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은 자기 가두어놓기와 놓여나기를 무수히 반복한다. 가두어놓기와 놓여나기라는 두 개의 의지는 서로를 죽이고 동시에 서로를 새로이 태어나게 한다. 

"바다 한가운데 외로이 떠 있는 섬만 섬이 아니다. 가두어놓을 수 있는 시공이면 어디든지 섬이고 그곳에 갇히는 일 또한 섬 자체인 것이다" 

"자기 외로움을 이겨내는 힘이 없는 사람은 자기를 가둘 수 없다. 가두어놓는 삶을 살며 고독을 씹어보아야 놓여나기, 자유 혹은 초월을 삶을 살 수 있다." 

                                                                    한승원 <바닷가 학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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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승원선생이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인 장흥에 들어가서 지은 집이 '해산토굴'이다. 미당에게 그를 키운 것의 팔할이 '바람'이었다면 한승원 선생에게는 '바다'다. 전남 장흥의 앞 바다말이다. (장흥의 '삼합'은 나름 유명한데 아직 한번도 함께 먹어보질 못했다. 미식가가 되어야 느낄 지복일텐데.) 그가 2002년에 낸 수필집 <바닷가 학교>는 자신이 바다로 부터 배운 것들의 보고서이자 바다에게 지불하는 수업료이다. 그 중 인용한 구절은 '섬의 미학' 에 들어 있는 구절이다. 

장맛비가 하루를 멀다고 중남부를 왕복하고 있다. 이쪽에서 물길어다 저쪽에 쏟아붓는 형상이다. 실제로 수해를 입은 농촌의 민가들은 모두 섬처럼 보인다. 바다에도 섬이 있고 뭍에도 섬이 있다. 또 섬이라고 할 수 없지만 삶의 상흔,섬의 트라우마같은-잊혀진 것들은 '여'가 되었다는- 섬조각들도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고 한 시인의 울림은 너무도 강해 '타인'의 섬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 '소통'이라는 말을 발견해냈다. 그런데 나를 비우고 다른 섬을 찾을 수는 없다. 내 안에도 섬이 있기 때문이다. 한승원 선생의 말처럼 '가두어놓을 수 있는 시공이면 어디나 섬'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 나오는 '그물에 대한 맹신'이라는 글에는 '어부들만 그물을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자기 나름대로 고기를 잡아먹고 살 그물을 하나씩 가지고 살아간다.' 라는 말이 나온다. 한선생은 '생존의 숭고한 그물'과 빗대어 '자기함정의 그물'을 이어서 말한다. 일종의 자기경험과 인식의 협애함에서 나온 '판단의 그물'이다.  

'구두장사를 하는 사람은 구두의 모양새로써,양복장사를 하는 사람은 양복의로써....(중략)... 내 감지 능력으로 감지할 수 없는 아주 많은 것들이 내 그물에 대한 나의 맹신을 비웃으며 내가 쳐노은 그물코 사이로 줄줄이 빠져나가고 있다.' 

내게 올 여름 딱 사흘 동안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이틀은 섬에 있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 하루는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 부질없고 너덜한 관계로 핸드폰의 한자리를 차지할 사람들은 아니다. 앞으로 오래 두고 사귀게 될만한 이들. '섬'과 같은 이들. 

'섬은 사람들의 배와 바람과 파도와 새들이 몰려올지라도, 잠시 머물렀다가 떠나갈지라도 수다나 호들갑이나 너스레를 떨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는다. 거기 들어가 자기를 가두는 사람들은 그 섬처럼 자기의 고독과의 싸움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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