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판단'은 '잘못된 이별'보다 훨씬 아플 수 있다. 

  -이하 진지하게 쓸까 막말로 쓸까 고민중이다-... ... ...  

정치 이야기다. 정치를 싫어하는 사람은 귀를 막아도 된다. 뭐 복잡하게 정치에 얽혀서 그런 개고생(막말로 쓰기로 작정했나보다)을 하려는지 납득이 안가는 사람들은 이 글을 읽지 않아도 된다. 

'잘못된 판단'의 대표적인 케이스는 올 초 우리회사 노조의 '어리벙벙 전술'이었다. 회사 눈치와 생색내기 사이에서 딴에는 등걸이 정치를 한다고 허둥거리다가 결국은 말년에 벽에 똥칠을 했다. 직원들은 노조를 집값떼어먹으려는 집주인처럼 봤고 완전히는 아니어도 등을 돌렸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집행부가 만들어졌으나 오판으로 인한 상처가 남아있기때문에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돌아왔는지는 다음번 동력을 모으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최근에 동종업계에 노조집행부가 넋나간 전술로 뼈아픈 상처를 남겼다. 회사에서는 1년 이상 구조조정에 대한 타협을 노조측에 요구해왔다. 회사는 실제로  동료들로부터 원성이 높은 몇 명의 사람을 그 대상자로-물론 이와 병행하여 회사측의 필요에 의한 인사까지 덤으로 포함하는- 사전에 말을 흘렸다. 이데올로기 작업에 들어간거다. 노사 협상 테이블은 일종의 주고 받는 게임으로 진행될 때가 많다. 구조조정이라는 빅카드를 들고 회사는 협상력을 높여갔고 또한 실제로 구조조정의 당위성을 노조에 지속적으로 강제했다. 1년간의 시달림 속에 노조는 결국 '그렇다면..조합원 총회에서 결판내자.'라고 전술적인 실수를 해버렸다. 즉 '구조조정'에 대한 찬/반여부를 조합원 전체 투표에 붙이겠다는 것이다. 이건 엄청난 오판이다. 내가 자주 이야기했지만 '1번과 2번' 중에 선택하라는 질문에 1번과 2번을 선택하는 것 만이 정치가 아니다. 정치적 인식이란 '내가 왜 1번과 2번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하지?'라고 되물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말은 제발 좀 기억해주시길...) '질문을 거부하는' 방식은 또한 유효한 전술이 될 수 있다. 그런데 그 회사 노조집행부는 막연한 믿음에 배를 띄우고 말았다. 

노조가 믿었던 건 뭐일까? 오판의 근거말이다. 그건 한마디로 하면 '설마 서로 다들 아는 직원들 끼리 상대의 목을 자르라고 찬성하겠는가.' 라는 선한 의지에 대한 막연한 믿음이다. 일단 투표를 하자고 했으니 취소도 못하고 그나마 그거 하나 믿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구조조정'에 대한 찬성표가 6대 4이상으로 나왔다. 이걸 가지고 '거봐,내가 말했지. 인간은 이기적이라니까'의 사례로 생각한다면 정말 소아적인거다. 회사는 1년간 회사 수익을 중심으로 구조조정의 당위성에 대해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담론작업을 해왔다. 그리고 회사의 전술이 먹혀들었던 것은 구조조정의 대상자들을 은연중에 띄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게임이론으로 보자면 상대가 불지 안불지 모르는게 아니라 상대의 상태를 안다는 것이다. 투표하는 사람들은 투표장 앞에서 인정주의에 잠시 망설였겠으나 '나는 구조조정 대상자는 아니니까.'라고 생각해 버리기 좋았던 것이다. '일단 몇 명 희생자가 생기면 나는 한 동안 괜찮을거고 월급이나 복지도 괜찮겠지.' 

노조가 투표 결과를 따르겠다고 했으니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 된거다. 구조조정이 절대악은 아니다. 그런데 구조조정이란 말은 늘상 직원해고를 위해 아름답게 꾸며진 말에 지나지 않을때가 많다. 즉 회사는 인력감축이라는 방식말고 다른 어떤 노력을 했는지 스스로에게 늘 관대하다. 실제로 많은 경영진은 그런 자구노력에 무능하면서 위기의 모든 원인을 노동자들에게만 전가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장 쉽고 눈에 띄게 단기적으로 비용절감효과가 있기때문이다. 어차피 한해 두해 수익으로 자기의 자리가 보전되는 월급쟁이 CEO들은 그거면 된다. 주주자본주의의 대리인들은 메뚜기 인생이고 메뚜기 철학자들이다. 인력과 노하우를 잃음으로써 생기는 장기적 손해라든가 직장-노동-삶의 긴밀한 연관성 같은 것들은 그들의 안중에 없다. 당연히 실업자 양산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같은 것들도 그들의 관심 밖이다. 그저 거리의 노숙자과 루저들이 늘어나는 것이 눈에 거슬린 뿐이다. 그러니 그들의 고급승용차의 색유리는 짙어지고, 그들의 거주공간은 외인출입이 금지된 요새가 된다. (뭐 다 아는 이야기 아닌가..) 

어쨋거나...오판은 상처를 남긴다. 저 일에서 가장 큰 오판은 노조 집행부의 잘못된 선택이다.바보같은 짓이다.  

나는 같은 노조는 아니지만 어쨋든 노동운동을 하는 유사한 조직의 아마추어같은 짓을 비판했다. 개인적으로 아마추어의 자유로움과 순수함을 좋아하지만 아무때나 그런 순수함을 옹호하는 것은 잘못이다. '순수'는 가끔 '무지'와도 연관을 맺는다. 거기에 노조의 '노'자도 모르면서 '노조'='진보'랍시고 옹호만 외치는 이들은 팔푼이들이다. MB와 싸워야 하는 이 시국에 '노조'를 비판하는 짓은 '진보'운동에 흠집내려는 의도 아니냐고 하는 이들은 대개 칠푼이나 육푼이 수준이다. 대개 그런 이들은 자신의 입장이 변하거나, 어떤 상처를 받으면 금새 돌아선다. 마치 어제까진 둘도 없는 친구이다가 어떤 사소한 다툼이후에는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이가 되어버리는 중딩 친구들의 관계같다. 차라리 쉽게 사랑을 주지 말고 사랑을 주면 오래 간직해라. 후자의 사랑은 또한 회초리를 품을 줄 아는 사랑이어야 한다.     

진보단체나 노조같은 조직들이 '무결점일 수는 없다. 애초부터 그런 근본주의적 기대는 하지 않는게 좋다. 하지만 최대한 신중하여 실수를 줄여가고, 또 실수를 통해 배워가야 하는 것이다. 더 많은 담금질이 필요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유령이 나올 것 같은 한밤중이다. 제국의 새로운 지배와 대중이 지닌 새로운 비물질적이고 협동적인 창조성은 그림자 속에서 움직이며, 아무것도 우리의 운명을 미리 비추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제국이 위기에 의해 정의되고, 제국의 쇠퇴는 항상 이미 시작됐고, 결과적으로 모든 적대선은 사건과 특이성을 향해 나아간다는 사실에 존재하는 새로운 준거점을 획득해 왔다. 

..이 어두운 밤에 사건의 실천을 적극적으로 이론화하고 정의할 수 있을까? 

두 가지 중요한 장애물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즉각 대답하지 못한다. 첫번째...자본주의 시장과 자본주의 생산 체제가 영원하고 극복될 수 없다는 널리 퍼진 환상.  두번째..맹목적인 아나키적 타자를 제외하곤 현재의 지배 형태에 대한 어떤 대안도 인식하지 않고 그래서 극단적인 신비주의에 동참하는 많은 이론적 입장들도 나타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보자면, 실존의 고통은 밝혀질 수 없고, 자각될 수 없고, 반란의 관점을 정립할 수 없다. .... 

이러한 입장들 가운데 어떤 것도 생체 정치적  질서의 일차적 측면을, 즉 생체 정치적 질서의 생산성을 어떻게든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 사실이다.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제국> p 490 - 491 

------------------------------------------------------------------------------------- 냉소주의와 정적주의적 실천 외에 생체 정치적 현실태를 배제시키는 요소는 또 무엇이 있을까? 근본적으로는 생체정치라는 개념의 타자로 배치되고 생체정치를 도출시킬 토대가 된 역사적인 그것이 아니었을까?  결국 생체정치는 하나의 방법론적인 총체성으로 작동하게 되는가?... 하지만 이런 질문보다 실천적으로 더 시급한 것은 '생체정치'의 효과로 작동하고 있으면서도 조각난 주체의 복원보다는 전(pre)-생체주의적 '주체'의 환상 속을 헤메이고 있는 것 아닌가?  푸코가 길에서 홉스를 만나면 홉스를 죽여라라고 한 이유는 그래서 아직도 유효하다. 

정국은 잠시 소강상태...폭풍전야...내일 모레는 경부고속도로가 조금 시끌거리겠지만 그건 지나가는 바람일테고... 여름이 되기전에 큰 바람이 한번 불텐데... 운동가인 척 하지만 결국 끼리끼리 '우리편' 패거리에 지나지 않는것들과 사려 깊은 운동가들 사이를 배회하며 담금질에 힘쓸 때이다.  

한 동안 허리 통증으로 좀 많이 고생했다. 자세 불량으로 척추가 휘어서-현대인들이 대게 그렇다- 디스크의 위험이 높다는 진단도 받았다. 지금은 걷는데는  지장이 없고 작은 통증만 조금씩 남았다. 아내의 적극적 권유로 이 통증이 지나고 나면 요가로 자세교정에 힘쓸터이다. 그나저나 거기 가려면 주말에도 아침 7시 전에 일어나야 하는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칼 폴라니의 경제사상
J.R.스탠필드 / 한울(한울아카데미) / 1997년 5월
평점 :
품절


"나의 목표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그 경관의 일부분이 되어 버린 다수의 사건이-사람들은 이것을 보편적이라고 합니다- 실상은 명확한 역사사 변화의 소산이라는 점을 밝히는 일입니다."  ......미셀 푸코 <자가의 테크놀로지>중에서 

화제가 되었던 TV 광고 카피가 있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  웃고 넘기자니 실업자 100만 시대에 사는 직장인으로 입맛이 쓰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 에서 전가의 보도로 쓰이는 말이 '구조조정' 아니던가? 정규직의 미래는 비정규직이고, 비정규직의 미래는 노숙자가 아니던가?  모두들 공포와 안도의 이중주 속에서 쩔뚝거리며 살고 있다. 20세기 초, 시장자유주의가 초래할 사회시스템의 붕괴를  경고했던 경제학자 칼 폴라니가 지금 한국사회에서 작동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모습을 본다면 어떤 쓸쓸한 말을 건넬까 궁금하다.   

신자유주의가 시대의 진리인양 행세하고 있을 때 국내에서는 그에 대한 이론적 방어로 장하준의 '제도주의'가 관심을 끌었다. <사다리걷어차기>,<나쁜 사마리아인>등을 통해 장하준은 피할 수 없는 대세로 받아들여지는 '신자유주의'에 반격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는 일종의 조합주의적 대안을 이야기했다. (장하준의 분석과 조합주의 대안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비판이 있었다.) 그에 대한 비판은 생략하더라도 최소한 그의 역사적 자본주의 분석은- 새로운 것이 많지는 않지만- 답답한 사람들의 마음에 희색을 돌게했다. 그는 시장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세계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실제로는 보호주의 속에서 성장을 해 놓고 현재의 이해를 위해 '사다리를 걷어차는 식'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비난했다.자본주의의 역사적 성장과정을 예로 들면서 '시장 자본주의'는 영원 불변의 가치가 아닌 역사적이며 상대적이며 또한 말처럼 '진정한 자유방임'인적이 없었음을 지적한다. 장하준의 제도주의적 문제제기 덕분에 국내에서 다시 관심을 끌고 있는 사람이 바로 경제인류학자인 칼 폴라니이다. 그는 시장 자본주의를 인류사적 발전의 도정 위에 올려놓고 그 허구성을 날카롭게 분석한 사람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하나이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거대한 변환>도 이런 바람을 타고 오랜만에 국내 재출간을 앞두고 있다. 

칼 폴라니의 개념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배태성(embeddness)'이다.  embed라는 말은 주로 수동형으로 쓰이는 단어인데 '어디 어디에 파묻다' 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제 두가지 질문이 생긴다. '무엇을 어디에 파묻느냐?' 는 주체와 대상의 문제다. 폴라니는 자본주의 역사를 분석하면서 '경제' 는 사회 시스템의 한가지 구성요소임을 강조한다. 결과적으로 역사적으로 그랬듯이 '경제'는 '사회' 속에 파묻혀야만 하는 것이다. 그는 '경제'를 독자적인 것으로 이탈시켜놓은 전통적인 경제학의 형식주의와 시장방임주의자들을 비난한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시장 신화와 그들의 자본주의는 사회 전체의 가치와 존립기반을 붕괴시킨다. 폴라니의 '배태성'을 그대로 전용하면 하면 그들의 자본주의는 편협하고 몰역사적이며,자민족중심적인 즉 이탈된(disembedded) 것이다. 이제 앞서 말한 몹쓸 TV 광고 카피를 폴라니와 연결시켜 보자. 폴라니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재-배태성' (Reimbeddeness)은 이런 말이다.'  

'집 나간 경제, 너도 개고생 그만하고, 남들 개고생도 그만 시키고 이제 사회의 품으로 돌아와라'

그렇다면 사회의 우선성을 요구한 칼 폴라니의 경제 사상에 영향을 준 것들은 무엇일까?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꼽을 수 있다. 폴라니는 <초기 제국에서의 교역과 시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어느 누구도 지금까지 인간생활의 물질적 조직을 깊이 꿰뚫어 본 사람은 없었다. 그는 사회 속에서 경제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의 문제를 폭넓게 제기하였던 것이다. 

폴라니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그리스 사회의 시장경제를 통해서 경제에 대한 사회의 우월성과 경제의 '형식주의'에 반하는 '실체주의'의 전거를 확보한다. 모든 그리스 철학의 핵심 과제는 '공동체의 안위'로 귀결된다. 폴라니가 관심을 가진 것은 정보의 평등과 합리적 의사결정이라는 허구적 상황하에서 수요=공급의 일치점을 찾는 것이 아니라 경제행위가 제도화되는 방식,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제도가 사회,정치, 문화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탐구하는 것이었다. 폴라니가 '얼치기 시장자유주의자'들을 비판한 것은 단지 그것이 경제 행위 한가지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지탱하고 있는 사고방식과 그들이 만들어 내는 시장신화와 이기적 개인이라는 근대적 개념들은 한 사회의 시스템 자체를 붕괴 시킬 끔찍한 디스토피아를 그 안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폴라니는 그런 면에서 형식주의자들과 달리 사회 전체를 관통하는 시장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 외에 폴라니는 마르크스와 오웬에게 영향을 받는다. 특히 그는 오웬이 제기한 '자본주의적 경향성이 갖는 항구적 악의 산출'이라는 문제를 문화적인 시각으로 접근하여 수용한다.  폴라니는 마르크스에게도 영향을 받았지만  일정정도 선을 긋는다. 문제는 마르크스의 '경제 결정주의'-정확히 말해서는 폴라니의 시대에 마르크스주의의 주류였던 '제 2 인터내셔널의 경제주의-에 반감때문이다. 폴라니의 방법론이 가진 인류학적 상대주의와 다원적인 경제사관은 마르크스의 '총체성'과 이론적으로도 어느 정도 배치될 수 밖에 없다.  

폴라니는 세칭 말하는 아담 스미스부터 시작되는 수요-공급의 주류경제학에 대항해 '인류학과 비교경제사'를 학문적 방법론으로 채택한다. 그는 시장자유주의자들이 제기하는 '이기적 인간관'에 제동을 걸면서 고대 사회의 경제 연구를 통해 '호혜성','재분배','증여' 등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한다. 폴라니의 경제인류학의 연구의 사례들을 여기서 모두 설명하기란 힘들다.결론적으로 역사적 과정을 통해 그는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자본주의적 인간'과 '자본주의적 사회'의 출현은 인류 역사에서 근자의 일이며 또한 일반적인 형태도 본성적인 태도도 아니었음을-폴라니는 자민족주의적 경제라고 말한다- 증명한다.  '시장자유주의자'들이 줄곧 외치는 '자본주의=이윤동기=이기적 인간본성'이라는 식의 도식 역시 고대 사회의 경제 연구를 통해 의심받는다. 고대의 어떤 사회에서도 '경제'를 우위에 둔 사회는 없었으며 '공동체'의 안위를 파괴하는 '이기적 개인'이나 제도를 방치한 사회도 없다.  

만약 사회의 실체인 인간과 자연,뿐만 아니라 이를 조직화한 기업이 파괴적인 악마의 맷돌로부터 보호받지 못한다면...어떤 사회라도 무지막지한 허구적 시스템의 결과 앞에서 잠시도 버텨내지 못할 것이다.

폴라니는 <거대한 변환>에서 이런 전통 사회의 흐름이 단절되는 19세기의 사회경제를 집중적으로 분석한다.(이 책의 저자인 스탠필드는 폴라니와 달리 17세기론을 주장한다.) 그는 19세기 자본주의 경제의 제도적 특징을 '세력균형','금본위제','자유국가','자기조정적 시장경제' 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은 '자기조정적 시장경제'라는 것이다. 이 말은 시장이 알아서 합리적으로 결정해준다는 시장자유주의자들의 금과옥조이자 신화이다. 폴라니는 결코 시장경제가 인간조건의 자연적 또는 자연발생적 성장의 결과가 아니라고 본다. 또한 자기조정적 시장이라는 것 역시 하나의 이데올로기였으며 이것이 점차 정책에 영향을 미쳐 자유방임주의 정책을 만들게 되었다는 말이다. 여기에는 결국 '자연'이 아니라 '인간의 설계' 라는 개념이 중요하다. 그에 따르면 다수의 시장만 가지고 시장경제가 형성되지는 않는다. 아담 스미스 이전에도 시장은 많았고 어디에나 있었지만 그것을 '시장경제'라고 하지는 않는다. 폴라니는 시장경제 발생의 '인간설계'의 중요한 요소로 '국가의 개입'을 들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시장자유주의자들은 '국가'를 적대시하며 '최소국가'를 요구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국가의 제도적 지원의 혜택을 누린다. '이현령 비현령 상인윤리'다.   

시장경제가 이렇게 형성되었으면 교환이라는 것이 핵심요소로 나서야한다. 자본주의적 교환은 '상품'이 없으며 불가능하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폴라니의 유명한 개념인 '허구적 상품'이 시장에 당당히 나서는 것이다. 폴라니는 '노동, 토지, 화폐' 를 허구의 상품이라고 말한다. 

노동, 토지와 화폐는 본래 상품이 아닌 것은 명백하다....노동은 생활 그 자체와 함께 하고 따라서 그 성질상 판매하기 위해 생산되는 것이 아니며..인간 활동의 다른 이름이다. 토지는 인간에 의해 생산되지 않는 자연의 다른 이름이다. 실질적 화폐는 결코 생산되지 않는 것이 원칙이며 은행이나 국가재정의 메커니즘을 통해 존재하게 되는 구매력의 표시일 뿐이다. ... 노동, 토지, 화폐에 상품이라는 말을 붙인 것 자체가 완전히 허구적이다. 

물론 폴라니는 이 세가지 요소가 상품처럼 교환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 스탠필드의 설명을 조금 더 들어보자.  

폴라니의 핵심은 시장경제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상품의 허구성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것, 이것은 시장경제의 허구적 또는 신비화된 기초는 자기조정적 시장경제의 신비적 성격으로 나타난다.허구적 전제를 기초로 세워진 시장경제의 모양은 사회조직의 현실적 개념이 아니다. 이는 철저하게 유토피아적 개념인 것이다.  

폴라니의 견해를 정리하면 시장자유주의 경제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실체이긴 하지만 이질적인 녀석이다. 또한 그 출발부터 시작해서 유지양상조차 허구적이다. 그런데 두려운 것은 이 녀석을 그냥 두었을 경우 사회는 총체적 파국상태를 피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보면 폴라니를 비관주의자로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마지막에 중요한 개념이 하나 더 있다. 미셀 푸코는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폴라니는 이런 식으로 말한다. 

인간사회는 자기 파괴적인 메커니즘을 무디게 하는 대항적 방어운동이 없었더라면 멸망했을 것이다. 

폴라니는 '자기조정적 시장'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그에 대한 '반동적인 움직임'이 늘 상존한다는 것을 말했다. 자기조정적 시장이 인간본성에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기서 벗어나려는 경향이 자연발생적이라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폴라니는 국가의 개임 뿐만이 아니라 역사적 제단계-심지어 제국주의나 민족주의,법인기업들-마저도 그런 방어적 반응의 주체가 되곤 한다고 말한다. 폴라나의 이러한 생각은 '조합주의 복지국가'나 '혼합경제'에 반영된다. 그는 자신의 주장이 좌파 집산주의로 오해받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속류 맑스주의 목적주의적 결정론과 반자유주의에 반대했다. 그와 함께  폴라니는 방어적 반응이 시장경제의 보완물로 작동시키는 '협애한 개입주의'에도 선을 긋는다. 그는 자기조정적 시장경제 해체를 요구하지만 결코 이것이 시장의 소멸을 예고하지는 않았다. 시장메커니즘은 어쨋든 도구성을 유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시장경제가 붕괴되는 자리에 두가지 선택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그것은 관리된 경제를 운영하는 두 가지 사회적 실체로서 민주주의와 전체주의이다. 폴라니는 이탈된 경제를 복원하여 '관리된 경제'로 돌아섰을 때의 문제를 '자유'의 훼손으로보는 '편협한 자유론'을 공격한다. 

자유주의자에게 자유의 개념은 단지 자유기업의 옹호로 전락하였다. 자유방임주의 경제학은 무책임의 경제학을 대표하는 것이다.  

J.M 클라크는 '통제의 경제학은 무책임의 경제학과 싸우고 있는 중이다.' 라는 말로 나쁜 자유에 대항하는 소중한 자유의 의미를 되짚어내었다. 폴라니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사람에게 보다 풍부한 자유를 제공해야 할 임무에 성실하는 한 권력이나 계획화가 인간에게 등을 돌리고 인간이 그 덕분에 구축하고 있는 자유를 파괴할지 모른다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이것이 복합사회에 있어서 자유의 의미이다. 

<칼 폴라니의 경제사상>은 폴라니의 경제사상의 출발과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폴라니의 저서들을 중심으로 주된 이야기를 끌어나가고 있지만 조금 더 가시성 높은 설명을 위해서 폴라니 이후 연구자들과 경제인류학자들의 저서들 중 유사한 대목들을 인용한다. 또한 역자의 보론에서는 제도주의학파의 창시자로 알려진 베블렌과 폴라니를 비교하여 제도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경제인류학을 통해 유사한 접근을 시도한 폴라니를 동류항으로 묶고 있다.또한 간략하게나마 베블렌 이후의 제도주의 지류들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는 것도 장점이다.  

이 책에 나오지는 않지만 폴라니의 한계에 대한 부분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그의 방법론이 '고대'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 계보적 분석을 통해 자본주의 형성과정의 허구성을 지적해 낸 부분은 인정하지만 역사적 존재로 등장한 자본주의 이후의 문제에 대해 치밀하지 못하다는 점, 또는 문헌적 접근을 중심으로 한 결과 결국 실제적 생산-노동의 관계성 속에서 작용-반작용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지 않다는 점. 또한 자연스러운 반작용 형성과정을 형식적으로 설명하며 동력 형성의 주체 문제는 거론되지 않는다는 점, 국가와 자본을 둘러싼 담론에서 국가의 선험적 중립성을 상정하고 있다는 점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자본주의 외에 대안이 없다', '시장 자본주의는 인간의 본성이다'는 식으로 고개를 박고 있는 사람들에게 폴라니는 충분한 해독제 역할은 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관적이게도 '종교적 신념'은 때로는 맹목적이어서 잘 바뀌지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본을 넘어, 노동을 넘어>... 그곳은 어디인가? 해체론을 오독한 것도 있겠지만-오독은 또한 중요한 해체론의 방법중 하나 아닌가? 잘 모르겠다만- 주체를 분열시키고 형체를 없애 버린 이후 그 바깥에서는 어느 땅 위에 도대체 어떤 형태의 주체를 형성할 것인가 라고 했던 해체론 비판자의 글이 생각난다. 

강수돌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감하지는 않는다. 실험적인 과정으로-물론 이런 실험이 혁명의 단초가 되기에 포기될 수 없다- '자본/노동'을 넘을 수 있는 것과 보편적인 차원까지 확산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차원의 것이다. 강수돌의 논지는 공감이 가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또 타당한 비판의 여지도 많다. '이거 아니면 저거야' 라는 식으로 '자본/노동'을 옹호하는 방식은 최소한 내 방식은 아니다. 이와 유사한 것이 진보내에서 가끔 논쟁이 되던 '계급' 문제와 '소수자'문제이다. 이것이 마치 적대적 모순의 관계처럼 논쟁되거나,또는 그렇게 인지되는 방식은 넌센스다. 이론적 논쟁에서 준거 지평으로 틀로서 논쟁을 하는 것은 '이론적 지평'의 문제로 이해해야만 한다. "당신은 '소수자'를 지지하니까 당신은 '계급'문제는 별 필요없다는 거지." 라는 식으로 논쟁을 끌어가거나, 인식하는 방식은 무지의 소산이다. 이 두 문제가 공히 실천 영역에서 변증법적인 화해를 추구할지라도 이론적 영역에서는 또 비판과 반비판은 꾸준히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가장 납득하기 어려운 방식이 '전선의 치열성' 에 대한 강조이다. 분명 '전선'은 치열한 경우가 있다. 그 때 행동은 통일되어야 한다. 레닌의 볼세비키당의 장점 중에 하나-레닌은 민주집중제라고 말했던 듯 한데- 당내의 자유로운 의견 개진가 전선에서의 행동의 일치였다.  '전선 치열성'은 역사적인 실체다. 실제로 그 '전선'의 때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진보나 혁명 세력에게 가장 중요하다. 기술적인 의미로, 그리고 또한 실제에서도 혁명은 거의 타이밍이다.  

하지만 '전선의 치열성'은 폭력적인 용어가 될 수 있다. 즉 그 치열성은 '배제'를 담보로 작동하는 방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선의 치열성'에 대한 해석의 임의성 또한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전선의 치열성'보다도 '이데올로기 작업'으로 '치열성'이 작동할 때가 훨씬 많다. ' 선거 때면 등장하는 '비판적 지지론'의 유령은 '전선의 치열성'이라는 담론이 선점하는 좋은 예가 된다. 물론 거기에는 일말의 진실도 있다.   

요는 그거다. 연대...연대하는데...연대는 정말 어려운 과정이다. 요즘 '연대'는 벽에 봉착한 진보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가 된 듯 하다. 진정한 연대를 위해서는 다양성에 대한 인정과 타협과 조정에 유연할 수 있는 조직의 인격적 성숙(?)이 필요하다.  

강수돌의 주장에 '맞아.맞아 대세는 생태야라며 이 지긋함에서 떠나자'라는 식의 '초월적'자세나또 다른 세계를 기획하는 상상력에 '지금 시국이 시국이거든요.당신 전선을 헷갈리게 하지마' 하는 식으로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오독하는 방식 모두 지양될 필요가 있다. 그렇게 이해한다면 강수돌의 주장은 '노동자들의 전선'을 분열시키는 주장이 될 것이다. 물론 '노동자성'에 좀 비판적인 시민운동 주체들 역시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비판의 순환고리를 따라 돈다.  

다시금 밝히지만 나는 강수돌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치는 않는다. 얼핏 들으면 다 좋은 말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해결해야하는 부분들이 눈에 많이 띈다. 사실 듣기에 가장 아름다운 것은 존레넌의 '이매진'식의 유토피아적 아나키즘 아닌가...듣기 좋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관심도서'란 말을 가끔 썼는데 갑자기 그 말이 도대체 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나가는 미녀에게 시선을 1과 2/3초 더 준다는 건가?  아니면 '저기요..사채 필요하시면 이리로 전화주세요.'라고 명함을 건넨다는 건가. 그것도 아니면 '저기 아래 새로 생긴 좋은 모텔이 있는데 함께 DVD나 보러갈까요.'라는 건지...도대체 내게 '관심도서'란게 뭘까? 스스로 생각해봤다. 부정적인 뉘앙스로는 정말 말 그래도 '관심만'이다. 그렇다면 내 관심망에 안걸리는 종목은 몇 개나 있을 성 싶기도 하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찾아보니 관심영역보다 비관심 영역이 훨씬 많다. 배드민턴, 훌라, 폭탄주, 스타 크래프트, 사교댄스, 골드미스 다이어리, 프로야구-어린시절 난 매우강력한 OB팬이었는데, 각종 처세술 책들, 프랑스어 교재... 등등등  

하여간 그동안 '관심만' 갖고 잊어버린 책도 있었다. 물론 최근에는 그 귀찮은 '관심' 때문에 쌓여가는 책들의 원성을 듣고 있긴 하다. 책장을 채우기 위해 필요한 게 책은 아니기 때문에 비교적 구매속도를 조절했다. 그런데 진실은 거역할 수 없다. '구매'는 '독서'보다 훨씬 쉽고 빠른 일이다.언젠가 읽겠지 해서 읽는 책도 있지만 최근에는 2년이상 대기발령시켜 놓은 육군 병장같은 책도 있다. 엘리어트 카네티의 <군중과 권력>이 그렇다. 책을 찾으려고 무던 애를 쓰다 우연히 대학가 서점에서 한 권 찾았는데 찾는 기쁨을 기억하며 여전히 모셔져 있다. 하여간 이런류의 병목이 늘어가는 것은 즐거운 일은 아니다. 나는 예전에 연애비용을 아껴가며 음반을 사던 기억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 때는 레코드 샵에서 5장 정도를 쥐고 결국 한 장만 남겨 놓고 다시 꼽던 시절이다. 요즘은 돈 좀 있다고 5장을 다 산다. 물론 처음부터 쥐는 양이 늘긴 하지만. 규모가 커졌다고 감동이 두 배가 되는 건 절대 아니다. 예전에는 그 한 장의 음반을 CD레이저가 CD표면에 홈을 낼만큼 열심히 들었다. 그런데 집으로 모셔오는 음반의 양이 늘어나다 보니 어떤 음반들은 1-2번 듣고 1년내내 손을 대지 않는 것도 수두룩하다. 내 음반량은 진짜 음반 매니아들 수준에 비하면 턱도 없지만 하루 한 장씩 듣는다면 5년 이상은 족히 걸릴거다. 최근 CD 시대의 종말증후로 '염가박스'세트가 나온다. 나도 그냥 흘려 보내질 못하는데, 사실 다 듣지 못한다. 책도 그도 그렇게 되면 곤란한데.... 

만화작가 줄스 파이퍼의 작품집이다. 이 바닥에서는 꽤나 유명한 사람인 듯 하다. 그림이 낯에 익다. 그런데 처음 소개된다고 한다. 과문해서 뭔가 착각하고 있는 듯 

선임하사는 책상에 고개를 파묻은 채 먼로를 바라보지조차 않았습니다
그럴 만도 했지요. 선임하사는 늘 바쁜 사람이니까요.
“저기요… 저는 이제 겨우 네 살이라구요.”
선임하사는 고개조차 들지 않았습니다. 마치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오직 자기뿐이라는 듯이, 먼로를 바라보지도 않고 빠르게 말했습니다.
“군대는 네 살짜리 어린이를 받지 않는다. 따라서 병사는 자신이 네 살이라고 믿고 있을 뿐이다. 당장 의무대로 가서 군의관의 검진을 받도록 하라!
                                                                  P62, <꼬마 병사 먼로 이야기> 중에서 

나는 통계적인 이유(?)로 군대를 좀 짧게 갔다왔다. 서울 북쪽 구파발 인근에 많은 방위 부대 출신이다. 사단 본부대 영선반이라고 매일 작업만 하는 방위였다. 공병대는 장비 써서 작업하고 영선반은 그냥 몸땡이로 작업한다.  난 내가 '방위'인게 좋다. 언젠가 이야기했지만 "나는 군대 가기전에도 군대가 싫었고 군대가서도 싫었으며 군대를 나와서도 싫다." 그런데 대부분 나말고도 대부분 그런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나는 해병대네' '나는 특전사 출신이거든' 이런 말을 자랑삼아 한다. '젊어 고생의 마초화' 가 이루어진다. 군복이나 제복입던 자신의 모습 외에 별로 아름다울게 없었던 사람들은 여전히 빨간 모자를 쓰고 길에서 교통정리한다. 자동차에 군대에 뜨는 별마크를 달고 말이다. 수많은 개인의 분화된 정체성 중 '예비역' 정체성으로 영원히 군대와 함께 하고픈 가련한 사람들이다.  

SF소설계의 무림당주 3인방 중 하나라는 로버트 A 하인라인의 <The moon is a harsh mistress>이다.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이라고 해놓으니 오히려 낯설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영어 제목에 더 익숙하다. 팝이나 재즈에서 이제는 스탠더드로 불리우는 노래다. 국내 CF에도 사용된 적 있었다. 존 바에즈, 린다 론스테드, 팻 메스니, 나윤선, 조수미등.... 이 노래는 이 책 제목에서 나온거다. 

SF소설은 다른 시공간을 통해 당대에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이야기한다. '로봇'이 '노동자'의 메타포였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현재 한국의 정치상황은 '대작 SF 소설'이 나오기에 좋은 토양을 가진 셈이다.  
하인라인은 이 소설에서 '혁명'(일종의 레닌적인)을 이야기한다.그것의 의미는 책을 읽고 가늠해봐야한다. 하인라인은 군국주의적 성향의 보수적 작가로 알려져있기 때문이다.      

친애하는 와이오밍, 혁명은 대중을 동지로 만든다고 해서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혁명은 극히 소수의 유능한 사람들만이 실행할 수 있는 과학입니다. 성공 여부는 올바른 조직이 있는가, 무엇보다 제대로 된 의사 소통이 가능한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역사적으로 적절한 순간에 실행하는 겁니다.” - 본문 중에서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 책 제목이 정말 딱딱하다. 이 책을 본 순간 칼 폴라니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폴라니의 접근 방식이 이러했기때문이다.  무화과나무님은 페이퍼에서 폴라니의 배태성(embeddeness)이라는 개념을 강조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무엇을 포함하고 있는가?  폴라니는 사회가 경제를 배태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의 의미는 형식주의경제학(주류경제학)이 시장자본주의와 인간본성을 결합하는 신화론적 해석에 맞서는 해방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폴라니의 주장은 시장중심자본조의는 disembeded 된 것이므로 다시 re-embedded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집나가 개고생하는 경제를 다시 말아넣어야 된다는 말이다.   

폴라니는 집나간 경제를 입증하기 위해 비교경제사와 인류학적 방법론을 채택한다. 폴라니는 '호혜성'이란 것을 이익 중심의 경제적 사고와 대비하고 각 문화에 존재했던 호혜성의 경제를 탐색하여 '경제적 사고'라는 것이 결코 통시적 역사의 결과물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폴라니는 맑스에 비판적인 입장이었는지만-정확히는 제2인터네셔널의 경제주의에- 또한편으로는 맑스와 중첩되는 아이디어들도 발견된다. 이 책은 어느 수준에서 인지 모르겠으나 '맑스와 모스'를 결합한다고 한다. 아래의 주장은 폴라니의 것과 다를바없다.  

사실상 현대적 시장의 근원지인 유럽에서조차 합리적 판단에 따라 만족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개인’이나 이들의 이윤 추구를 매개하는 공간인 ‘시장’ 등은 갑작스럽게 등장한 개념이라 할 수 있으며, 임금노동제에 기초한 상품시장의 논리 역시 비서구의 ‘원시사회 부족민들’만이 아니라 근대 서구인들 자신의 일반적인 윤리를 전혀 반영하지 않는 것이었다.  

 <자유론> 시국이 시국이다 보니 딱 어울린다. 언론학부 1학년들이 처음에 배우는 이론 중 하나가 윌버슈람의 <언론의 4이론>이다. 그 중 자유주의 언론관의 토대가 되는 것이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이다. 그는 이 책에서 '표현의 자유'에 대한 고전적 정의를 내려놓았다. 물론 '언론의 자유'와 '언론의 책임' 사이의 관계는 좀 더 다층적이고 복잡하다. 그렇지만 그 복잡성도 '언론자유'의 기본적 가치가 존중되지 못한다면 모래 위의 집과 유사하다. 하버마스의 '공론의 장'이라는 것도 결국 언로가 유형,무형의 장애를 받는 상황에서는 구성자체가 유의미하지 못하다. 

“개성을 파멸시키는 것은, 그것이 어떤 이름으로 불리어도, 그것이 신의 의지나 인민의 명령을 강행하는 것이라고 공언된다고 해도, 모두 전제적이라고 할 수 있다. - 본문 142쪽 

존 스튜어트 밀은 앞서 말한 칼 폴라니기 비판한 고전파 경제학자 제임스 밀의 아들이다. 스튜어트 밀는 어려서부터 영재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그는 처음에는 자유주의적 공리주의자로 출발해서 후에는 페이비어니즘에 영향을 주었다고 알고 있다.  

 

<큐복음서의 민중신학>이다. 큐복음서란 무엇인가? 

공관복음 중에서 성서학자들의 치밀한 텍스트 분석에 의하면 마가복음이 먼저 성립하였고, 마태와 누가복음은 마가복음과 여타 전승들을 종합하여 편집 기술되었다고 한다. 마태와 누가복음에서 중복되는 부분을 적출하여, 여기서 마가에서 온 것을 제외하면 마태와 누가가 참고로 한 공통의 자료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을 독일어 자료를 뜻하는 크벨레(Quelle)의 첫 글자를 따서 Q자료라 불렀는데 이 Q자료는 예수의 어록으로만 되어있다. 그런데 1945년 도마복음서라는 어록복음서가 이집트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되어 그동안 가설적으로만 논의되던 Q자료가 세계 신학계에서 큐복음서라는 사실적 복음서로 인정되게 되었다.

나는 꽤 오래 교회를 다녔고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래 교회와 절연했다. 물론 내가 교회를 그만둘때는 '예수=교회'라는 도구적 방법을 썼다. 지금 나는 '문화적으로 종교'를 이해하는 입장이다. 나는 사람들이 한국 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그것을 '예수'에게까지 투사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파르마코스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뿐만이 아니라 애꿋게도 기독교인들이 만든 역사에 의해 또다른 희생양이 되고 있는 것 같다. 공자, 석가를 대하듯 예수를 대하면 된다. 종교성이 없어도 그런 스승으로 이해한다면 '예수=교회'라는 식의 비판으로 부터는 탈피할 수 있다. 예수땜에 이 모양 이 꼴이 된거 아니다. 그런면에서 예전에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에서 예수를 재조명한 방식은 내게 반가왔다. 저자 김명수 교수는 부산 경성대에 있는 걸로 안다. 안병무 선생의 맥을 잇고 있다는 홍보문구가 눈에 띈다.  
  

^^ 사실 내가 가장 읽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대충 대충 넘겨보는 책이 육아책이다. 육아책은 엄마 몫이라는 식의 촌스러운 생각은 넘어선지 오래다. 곧 두 남자 아이의 아빠가 될 내게 <남자 아이 심리백과>는 유용해 보인다. 혹시 모른다. 이 책을 보다가 내 안에 살아 있는 어떤 소년을 만나게 될지도.  

예찬이는 요즘 어린이집을 다니고,으젓하고, 섬세하다. 식물과 자동차를 사랑하고, 머리 깍기를 싫어한다. 말은 또래 아이들보다 6개월 이상은 빠른 것 같다. 어린이집 선생님들이 예찬이가 던지는 표현들을 재미있어하면서 일기장에 써서 보내주신다. 아이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재미있고 놀라운 경험이지만 한편으로는 이제 강제로는 뭔가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때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본적 육아태도가 '대화'이다보니 이제는 대충 그냥 따라왔으면 좋겠는데 하는때도 대화를 계속해야 한다. 인내와 체력....그리고 사랑이 필수다. 

 발마스님이 번역한 <마르크스와 해체>가 나왔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출간 이후 전개된 논쟁의 전후과정을 온전하게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번역ㆍ출간한 책이다. 즉 원래 미국의 문학이론가였던 마이클 스프린커가 <마르크스의 유령들> 출간을 기회로 삼아 영미권 및 유럽의 저명한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데리다 사이의 대화의 장으로서 출간했던 <유령의 모습을 그리기>(Ghostly Demarcations, 1999)라는 책에 실린 글들을 뽑아서 묶은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읽게 될 것 같지는 않다. 데리다의 개념들을 조각 조각아는 수준이니 먼저 데리다를 공부하고 볼 생각이다. 발마스님의 번역한 책들 중 유명한 데리다의 <법의 힙>, 발리바르의 <스피노자와 정치> 를 지난 주 헌책방에 갔다가 봤다.모두 새 책이나 다를 바 없었다. 지금 당장 밀린 것들과 그 책들 사이에서 무지 고민했다.결국 당장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들었다 놨다만 하다 놓고 왔는데 ...돌아서고 나니 그새 팔려나갔을 것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 (결국 그래서 사두게 되면  앞서 말한 병목이 쌓이게 되는거다. 으...둘다 새 책인데 50% 였는데...으으 자꾸 생각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