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서  

                     -정희성

빛 안에 어둠이 있었네 

불을 끄자 

어둠이 그 모습을 드러냈네 

집은 조용했고 

바람이 불었으며 

세상 밖에 나앉아 

나는 쓸쓸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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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돌아보면 같은 자리지만 나는 아주 먼 길을 떠난 듯 했어' 장마철에 차 안에서 들으면 좋은 음반이 윤상 1.2집 아닐까? 전람회 2집도 내가 요맘때 즐겨듣는다. 정희성 시인의 <돌아다보면 문득>이라는 시집이야기를 하다가 '도치된 문장'이 낯익어 딴소리 잠시 해봤다. 

오늘은 이런 감상적인 딴소리마저 송구스럽다.  

평택에서는 폭력과 대항폭력 사이의 일촉즉발,폭풍전야다. 평범하게 살았을 젊은 아내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종강씨는 강연다니면서 가끔 고 정은임 아나운서의 영화음악 오프닝을 인용한다. 

 이런 내용이다.

 

새벽 세 시,
고공 크레인 위에서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1백여 일을 고공 크레인 위에서 홀로 싸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올가을에는 외롭다는 말을 아껴야 겠다구요.
진짜 고독한 사람들은
쉽게 외롭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조용히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쉽게 그 외로움을 투정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어딘가에 계시겠죠?

마치 고공 크레인 위에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
이 세상에 겨우 겨우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지난 하루 버틴 분들,
제 목소리.. 들리세요?
저 FM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정희성 시인의 시보다 인용이 길어졌지만 시인은 충분히 용서해주실 것이다. 2003년 한진중공업 파업당시 김주익 열사의 이야기다.  

그는 얼마나 외로웠을까....그리고 오늘 남편의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아내는 또 얼마나 외로왔을까?  큰 아이는 네살, 작은 아이는 한살....우리집과 같은데.

그렇다. 외롭다는 말을 아껴야 한다. 우리가 여전히 외롭고 쓸쓸한 것은 사실이지만. 

'세상 밖에 나앉아 쓸쓸한' 시인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또한 잊지 않는다. 

<희망> 

그 별은 아무에게나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 별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자기를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의 눈에나 모습을 드러낸다. 

천박할 정도로 외롭고 쓸쓸한 날이지만 장맛비 뒤에 한 줌의 햇살이...우리와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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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출근길, 초등학교 4명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왔다.  

멀뚱 멀뚱하다가... "언제 방학하니?" 라고 물었더니,  좀 큰 친구가 "오늘부터요" 라고 즉시 대답한다. 오늘 학교가면 방학식한다는 것이다.  

"웅...좋겠다."   

아이들은 엘리베이터 문에 열리자 우르르 내달았다.   

이번 주에 나온 책만은 아니지만최근에 나온 책들이다. 날도 더우니 좀 가벼운... 

 <제국>,<다중>의 안토니오 네그리의 대담집이다.(오늘 아침보니 로쟈님 페이퍼에 올라와있다.) 나는 어제 서점에서 책을 열어봤다. 책은 분량이나 무게면에서 '가벼웠다.' 하지만 저자인 안토니오 네그리는 어떤가? 

책의 내용을 대충 훑어봤다. 대담집이다 보니 '말글'로 되어 있어서 눈에 쉽게 들어왔다.   

생각컨데, 안토니오 네그리의 저작을 아직 접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그가 인식하고 있는 세상과 그의 사상의 편린들을 맛볼 수 있는 책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가 바라보는 세계에 대한 인식이 이해되어야 이후 그가 논의 하는 '비물질노동'이나 '다중'이나 '해방'의 개념들도 이해될 터이니 말이다.  

  <불꽃의 지휘자 카라얀> 이다. 클래식에 도통 무지한 사람도 카라얀이라는 이름은 안다. 이발소 같은 곳에도 그가 지휘하는 모습이 스킬자수로 벽면에 붙어있기도 했다. 검은실과 흰실만으로 이루어진.. 

카라얀은 호평을 받든 비난을 받든 양적으로 다른 모든 지휘자들을 압도한다. 결국 20세기 클래식사를 논할 때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을 언급하지 않으면 한발짝도 뗄 수 없을 정도다.  나치협력, 기회주의적 영민함, 기술진보에 대한 선견지명, 권위주의적 카리스마, 유미주의적 완벽주의....  클래식 음악을 잘 안듣는 이는 이런 내용을 들으면 -특히 정치적 진보 강박증에 붙들린 이들은- 전자때문에 카라얀을 싫어한다. 또 클래식을 좀 듣는 이들 중에는 그의 명품 다이아몬드 사운드때문에 싫어한다. 음악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카라얀'이라는 상표만 펄럭인다는 것이다. 카라얀은 출장 횟수가 많은 타자다. 규정타수를 초월한지는 오래다. 그리고 그가 4할 이상을 쳐낸 - 4할이상이면 야구에서는 기록적이기때문에-고 있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20세기 클래식을 알려면 그를 만나야 한다. 

생각해보니...클라우디오 아바도-내가 좋아하는-를 제외하고 베를린 필의 수장들의 전기가 국내 모두 번역되었다. 아래는 참고... 

 전후 최고의 지휘자이자- 후배 카라얀을 몹시도 싫어한- 벨헬름 푸르트 뱅글러. 

클라우디오 아바도 이후 막강한 유수의 지휘자들을 낙마시키고 21세기 베를린 필의 수장이 된 젊은 피 사이먼 래틀. 

 

 지휘자 이야기가 나왔으니 최근에 나온 안동림교수의 <불멸의 지휘자>까지 소개를 마쳐야겠다. 

안동림교수는 <이 한장의 명반>시리즈로 유명한 분이고 <장자>의 번역본도 높이 평가를 받는다. 이 분이 최근에 세계의 유명 지휘자들의 약사를 책으로 만들었다. 이 책 역시 서점에서 열어보았다. 종이질이 꽤나 좋은 편이다. 한 지휘자 별로 5-6 페이지 정도로 그의 약사와 사운드를 정리하고 그가 지휘한 명반을 뒤에 소개하는 형식으로 책이 꾸려져 있다.  이 책은 클래식 음악에 관심을 막갖기 시작한 분들에게는 즐거움이 될 만하다. 사진도 꽤 있는 듯 하다. 멀리 있는 베토벤보다 이런 지휘자나 연주자들의 존재가 클래식을 더욱 가깝게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허균 선생의 새 책이 나왔다. <한국의 누와 정> 나는 예전에 허균 선생의 책을 몇 권 본 적이 있다. 이 책과 쌍을 이뤄도 좋을 만한 <한국의 정원, 선비가 거닐던 세계>도 내가 좋아했던 책이다. 

나와 아내는 연애시절에 옛집이나 절집을 보러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나보다 아내가 더 즐겼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나는 특히 한옥집의 누마루나 정자를 좋아했다. 그곳에서는 최고의 경치를 볼 순 있다. 옛 선비들은 이럴 때 '차경'이라는 말을 썼다고 한다. 경치를 잠시 빌렸다는 말이다. 요즘은 돌아다니지 못하지만 여전히 그 곳 정자들은 그 자리에서 '차경'하고 있을 터.     

 <자본론>이 동아대 강신준 교수에 의해 원전번역되고 있다. 개인적으로 강신준 교수를 한 번 만나 뵌 적도 있었고, 또 그가 썼던 <자본론의 세계>로 '자본론'의 맛을 본 적도 있다. 이 책은 나름 스테디셀러가 아닌가 싶은데...출판사를 바꾸고 개정판이 나오고..그랬다. 나는 아직도 <자본론>을 통독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잘 모르겠다. 하여간 그게 어떤 자본주의이던 간에 입으로 자본주의를 말하며 '자본론'에 대해 일자무식해서는 말이 안된다고 생각한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상관없다만... 특히 자신이 진보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자본주의'의 내적 원리에 대해 가장 통렬하게 집어낸 사람의 생각을 모르고서 어디서 부터 도대체 어디서 부터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겠는가. 물론 마르크스가 '자본론'이 다는 아니다. 대신 민주당과 한나라당 또는 민노당과 진보신당만이 다는 더더욱 아니다.  한때 부산일보의 자랑-요즘도 하시나 모르겠지만-손문상 화백이 그림을 넣어주었다. 서점에서 대략 넘겨봤는데 이야기와 실제 현실의 예를 들어가면서 풀어내고 있는 듯 했다.  

 <밥줄이야기>이다. 이 책은 월간 <말>지에서 기자로도 일했던 이동권씨의 책이다. 이 책은 '우리이웃'의 이야기이다....라고 진보 중산층이 말하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 책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런 '이웃'은 아파트시민들 사이에는 없다. 이 책에 나온 '우리와 함께 가는 그런 이웃'은 당신 주변에 없다. 즉 우리가 '이웃'이라고 말하는 그 타자가 우리 '이웃'에 없는 아이러니다.  

...도부, 시각장애인안마사,무당,로프공,밴드마스터...

 나는 이런 '이웃'과의 단절된 현실을 마땅한 현실이라고 말하고자하는 바는 아니다. 실제로 '동어반복의 열의' 속에 이들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그런면에서 조금 더 눈을 내리깔고 네 옆을 한번쯤 천천히 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이웃'이 보인다. 투사가 될 필요도 없고, 현장으로 들어갈 필요도 없다. 그렇지만 최소한 시인의 눈은 후천적으로 기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감단직 노동자, 트럭노점상,우편배달부,산불감시원,때밀이...   

 지난 달에 나온 책이다. <김광석 평전>.  그가 살아있었다면 만날 기회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물론 나는 개인적으로 그를 여러번 봤다. <학전> 소극장 무대는 내가 즐겨찾던 곳이고-즐겨라는 말은 돈이 허락할때라는 뜻이다- 내가 그를 좋아하게 된 것은 <동물원>시절부터다. 나는 고등학교때 <동물원>이라는 밴드를 무척 좋아했었다. <동물원>이후 김광석이 가장 성공적으로 솔로로 데뷔를 했지만 다른 멤버들의 음반들도 좋아했다. 김창기는 <창고>라는 프로젝트를 해서 -내가 좋아하는  -'강릉..차표'도 불렀다. 그 전에 내가 좋아했던 음반은 박기영의 음반이었다. 건반을 연주하는 사람인데...그가 부른 '별빛가득한밤에'등을 좋아했고 그의 솔로음반 중 눈길을 달리는 기차소리가 섞인 '백마에서'라는 곡도 무척 좋아했다.  나는 우리 과에 '김광석과 여행스케치'의 존재를 누구보다 빨리 알린 사람 중에 하나였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걸 모른다.) 친구들 생일 선물로 김광석의 솔로음반을 많이 전달했다. 그런데...정작 김광석이 우리과에서 더 유명해진 것은 노래패하는 선배들의 멋진 노래때문이다. 담배 하나를 재떨이 위에 피워놓으며 기타로 불러대던 김광석의 노래는 멋졌고....나의 문화활동은 DIY에 빛을 잃었다.^^ 나는 김광석 세대다. 김광석이 키워준 세대이며 김광석을 함께 나눈 세대다. 김광석 노래 중에는 버릴 곡이 하나 없지만 '기대어 앉은 오후'라는 곡을 특히 좋아한다. '다시부르기' 부터 그는 그가 한국 음악에 열어줄  새로운 가능성을 조금 더 깊이 실험해보고 있었다. 그게 가장 아쉽다. <학전> 소극장에 앉아서 듣던 그의 노래가 아직도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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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은 자기 가두어놓기와 놓여나기를 무수히 반복한다. 가두어놓기와 놓여나기라는 두 개의 의지는 서로를 죽이고 동시에 서로를 새로이 태어나게 한다. 

"바다 한가운데 외로이 떠 있는 섬만 섬이 아니다. 가두어놓을 수 있는 시공이면 어디든지 섬이고 그곳에 갇히는 일 또한 섬 자체인 것이다" 

"자기 외로움을 이겨내는 힘이 없는 사람은 자기를 가둘 수 없다. 가두어놓는 삶을 살며 고독을 씹어보아야 놓여나기, 자유 혹은 초월을 삶을 살 수 있다." 

                                                                    한승원 <바닷가 학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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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승원선생이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인 장흥에 들어가서 지은 집이 '해산토굴'이다. 미당에게 그를 키운 것의 팔할이 '바람'이었다면 한승원 선생에게는 '바다'다. 전남 장흥의 앞 바다말이다. (장흥의 '삼합'은 나름 유명한데 아직 한번도 함께 먹어보질 못했다. 미식가가 되어야 느낄 지복일텐데.) 그가 2002년에 낸 수필집 <바닷가 학교>는 자신이 바다로 부터 배운 것들의 보고서이자 바다에게 지불하는 수업료이다. 그 중 인용한 구절은 '섬의 미학' 에 들어 있는 구절이다. 

장맛비가 하루를 멀다고 중남부를 왕복하고 있다. 이쪽에서 물길어다 저쪽에 쏟아붓는 형상이다. 실제로 수해를 입은 농촌의 민가들은 모두 섬처럼 보인다. 바다에도 섬이 있고 뭍에도 섬이 있다. 또 섬이라고 할 수 없지만 삶의 상흔,섬의 트라우마같은-잊혀진 것들은 '여'가 되었다는- 섬조각들도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고 한 시인의 울림은 너무도 강해 '타인'의 섬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 '소통'이라는 말을 발견해냈다. 그런데 나를 비우고 다른 섬을 찾을 수는 없다. 내 안에도 섬이 있기 때문이다. 한승원 선생의 말처럼 '가두어놓을 수 있는 시공이면 어디나 섬'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 나오는 '그물에 대한 맹신'이라는 글에는 '어부들만 그물을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자기 나름대로 고기를 잡아먹고 살 그물을 하나씩 가지고 살아간다.' 라는 말이 나온다. 한선생은 '생존의 숭고한 그물'과 빗대어 '자기함정의 그물'을 이어서 말한다. 일종의 자기경험과 인식의 협애함에서 나온 '판단의 그물'이다.  

'구두장사를 하는 사람은 구두의 모양새로써,양복장사를 하는 사람은 양복의로써....(중략)... 내 감지 능력으로 감지할 수 없는 아주 많은 것들이 내 그물에 대한 나의 맹신을 비웃으며 내가 쳐노은 그물코 사이로 줄줄이 빠져나가고 있다.' 

내게 올 여름 딱 사흘 동안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이틀은 섬에 있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 하루는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 부질없고 너덜한 관계로 핸드폰의 한자리를 차지할 사람들은 아니다. 앞으로 오래 두고 사귀게 될만한 이들. '섬'과 같은 이들. 

'섬은 사람들의 배와 바람과 파도와 새들이 몰려올지라도, 잠시 머물렀다가 떠나갈지라도 수다나 호들갑이나 너스레를 떨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는다. 거기 들어가 자기를 가두는 사람들은 그 섬처럼 자기의 고독과의 싸움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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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체근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이일수 옮김 / 강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한국 사회의 근대성을 규정하는 말 중 자주 사용되는 말이 '압축근대'이다. 이 말은 한국의 역사적 좌표를 이중적으로 구속하고 있는 말처럼 보인다. '압축'이 의미하는 바는-경제적 관점에서 보자면 '고도성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서구의 역사 과정과 비교하여 빠른 시간 내에 이루어낸 근대화 과정을 말한다. 다른 하나는 복합어의 두번째 단어인 '근대'라는 단어에 시선을 돌릴 필요도 있다.즉 '압축'되었을 망정 '근대' 라는 역사적 시간축 안에 우리가 있다는 것이다.   


'압축근대'라는 말은 복합적인 의미가 있지만 기실 이 말을 사용할때는 '한국적 근대성의 부정적 요소'들을 언급하기 위해 주로 사용된다. 전근대적 권위주의의 잔존, 천민자본주의의 상식화, 시민 사회의 역사와 공간의 일천함, 정치적 다양성의 협소화, 다문화와 차이에 대한 이해부족 등등..그리고 이와 동시에 한국은 1990년대를 넘어서면서 자본주의의 새로운 변신에 기인한 탈근대적 과제 역시 동시에 안게 된다. 결국 제대로 '이루지 못한 근대성'과 너무 '일찍 달려든 탈근대성' 사이에서 한국사회의 모순은 두가지 중층과제를 떠안게 된것이다. 결국 현재 한국사회의 모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론적으로 어느 한쪽의 우선적 해결로서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최소한 현실에서는 반독재세력에 대한 대항전선이 형성되더라도 그 지점은 출발점이지 결절점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애써 피곤해질 '근대와 탈근대'의 논쟁은 재연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액체근대>를 읽기 위해서는 수렁에 빠진 이 논쟁의 주요 쟁점들에 대해서 한번쯤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근대와 탈근대'의 문제에 관심이 별로 없다면- 그것은 그저 현학적인 학자들의 자기연명 수단정도로 생각한다면- 지그문트 바우먼의 <액체근대>는 별로 읽을 가치도, 읽는 재미도 주지 못할 것이다. 그와 함께 들뢰즈가 말한 '권력의 모든 측면에 대항하여 싸울 힘'도 스스로 포기해야 할 지도 모른다. 동네 아이들끼리 가짜 총싸움을 하더라도 그 지형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알고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자기강화를 위한 지리한 동어반복의 구호보다 차라리 책에 코박는 편을 택한 것도 그 때문일지 모른다.물론 정답은 없다. 최소한 나는 인터넷상에서 100번의 'MB타도' 구호를 외쳤다고 100배쯤 더 진보적이 된다고 생각치 않는 비정상적인 1인 중에 하나다.) 

지그문트 바우먼이 말한 '액체근대'는 무엇일까? 여타 학자들이 자기 나름의 개념적 용어로 설명한 '변화된 근대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 최소한 미묘한 차이들은 존재하겠지만 가장 보편적인 용어로 '포스트모던'이다. (보편적 총체성의 거부를 보편적 단어로 설명해버렸다.문제는 이 '포스트모던' 이라는 것이 누구의 '포스트모던'이냐에 따라 또 상호비판적이며 때론 부정적이기까지한 다른 의미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바우먼은 변화된 현재의 역사시대를 '유동성'이라는 액체의 특성에 빗대어서 말한다. 그는 공산당 선언의 유명한 구절인 '모든 굳어진 것은 녹아내린다.'라는 말에서 '액체근대'의 추이를 읽어낸다.( 내 개인적으로 어린 시절 넘겨집던 마르크스의 유물론 철학에서 가장 인상적인 한 단어는 단연코 '변화'였다.) '모든 것은 변한다.' 라는 것이 따지고 보면 변증법의 운동을 설명하기 위한 기본 토대가 되는 것 아닌가? 마르크스는 이런 변화를 헤겔의 변증법과 노동계급의 궁극적 승리라는 유토피아주의로 교직해낸다. 문제는 마르크스식의 사적유물론에서는 운동성이 어느 지점에서 스스로 멈추어 서는 공간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아주 오래된 논쟁거리이고 이에 대한 해석을 두고 비판과 반비판이 가득하다.) 바우먼의 시각에서는 마르크스는 유토피아를 상정하면서 운동의 종말을 스스로 예고한 것으로 읽힌다. 마르크스가 '녹아내리는 것'의 당위성을 주장했던 대상은 -쉽게 말하자면- 전근대적 과제들이었다는 것이 바우먼의 이야기다. 그리고 -비단 마르크스 프로젝트뿐만이 아니었지만 그의 프로젝트를 가장 이상적인 근대적 계몽의 의지로 읽는다면- '녹여서 이루어낸 것'이 바로 '고체근대', '무거운 근대'이다.이 시대는 근대적 유토피아의 신념은 사라진 시대이다.바우먼의 비유를 들자면 '여호수아의 담론'이 종말을 고하고 바우먼은 이제 그런 '헤비메틀의 근대'가 다시 한번 '녹아내리는' 단계에 들어왔다는 것이며 이를 개념화해낸 말이 '액체근대'이다.  

물론 바우먼은 전근대-근대-탈근대의 도상에서 해체가 부분적이고 파편적으로 이루어졌음을 강조한다. 전근대의 장점-예를 들자면 호혜성같은 것들-은 파괴되고 '경제적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선택적 수용만이 강제된다. 근대에서 탈근대로의 이행도 마찬가지이다. 바우먼은 '유동성'이라는 가치가 '상위 계층'의 독점과 지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밝힌다. 즉 가장 '유동성이 뛰어난 계층'은 자본가를 중심으로 한 사회 상류층들이 차지하며 이익창출의 토대를 위해서 땅에 고착된 계급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바우먼은 '부재지주'라는 말로 유동하는 자본주의 시대의 자본가들을 표현한다.  

묶이지 않은 그들의 손은 손이 묶인 사람들을 지배한다.손이 묶이지 않은 사람들의 자유는 손이 묶인 사람들의 속박의 주요한 이유가 된다.....이런 점에서 무거운 근대에서 가벼운 근대로 가는 길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그러나 그 골조는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졌다. 더 빨리 움직이고 행동하는 사람들, 운동의 순간성에 가장 근접한 이들이 이제 세상의 지배자들이다. p 193

물론 이쯤 되면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결국 '액체근대'라는 것이 현실의 모습을 포착해내지 못하고 그저 움직이는 자본과 그 일부의 영향력들을 과대하게 형상화해낸 것은 아닌가?" 라는 것 말이다. 충분히 가능한 질문이다. 바우먼의 <액체근대>를 보다가 절차적 민주주의의 실행조차 이루어내지 못해서 다시 싸우고 있는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과 너무 동떨어진 듯 보인다. 또한 다분히 제 1세계의 산업변동 구조에 따른 사회분석의 인상도 갖게 된다.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좀 더 여유로운 시각으로 본다면 바우먼이 말하고 있는 '액체근대'이 경향성들은 이미 한국 사회와 한국의 사회적 관계들 속에서도 분명히 감지된다. 예를 들자면 '노동자의 결속성 문제'같은 것들에 대한 시각이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그건 '노동자 개념'의 부족이다.(결코 틀린 말은 아니다.) 또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작업때문이기도 하다.(이 또한 맞는 말이다.) 하지만 바우먼은 사회적 생산양식의 변화-산업적 용어로 보자면 포디즘에서 포스트포디즘으로의 변화이다- 와 그에 따른 개인성와 유동성, 불확실성의 시대에 따른 개인의 선택적 합리성이기도 하다.  


바우먼은 '액체근대'의 특성중에 중요한 부분으로 '상호결속의 시대의 종말'을 말한다. 일명 '결속 끊기'이다. 그는 푸코의 '원형감옥' 역시 한계효용이 다다랐다고 말한다.나름 유명한 개념이기도 한 '시놉티콘'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즉 '고체근대'의 시대는 '한 사람의 관리자가 여럿을 감시하는 체제'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것은 관리자 역시 여럿의 시각에 노출되어야 하고 또한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한다는 공간적 제약을 받는다. '액체근대'는 이정도의 비용조차 비효율적으로 보는 것이다. 즉 공간성의 폐기이다.(바우먼은 그래서 '액체근대'의 시대에는 '시간' 특히 '속도'가 중요한 개념이라고 설명한다.) 쉬운 예로- 네그리의 <다중>에도 미국의 전략 배치문제가 언급하며 유사한 내용을 설명하는 대목이 있는데- 지상군 시대의 종말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최소한 지상군이 사라지진 않아도 지상군의 비중이 현격히 줄어드는 것이 바로 판옵티콘에서 시놉티콘으로의 원형감옥에서 탈원형감옥으로의 전환의 예증같은 것이다. 바우먼은 '결혼에서 동거로' 라는 표현으로  '고체근대'의 결속성이 녹아내리는 것을 설명한다. 이런 결속성에는 인간관계나 공동체적 가치뿐만이 아니라 전후 지속된 포드주의적 타협, 즉 노동-자본의 결속 또한 포함된다. 바우먼은 여기서 이런 '동거'의 문제에 대해 지적한다. 

함께 지낸다는 것이 서로 득이 되는 합의와 상호의존의 문제였다면 결속끊기는 일방의 문제이다. 일방이라 함은 결합의 한쪽 당사자가 늘 은밀히 바라왔지만 어렴풋하게라도 그에 대한 속내를 드러낸 적이 없었던 자율성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p239-240 

바우먼은 '액체근대'시대에 '총체성의 신화'가 폐기되면서 '불확실성과 토대없는 개인주의'가 지배한다고 언급한다. (개인주의는 근대화의 특징인데 이것과는 차이가 있다.) 이 두가지가 화학결합하면 '불안'이라는 감정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다. 현대인은 과하게 주어진 자유를 감당하지 못하며, 또한 신은 물론이고 자기 정체성, 근대적인 상상 속의 유토피아마저 사라진 하얀 지평선 위를 배회하게된다. 그가 의탁할 곳은 오직 하나뿐이다. 바우먼이 강조하는 '소비'이다. 바우먼은 크리스토퍼 래쉬의 <나르시즘의 문화>를 인용하여 '모든 견고한 것들이 녹아버린는 일이 보편적인 상황에서 주도권은 사물에 놓인다' 라고 말한다. 하지만 바우먼은 '소비의 자유' 가 결국은 '버릴 수 있는 자유'의 자원에 따른 '자유의 재분배'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 이 부분은 좀 설명이 필요하다. 바우먼이 보기에 소비자본주이 사회에서 개인이 누릴 수 있는 자유는 소비할 수 있는 자유뿐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일종의 질적 차이가 생긴다. 소비문제를 다룬 전통적인 학자들-예를 들자면 베블렌같은- 이들은 차별화와 기호가치라는 부분에 촛점을 둔다. 바우먼은 소비에서의 자유는 결국 '자원'의 문제이다. 이 차원은 소유의 자원이 아니라 폐기할 자원이다. 즉 소비자본주의 하에서 엘리트들은 '잘못된 선택을 버릴 자유'가 있다. 그러나 하위계층은 소비를 통한 욕구의 배설을 꾀하지만 그들에게는 '버릴 자유'가 부족하다.(쉽게 말하면 돈 있는 사람들은 실패하면 다른걸 할 자유가 있지만 돈 없는 이들은 실패하면 빚독촉에 의한 자살이다.) 바우먼은 결국 '쇼핑하기'를 통한 정체성이 해방적 가치를 전혀 가지지 못하며 사회적 위계에 따라 차등적으로 구성되는 자유의 재분배정도의 역할이 전부라고 말한다.(그런 이것이 절반의 축복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본이 생산자와 결속대신에 소비자와의 '상호의존'에 의지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소비자들이 찾은 유일한 공간인 '소비의 공간'은 기실 '빈 공간'이다. 바우먼은 레비스트로스가 <슬픈열대>에서 보여준, 타자성 극복의 두가지 대응을 인용하여 '소비공간'에 작동하는 유동하는 자본의 전략을 말한다. 

인류의 역사에서는 타인의 타자성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두전략이 사용되었다.하나는 '뱉어내는'전략이고 다른 하나는 '먹어치우는'전략이다. ....소비의 공간은 '먹어버리는'공간으로 배치된 것이다. p164-165 

쉽게 말하면 전자의 전략은 배제의 전략이고 후자의 전략은 포섭의 전략이다. 바우먼이 보기에 현대의 개인은 자본의 포섭 전략에 완전히 노출된 존재이다. 그들이 유일하게 자유롭다고 느끼는 소비의 공간은 철저하게 '개인화된 주관적 만족'속에서만 복무하게 만드는 공간이며 외부와 단절되된 사물화된 공간인 셈이다.

바우먼은 <액체근대>에서 주로 '고체근대'와 다른 '액체근대'의 특징에 대해서 말한다. 그것을 부정하기보다는 우리의 여행가방 속에 넣고 시작하기 위함이다. 그는 '액체근대' 시대에 달라진 해방의 개념, 개인성의 문제, 시/공간의 변화, 일과 자본의 결속해체, 공동체주의의 탈색-바우먼은 짐 보관소로서의 공동체라는 말을 꺼내는데, 전통적 연대방식의 무너짐과 동시에 인터넷 공동체에 대한 일종의 과잉기대 속에 있다면 그의 분석을 참고해 볼 필요가 있다- 등등을 흥미로운 비유와 표현법을 통해 말하고 있다.(이 점에 이 책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덕목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액체근대'를 피할 수 있는 길은 있는가? 사실 없다. 이런 경향성 자체를 완전히 거부한다는 것은 벽돌을 가지고 밀물을 막아보려는 것과 유사할지도 모른다. 또한 바우먼의 <액체근대>에서 그런 것을 기대할 수도 없다. 이 책은 '해방전략지침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책 전반부에 바우먼은 아도르노로 대표되는 전세대 '비판이론'을 경유함으로써 현재적 과제를 고찰한다. 아도르노의 '비판이론'의 핵심은 '전체주의와 총체성의 거부' 이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의 해방적 성찰로서 유의미했다. 바우먼에 의하면 '액체근대'의 시대에 이런 '총체성의 거부' 자체가 대상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즉 이제 모든 것이 개인화되고 파편화되어 있다는 말이다.(사실 과연 그렇게 볼 수 있는가의 문제에 아도르노는 동의하지 않을것이다.그는 대중문화에 대한 분석에서 오히려 총체화를 거부한다는 이름으로 다시 총체화적으로 관리되는 사회의 모습을 예리하게 읽어냈기때문이다.) 바우먼은 '비판이론'의 과제를 재전도하길 요구한다. 그의 개념적 용어의 사용은 칼 폴라니의 '재배태' 개념과 유사하다.  

많은 이들이 느끼고 있겠지만, 비판이론은 그것이 다루어야하는 주제 자체가 사라질 형국이다...과거 해방이 지녔던 의미는 현재 상황에서는 구시대의 낡은 유물이 되었다.해방의 새로운 공적 의제들이 비판이론의 손길을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아직도 비판적 공공 정책을 기다리는 새로운 공적 의제들이 현대 인간 조건의 '액화된' 비전과 함께 부상하고 있다. p78 

바우먼은 비판이론이 거부했던 '총체화' 가 전후 서구 역사에서 '액화된' 것으로 본다.즉 모두 녹아없어지고 소비주의의 흐름에 몸을 맡긴 파편화된 개인만이 남아있다는 것이 그가바라보는 시각이다. 결국 그는 폴라니의 '배태'개념을 재인용하여 달라진 상황을 인정하며 '재배태'의 가능성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법률상 개인과 실제적 개인의 간극' '법률적으로 강제되는 부정적 자유와 진정한 자유' 등등의 간극을 돌아보고 여기를 메우는 것이 '비판이론'의 과제이며 해방의 선셜조건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는 '대문자' 정치의 복원과 함께 '공적영역'의 복구를 요구한다. 폴라니식으로 말하자면 탈배태된 '공적 영역'의 재배태인 셈이다. 

이제 공적 권력은 권력의 역사 대부분에 걸쳐서 힘껏 파괴하고 제거하려 했던 것을 소생시켜야만 한다. 오늘날 진정한 해방에는 '공적 영역'와 '공적 권력'의 필요성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더욱 요청된다. p82 

노파심 삼아 말하자면 마지막 결론부분만 방점을 찍어 읽어 내면 바우먼의 <액체근대>를 부분적으로 -결국 계몽주의적 자기강화를 위해 -응용하는 것밖에 안된다. 바우먼은 공동체주의의 부활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하며,또 근대적 프레임 속에서 헛발질하는 진보라는 관념 자체도 의문시한다. 그는 포스트모던한 현실의 변화를 충분히 인지한 틀 속에서는 전통적인 방식의 공동체적 결사보다는 이미 풀려난 개인의 자유주의적 가치에,생활정치 세계와 결속에 힘을 싣는다. 이것은 공동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불확실성','불안정','불안전' 이라는 세속의 삼위일체 속에 일시성과 차이가 공존할 수 있는 통한 자유주의적 공동체 개념이다.  

공동체주의자들이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한가지 가능성은 인간의 자유를 넓히고 파고들어가게 되면 인간 전체의 안전의 합이 늘어날 수도 있고,자유와 안전이 상호 공존 속에서 각각 증대됨은 물론이고 이들이 같이 성장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p290 

듣기에만 좋은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바우먼이 '자유의 간극'을 메우는 실천적 가치에 대해서도 강조한다는 점을 잊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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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플루 비상.... 

경남창원에서 열렸던 월드콰이어 합창대회가 신종플루때문에 행사전체가 급취소되었다. 사실 그 때 우리 팀은 창원에 있었다. 나는 부산에 있었지만  

어제 부산에 있는 모초등학교에서 약 40명의 아이들이 신종플루 양성반응이 보고되어 가택격리되었다. ㅜㅜ 

그저께...아침 6시에 함양에 갔다. 빗길을 뚫고 가는데....함께가는 승합차 안에 지원부서 젊은 친구 하나가 감기 몸살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은 농담처럼..."야...너 창원 갔다 왔잖아.며칠전에...너 신종플루 아니야....내 옆에서 떨어져...입막아" 뭐 이랬다. 그리고 또 다들 일을 했다. 이 친구가 자기도 좀 불안했는지 그날 오후 보건소에 갔는데, 어제 결과가 나왔다. 신종플루 양성 반응 

회사가 수근 거렸다. 다들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진 않지만 내심 ...어이구 이거 조심해야지...하는 분위기였다. 나보고도...어제 그 승합차 멤버잖아..어이..저리가... 어 진짜에요...빨리 보건소 가봐야하는 거 아니에요...등등 

나는 아직 증상이 없고...설마했지만...집에 들어오는 길에 약간 고민을 했다. 아이들 때문이다. 마스크를 하고 들어가면 아내의 과잉공포심을 불러일으킬 것 같기도 하고,또 안하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아이들에게......하여간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그냥 마스크 하나 사서 쓰고 집에 들어갔다. 예찬이가...아빠 마스크 뭐야...하고 계속 묻는다. 집에서 자기 전까지 계속 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수시로 열을 체크했다. 물론 함께 자는 예찬이도 어제는 엄마와 잤다. 

아침에 일어나서 머리에 손을 대어보니 열은 없는 듯 하다. 잠복기가 2-3일이라는데 만약 지금 이 시간이 잠복기라면 주말이면 증상이 나타나게 된다. 물론 신종플루환자와 접촉했다고 모두 신종플루가 걸리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 신종플루의 공포는 아주 간단하다. 

불확실성....이게 가장 공포스러운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먼이 <액체근대>에서 말한, 아마 그의 다른 책 <유동하는 공포>에서도 유사한 예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면에서 신종플루는 그런 불확정한 대중을 상대로 하는 불확실한 공포여서 포스트모던한 공포에 가장 가깝다.  

누구나 피해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누구나 숙주가 될 수 있다. 요즘 공포 영화 중에는면 이런 소재들의 영화가 꽤있다. 영화<링>이 무서웠던 건 관절 꺽기 귀신때문이 아니라 그런 무차별성때문이다. "어..나는 그런 원한의 인과관계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나는 최소한 거기에서는 선한 대상인데"....영화<링>은 그런거 소용없다고 말한다. 그냥 비디오를 보면 그게 정치적으로 좌파던 우파든, 도덕적으로 착하던 나쁘던 상관없다고 말한다.(참으로 훌륭한 공포영화 아닌가?)  

신종플루는 새로운 형식의 공포를 질병의 형태로 보여준다. 

희망이라면..^^  

회사의 어떤 친구 하나가 그러더군..  

"이번 신종플루는 약한 녀석이구요. 올 가을이나 내년 봄쯤 하이브라이드된 진짜 메가톤급 바이러스가 올텐데..지금 살짝 앓아 놓으면 항체가 생겨서 .."  

뭔 근거가 있는 말인지 ^^  당분간 나는 요주의 대상자 명단-내 스스로도-에 들어갔다. 그나저나 다음주에 총파업 기간이 잡혀있는데- 형식만 그렇지 각 사가 서로 눈치보다가 교대파업 형태가 될 듯 하다- 신종플루가 이래 저래 딴지를 걸 수도 있겠다 싶다.최소한 우리 회사 내에서는 말이다.  월드컵이 열리는 날 혁명할 수 없다고 하듯이... 신종플루와 대중동원도 안티적 관계이다. 역시 현실은 복합적이고 오묘하며 재미있다. ^^  <리어왕>에 그런 대사가 나온데...정확히 기억나질 않지만... 너희들은 나를 위대한 권력을 가진 왕이라고 하지만 난 내 몸의 몸살하나 다스리지 못하고 있는 걸....뭐 이런 말.  

아...나 왜 이렇게 웃기지.  

웅.... 

선무당 임의진 목사가 새로운 음반을 냈다 

 <커피 여행>.. 나는 솔직히 커피맛에 특별히 민감한 미각을 갖지는 못했지만-그런고로 새마을 커피가 가장 좋다- 그가 고르는 음악에는 그래도 나름 뚫린 귀를 갖고 있다고는 생각한다.  

어제 이 음반의 발표회(?)가 서울에서 열렸을 것이다. 그자리에 참석하는 한 인사에게 들었기때문에..거의 끝나고 술먹는 자리여서 좋아라 한다는... 

그 인사에게 임의진 목사 만나면 내가 팬이라고 전하시고...싸인든 음반 한장 얻어달라고 했는데...^^  그럴 경황이 있으셨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기대... ^^ 

임의진 목사의 홈페이지는 예전에도 한 번 소개했었는데...그래서 이번엔 안한다. 저작권 문제때문인지 예전에 있던 음악들은 모두 사라지고...디자인은 좀 더 심플해지고 그랬다. 언제가 혼자 여행갈 수 있는 시간이 되면 한번 찾아가서 좋은 음악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분이다. 그분도 나도 그렇게 한가할라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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