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체근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이일수 옮김 / 강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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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의 근대성을 규정하는 말 중 자주 사용되는 말이 '압축근대'이다. 이 말은 한국의 역사적 좌표를 이중적으로 구속하고 있는 말처럼 보인다. '압축'이 의미하는 바는-경제적 관점에서 보자면 '고도성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서구의 역사 과정과 비교하여 빠른 시간 내에 이루어낸 근대화 과정을 말한다. 다른 하나는 복합어의 두번째 단어인 '근대'라는 단어에 시선을 돌릴 필요도 있다.즉 '압축'되었을 망정 '근대' 라는 역사적 시간축 안에 우리가 있다는 것이다.   


'압축근대'라는 말은 복합적인 의미가 있지만 기실 이 말을 사용할때는 '한국적 근대성의 부정적 요소'들을 언급하기 위해 주로 사용된다. 전근대적 권위주의의 잔존, 천민자본주의의 상식화, 시민 사회의 역사와 공간의 일천함, 정치적 다양성의 협소화, 다문화와 차이에 대한 이해부족 등등..그리고 이와 동시에 한국은 1990년대를 넘어서면서 자본주의의 새로운 변신에 기인한 탈근대적 과제 역시 동시에 안게 된다. 결국 제대로 '이루지 못한 근대성'과 너무 '일찍 달려든 탈근대성' 사이에서 한국사회의 모순은 두가지 중층과제를 떠안게 된것이다. 결국 현재 한국사회의 모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론적으로 어느 한쪽의 우선적 해결로서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최소한 현실에서는 반독재세력에 대한 대항전선이 형성되더라도 그 지점은 출발점이지 결절점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애써 피곤해질 '근대와 탈근대'의 논쟁은 재연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액체근대>를 읽기 위해서는 수렁에 빠진 이 논쟁의 주요 쟁점들에 대해서 한번쯤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근대와 탈근대'의 문제에 관심이 별로 없다면- 그것은 그저 현학적인 학자들의 자기연명 수단정도로 생각한다면- 지그문트 바우먼의 <액체근대>는 별로 읽을 가치도, 읽는 재미도 주지 못할 것이다. 그와 함께 들뢰즈가 말한 '권력의 모든 측면에 대항하여 싸울 힘'도 스스로 포기해야 할 지도 모른다. 동네 아이들끼리 가짜 총싸움을 하더라도 그 지형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알고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자기강화를 위한 지리한 동어반복의 구호보다 차라리 책에 코박는 편을 택한 것도 그 때문일지 모른다.물론 정답은 없다. 최소한 나는 인터넷상에서 100번의 'MB타도' 구호를 외쳤다고 100배쯤 더 진보적이 된다고 생각치 않는 비정상적인 1인 중에 하나다.) 

지그문트 바우먼이 말한 '액체근대'는 무엇일까? 여타 학자들이 자기 나름의 개념적 용어로 설명한 '변화된 근대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 최소한 미묘한 차이들은 존재하겠지만 가장 보편적인 용어로 '포스트모던'이다. (보편적 총체성의 거부를 보편적 단어로 설명해버렸다.문제는 이 '포스트모던' 이라는 것이 누구의 '포스트모던'이냐에 따라 또 상호비판적이며 때론 부정적이기까지한 다른 의미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바우먼은 변화된 현재의 역사시대를 '유동성'이라는 액체의 특성에 빗대어서 말한다. 그는 공산당 선언의 유명한 구절인 '모든 굳어진 것은 녹아내린다.'라는 말에서 '액체근대'의 추이를 읽어낸다.( 내 개인적으로 어린 시절 넘겨집던 마르크스의 유물론 철학에서 가장 인상적인 한 단어는 단연코 '변화'였다.) '모든 것은 변한다.' 라는 것이 따지고 보면 변증법의 운동을 설명하기 위한 기본 토대가 되는 것 아닌가? 마르크스는 이런 변화를 헤겔의 변증법과 노동계급의 궁극적 승리라는 유토피아주의로 교직해낸다. 문제는 마르크스식의 사적유물론에서는 운동성이 어느 지점에서 스스로 멈추어 서는 공간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아주 오래된 논쟁거리이고 이에 대한 해석을 두고 비판과 반비판이 가득하다.) 바우먼의 시각에서는 마르크스는 유토피아를 상정하면서 운동의 종말을 스스로 예고한 것으로 읽힌다. 마르크스가 '녹아내리는 것'의 당위성을 주장했던 대상은 -쉽게 말하자면- 전근대적 과제들이었다는 것이 바우먼의 이야기다. 그리고 -비단 마르크스 프로젝트뿐만이 아니었지만 그의 프로젝트를 가장 이상적인 근대적 계몽의 의지로 읽는다면- '녹여서 이루어낸 것'이 바로 '고체근대', '무거운 근대'이다.이 시대는 근대적 유토피아의 신념은 사라진 시대이다.바우먼의 비유를 들자면 '여호수아의 담론'이 종말을 고하고 바우먼은 이제 그런 '헤비메틀의 근대'가 다시 한번 '녹아내리는' 단계에 들어왔다는 것이며 이를 개념화해낸 말이 '액체근대'이다.  

물론 바우먼은 전근대-근대-탈근대의 도상에서 해체가 부분적이고 파편적으로 이루어졌음을 강조한다. 전근대의 장점-예를 들자면 호혜성같은 것들-은 파괴되고 '경제적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선택적 수용만이 강제된다. 근대에서 탈근대로의 이행도 마찬가지이다. 바우먼은 '유동성'이라는 가치가 '상위 계층'의 독점과 지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밝힌다. 즉 가장 '유동성이 뛰어난 계층'은 자본가를 중심으로 한 사회 상류층들이 차지하며 이익창출의 토대를 위해서 땅에 고착된 계급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바우먼은 '부재지주'라는 말로 유동하는 자본주의 시대의 자본가들을 표현한다.  

묶이지 않은 그들의 손은 손이 묶인 사람들을 지배한다.손이 묶이지 않은 사람들의 자유는 손이 묶인 사람들의 속박의 주요한 이유가 된다.....이런 점에서 무거운 근대에서 가벼운 근대로 가는 길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그러나 그 골조는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졌다. 더 빨리 움직이고 행동하는 사람들, 운동의 순간성에 가장 근접한 이들이 이제 세상의 지배자들이다. p 193

물론 이쯤 되면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결국 '액체근대'라는 것이 현실의 모습을 포착해내지 못하고 그저 움직이는 자본과 그 일부의 영향력들을 과대하게 형상화해낸 것은 아닌가?" 라는 것 말이다. 충분히 가능한 질문이다. 바우먼의 <액체근대>를 보다가 절차적 민주주의의 실행조차 이루어내지 못해서 다시 싸우고 있는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과 너무 동떨어진 듯 보인다. 또한 다분히 제 1세계의 산업변동 구조에 따른 사회분석의 인상도 갖게 된다.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좀 더 여유로운 시각으로 본다면 바우먼이 말하고 있는 '액체근대'이 경향성들은 이미 한국 사회와 한국의 사회적 관계들 속에서도 분명히 감지된다. 예를 들자면 '노동자의 결속성 문제'같은 것들에 대한 시각이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그건 '노동자 개념'의 부족이다.(결코 틀린 말은 아니다.) 또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작업때문이기도 하다.(이 또한 맞는 말이다.) 하지만 바우먼은 사회적 생산양식의 변화-산업적 용어로 보자면 포디즘에서 포스트포디즘으로의 변화이다- 와 그에 따른 개인성와 유동성, 불확실성의 시대에 따른 개인의 선택적 합리성이기도 하다.  


바우먼은 '액체근대'의 특성중에 중요한 부분으로 '상호결속의 시대의 종말'을 말한다. 일명 '결속 끊기'이다. 그는 푸코의 '원형감옥' 역시 한계효용이 다다랐다고 말한다.나름 유명한 개념이기도 한 '시놉티콘'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즉 '고체근대'의 시대는 '한 사람의 관리자가 여럿을 감시하는 체제'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것은 관리자 역시 여럿의 시각에 노출되어야 하고 또한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한다는 공간적 제약을 받는다. '액체근대'는 이정도의 비용조차 비효율적으로 보는 것이다. 즉 공간성의 폐기이다.(바우먼은 그래서 '액체근대'의 시대에는 '시간' 특히 '속도'가 중요한 개념이라고 설명한다.) 쉬운 예로- 네그리의 <다중>에도 미국의 전략 배치문제가 언급하며 유사한 내용을 설명하는 대목이 있는데- 지상군 시대의 종말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최소한 지상군이 사라지진 않아도 지상군의 비중이 현격히 줄어드는 것이 바로 판옵티콘에서 시놉티콘으로의 원형감옥에서 탈원형감옥으로의 전환의 예증같은 것이다. 바우먼은 '결혼에서 동거로' 라는 표현으로  '고체근대'의 결속성이 녹아내리는 것을 설명한다. 이런 결속성에는 인간관계나 공동체적 가치뿐만이 아니라 전후 지속된 포드주의적 타협, 즉 노동-자본의 결속 또한 포함된다. 바우먼은 여기서 이런 '동거'의 문제에 대해 지적한다. 

함께 지낸다는 것이 서로 득이 되는 합의와 상호의존의 문제였다면 결속끊기는 일방의 문제이다. 일방이라 함은 결합의 한쪽 당사자가 늘 은밀히 바라왔지만 어렴풋하게라도 그에 대한 속내를 드러낸 적이 없었던 자율성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p239-240 

바우먼은 '액체근대'시대에 '총체성의 신화'가 폐기되면서 '불확실성과 토대없는 개인주의'가 지배한다고 언급한다. (개인주의는 근대화의 특징인데 이것과는 차이가 있다.) 이 두가지가 화학결합하면 '불안'이라는 감정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다. 현대인은 과하게 주어진 자유를 감당하지 못하며, 또한 신은 물론이고 자기 정체성, 근대적인 상상 속의 유토피아마저 사라진 하얀 지평선 위를 배회하게된다. 그가 의탁할 곳은 오직 하나뿐이다. 바우먼이 강조하는 '소비'이다. 바우먼은 크리스토퍼 래쉬의 <나르시즘의 문화>를 인용하여 '모든 견고한 것들이 녹아버린는 일이 보편적인 상황에서 주도권은 사물에 놓인다' 라고 말한다. 하지만 바우먼은 '소비의 자유' 가 결국은 '버릴 수 있는 자유'의 자원에 따른 '자유의 재분배'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 이 부분은 좀 설명이 필요하다. 바우먼이 보기에 소비자본주이 사회에서 개인이 누릴 수 있는 자유는 소비할 수 있는 자유뿐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일종의 질적 차이가 생긴다. 소비문제를 다룬 전통적인 학자들-예를 들자면 베블렌같은- 이들은 차별화와 기호가치라는 부분에 촛점을 둔다. 바우먼은 소비에서의 자유는 결국 '자원'의 문제이다. 이 차원은 소유의 자원이 아니라 폐기할 자원이다. 즉 소비자본주의 하에서 엘리트들은 '잘못된 선택을 버릴 자유'가 있다. 그러나 하위계층은 소비를 통한 욕구의 배설을 꾀하지만 그들에게는 '버릴 자유'가 부족하다.(쉽게 말하면 돈 있는 사람들은 실패하면 다른걸 할 자유가 있지만 돈 없는 이들은 실패하면 빚독촉에 의한 자살이다.) 바우먼은 결국 '쇼핑하기'를 통한 정체성이 해방적 가치를 전혀 가지지 못하며 사회적 위계에 따라 차등적으로 구성되는 자유의 재분배정도의 역할이 전부라고 말한다.(그런 이것이 절반의 축복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본이 생산자와 결속대신에 소비자와의 '상호의존'에 의지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소비자들이 찾은 유일한 공간인 '소비의 공간'은 기실 '빈 공간'이다. 바우먼은 레비스트로스가 <슬픈열대>에서 보여준, 타자성 극복의 두가지 대응을 인용하여 '소비공간'에 작동하는 유동하는 자본의 전략을 말한다. 

인류의 역사에서는 타인의 타자성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두전략이 사용되었다.하나는 '뱉어내는'전략이고 다른 하나는 '먹어치우는'전략이다. ....소비의 공간은 '먹어버리는'공간으로 배치된 것이다. p164-165 

쉽게 말하면 전자의 전략은 배제의 전략이고 후자의 전략은 포섭의 전략이다. 바우먼이 보기에 현대의 개인은 자본의 포섭 전략에 완전히 노출된 존재이다. 그들이 유일하게 자유롭다고 느끼는 소비의 공간은 철저하게 '개인화된 주관적 만족'속에서만 복무하게 만드는 공간이며 외부와 단절되된 사물화된 공간인 셈이다.

바우먼은 <액체근대>에서 주로 '고체근대'와 다른 '액체근대'의 특징에 대해서 말한다. 그것을 부정하기보다는 우리의 여행가방 속에 넣고 시작하기 위함이다. 그는 '액체근대' 시대에 달라진 해방의 개념, 개인성의 문제, 시/공간의 변화, 일과 자본의 결속해체, 공동체주의의 탈색-바우먼은 짐 보관소로서의 공동체라는 말을 꺼내는데, 전통적 연대방식의 무너짐과 동시에 인터넷 공동체에 대한 일종의 과잉기대 속에 있다면 그의 분석을 참고해 볼 필요가 있다- 등등을 흥미로운 비유와 표현법을 통해 말하고 있다.(이 점에 이 책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덕목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액체근대'를 피할 수 있는 길은 있는가? 사실 없다. 이런 경향성 자체를 완전히 거부한다는 것은 벽돌을 가지고 밀물을 막아보려는 것과 유사할지도 모른다. 또한 바우먼의 <액체근대>에서 그런 것을 기대할 수도 없다. 이 책은 '해방전략지침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책 전반부에 바우먼은 아도르노로 대표되는 전세대 '비판이론'을 경유함으로써 현재적 과제를 고찰한다. 아도르노의 '비판이론'의 핵심은 '전체주의와 총체성의 거부' 이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의 해방적 성찰로서 유의미했다. 바우먼에 의하면 '액체근대'의 시대에 이런 '총체성의 거부' 자체가 대상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즉 이제 모든 것이 개인화되고 파편화되어 있다는 말이다.(사실 과연 그렇게 볼 수 있는가의 문제에 아도르노는 동의하지 않을것이다.그는 대중문화에 대한 분석에서 오히려 총체화를 거부한다는 이름으로 다시 총체화적으로 관리되는 사회의 모습을 예리하게 읽어냈기때문이다.) 바우먼은 '비판이론'의 과제를 재전도하길 요구한다. 그의 개념적 용어의 사용은 칼 폴라니의 '재배태' 개념과 유사하다.  

많은 이들이 느끼고 있겠지만, 비판이론은 그것이 다루어야하는 주제 자체가 사라질 형국이다...과거 해방이 지녔던 의미는 현재 상황에서는 구시대의 낡은 유물이 되었다.해방의 새로운 공적 의제들이 비판이론의 손길을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아직도 비판적 공공 정책을 기다리는 새로운 공적 의제들이 현대 인간 조건의 '액화된' 비전과 함께 부상하고 있다. p78 

바우먼은 비판이론이 거부했던 '총체화' 가 전후 서구 역사에서 '액화된' 것으로 본다.즉 모두 녹아없어지고 소비주의의 흐름에 몸을 맡긴 파편화된 개인만이 남아있다는 것이 그가바라보는 시각이다. 결국 그는 폴라니의 '배태'개념을 재인용하여 달라진 상황을 인정하며 '재배태'의 가능성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법률상 개인과 실제적 개인의 간극' '법률적으로 강제되는 부정적 자유와 진정한 자유' 등등의 간극을 돌아보고 여기를 메우는 것이 '비판이론'의 과제이며 해방의 선셜조건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는 '대문자' 정치의 복원과 함께 '공적영역'의 복구를 요구한다. 폴라니식으로 말하자면 탈배태된 '공적 영역'의 재배태인 셈이다. 

이제 공적 권력은 권력의 역사 대부분에 걸쳐서 힘껏 파괴하고 제거하려 했던 것을 소생시켜야만 한다. 오늘날 진정한 해방에는 '공적 영역'와 '공적 권력'의 필요성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더욱 요청된다. p82 

노파심 삼아 말하자면 마지막 결론부분만 방점을 찍어 읽어 내면 바우먼의 <액체근대>를 부분적으로 -결국 계몽주의적 자기강화를 위해 -응용하는 것밖에 안된다. 바우먼은 공동체주의의 부활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하며,또 근대적 프레임 속에서 헛발질하는 진보라는 관념 자체도 의문시한다. 그는 포스트모던한 현실의 변화를 충분히 인지한 틀 속에서는 전통적인 방식의 공동체적 결사보다는 이미 풀려난 개인의 자유주의적 가치에,생활정치 세계와 결속에 힘을 싣는다. 이것은 공동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불확실성','불안정','불안전' 이라는 세속의 삼위일체 속에 일시성과 차이가 공존할 수 있는 통한 자유주의적 공동체 개념이다.  

공동체주의자들이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한가지 가능성은 인간의 자유를 넓히고 파고들어가게 되면 인간 전체의 안전의 합이 늘어날 수도 있고,자유와 안전이 상호 공존 속에서 각각 증대됨은 물론이고 이들이 같이 성장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p290 

듣기에만 좋은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바우먼이 '자유의 간극'을 메우는 실천적 가치에 대해서도 강조한다는 점을 잊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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