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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탄생 ㅣ 대우고전총서 21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박찬국 옮김 / 아카넷 / 2007년 9월
평점 :
나의 형제들이여, 그대들의 가슴을 펴라.활짝, 더 활짝! 그리고 그대들의 다리도 잊지마라! 그대들의 다리도 들어올려라,그대들 훌륭한 무용가들이여,그대들이 물구나무를 선다면 더욱 좋으련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4부
니체의 초기저작인 <비극의 탄생>은 고전 그리스 비극의 탄생과 몰락에 대한 이야기이다. 물론 이 책이 그런 문헌학적인 가치만 있었다면 고전 목록표에 오르기 보다는 전문가들의 도록에나 올랐을 것이다. 이 책에서 니체는 그리스 비극의 성격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세계와 예술,그리고 예술을 이해하는 유력한 방식을 강력히 피력한다.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보여준 예술론과 개념적 용어들은 이 책이 씌여진지 100년이 넘은 시점메도 사람들의 귀를 현혹하고 아이디어 고갈에 시달리는 저널리스트들의 타자기 위에서 그럴싸한 문화기사의 머릿말을 위해 쓰여진다. <비극의 탄생>에 나와서 이제는 보편명사가 되어버린 개념어가 '디오니소스적 예술'과 '아폴론적 예술'이다. 니체가 그리스 비극의 계보를 따지면서 적용한 개념이다. 이 말의 상식적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분히 이항적인 분류법으로 구분하는 고등학교 참고서의 설명도 아직 기억이 난다. 실제로 그렇게 구분할 수있는 대목이 있긴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 만은 아니다. 오히려 니체가 강조하는 방점은 '상호보충적'인데 있다. 그런고로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을 대립적 개념으로 하나는 '감성 대 지성' 또는 '비조형대 조형' '직관 대 분석' 이런 식으로 나누어 보는 것의 유용성보다 이 둘을 썀쌍둥이로 보는 것이, 그 점을 강조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종합의 유용성은 여전하다. 현역에서 은퇴를 선언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브렌델은 <그라모폰지>와의 인터뷰에서 훌륭한 모차르트 연주를 위한 방법으로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말하기와 노래하기를 동시에 고려하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결국 애써 비유하자면 말하기란 아폴론의 것이고 노래하기란 디오니소스의 것이다. 이런 식으로 백여년이 지나도 니체식의 화법의 변용을 거쳐 여전히 유효하다.
<비극의 탄생> 1장에 첫 문장은 그 중요성을 이렇게 말한다.
"예술의 발전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과 결부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생식이 지속적으로 투쟁하면서 단지 화합하는 남녀 양성에의존하는것과 유사하다." <비극의 탄생>
그런데 '나누기 좋아하는 '이성은 그런 과정을 철저히 몰이해한다. 니체의 용어로 이야기 하자면 그것은 아폴론적 인간의 것이 아니라 소크라테스적 인간이 벌인 일이다. 니체는 소크라테스적 인간의 출현을 고대 그리스의 가장 중요한 변곡점으로 보는데, 그는 소크라테스적 인간을 이론적 인간이라고 칭한다. <비극의 탄생>은 물론이고 그 이후 벌어지는 근대/탈근대적 철학논쟁을 따라가다보면 니체의 '소크라테스적 인간', '이론적 인간'이 어떤 의미인지 조금 가닥이 잡힌다. 왜 니체가 포스트모던의 선구자로 불리는지 이해가 될 때 니체의 소크라테스적 인간의 의미가 명확해진다는 말이다. 하버마스가 '고대의 탐구 속에서 진리의 조각이나 찾아 해매는 인간들' 이라고 비난했던 자들의 첫번째 명단 속에 '니체'가 있다. 이런 비난의 무대 위에서 이야기하자면 계몽 이성의 강인한 신념, 니체의 용어를 빌자면 '이론적 낙관주의' 라고 할 만한 하버마스류가 '소크라테스적 인간'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니체에게는 철학이나 학문을 성찰하고 넘어서는 심미적인 미학의 태도가 중요하다. 그런데 하버마스는 -쉽게 말하자면- '미학'을 모른다. 니체에 대한 미학적 평가에서 중요한 부분은-니체가 과연 전통적 의미의 미학자였는지에 대한 논쟁은 있지만- 철학의 하위 개념으로서 미학,또는 재현이나 모방으로서의 예술을 삶의 본질을 이해하는 중요한 위치까지 올린 것이다. 혹자는 철학에 대한 예술의 우월성을 주장했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니체를 예술지상주의자,예술본질주의자 정도로 축소평가하려는 비판적 오용이 아닐까 싶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철학의 시녀로 살던 예술을 동등한 위치로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당연히 예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철학의 과잉기대를 줄이려는 것이 선구자의 방식들이기 때문이다. 어쨋거나 니체식으로 보자면 하버마스는 계몽 이성의 가능성을 위해 '세계를 인식 가능한 것' 으로 파악하고 이성을 통한 해결가능성을 낙관하는 자이다. 니체는 이런 전통의 기원에 소크라테스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천적 염세주의에 반해서 소크라테스는 이론적 낙천주의의 원형이다. 그는 사물의 본성을 철저하게 규명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지식과 인식에 만병통치약과 같은 효력이 있음을 인정하고 오류야말로 악 그 자체로서 파악한다. 저 근거들을 천착하고 가상과 오류에서 참된 인식을 분리해 내는 것이 소크라테스적 인간에게는 가장 고귀한 소명,유일하고 진정한 인간의 소명이라고 여겨졌다.
물론 하버마스는 역으로'이성의 실천가능성'을 폄훼한 사람으로 니체를 지목한다. 이를 따라가면 결국 '포스트모던 논쟁의 전장'이 발견된다. 종군기자가 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그것보다 여기서는 니체의 소크라테스가 다분히 허구적이라는 것에 대한 평가는 언급해야겠다. 즉 니체는 소크라테스라는 철학자 개인-도망가라는데도 약먹고 죽은 그 인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신화의 종언을 선언한 사람들로 소크라테스와 에우리피테스 등을 들고 있는 니체인데 사실 소크라테스의 책을 읽어본다면 그의 이성이라는 것이 결국 신적인 진리 앞에 복속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신과 신화를 결코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적 인간' 이라고 하는 것은 -적이라는 말에 주목해야한다.-'계몽이성적 인간의 출현' 이라는 은유적 해석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이런 출현을 호메로스의 오딧세우스까지 올려보내기도 한다. 사이렌 신화에서 욕망과 환상을 거부하고 이성으로 자기보존하려는 오딧세우스말이다.
앞선 <비극의 탄생>인용 문장에서도 '가상과 오류에 대한...'이라는 말이 언급되는데, 니체에게 '가상'은 중요한 개념이다. 쇼펜하우어의 '표상' 개념을 이용하는 것으로 그는 우리가 감각적으로 경험하는 세계는 세계 자체가 아니라 세계의 현상이라고 보았다. 이런 개념을 니체에게로 끌어오면 예술은 '이중으로 매개된 가상' 즉 '가상의 가상'이 된다. 그 단초를 보여주는 문장이 이것이다.
"인간은 꿈의 세계를 산출한다는 점에서 완전한 예술가이다." <비극의 탄생>
니체에에게 예술을 창조하는 두가지 기원은 '꿈과 도취'이다. 전자가 바로 아폴론의 기저가 되고 후자가 디오니소스의 것이다.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런 꿈의 세계에서 아름다운 가상을 구현하는데-그것이 바로 그리스의 신들이다- 이것이 조형예술의 전제가 된다. 그런데 이와 함께 현상의 인식이 무너질때 생기는 '전율'이라는 요소가 있다. 이것이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본질인 '도취'이다. 예술 형식으로 구분하자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음악'이다. 니체에게 세계의 심연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술이고 그리고 예술의 본체는 바로 '음악'이다. (불행하게도 그 음악이란 것이 문화산업이 만들어낸 소녀시대나 빅뱅이 아니라는 점...왜 음악이 다른 예술 장르들 중에서 가장 비모방적이며 본질적인 지는 미학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 필요하다. 이것이 음악이 다른 장르에 비해 니체처럼 본질적이다라는 뜻으로 이해될 필요는 없어도 최소한 차별적인 특수성이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세계는 그렇게 '아폴론적인 것' 과 '디오니소스적인 것' 그리고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혼합'을 통해 표상된다. 니체가 그리스 비극의 탄생에 독특한 해석을 가한것은 이 혼합의 결과물이 바로 '그리스 비극'이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은 최초의 혼돈시기-거인족과 신들의 전쟁인 티타노마키아부터- 아폴론적 중간계를 통해 혼동의 끔직함을 피했다. 그렇지만 이후에 디오니소스의 침입을 받았을때 그들은 순치라는 방식으로 디오니소스를 파괴하지 않고 체제 내에 포섭한다. 니체가 그리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화해'라고 불렀던 것이다. 니체는 그리스인들이 고뇌에 대한 민감성과 그들의 뛰어남으로 인해 세계의 본질을,심연을 이해했다고 본다. 그렇다면 그들은 절망하고 좌절하고 포기했을까? 그렇지 않다. 그리스인은 명랑하다. 그런데 니체가 말하는 명랑성은 사계절이 봄이어서 생기는 그런 명랑성이 아니다. 니체의 '그리스적 명랑성'은 겨울-봄을 이해하고 그 몰락과 창조의 원리는 체화해낸 자들의 명랑성이다.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이런 '실천적 허무주의'를 아폴론적인 형상으로-즉 무대 언어로- 상연하게 된다. 그리스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이런 구도 하에서 보자면 비극의 출발점과 핵심이 무엇인지 명확해진다. 그것은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다. 하지만 이 광기-축제의 심연을 직접 바라볼 수 있는가? 니체는 그럴 수 없다고 본다. 그리스인들이 아폴론적 형상을 이용하여 마치 비극의 중심에 아폴론적인 것이 있고 그것이 중심이며 기원으로 생각케 한다는 것이다. (태양을 맨눈으로 직접 바라볼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니체에게 실연으로서 그리스 비극에서 중심 모티브는 연기나 대사가 아니라 음악이며 그 음악이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실체이다. 음악은 마치 숨어 있는 배경처럼 느껴지지만 종국에가서 아폴론적인 것의 한계를 넘는 의미를 전달한다.
음악은 세계의 본래적인 이념이며 연극은 이 이념의 반영,즉 그것의 개별화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 ... ... 비극에서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 사이의 난해한 관계는 진정 두 신의 형제결의라는 것으로 상징될 수 있을 것이다. 디오니소스는 아폴론의 언어로 말하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아폴론이 디오니소스의 말을 한다. 이와 함께 비극과 예술 일반이 최고의 목표가 달성된 것이다. <비극의 탄생>
물론 니체이 '예술-형이상학'은 니체 후기에 자기에 의해서 부정되고 한계가 지적되기도 한다. 니체가 독일문화 중흥의 기대로 그리스 비극의 적자로 이해한 바그너에 대해 <비극의 탄생>의 재서문인 <자기비판의 시도>에서 바그너를 폐기했듯이 말이다.
우리는 음악이 직접 내면에 말을 걸며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착각한다. 음악은 의지에 대해서도 사물들 자체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그런 것은 내면적인 삶의 전영역을 음악의 상징성이 지배한 시대에에 비로서 지성이 꿈꿀 수 있었떤 것이다. 지성 자체가 이런한 의미심장함을 음향 속에 집어넣었던것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권
앞서 언급했듯이 비극은 그렇게 시작해서 소크라테스적 인간들의 출현으로 몰락한다. 비극의 계보 속에서는 에우리피데스에 있어서 신화의 해체와 낙관주의가 드러난다는게 니체의 설명이다. 그는 근대의 전형을 형성한 '이성중심주의의 낙관성'을 '알렉산드리아 명랑성'이라고 칭한다. 그에 따르면 근대인들은 모두 알렉산드리아적 명랑성의 그물망 속에 놓여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런 그물망을 깨기 위해 니체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비극의 탄생>에서는 종교개혁,바그너로 상징되는 독일문화의 깨어남을 요구하고 있는데-그런면에서 니체는 반계몽주의자였지만 문화적으로는 다시 계몽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좀 더 보편적 문장을 찾자면 이것이될 터이다. <비극의 탄생>에서 인기있는 말 중에 하나이다.
"삶과 세계는 미학적 현상으로서만 정당화된다" <비극의 탄생>
문장은 짧지만 그 의미를 이해하기란 그다지 쉬운 말은 아니다. 수많은 해석이 가능할터인데,최소한 탈근대론 언저리에 있는 학자들은 '미학'과 '삶'의 연동에 관심이 높다. 푸코같은 이들이 "당신의 삶이 예술이 되게 하라." 라고 말했다면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니체는 그리스인들인 추악함과 부조화마저도 예술적 유희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직접적 파악될 수 있는 것이며, 이는 음악에서의 불협화음의 방식과 유사하다는 점을 말한다. 니체는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언급한다. 어떤 의미에서 니체와 여러모로 유사한 아도르노는 쇤베르크에서 예술의 회생가능성, 세계를 버틸수 있는 힘을 찾았다. (내가 아직 쇤베르크를 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여러번 이야기했다.) 협화음의 세상-즉 이론적 낙관주의의 세상-에서는 디오니소스적 밤와 세계와 어둠의 세계가 움을 틀 자리가 없다. 그렇지만 니체에겐 이런 '몰락'의 이미지와 변화의 힘들이 모든 창조의 근원이다. 이런 불협화음의 이미지가 디오니소스적 음악의 한 모습이다.
"그대들은 나처럼 존재하라! 현상의 끊임없는 변천 속에서 영원히 창조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생존하도록 영원히 강제하며,현상의 이러한 변천에 영원히 만족하는 근원적인 어머니인 나를!"
디오니소소의 신화중에 하나는 디오니소스가 여덟조각으로 찟겨졌다가 다시 사는 영원한 창조성의 상징으로 그려진다. 창조와 쾌락과 생산의 신...디오니소스. vivo ergo cogito ! (나는 살아있다.고로 생각한다.) 사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서 중요한 것은 니체가 그리스 비극의 문헌학적 고증을 얼마나 철저히 해냈는가가 아니다. 니체의 최초 작품으로 그가 이후에 도달하는 철학적 세계의 맹아들이 <비극의 탄생>에 숨어있다는 점이다. 대략 니체사상을 요약하는 말이 '영원회귀','초인',' 디오니소스' 뭐 이런 것들인데....<비극의 탄생>을 눈여겨 보면 봄철 들판에서 보는 민들레처럼 그것들이 보인다.
박찬국 역의 <비극의 탄생>은 역자해제가 60여페이지에 이른다. 주로 1,2장을 중심으로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 인 것의 개념과 비극의 탄생과 몰락을 둘러싼 대립물들을 비교적 친절하게 설명해놓고 있다. 따라서 과거 <비극의 탄생>을 읽었던 독자라면-최소한 <비극의 탄생> 재발견을 위함이 아니라면- 역자 해제만으로도 지난 기억을 되짚어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