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커 무섭네. .. .. ...  

10만명의 군중보다 2-3명의 해커의 파괴력이 크다...뭐 이런 말을 해커들끼리 소영웅주의 삼아 한다던데... 

'장점이 가장 큰 약점'이라는 '역설의 미학'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게 이런 사건들 아닐까 싶다.네트워크의 편리함은 또한 네트워크의 단점이 되기도 한다. 어느 한 구석에서 문제가 생기면 모든 시스템 자체가 버벅 거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정치적 용어로 이런 역설을 표현하면 권력이 사방에 있으면 사방에 모두 투쟁의 장이 형성되는 것이라고나 할까.. 물론 이번 해킹에 어떤 의도가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전통적인 해커들의 영웅주의적 장난일 수도 있고 또다른 의미일 수도 있다. 최소한 정치적으로 의미가 있으려면 해커가 그 의미를 밝히지 않는한 추측이 전부일게다. 또한 이것이 일종의 테러라면 테러로서의 의미를 밝히지 않는한 아무런 정치적 메시지도 담지 않는 비정치적인 것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모든 테러리스트들은 어떤 테러행위가 자기들이 소행이며 어떤 의미를 담고 있다고 명확히 밝히는 성명을 내곤한다. 테러 자체는 그저 수단이며 자기들의 정치적 메시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 말이다.  

어쨋거나 '핵티비즘'이라는 말로 해커들의 사회학적 의미를 표현하는 말이 있는데...그에 대한 평가를 둘째치고라도  네트워크 사회에서 파괴력이 대단한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듯 하다.알라딘에서 아무리 진보적인 인사들이 울부짖어도 콧방귀도 끼지 않을 법한 최시중 방통위원장 형님께서 이번 사건에 낯빛이 흙색으로 변했다.  

어디선가 TV뉴스 속에서 몇 꼭지를 장식하고 있는 버벅이는 정부관료와 테크니션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모종의 묘한 우월감같은 것이 들 법도 하다. 

그런데 해커보다 더 무서운 것도 있었으니...그건 요즘 욕먹는 KBS뉴스다. 우연히 오늘은 KBS뉴스와 MBC 뉴스를 동시에 봤다.  

KBS...미국도 난리. 미국은 해킹테러주모국으로 북한의 지목.물론 공식반응은 아니지만 미국측이 그렇게 보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뉴스아이템이 '북한 사이버 테러전력'은...이런 뉴스가 나온다. 

MBC....미국도 난리. 북한이 주도했을 가능성 제기 그러나 반박도 많음. 북한음모론에 이어 북한음모론에 대한 미국 내의 반박론. ... 

해커도 무섭지만 KBS가 욕먹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미국 내의 일부에서의 추측성 주장을 사실이라고 가정하고  북한의 사이버 전투력과 전투의지와 관련된 보도를 낸다는 것은 -특종을 노린 기사가 아니었다면,그런데 이건 특종이라는 사건의 선보도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아이템 아닌가?-일단 너무 앞서가거나 너무 냄새가 나는 것 아닌가? KBS 보도국 내에서 이와관련되서 왈가왈부가 많았을 것 같다만...하여간 KBS가 욕먹는 이유가 달리 있는게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장마....나는 '장마가 시작될 무렵'이란 말에 묘한 매력을 느낀다. 왠지 그 시간이 블랙홀처럼 많은 기억들과 시간들을 흡입해버릴 것 같아서... 장마철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저기 먼 하늘에서 불길한 느린 걸음으로 다가오는 구름...그리고 그 아래 도시....또 소음들이 묻히게 될 비의 침묵들...하여간 '장마가 시작될 무렵' 이란 말은- 시기적으로 2009년의 장마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내가 요맘때 사는 책에 많이 써놓았던 글이다. 

장마...조금은 서늘한 곳에 앉아서 하릴 없는 비를 보며 하루 종일 음악이나 듣고 싶다. 시인 김갑수가 자기 작업실을 만들고 '줄라이홀'이라고 이름지었다던데...내게도 그런 동굴이 하나 있으면 좋겠다.  

예전에 일 때문에 가본적이 있는 언양의 한 한옥집이 생각난다. 마을 제일 높은 곳에 한옥을 한채 지어놓고 초가집,황토집 짓는 일에 전력을 다하시는 분의 집이었다. 그 집 대청 마루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산 빛이 오늘 장맛비에는 어떤 빛깔을 띨까? 

조용히 음악이나 듣고 싶은 날이다.  

오늘 낮에 예찬이는 갑자기 병원으로 실려가고- 잘 놀다가 졸리다고 하더니 열이 39.5 가까이 올랐단다. 점심 시간에 회사에서 총알 같이 병원에 갔더니 이미 치료받고 나왔더라. 어린이집 원장에 안겨 있는데, 런닝과 팬티만 입고 커다란 수건을 둘러쓰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알아보는 듯 한 눈빛을 보내더니만 이내 픽쓰러져 눈을 감고 잔다. 

아이를 집에 내려놓고 잠든 모습을 보고 다시 회사로 왔다.  아내는 최근에 둘째 재원이에게 신경쓰느라 예찬이에 못해준 것이 더 미안해서 자는 아이를 보고 눈물을 훌쩍인다. 

낮에 전화를 걸었더니...자는 모습이 그래도 아까 보다는 좀 편안해 보인다고 하니 안심이다. 하지만 오늘 밤은 지루하고 힘든 밤이 될 것같다.  

...장마철이다. 

슈베르트를 듣는다. 그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 D960. 얼마전에 마우리치오 폴리니의 연주를 들으며 비오는 날 출근했었다. 이 연주는 알프레드 브렌델이다. ECM에서 나온 아파나시예프의 연주-단 한곡만 수록된 것이 안타깝지만-도 상당히 훌륭하다.  

 

...책이 있다. 장마철에 읽어도 좋을 책이다. 

내가 좋아하는 국내 아티스트는 상당히 한정적이다. 과거에는 그래도 꽤 있었는데 점점 줄어든다. 젊은 아티스트들 중에서 한번에 관심을 끌었던 친구가 '루시드 폴'이다. 이미 오래되었는데 영화<버스정류장>에 나온 그의 음악을 듣고 그를 기억했다. 그의 음반은 이후 상당히 오랜 시간 뒤에야 나왔다. 

어제는 퇴근하면서 루시드 폴의 2007년 음반을 들었다. 최근에 그와 마종기 시인이 함께 나눈 편지글이 책으로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퇴계,고봉만큼은 아니더라도 이런 만남은 참 매혹적이다. 내겐 그런 편지를 나눌 사람이 있는가? S형....^^ 그가 황사에 떠밀려 다시 한국으로 오지 않았으면 북경-부산간의 편지가 좀 더 오래 이어질 수 있었을지 모른다. 요즘은 그냥 전화로 한다. 

그냥 팬레터라도 좀 쓰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무언가 이야기가 될 것 같은...내가 무언가 그를 통해 성장할 수 있을 것 같은... 하여간 마종기도 조윤석도 좋겠다. 그런 친구가 있는 건 삶이 풍요로와 질 수 있는 여러 조건들 중에 하나다.  

루시드 폴- 사람이었네 

장마철에 끈끈한데 무슨 판소리냐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나는 판소리가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나의 음악기행 중 최근 놀고 있는 마당이 국악이다. 주로 기악곡 중심으로 즉 산조들도 많이 듣지만 가장 긴 시선을 꼽고 있는 장르는 판소리다. 너무 훌륭한 음악이다. 판소리 음반이 비록 절판된게 많긴 하지만 아마 하나 둘 사모을게 뻔하다. 곧 부산에 있는 국립국악원 부산지사 자료실 방문도 한번 해봐야겠다. 내가 요즘 가장 즐겨듣는 음반은 판소리계에서는 누구나 다 아는 명반, <빅터판 춘향가>이다. 정정렬, 임방울, 이화중선, 박녹주, 김소희가 노래한다.  떨어지는 빗소리와 함께 듣는 이 절대 고수들의 향연이란....이런 글을 보고 또 쾡하고 한마디 건네기좋아하는 자들을 미리 생각해 내가 하고 싶은 말 중 하나가 있는데, 그건 이미 진회숙이 <나비야 청산가자>에서  다 말했다.(서로 대면대면한다는 유명한 진씨 가문의 장녀다) 

"나는 '우리것은 소중한 것이여'의 맹목적 내셔널리즘이나 '우리소리 우습게 보지마라'식의 피해의식 혹은 사라져가는 옛것에 대한 인류학적 관심은 우리 음악에 접근하는 바람직한 방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진회숙이 생각할 때 '우리 음악은 그것 자체로 귀중한 예술적 가치'가 있고 '클래식음악을 좋아하는 것과 같은 이유로 국악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내가 더하고 뺄말이 없다.  

임방울-쑥대머리(판소리 춘향가 중 옥중 대목에 나오는 장면이다. 임방울은 일제시대 최고인기 가객이었으며 이곡은 그의 대표적 레퍼토리다. '임방울=쑥대머리'로 기억될 정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통적인 광고론에서는 3B 라는게 있다. 자본주의가 못팔아 먹는 것은 없는데-자본주의 마저도 팔아먹을 수 있다- 물도 예외가 아니다. 새롭게 태어난 영화<007>의 적은 '물'을 자원으로 확보하여 독점 수익을 얻어내려는 세력으로 그려진다. 

그러나....먼저 광고보고 좀 웃고 좀 귀여워라하고.... 

그 다음에는 거리를 두고 '생각하기' 한 번 해보자. 중간에 살짝 부딪혀 주는 센스가...가장 귀엽다. 하지만 CG아기는 실물 아기보다 징그럽긴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극의 탄생 대우고전총서 21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박찬국 옮김 / 아카넷 / 200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의 형제들이여, 그대들의 가슴을 펴라.활짝, 더 활짝! 그리고 그대들의 다리도 잊지마라! 그대들의 다리도 들어올려라,그대들 훌륭한 무용가들이여,그대들이 물구나무를 선다면 더욱 좋으련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4부

 니체의 초기저작인 <비극의 탄생>은 고전 그리스 비극의 탄생과 몰락에 대한 이야기이다. 물론 이 책이 그런 문헌학적인 가치만 있었다면 고전 목록표에 오르기 보다는 전문가들의 도록에나 올랐을 것이다. 이 책에서 니체는 그리스 비극의 성격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세계와 예술,그리고 예술을 이해하는 유력한 방식을 강력히 피력한다.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보여준 예술론과 개념적 용어들은 이 책이 씌여진지 100년이 넘은 시점메도 사람들의 귀를 현혹하고 아이디어 고갈에 시달리는 저널리스트들의 타자기 위에서 그럴싸한 문화기사의 머릿말을 위해 쓰여진다. <비극의 탄생>에 나와서 이제는 보편명사가 되어버린 개념어가 '디오니소스적 예술'과 '아폴론적 예술'이다. 니체가 그리스 비극의 계보를 따지면서 적용한 개념이다. 이 말의 상식적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분히 이항적인 분류법으로 구분하는 고등학교 참고서의 설명도 아직 기억이 난다. 실제로 그렇게 구분할 수있는 대목이 있긴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 만은 아니다. 오히려 니체가 강조하는 방점은 '상호보충적'인데 있다. 그런고로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을 대립적 개념으로 하나는 '감성 대 지성' 또는 '비조형대 조형' '직관 대 분석' 이런 식으로 나누어 보는 것의 유용성보다 이 둘을 썀쌍둥이로 보는 것이, 그 점을 강조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종합의 유용성은 여전하다. 현역에서 은퇴를 선언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브렌델은 <그라모폰지>와의 인터뷰에서 훌륭한 모차르트 연주를 위한 방법으로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말하기와 노래하기를 동시에 고려하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결국 애써 비유하자면 말하기란 아폴론의 것이고 노래하기란 디오니소스의 것이다. 이런 식으로 백여년이 지나도 니체식의 화법의 변용을 거쳐 여전히 유효하다.  

<비극의 탄생> 1장에 첫 문장은 그 중요성을 이렇게 말한다. 

"예술의 발전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과 결부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생식이 지속적으로 투쟁하면서 단지 화합하는 남녀 양성에의존하는것과 유사하다."  <비극의 탄생>

 그런데 '나누기 좋아하는 '이성은 그런 과정을 철저히 몰이해한다. 니체의 용어로 이야기 하자면 그것은 아폴론적 인간의 것이 아니라 소크라테스적 인간이 벌인 일이다. 니체는 소크라테스적 인간의 출현을 고대 그리스의 가장 중요한 변곡점으로 보는데, 그는 소크라테스적 인간을 이론적 인간이라고 칭한다. <비극의 탄생>은 물론이고 그 이후 벌어지는 근대/탈근대적 철학논쟁을 따라가다보면 니체의 '소크라테스적 인간', '이론적 인간'이 어떤 의미인지 조금 가닥이 잡힌다. 왜 니체가 포스트모던의 선구자로 불리는지 이해가 될 때 니체의 소크라테스적 인간의 의미가 명확해진다는 말이다. 하버마스가 '고대의 탐구 속에서 진리의 조각이나 찾아 해매는 인간들' 이라고 비난했던 자들의 첫번째 명단 속에 '니체'가 있다. 이런 비난의 무대 위에서 이야기하자면 계몽 이성의 강인한 신념, 니체의 용어를 빌자면 '이론적 낙관주의' 라고 할 만한 하버마스류가 '소크라테스적 인간'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니체에게는 철학이나 학문을 성찰하고 넘어서는 심미적인 미학의 태도가 중요하다. 그런데 하버마스는 -쉽게 말하자면- '미학'을 모른다. 니체에 대한 미학적 평가에서 중요한 부분은-니체가 과연 전통적 의미의 미학자였는지에 대한 논쟁은 있지만- 철학의 하위 개념으로서 미학,또는 재현이나 모방으로서의 예술을 삶의 본질을 이해하는 중요한 위치까지 올린 것이다. 혹자는 철학에 대한 예술의 우월성을 주장했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니체를 예술지상주의자,예술본질주의자 정도로 축소평가하려는 비판적 오용이 아닐까 싶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철학의 시녀로 살던 예술을 동등한 위치로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당연히 예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철학의 과잉기대를 줄이려는 것이 선구자의 방식들이기 때문이다. 어쨋거나 니체식으로 보자면  하버마스는 계몽 이성의 가능성을 위해 '세계를 인식 가능한 것' 으로 파악하고 이성을 통한 해결가능성을 낙관하는 자이다. 니체는 이런 전통의 기원에 소크라테스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천적 염세주의에 반해서 소크라테스는 이론적 낙천주의의 원형이다. 그는 사물의 본성을 철저하게 규명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지식과 인식에 만병통치약과 같은 효력이 있음을 인정하고 오류야말로 악 그 자체로서 파악한다. 저 근거들을 천착하고 가상과 오류에서 참된 인식을 분리해 내는 것이 소크라테스적 인간에게는 가장 고귀한 소명,유일하고 진정한 인간의 소명이라고 여겨졌다. 

물론 하버마스는 역으로'이성의 실천가능성'을 폄훼한 사람으로 니체를 지목한다. 이를 따라가면 결국 '포스트모던 논쟁의 전장'이 발견된다. 종군기자가 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그것보다 여기서는 니체의 소크라테스가 다분히 허구적이라는 것에 대한 평가는 언급해야겠다. 즉 니체는 소크라테스라는 철학자 개인-도망가라는데도 약먹고 죽은 그 인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신화의 종언을 선언한 사람들로 소크라테스와 에우리피테스 등을 들고 있는 니체인데 사실 소크라테스의 책을 읽어본다면 그의 이성이라는 것이 결국 신적인 진리 앞에 복속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신과 신화를 결코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적 인간' 이라고 하는 것은 -적이라는 말에 주목해야한다.-'계몽이성적 인간의 출현' 이라는 은유적 해석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이런 출현을 호메로스의 오딧세우스까지 올려보내기도 한다. 사이렌 신화에서 욕망과 환상을 거부하고 이성으로 자기보존하려는 오딧세우스말이다.

앞선 <비극의 탄생>인용 문장에서도 '가상과 오류에 대한...'이라는 말이 언급되는데, 니체에게 '가상'은 중요한 개념이다. 쇼펜하우어의 '표상' 개념을 이용하는 것으로 그는 우리가 감각적으로 경험하는 세계는 세계 자체가 아니라 세계의 현상이라고 보았다. 이런 개념을 니체에게로 끌어오면 예술은 '이중으로 매개된 가상' 즉 '가상의 가상'이 된다. 그 단초를 보여주는 문장이 이것이다.

"인간은 꿈의 세계를 산출한다는 점에서 완전한 예술가이다."  <비극의 탄생> 

  니체에에게 예술을 창조하는 두가지 기원은 '꿈과 도취'이다. 전자가 바로 아폴론의 기저가 되고 후자가 디오니소스의 것이다.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런 꿈의 세계에서 아름다운 가상을 구현하는데-그것이 바로 그리스의 신들이다- 이것이 조형예술의 전제가 된다. 그런데 이와 함께 현상의 인식이 무너질때 생기는 '전율'이라는 요소가 있다. 이것이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본질인 '도취'이다. 예술 형식으로 구분하자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음악'이다. 니체에게 세계의 심연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술이고 그리고 예술의 본체는 바로 '음악'이다. (불행하게도 그 음악이란 것이 문화산업이 만들어낸 소녀시대나 빅뱅이 아니라는 점...왜 음악이 다른 예술 장르들 중에서 가장 비모방적이며 본질적인 지는 미학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 필요하다.  이것이 음악이 다른 장르에 비해 니체처럼 본질적이다라는 뜻으로 이해될 필요는 없어도 최소한 차별적인 특수성이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세계는 그렇게 '아폴론적인 것' 과 '디오니소스적인 것' 그리고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혼합'을 통해 표상된다. 니체가 그리스 비극의 탄생에 독특한 해석을 가한것은 이 혼합의 결과물이 바로 '그리스 비극'이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은 최초의 혼돈시기-거인족과 신들의 전쟁인 티타노마키아부터- 아폴론적 중간계를 통해 혼동의 끔직함을 피했다. 그렇지만 이후에 디오니소스의 침입을 받았을때 그들은 순치라는 방식으로 디오니소스를 파괴하지 않고 체제 내에 포섭한다. 니체가 그리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화해'라고 불렀던 것이다. 니체는 그리스인들이 고뇌에 대한 민감성과 그들의 뛰어남으로 인해 세계의 본질을,심연을 이해했다고 본다. 그렇다면 그들은 절망하고 좌절하고 포기했을까? 그렇지 않다. 그리스인은 명랑하다. 그런데 니체가 말하는 명랑성은 사계절이 봄이어서 생기는 그런 명랑성이 아니다. 니체의 '그리스적 명랑성'은 겨울-봄을 이해하고 그 몰락과 창조의 원리는 체화해낸 자들의 명랑성이다.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이런 '실천적 허무주의'를  아폴론적인 형상으로-즉 무대 언어로- 상연하게 된다. 그리스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이런 구도 하에서 보자면 비극의 출발점과 핵심이 무엇인지 명확해진다. 그것은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다. 하지만 이 광기-축제의 심연을 직접 바라볼 수 있는가? 니체는 그럴 수 없다고 본다. 그리스인들이 아폴론적 형상을 이용하여 마치 비극의 중심에 아폴론적인 것이 있고 그것이 중심이며 기원으로 생각케 한다는 것이다. (태양을 맨눈으로 직접 바라볼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니체에게 실연으로서 그리스 비극에서 중심 모티브는 연기나 대사가 아니라 음악이며 그 음악이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실체이다. 음악은 마치 숨어 있는 배경처럼 느껴지지만 종국에가서 아폴론적인 것의 한계를 넘는 의미를 전달한다. 

음악은 세계의 본래적인 이념이며 연극은 이 이념의 반영,즉 그것의 개별화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 ... ... 비극에서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 사이의 난해한 관계는 진정 두 신의 형제결의라는 것으로 상징될 수 있을 것이다. 디오니소스는 아폴론의 언어로 말하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아폴론이 디오니소스의 말을 한다. 이와 함께 비극과 예술 일반이 최고의 목표가 달성된 것이다. <비극의 탄생>

물론 니체이 '예술-형이상학'은 니체 후기에 자기에 의해서 부정되고 한계가 지적되기도 한다. 니체가 독일문화 중흥의 기대로 그리스 비극의 적자로 이해한 바그너에 대해 <비극의 탄생>의 재서문인 <자기비판의 시도>에서 바그너를 폐기했듯이 말이다. 

우리는 음악이 직접 내면에 말을 걸며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착각한다. 음악은 의지에 대해서도 사물들 자체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그런 것은 내면적인 삶의 전영역을 음악의 상징성이 지배한 시대에에 비로서 지성이 꿈꿀 수 있었떤 것이다. 지성 자체가 이런한 의미심장함을 음향 속에 집어넣었던것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권 

앞서 언급했듯이 비극은 그렇게 시작해서 소크라테스적 인간들의 출현으로 몰락한다. 비극의 계보 속에서는 에우리피데스에 있어서 신화의 해체와 낙관주의가 드러난다는게 니체의 설명이다. 그는 근대의 전형을 형성한 '이성중심주의의 낙관성'을 '알렉산드리아 명랑성'이라고 칭한다. 그에 따르면 근대인들은 모두 알렉산드리아적 명랑성의 그물망 속에 놓여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런 그물망을 깨기 위해 니체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비극의 탄생>에서는 종교개혁,바그너로 상징되는 독일문화의 깨어남을 요구하고 있는데-그런면에서 니체는 반계몽주의자였지만 문화적으로는 다시 계몽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좀 더 보편적 문장을 찾자면 이것이될 터이다. <비극의 탄생>에서 인기있는 말 중에 하나이다. 

"삶과 세계는 미학적 현상으로서만 정당화된다" <비극의 탄생> 

문장은 짧지만 그 의미를 이해하기란 그다지 쉬운 말은 아니다. 수많은 해석이 가능할터인데,최소한 탈근대론 언저리에 있는 학자들은 '미학'과 '삶'의 연동에 관심이 높다. 푸코같은 이들이 "당신의 삶이 예술이 되게 하라." 라고 말했다면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니체는 그리스인들인 추악함과 부조화마저도 예술적 유희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직접적 파악될 수 있는 것이며, 이는 음악에서의 불협화음의 방식과 유사하다는 점을 말한다. 니체는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언급한다. 어떤 의미에서 니체와 여러모로 유사한 아도르노는 쇤베르크에서 예술의 회생가능성, 세계를 버틸수 있는 힘을 찾았다. (내가 아직 쇤베르크를 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여러번 이야기했다.) 협화음의 세상-즉 이론적 낙관주의의 세상-에서는 디오니소스적 밤와 세계와 어둠의 세계가 움을 틀 자리가 없다. 그렇지만 니체에겐 이런 '몰락'의 이미지와 변화의 힘들이 모든 창조의 근원이다. 이런 불협화음의 이미지가 디오니소스적 음악의 한 모습이다.

"그대들은 나처럼 존재하라! 현상의 끊임없는 변천 속에서 영원히 창조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생존하도록 영원히 강제하며,현상의 이러한 변천에 영원히 만족하는 근원적인 어머니인 나를!" 

디오니소소의 신화중에 하나는 디오니소스가 여덟조각으로 찟겨졌다가 다시 사는 영원한 창조성의 상징으로 그려진다. 창조와 쾌락과 생산의 신...디오니소스. vivo ergo cogito ! (나는 살아있다.고로 생각한다.) 사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서 중요한 것은 니체가 그리스 비극의 문헌학적 고증을 얼마나 철저히 해냈는가가 아니다. 니체의 최초 작품으로 그가 이후에 도달하는 철학적 세계의 맹아들이 <비극의 탄생>에 숨어있다는 점이다. 대략 니체사상을 요약하는 말이 '영원회귀','초인',' 디오니소스' 뭐 이런 것들인데....<비극의 탄생>을 눈여겨 보면 봄철 들판에서 보는 민들레처럼 그것들이 보인다.  

박찬국 역의 <비극의 탄생>은 역자해제가 60여페이지에 이른다. 주로 1,2장을 중심으로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 인 것의 개념과 비극의 탄생과 몰락을 둘러싼 대립물들을 비교적 친절하게 설명해놓고 있다. 따라서 과거 <비극의 탄생>을 읽었던 독자라면-최소한 <비극의 탄생> 재발견을 위함이 아니라면- 역자 해제만으로도 지난 기억을 되짚어볼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요즘은 밤 10시에 잔다. 처녀총각들은 '어떻게 사람이 10시 이전에 자요?'라고 물을 것이다. 나는 '뭐 그럴 수도 있지' 하는 입장이어서 처녀총각때도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다만, 나의 최근 취짐시간을 들은 내 주변의 다수의 처녀총각들은 그렇게 말한다. 이런 답변은 언젠가 내 선배가 '영화관 못가본지 2년째이다.' 라고 했을 때의 반응과 유사하다.  

"어유...완전 비문화인이네.어떻게 영화관을 2년 동안이나 안가요. 나이도 젊은데.." 

좀 여유있게 생각해보거나 자기가 하지못한 경험이나 세계에 대해 조금만 더 겸허하면 될 것인데....하여간...어디나 그렇다. 

내가 밤 10시에 자는 이유는 예찬이를 재워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를 씻기고 동화책을 두 권 읽어주고 누워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잠시하다가...."예찬아 이제 눈감아" 하면 대략 10시 전후일 것이다. 그리고 나도 잠든다. 새벽에 아이가 찡찡거리면 나도 깨기 때문에 그 때 자야만 한다. 아이들은 자면서 이야기도 하고 노래도하고 찡찡거리기도 하고..갑자기 벌떡 일어나기도 하고...오줌 누러가기도 하고...하여간 어른들의 수면과 다르다.( 정치철학에서의 '차이'를 인정하기 만큼 아이의 '차이'를 인정하는데도 시간이 걸린다. 어른들은-특히 남자들은,고로 나도 가끔 그러듯이- 아이를 '작은 어른'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오늘 밤은 아이가 아니라 모기때문에 1시 30분에 깻다. 종종 있는 일이다. 모기를 잡기 위해 아이를 거실로 들어나르고 파리채로 모기를 잡았다.(파리채는 모기도 잡고,벌레도 잡는데 언제나 '파리'라는 특정종의 이름을 뒤집어쓰고 있다. 이건 분명히 모기 입장에서 폭력적인 파시즘 용어다. 분명히 언어의 지시에서 드러나듯 파리들에 대한 우생학적 음모가 있거나 파리채를 매개로 한 기술문명하의 근대적 배제가 있다. 이건 파시즘 양상이다. 남발되는 파시즘...)

벽에 붙은 녀석을 탁하고 치니..다음은 상상하시라. 이보다 더 잔혹할 순 없다. 쿠엔틴타란티노도 울고갈 유혈낭자극이다. 착달라 붙은 모기의 사체를 하드보일드한 표정을 한 사내가 물티슈를 쓰윽 꺼내서 싹하고 닦았다. 졸린눈을 비비며 모기의 사망시간을 확인한다. 새벽 1시 40분...사망원인...강한 외부 타격에 의한 내부장기 파열 ..추정. 

다시 자려고 아이를 데리고 와서 누웠다. 

어...잠이 안온다. 말똥...말똥... 

그리고 여기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반전' 또는 '전복' 또는 '사선 긋기' 또는 '영구혁명' 또는 '불확실성' 또는 '사적 유물론의 패배' 같은 멋진 사건이 발생한다. 

왱...왱.... 그렇다. 다른 모기가 있었다.  

이런 저항의 항구성. 모기채가 있는 곳엔 저항이 있다.!!  이런 다중들의  비중심적이고 리좀적인 공격... 단결된 모기는 승리하리라!! 하여간 나는 모기의 이런 반전을 좋아한다.  모기가 한마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첫번째 나의 소망이자 환상이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그리고 나는 이런 반전에 흐뭇해한다. 갸륵한 모기...소크라테스 같은 모기...환등상같은 모기...1그람의 철학자 모스키토...극락왕생을 시켜주마...너의 운명은 그것이다. 신 역시 운명의 여신과의 약속을 어길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나의 실패다. 운명의 여신은 아직 모기의 운명을 정하지 않았다. 결국 모기와의 승부는 일단 나의 퇴각이다. 나는 잘 안쓰는 홈메트를 찾아내서...자는 예찬이 발 아래께에 두고...다시 잠을 청한다. 뒤척인다. 왼쪽 오른쪽...위로 아래로...창문을 열었다가 선풍기를 틀었다가..찡찡이는 예찬이의 다리를 주물렀다가...

모기의 철학적 공격이 설레여서였는지...여전히 잠은 안오고...지금 켜 있는 모니터 하단 아래있는 디지털 시계가 가르치고 있는 시각은 오전 3시 33분

...아....어제는 예찬이의 3번째 생일이었습니다..축하...'3파티'를 했지요. 숫자 초를 사서 한번 논 적있었더니..예전에 예찬이가 1미터 되었던 기념으로 '1파티'를 했더니 얼마전 부터 3살 생일된다고 하니 '3파티'를 하자고 합디다. 그래서 '3파티'입니다. 예찬이가 아주 아주 건강하게 나 없어도 한 90파티-지금 기준으로는 장수니까- 했으면 합니다. 그때면 예찬이의 손자 손녀들이 예찬이 할아버리를 축하해주겠지요. 전 늙은 아들을 하늘에서 바라보면서 '야..너도 이제 오래됐구나.축하한다. 90살 생일'....뭐 이러지 않을까..^^ .... 

아...또 한가지...예찬이 동생 이름은 '재원'이로 정했습니다. 출생신고 기일을 하루 남기고 정했습니다. 어려웠고 이름과 관련된 희안한 꿈을 꾸어서-최소한 몽은 아닙니다- 이름을 바꾸고 다시 정하느라 늦었습니다. 과학과 이성의 시대에 잘지만 전 그런 것들의 가치를 부분부분 존중합니다. 거기에는 어떤 '신화적 지혜' 또는 '민중적 경험의 지혜' 같은 것들이 있어보입니다. 

...또 무슨 이야기해야하지..아.. 책 

이번주에 관심이 가는 책이 몇 권 있네요.  로쟈님의 페이퍼에 이미 등장한 책들이지만.. 

 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책은 라클라우. 지젝. 버틀러의 대담집인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이네요. 이미 로쟈님의 페이퍼에 언급된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바빠서 살짝 보고 책의 존재만 확인했습니다. 

라클라우,무페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전략>은 절판되어서 못봤지만 읽고 싶었던 책이었습니다. 포스트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주의도 아니다..라는 비난을 불러 일으켰던 책이고 그 책의 주요한 생각들은 다른 저작들을 통해서 약간 씩 훔쳐읽었습니다.  

이 책에 대한 한겨레 고명섭기자의 리뷰 역시 지젝/라클라우- 이 둘은 서로 서평도 써주고 칭찬도 하다가 어느지점에서 갈라지기도 한 사람들인데-의 논쟁의 중심축으로 그런 도상 위에 놓고 있는 듯 합니다.  

 

재번역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해서 작년 말부터 기대했던 칼 폴라니의<거대한 전환>(거대한 변환이라고 하기도 함)이 나왔군요. 요즘 출판사 길에서 꾸준히 나오는 고키토 총서네요.  

칼 폴라니가 최근 다시 한국에서 각광을 받는 것은 사실 지극히 한국적인 정서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나친 시장편형이 두드러지다 보니 그에 대한 교정자가 필요했고 거기에 칼 폴라니가 부합한거지요. 너무 많이 말하여지거나 이젠 아무도 말하지 않는 맑스보다 사람들에게 신선할 수도 있을테니...지난 번에 읽었던 스텐필드의 <칼 폴라니의 경제사상>은 사실 이 책을 읽.,기 위한 사전 독서였던 셈이지요. 전체적인 조망을 하는데 도움이 되었구,,,제도주의 학파의 흐름 또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절판이라는..이 책은 폴라니의 소개에 열심이셨던 역자의 번역이라 믿음이 가기도 합니다.  

최근에 지그문트 바우먼의 <액체근대>를 보고 있는데 1장 '해방' 편에 보면 폴라니의 'embed'라는 개념이 언급됩니다. 일단 액체근대의 개인성과 유동성이라는 토대를 파악하는-인정이 아니라 개념적 인식을 위한-차원에서 보자면 '재영토화'하려는 공동체주의자들의 희망을 비판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1장 후반부에 가면 바우먼이 정말 이야기하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부분이 비로소 나타나지만 말입니다. 그가 요구하는 비판이론의 현재적 재구성은 지금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말이지요. 한국의 과제는 비판이론이 제기했던 고전적 계몽이성과 근대성으로부터의 해방과 함께 소비자본주의하의 개인화로 정리되는 탈근대적 정치해체에 대한 이중적 도전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현재 1장 후반부를 읽고 있는데 읽어볼 만한 책입니다. 재미있습니다. 포스트모던/모던의 해묵은 이야기를 다시 정리하는 느낌이 들긴하지만....분석을 서술하는 방식과 비유들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쇼펜하우어에게 따로 큰 관심이 있지는 않습니다만... 니체의 <비극의 탄생>은 쇼펜하우어의 이 책이 없었다면 나오기 힘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초기 니체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두 사람을 꼽으라면 쇼펜하우어와 바그너로 정리됩니다. <비극의 탄생>에는 그래서 이 책에 대한 언급니 많지요. 리뷰를 써야지 써야지 하면서 미루어두고 있는 <비극의 탄생>을 정리하고 글을 써야겠습니다.  

쇼펜하우어는 흔히 허무주의자 정도로 알려져있는데 그 허무주의는 싸구려 '귀찮아 허무주의' '나몰라 허무주의'와는 차원이 다른 존재론적 심연을 건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면에서라면 저 역시 분명히 허무주의자일겝니다. (허무주의는 극복해야할 나쁜 것으로만 배운 소크라테스주의적 이론형인간이라면 그 경직성으로 인해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할겝니다.  <인문학서재>에서 로쟈님이 시를 읽지 않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랬나요...어..누가그랬지..로쟈 아니었나..하여간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는데...이런 저질 기억력하고는...) 특히 니체는 '힘'이라는 부분에 방점을 찍으면서 '강인한 허무주의'라는 돌파구를 강조하지요. 세계의 밑바닥엔 무엇이 있을까요? 지젝의 실재계와 사라마구의 실재계는 온통 하얗습니다. 제가 가끔 인용하는 <리어왕>의 구절은 "난 눈을 뜨고 있을때  더 잘 걸려넘어졌다." 라는 겁니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는 장님이 되어서 이제 무엇을 보았을까요?  캄캄한데 뭘 보냐구요...니체의 <비극의 탄생> 어떤 대목에는 오이디푸스가 뭘 봤는지 설명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어딘가에 있는데...역시 저질 기억력ㅋㅋ 

하여간 그렇구요..  

오랜만에 한국소설입니다. 제겐 점점 멀어지고 있는 한국소설인데...물론 그래도 간간히 요즘 트렌드는 어떤가 싶어서 한번씩 보긴합니다. 

이 책은 사실 이미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잘 생겼다는 것을 안 저자가 자기 사진을 넣어서-사실 책 날개에 사진이 있습니다-제게 보내준거지요. 자랑하려구요.ㅋㅋ 책은 아직 읽지 못했지만 얇은 두께에 비해 다루는 주제는 결코 얇지 않을 듯 합니다. 성찰적 깊이를 포기하거나 탈각하여 유희만이 남겨진 희희낙낙 포스트모던 소설들에 식상해진 독자라면 ,또는 소비자본주의시대의 칙릿이 결국 트랜스포머한 하이틴 로맨스의 환등이라면....발뒤꿈치쪽을 베는 상처에 더 눈이 가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원래 아픈곳에 손이 가기 마련인지라... 

 이 책이 뒤에 평론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치열한 현실을 진정한 언어로 그릴 줄 아는 작가 김이설
가족이라는 고통스러운 '운명', 그 너머를 꿈꾸는 '새로운 이야기(異說)' 

....지금 시각 4시 40분...어쩌지..책 읽거나 음악들으려 하지 말고 곱게 자려고 노력하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