. 할아버지는 새로운 실험을 좋아하셨는데 대게 일본의 선진 농업기술을 자신의 밭에서 실험해 보신 거다. 딸기나 수박같은 것들을 일본 책 보고 그 동네에서 처음하셨던 분이다. 장례식장에서 알게된 사실인데 돌아가시기 몇 해 전까지 컴퓨터로 주식트레이딩까지 하셨단다. 바짝마르고 허리가 굽은 노인이 컴퓨터로 나도 못하는 트레이딩하는 걸 생각하니 괜히 웃음이 났다.  

내가 마지막으로 외할아버지를 뵌 건 아내와 결혼하고 외갓집에 인사드리러 갔을 때다. 그러니가 이미 3-4년전이다. 외할아버지는 원래 살던 집-그 곳에서 거의 한 평생을 사셨다-은 농삿일을 이어받은 자식에게 주고 당신은 1km쯤 떨어진 산 속에 창고같은 집을 짓고 사셨다. 자식들이 내려오라해도 그곳이 편하다며 식사 후에는 매번 그리로 들어가셨다. 거기서 개와 양,소 그리고 집 뒤편에 있는 할머니의 산소를 벗삼아 계절을 보내셨다. 아내와 인사드리러 갔을 때 할아버지는 '곱다' 라며 아내의 손을 꼭 잡아주셨다.아내는 외할아버지를 좋아했다. 그 분이 산 속에 있는 밭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그냥 잘 찍은 사진이나 그림 같았다. 왜 있지 않은가? 강단있게 살아온 한 농부의 굵은 주름을 찍은 그런 흑백사진들...그런데 외할아버지는 정말 그랬다. 그 분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외손자인 내가 꼼꼼히 알턱은 없다. 하지만 분명히 그런 이미지를 풍기신 건 사실이다. 그 때 사진기가 있었다면 몇 장 찍어 놓았을터인데.. 

외할아버지의 상여를 따라서 그 산을 올랐다. 할아버지 살던 집에는 주인대신 몰려온 사람들에 놀란 강아지들이 연신 짖어댔다. 외할머니 산소 옆까지 올라가는 길에 산을 깍아 놓은 밭이 있었다. 그 위에 양을 먹이기 위해선지 그냥 맨땅으로 두기가 그래선지 보리 싹이 제법 올라와있었다. 아직 이른 봄인데도 마치 봄의 중턱쯤 온 듯 초록빛이 완연했다. 보리싹 사이로 무릎 높이만한 어린 감나무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심어져있었다. 굽은 허리에 더러운 옷으로 혼자서 감나무를 심고 있는 노인의 모습이 눈에 어릿했다. 잠시 코 끝이 징해졌다. 그리고 '어린 보리싹과 어린 감나무가 한 동안 할아버지를 적적하게 해드리진 않겠구나.' 생각했다.  

우리가 어른이 된다는 것은 점점 외갓집과 멀어진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방학때면 기다려지던 외갓집.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그곳은 추억의 장소로 변한다. 내게도 그렇다. 나는 앞으로 살아생전 그곳을 몇 번이나 더 가보게 될까?  

오는 4월에 아이와 함께 가려고 했었는데 외할아버지는 이제 그곳에 계시지 않는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에나 가볼 수 있겠지.... 감나무와 외할아버지를 남겨두고 산을 내려왔다. 왠지 아내와 함께 갔던 4년전 어느날 처럼 밭 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서 할아버지가 오히려 내게 '잘 가라'고 손짓해주시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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