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역행을 하다보니 이 오래된 시집<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을 다시 꺼내 읽게 된다. 나는 이 시집에 나온 시들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또 싫어하기도 한다.  

내가 386선배들의 편협함에 못마땅했던 이유는 잘라말하면 이런류의 시들 만이 진정한,최고의 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물론 나역시 혹한적도 있다. 그렇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나는 그들이 아직도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그 때도 지금도 부르주아지 근성으로 인해 여기에 실린 시들이 '시'가 보여 주어야하는 최고의 전형이라고는 생각하지 는않는다. 

하지만 여기에는 분명히 시가 보여주어야하는 어떤 아름다움 중 하나가 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김남주가 누군지 잘 모를 것이며, 또 시집 제목만으로도 유명했던 이 번역시집의 존재 자체도 모를 것이다.(정말 아침 저녁으로 읽어야 할 것 같은...) 아니 이제 아무도 이런 시집을 읽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요즘 친구들이 보면 '이게 무슨 시야? 투쟁구호같은거 아니야.' 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를 펼친다.      

그날이 오면 거칠고 드센 폭풍은/ 수없이 많은 떡갈나무를 찟어발길 것이다. 

궁정은 부들부들 떨게 되고/ 성당의 탑은 무너져 버릴 것이다. (하이네의 시<기다려라 다만>중 발췌) 

어제 61년만에 일식이 있었다.  

 "낮이 사라진 그날, 독재의 개들은 진실을 먹어치웠다"(국회의원 천정배) 

 몇 시간 안에 해는 다시 빛나고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지만 개들이 먹어치운 해는 이 땅에 아주 오래 오래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된다. 

 반세기를 지배해온 일본의 자민당이 그렇게 오래 버틸 수 있었던 것 중에 하나는 미디어의 상황과 관련이 있다.  일본의 신문은 우리처럼 보수우익 신문들이 판을 친다,가끔 진보적인 분들도 인용하는 외신에는 일본판 조선일보,일본판 중앙일보가 꽤 있다. 조선일보의 정치적 의도를 비판하기 위해 국내 또다른 론을 인용할 경우, 가끔 '이항 대립'의 틈바구니로 몰리기 때문에 택하는 것이 외신이다. '물러난'객관성을 얻기 위해 외신을 인용하는데, 가끔 어처구니 없을 때는 선택한 것이 각국의 보수우익 신문일때이다. (몇 년 전에 페이퍼인가 댓글로 이와 유사한 내용을 쓴 적이 있다.) 

현재 한나라당이 모델로 두는 것은 거의 일본 모델과 유사하다. 일본 신문 중 전국지는 대개가 보수 우익지이다. TV는 NHK만 제외하면 상업방송의 천국이다. 사회적 다양성을 담아내는 시민사회의 두께가 미력한 이 사회에서 한나라당이 날치기 미디어법을 통해 끌고 가고자 하는 모델은 '장기집권 자민당-보수.상업 미디어 동거 모델' 이다. 이것은 단 한번의 승부수가 아니다. 장기간의 이데올로기적 작업이며 거대프로젝트이다. 이데올로기가 끝났다고 앞에서 말하면서 실제로 거대한 이데올로기적 기획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의 종언'은 그 언명 자체로 '거대한 이데올로기'가 되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절차적으로 '날치기 조차 제대로 날치기'하지 못했다. TV중계를 통해서 전국에 중계된 바를 보더라도 국회부의장이라는 인간은 투표종료를 번복했다. 또한 대리투표 의혹이 불거지자 '증거화면' 가지고 오라고 뻣대고 있다. 그렇게 '증거 대라' 라고 나오면 그 '증거'를 못찾아낼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모든 장면이 중계되고 있었고 국회의사당 방청석에 카메라가 몇 대가 있었는지 모르는가?  

'증거' 가 나오면 이 자들은 또 다르게 말을 바꿀게 뻔하다. '몇 몇 그런 예가 있는데'라고 하면서 '희생양'으로 자기 의원 몇 명 징계하고 끝낼 것이다. 이 참에 '증거' 가 나온다면 그렇게 자랑스럽게 지킨다고 헛소리하던 -스스로 매번 모독하면서- 대한민국 헌정 역사를 뒤튼 죄목으로 한나라당 의원이 전원 사퇴하겠다고 약속을 하라. 그리고 기습상정 날치기한 법안은 절차적으로도 민주주의에 어긋나기 때문에 원천무효가 되어야 한다. 

방송법의 절차상 문제는 사실 부차적인 것이다. 미디어 악법의 주요 4대 법안. 이 문제는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분리되지 않는다. 이 점을 끝까지 놓치지 말아야 한다. 즉 나머지 법들은 어떻게 되었든 통과 되었으니 그냥 가고, 절차상 문제가 있었던 방송법은 다시 수정하지는 식으로 접근해서는 곤란하다. 그렇기 때문에 '원천무효'이어야하지 '방송법'만 재논의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TV 보도에서는 편의적으로 절차적 논란이 예상되는 '방송법'을 부각시키고 있지만 이것은 긍정적인 점과 부정적인 점을 동시게 갖고 있다. 미디어 4대 악법을 하나로 읽어야 한다는 점.  흥분할때 흥분하고 욕을 할 때 욕을 하더라도 미디어는 비판적으로 읽어야만 한다.   

주요 언론 악법은 신문법 개정안, 방송법 개정안,IP 사업법 개정안,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이다.   

"적은  

아직 승리한 것이 아니다"  

(브레히트의 시<평화를 위한 전사의 죽음에 부쳐>중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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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으로 국회 미디어법 상정 현장 중계를 보고 있다. 

...

이윤성 국회부의장-이 양반도 언론인 출신이다-이 직권상정했고, 경호권을 발동했다.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을 실신해서 쓰러지고....  

.. 

노무현 탄핵안 상정 날치기와 똑같은 방식이다. 

.. 

국회에서는 '직권상정 결사반대' 의 구호가 울려퍼지고 있다. 

.. 

..그 와중에 전자투표가 이루어지고 있다. 

..초록불이 하나 둘 들어오고 있다.  

...  

신문법 투표가 종료되었다. 

.. 

방송법 재표결이라는 말도 안되는...개같은 짓거리까지... 

"다시 투표해주십시오"  

개같은 **...   ...  

 

사실 저런 모든 짓거리를 처음부터 볼 필요도 없었다. 

..민주주의가 숨이 넘아가는 장면을 이렇게 목도하고 있다. 

.. 개만도 못한 **...  

 

 "국회를 전원해산하라."  

 "이제는 정권퇴진이다."

오로지 피끓는 '단결 투쟁'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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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의 직업은 온 세상

“나도 한때 철거민인 적이 있어서 아는데 철거민과 비정규직의 입장을 누구보다 이해하고 있다.”(2009년 2월12일 한나라당 청년위원회 만찬)

“나도 창업했던 소상공인(출신)이다. 선배로서 얘기하자면 무엇보다 용기가 있어야 한다.”(2009년 4월9일 소상공인 교육생과 만남)

“내가 어린 시절 노점상을 해봐서 여러분 처지 잘 안다.”(2008년 12월23일 서민 초청 연찬)

“학생 때 나도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면서 고통을 겪었던 민주화 1세대이다.”(2008년 6월11일 중소기업성공전략회의)

“나도 체육인이다. 15년간 수영연맹 회장을 했고 세계체육연맹 집행위원을 하면서 많은 사람과 인연을 맺었다.”(2008년 8월26일 베이징 올림픽 선수단 초청 오찬)

“나도 기업인 출신으로서 아세안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일한 적이 있다.”(2009년 5월31일 한·아세안 최고경영자 정상회의)
.. 

MB의 자뻑 심리에 대한 <시사인>의 글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1-2년전 어떤 회사 사장의 평소 발언이 생각났다. 나는 당시 그걸 '선무당론' 이라고 불렀다. 당시 쟁점은 고유 직종에 대한 전문성의 문제였는데,권력을 가진 이 회사의 이 양반은 '툭'하면 '멀티플레이어론'을 내세우며 이것이 '시대정신'이고 '개혁'이라고 외쳤다. 정확히 여기저기 자기들의 임의에 의해 노동력을 편재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 저것 동시에 다 잘할 수 있으면 좋지만 또 그만큼 경박단소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도 힘을 가진 자가 '아니란다'. 자기는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봐서 다 알고 있다고...지금 이명박이 하는 말과 똑같은 거다. 오죽하면 어떤 특정 부서를 들어 그 쪽에 있는 사람들도 내가 젊은시절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몇 달 그런 부서에서 이것 저것 다해봤기 때문에 날 속일 수 없다고 당당히 말한다. 

이게 '선무당 사람잡는 일이다.' 

MB이고 그 회사 CEO이고 모두 '선무당'이고 자기 같은 선무당을 세상에 만들고 싶어하는 것이다. 나쁘다. 

하지만 나는 또 질문한다. '반면교사'의 질문이다. '나는 그렇지 않은가? '라고 말이다.  

그러니까 이런 거다. 요트 타고 바다 낚시 서너번 해보고 나서 '바다'에 대해서 '마스터' 한 것이다. 피곤한 일이다. 이런 일들은 내 자신에게도 반복적으로 발생한다. 그리고 내 부족한 눈에도 내 주변에서 여러번 목격된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언젠가 '알 수 없다'는 말을 한 적도 있다. 

20여년전 쯤에 내가 잠시 외국에 나갔을때, 50줄의 은발의 외국인 선생이 내게 그런 말을 했다.영어로 다가.. 

"지금보다 젊었을 때는 모든게 더 확실해보였는데....참 이상한 것이 말이지요...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세상이 잘 보이지 않더군요." 고 말이다. 

나는 그 말 뜻을 당시 이해하진 못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음의 협소함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내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esc 할 정도는 아니었다. 또 '내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남는 마음의 저장공간조차 궁벽해할 만큼은 아니었다. 나는 언젠가 그 질문을 꺼내 보려고 꼭꼭 쟁여두었다. 지금까지 그 대화가 오고갔던 장면이 그대로 기억나는 것이 내 증거다. 

모른다는 것은 죄가 아니다. 영원히 알 수 없다는 것도 죄가 아니다. 알려는 그 길 위에서 죽게될 것이 나의 운명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안타까울 것도 뒤에 남겨진 것들에 찜찜할 것도 없다. 

Amore fati 

오히려 길을 걸었다고, 꽃을 키웠다고, 바다를 항해 했다고,바람을 느꼇다고... '안다'라는 '자만심'속에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길 위에 주저 앉아 버린 옹이'가 되는 것이다. 모르는 자들보다 아는 자들이 '근본주의자'가 될 가능성이 역사적 경험으로 훨씬 높으며, 20세기 초반의 비판철학은 그런 정치적,인식적'전체주의'와의 전장에서 시작되었다.  

공자는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라고 했다.  

모른다.그러므로 나는 길 위에서 죽을 것이다. Amore f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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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얼음 

                -박남준 

옷을 껴입듯 한 겹 또 한 겹 

추위가 더할수록 얼음의 두께가 깊어지는 것은 

버들치며 송사리 품 안에 숨 쉬는 것들을  

따뜻하게 키우고 싶기 때문이다 

철모르는 돌팔매로부터 

겁 많은 물고기들을 두 눈 동그란 것들을 

놀라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얼음이 맑고 반짝이는 것은 

그 아래 작고 여린 것들이 푸른빛을 잃지 않고 

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겨울 모진 것 그래도 견딜 만한 것은 

제 몸의 온기란 온기 세상에 다 전하고 

스스로 차디찬 알몸의 몸이 되어버린 얼음이 있기 때문이다 

쫓기고 내몰린 것들을 껴안고 눈물지어본 이들은 알 것이다 

햇살 아래 녹아내린 얼음의 투명한 눈물자위를 

아 몸을 다 바쳐서 피워내는 사랑이라니 

그 빛나는 것이라니 

.............................................................................. 

 신종플루가 약간 걱정되었다.하지만 아침 9시에 버스에 올랐다. 서울에 있었다.그리고 조금 전 밤 11시. 오랜만에 멀리 도시의 불빛들을 차창 밖으로 내다보며 부산에 도착했다. 긴 하루였지만 한동안 못보던 풍경들을 멀리서나마 볼 수 있어서 위로가 되었다. 

위성TV로 롯데 자이언츠의 가르시아가 만루홈런을 치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야구중계에 그다지 큰 미련이 없는 관계로 평소 볼 일이 없었는데 그것도 새로왔다. 롯데는 8연승이란다.   

 박남준 시인은 악양에 산다. 

수 년전에 혼자 여행을 다니다 그저 이름이 멋있어서 들렀던 곳이 악양이다. 중고차가 길을 잘못 들어 헤메이기도 했다. 다시금 악양을 찾을 일이 있다면 박남준 시인을 뵙고 싶다. 

시인의 시를 읽다보면 '아비됨'의 의미를 다시금 새긴다. 결국 녹아내리게 될 얼음이 되는 것이다. '겁 많은 물고기들을 놀라지 않게 하기 위해서' 따뜻한 얼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거창하게 '우리 아이들이 살 세상을 위해' 라는 진부한 표현에 자기감화 받는 일을 삼가하는 편이다. 그 말 자체의 울림과 결과가 아름답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왠지 자기의 행위를 무슨 대단한 일인양 치켜세우는 그 소박함 속에 담긴 자기위안이 내 스타일-나는 단지 스타일의 차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라는 것 뿐이다.  

시인의 마음은 그런 '아비됨'의 마음에서 더 보편적인 사랑으로 나아간다. 이 시가 아름다운 것은 거기서 부터이다.  

'쫓기고 내몰린 것들을 껴안고 눈물지어본 이들은 알 것이다'  

이 문장은 내게 '오래되었으나 삭지 않아 눈에 밟히는 것들'이 된다. 시인은 '쓰러진 것들이 쓰러진 것들과'라는 시에서 그렇게 말한다. 

저 구절 중에서 가장 패이는 부분은 '껴안고' 이다. 나는 나름 업무상 이런 저런 부류의 인간들을 많이 만나는편이다. '기름진 것들'도 가끔 있다만 '쫓기고 내몰린 것들'에 늘 마음이 간다. 그리고 그들 때문에 자주 붉어진 눈사위를 동료들에게 숨기려고 딴짓을 하는 체한다. 즉 '쫓기고 내몰린 것들'을 조금은 알고 또 -조작되었을지도 모르지만-타고난 공감능력으로 인해 '눈물'은 그것보다  조금 더 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껴안고' 라는 말은 목에 걸려 나오지 않는 작은 조각뼈같다. 내가 정말 '껴안고' 눈물지어본 적이 있었을까?  너는 정녕 '껴안고' 울었는가? 너는 진실로 '껴안고' 울고 있는가?   

'껴안고 운다'의 그 무거움에 대해서 무릎을 꺽으며 깊이 생각한다. 거기가 내 바닥이다. 

 다들 '껴안고' 잘 우는데 나는 아직 내 바닥에 질척거리고 있다. 내 '뼈아픈 후회'는 그거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이며 그저 '죽은 귀에 모래알을 넣어준 바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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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란 모름지기 아이가 장난치며 즐기는 것과 같으니,글짓는 사람은 의당 처녀처럼 부끄러워할 줄 알아 자신을 잘 감추어야 한다." 

"아아! 혹 누군가 '널리 남아게 구함으로써 자신을 밝히고 빛낼지어다!' 라는 말로 나를 책망하는 이가 있다면, 그것이 비록 통절하고 신랄한 풍자라 하더라도 나는 내 두려워하는 바를 더욱 깊게 할 것이며 내 감추는 바를 더욱 견고하게 할 것이다. 또 누군가 '다만 스스로 즐거워할 뿐이요 남과 더불어 한가지로 즐거워하지는 말지어다!' 라는 말로 나를 책망하는 이가 있다면, 이에 대해서는 변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내 이미 스스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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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암그룹의 일원이었던 '책만 보는 바보' 이덕무의 선집에 나오는 글이다. 그의 문장론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와 처녀의 마음'이 이 글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그렇다면 이 마음은 어떤 것인가? 둘의 공통점은 '순수함'이다. 어떤 효용적 가치보다는 글을 대할 때 갖는 아이와 갖은 천진함, 처녀와 같은 부끄러운 마음이 요체이다.   

순수한 마음이 발현된 '있는 그대로의 마음'과 진실한 감정이 표출된 '참된 마음' 

이덕무의 전집이 '청장관전서'이다. '청장'이 그의 호였기 때문이다. '청장'은 '푸른 백로'를 말한다. 한 평생 가난을 벗을 삼았던 그였기에 필요한 것만 먹고 더 탐하지 않는 '청장'이 꽤나 어울린다.  

문장의 입장에서 우리는 '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인터넷의 대중적 글쓰기는 환영할 만한 일이고, 나 역시 그에 큰 위로와 도움을 받지만 또 그만큼 '보는 마음'과 '쓰는 마음' 을 요구하기도 한다. 솔직히 내 개인적으로 이 두 부분에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보는 마음'에서 나는 책과 모니터를 통해 읽는 글사이의 집중도를 비교하면 강 하나가 놓여있다 할 정도다. '쓰는 마음'도 그렇다. 그저 속풀이 한다치고 마구 쓴 글도 무척 많고 그것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인터넷 글쓰기의 한가지 장점이기도 하다. 동네 슈퍼가는 마음으로 편하게 움직여도 되는...그리고 나는 이것이 꼭 나쁘다고 생각치는 않는다.)   

글쓰기가 대중화되고,누구나 시민기자가 되고,누구나 평론가가 되고,누구나 사진가가 되고...분명히 좋은 현상이다...하지만 그럴 수록 그 모든 이들이 이덕무의 문장론의 요체도 더불어 깊어 생각해봐야 한다.     

오늘은 서울에 간다. 하루 휴가를 냈다. 굵은 비를 가르며 섬에서 소리를 지르려고 말이다.  

아침부터 왠 타박인가 싶어 내가 좋아하는 이덕무의 '가장 큰 즐거움'이란 글을 올린다. 

 "마음에 맞는 계절에 마음에 맞는 친구를 만나 마음에 맞는 말을 나누며 마음에 맞는 시와 글을 읽는일, 이야말로 최고의 즐거움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회는 지극히 드문 법, 평생토록 몇 번이나 만날 수 있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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