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밤 10시에 잔다. 처녀총각들은 '어떻게 사람이 10시 이전에 자요?'라고 물을 것이다. 나는 '뭐 그럴 수도 있지' 하는 입장이어서 처녀총각때도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다만, 나의 최근 취짐시간을 들은 내 주변의 다수의 처녀총각들은 그렇게 말한다. 이런 답변은 언젠가 내 선배가 '영화관 못가본지 2년째이다.' 라고 했을 때의 반응과 유사하다.  

"어유...완전 비문화인이네.어떻게 영화관을 2년 동안이나 안가요. 나이도 젊은데.." 

좀 여유있게 생각해보거나 자기가 하지못한 경험이나 세계에 대해 조금만 더 겸허하면 될 것인데....하여간...어디나 그렇다. 

내가 밤 10시에 자는 이유는 예찬이를 재워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를 씻기고 동화책을 두 권 읽어주고 누워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잠시하다가...."예찬아 이제 눈감아" 하면 대략 10시 전후일 것이다. 그리고 나도 잠든다. 새벽에 아이가 찡찡거리면 나도 깨기 때문에 그 때 자야만 한다. 아이들은 자면서 이야기도 하고 노래도하고 찡찡거리기도 하고..갑자기 벌떡 일어나기도 하고...오줌 누러가기도 하고...하여간 어른들의 수면과 다르다.( 정치철학에서의 '차이'를 인정하기 만큼 아이의 '차이'를 인정하는데도 시간이 걸린다. 어른들은-특히 남자들은,고로 나도 가끔 그러듯이- 아이를 '작은 어른'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오늘 밤은 아이가 아니라 모기때문에 1시 30분에 깻다. 종종 있는 일이다. 모기를 잡기 위해 아이를 거실로 들어나르고 파리채로 모기를 잡았다.(파리채는 모기도 잡고,벌레도 잡는데 언제나 '파리'라는 특정종의 이름을 뒤집어쓰고 있다. 이건 분명히 모기 입장에서 폭력적인 파시즘 용어다. 분명히 언어의 지시에서 드러나듯 파리들에 대한 우생학적 음모가 있거나 파리채를 매개로 한 기술문명하의 근대적 배제가 있다. 이건 파시즘 양상이다. 남발되는 파시즘...)

벽에 붙은 녀석을 탁하고 치니..다음은 상상하시라. 이보다 더 잔혹할 순 없다. 쿠엔틴타란티노도 울고갈 유혈낭자극이다. 착달라 붙은 모기의 사체를 하드보일드한 표정을 한 사내가 물티슈를 쓰윽 꺼내서 싹하고 닦았다. 졸린눈을 비비며 모기의 사망시간을 확인한다. 새벽 1시 40분...사망원인...강한 외부 타격에 의한 내부장기 파열 ..추정. 

다시 자려고 아이를 데리고 와서 누웠다. 

어...잠이 안온다. 말똥...말똥... 

그리고 여기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반전' 또는 '전복' 또는 '사선 긋기' 또는 '영구혁명' 또는 '불확실성' 또는 '사적 유물론의 패배' 같은 멋진 사건이 발생한다. 

왱...왱.... 그렇다. 다른 모기가 있었다.  

이런 저항의 항구성. 모기채가 있는 곳엔 저항이 있다.!!  이런 다중들의  비중심적이고 리좀적인 공격... 단결된 모기는 승리하리라!! 하여간 나는 모기의 이런 반전을 좋아한다.  모기가 한마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첫번째 나의 소망이자 환상이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그리고 나는 이런 반전에 흐뭇해한다. 갸륵한 모기...소크라테스 같은 모기...환등상같은 모기...1그람의 철학자 모스키토...극락왕생을 시켜주마...너의 운명은 그것이다. 신 역시 운명의 여신과의 약속을 어길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나의 실패다. 운명의 여신은 아직 모기의 운명을 정하지 않았다. 결국 모기와의 승부는 일단 나의 퇴각이다. 나는 잘 안쓰는 홈메트를 찾아내서...자는 예찬이 발 아래께에 두고...다시 잠을 청한다. 뒤척인다. 왼쪽 오른쪽...위로 아래로...창문을 열었다가 선풍기를 틀었다가..찡찡이는 예찬이의 다리를 주물렀다가...

모기의 철학적 공격이 설레여서였는지...여전히 잠은 안오고...지금 켜 있는 모니터 하단 아래있는 디지털 시계가 가르치고 있는 시각은 오전 3시 33분

...아....어제는 예찬이의 3번째 생일이었습니다..축하...'3파티'를 했지요. 숫자 초를 사서 한번 논 적있었더니..예전에 예찬이가 1미터 되었던 기념으로 '1파티'를 했더니 얼마전 부터 3살 생일된다고 하니 '3파티'를 하자고 합디다. 그래서 '3파티'입니다. 예찬이가 아주 아주 건강하게 나 없어도 한 90파티-지금 기준으로는 장수니까- 했으면 합니다. 그때면 예찬이의 손자 손녀들이 예찬이 할아버리를 축하해주겠지요. 전 늙은 아들을 하늘에서 바라보면서 '야..너도 이제 오래됐구나.축하한다. 90살 생일'....뭐 이러지 않을까..^^ .... 

아...또 한가지...예찬이 동생 이름은 '재원'이로 정했습니다. 출생신고 기일을 하루 남기고 정했습니다. 어려웠고 이름과 관련된 희안한 꿈을 꾸어서-최소한 몽은 아닙니다- 이름을 바꾸고 다시 정하느라 늦었습니다. 과학과 이성의 시대에 잘지만 전 그런 것들의 가치를 부분부분 존중합니다. 거기에는 어떤 '신화적 지혜' 또는 '민중적 경험의 지혜' 같은 것들이 있어보입니다. 

...또 무슨 이야기해야하지..아.. 책 

이번주에 관심이 가는 책이 몇 권 있네요.  로쟈님의 페이퍼에 이미 등장한 책들이지만.. 

 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책은 라클라우. 지젝. 버틀러의 대담집인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이네요. 이미 로쟈님의 페이퍼에 언급된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바빠서 살짝 보고 책의 존재만 확인했습니다. 

라클라우,무페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전략>은 절판되어서 못봤지만 읽고 싶었던 책이었습니다. 포스트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주의도 아니다..라는 비난을 불러 일으켰던 책이고 그 책의 주요한 생각들은 다른 저작들을 통해서 약간 씩 훔쳐읽었습니다.  

이 책에 대한 한겨레 고명섭기자의 리뷰 역시 지젝/라클라우- 이 둘은 서로 서평도 써주고 칭찬도 하다가 어느지점에서 갈라지기도 한 사람들인데-의 논쟁의 중심축으로 그런 도상 위에 놓고 있는 듯 합니다.  

 

재번역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해서 작년 말부터 기대했던 칼 폴라니의<거대한 전환>(거대한 변환이라고 하기도 함)이 나왔군요. 요즘 출판사 길에서 꾸준히 나오는 고키토 총서네요.  

칼 폴라니가 최근 다시 한국에서 각광을 받는 것은 사실 지극히 한국적인 정서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나친 시장편형이 두드러지다 보니 그에 대한 교정자가 필요했고 거기에 칼 폴라니가 부합한거지요. 너무 많이 말하여지거나 이젠 아무도 말하지 않는 맑스보다 사람들에게 신선할 수도 있을테니...지난 번에 읽었던 스텐필드의 <칼 폴라니의 경제사상>은 사실 이 책을 읽.,기 위한 사전 독서였던 셈이지요. 전체적인 조망을 하는데 도움이 되었구,,,제도주의 학파의 흐름 또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절판이라는..이 책은 폴라니의 소개에 열심이셨던 역자의 번역이라 믿음이 가기도 합니다.  

최근에 지그문트 바우먼의 <액체근대>를 보고 있는데 1장 '해방' 편에 보면 폴라니의 'embed'라는 개념이 언급됩니다. 일단 액체근대의 개인성과 유동성이라는 토대를 파악하는-인정이 아니라 개념적 인식을 위한-차원에서 보자면 '재영토화'하려는 공동체주의자들의 희망을 비판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1장 후반부에 가면 바우먼이 정말 이야기하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부분이 비로소 나타나지만 말입니다. 그가 요구하는 비판이론의 현재적 재구성은 지금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말이지요. 한국의 과제는 비판이론이 제기했던 고전적 계몽이성과 근대성으로부터의 해방과 함께 소비자본주의하의 개인화로 정리되는 탈근대적 정치해체에 대한 이중적 도전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현재 1장 후반부를 읽고 있는데 읽어볼 만한 책입니다. 재미있습니다. 포스트모던/모던의 해묵은 이야기를 다시 정리하는 느낌이 들긴하지만....분석을 서술하는 방식과 비유들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쇼펜하우어에게 따로 큰 관심이 있지는 않습니다만... 니체의 <비극의 탄생>은 쇼펜하우어의 이 책이 없었다면 나오기 힘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초기 니체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두 사람을 꼽으라면 쇼펜하우어와 바그너로 정리됩니다. <비극의 탄생>에는 그래서 이 책에 대한 언급니 많지요. 리뷰를 써야지 써야지 하면서 미루어두고 있는 <비극의 탄생>을 정리하고 글을 써야겠습니다.  

쇼펜하우어는 흔히 허무주의자 정도로 알려져있는데 그 허무주의는 싸구려 '귀찮아 허무주의' '나몰라 허무주의'와는 차원이 다른 존재론적 심연을 건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면에서라면 저 역시 분명히 허무주의자일겝니다. (허무주의는 극복해야할 나쁜 것으로만 배운 소크라테스주의적 이론형인간이라면 그 경직성으로 인해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할겝니다.  <인문학서재>에서 로쟈님이 시를 읽지 않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랬나요...어..누가그랬지..로쟈 아니었나..하여간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는데...이런 저질 기억력하고는...) 특히 니체는 '힘'이라는 부분에 방점을 찍으면서 '강인한 허무주의'라는 돌파구를 강조하지요. 세계의 밑바닥엔 무엇이 있을까요? 지젝의 실재계와 사라마구의 실재계는 온통 하얗습니다. 제가 가끔 인용하는 <리어왕>의 구절은 "난 눈을 뜨고 있을때  더 잘 걸려넘어졌다." 라는 겁니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는 장님이 되어서 이제 무엇을 보았을까요?  캄캄한데 뭘 보냐구요...니체의 <비극의 탄생> 어떤 대목에는 오이디푸스가 뭘 봤는지 설명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어딘가에 있는데...역시 저질 기억력ㅋㅋ 

하여간 그렇구요..  

오랜만에 한국소설입니다. 제겐 점점 멀어지고 있는 한국소설인데...물론 그래도 간간히 요즘 트렌드는 어떤가 싶어서 한번씩 보긴합니다. 

이 책은 사실 이미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잘 생겼다는 것을 안 저자가 자기 사진을 넣어서-사실 책 날개에 사진이 있습니다-제게 보내준거지요. 자랑하려구요.ㅋㅋ 책은 아직 읽지 못했지만 얇은 두께에 비해 다루는 주제는 결코 얇지 않을 듯 합니다. 성찰적 깊이를 포기하거나 탈각하여 유희만이 남겨진 희희낙낙 포스트모던 소설들에 식상해진 독자라면 ,또는 소비자본주의시대의 칙릿이 결국 트랜스포머한 하이틴 로맨스의 환등이라면....발뒤꿈치쪽을 베는 상처에 더 눈이 가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원래 아픈곳에 손이 가기 마련인지라... 

 이 책이 뒤에 평론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치열한 현실을 진정한 언어로 그릴 줄 아는 작가 김이설
가족이라는 고통스러운 '운명', 그 너머를 꿈꾸는 '새로운 이야기(異說)' 

....지금 시각 4시 40분...어쩌지..책 읽거나 음악들으려 하지 말고 곱게 자려고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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