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들아 

               -최상호  


너 처음 세상 향해
눈 열려
분홍 커튼 사이로 하얀 바다 보았을 때

그때처럼 늘 뛰는 가슴 가져야 한다

까막눈보다 한 권의 책만 읽은 사람이
더 무서운 법

한 눈으로 보지 말고 두 눈 겨누어 살아야 한다

깊은 산 속 키 큰 나무 곁에
혼자 서 있어도 화안한 자작나무같이

내 아들아

그늘에서 더욱 빛나는 얼굴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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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이 시의 출처는 시인의 <김춘수의 '꽃'을 가르치며>(시와 시학사)이다. 하지만 내가 이 시를 읽었던 것은 도종환 선생이 엮어 놓은 <부모와 자녀가 꼭 함께 읽어야 할 시>에서이다. 

도종환 시인은 부모의 마음에서 바라본 자식에 대한 이야기와 자식의 마음에서 바라본 부모에 대한 마음.그리고 두 세대가 함께 읽는 시로 이 편집본을 엮어 놓았다. 

아들의 위치에만 있다가 요 몇 년 사이에 부모와 자식 사이에 낀 존재가 되다보니 마음이 삼대를 건너 다닌다. 아이가 생기고 내가 얻은 가장 큰 변화이자 또 세계의 확장이다.
  

월요일은 둘째 재원이의 100일이어서 '100파티'를 했다. 미리 자리에 앉아서 잔뜩 기대하고 있는 예찬이에게 귓속말로 비밀을 하나 알려주었다.  "촛불은 예찬이가 끄는 거다." 라고 말이다. 금새 얼굴이 환해진다. 

가끔 예찬이가 혼자 노는 걸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안쓰럽다. 엄마는 집안일 하고 있고 아빠는 둘째를 안고 다니고 있고...  

어제 밤에는 함께 자는데 예찬이가 "아빠가 안놀아 주었잖아"라고 말해서 더 짠했다. 책도 읽어주고 많이 놀아준다고 생각하지만 예찬이가 꼭 함께 놀고 싶을 때는 둘째 재원이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거기에 오늘 아침에는 예찬이에게 화를 내고 나왔다. 식사를 빨리 끝내고 아이 이닦이고 어린이집 갈 준비까지 마쳐주고 나오는게 아침에 내가 해야될 일이다. 그런데 오늘은 식사준비도 좀 늦고 어슬렁 거려서인지 좀 늦었다. 거기에다 밥 잘먹는 예찬이도 요즘 종종 식탁 앞에서 '안먹어' '그럼 내려가서 놀아' '싫어'를 반복한다. 밥을 먹으래도 싫다고 하고 먹지 말래도 싫다고 한다. 결국 오늘 내게 혼났다. 엉엉 울고 불고...  

대개는 설명하고 달래고 화해하는 수순을 밟는데...오늘은 출근시간도 가까왔고 티격거리기도 싫어서 그냥 출근해버렸다. 엘리베이터에 들어가는데 아내의 목소리가 들린다. "예찬이가 아빠한테 인사한데요".....그냥 엘리베이터 속으로 들어가면서 "됐어" 하고 나와버렸다. 

금새 미안했다.  

그래서 아이어린이집 가기 전에 전화를 한다. 아내가 핸드폰을 두고 나갔나 보다.     

아이가 '화안한 자작나무'가 되길 바라기 전에 내가 그 숲 언저리라도 좀 가있어야 될텐데..쯥  

반성으로 시작하는 하루다. 

아...도종환 시인의 저 시집은 아이 키우는 사람들이라면 뭉클해질만한 시가 많다. 아이 동화책 읽는 틈틈이 아이와 부모를 생각하며 읽어도 좋을 시선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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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나를 고민하게 만드는 전집이다. 9월 9일에 판매가 시작된다는 비틀즈 전집 박스물. 가격이 30만원을 넘는다. 나는 비틀즈 LP는 몇 장 있지만 CD로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이 박스물에 눈이 간다. 

일본 하라주쿠에 가서 비틀즈 샵을 둘러보며 재미있는 물건들을 만지작 거리다 내려놓은 기억도 난다. 생각보다 비싸서...   

아내에게 얼핏 운을 띄웠는데 의외로 호의적이다. 아내는 "비틀즈, 비틀즈 하는데 히트곡들은 들어봤겠지만 제대로 들어 본 적이 없어서 이참에.." 이렇게 말한다. 내가 약간 거들며 " 나중에 예찬이랑 재원이랑도 들을 수 있을 거 같지 않아" 그랬다.  (사실은 매체가 바뀔 것이다.^^)


<브리태니커 판소리 전집>CD 이다. 판소리 5마당과 단가집이 포함되어 있다. 뿌리깊은 나무에서 과거 LP로 만들었던 전설의 판소리 명반이다. (알라딘에는 이미지가 없다.) 올초부터 판소리를 제법 듣고 있다. 관련 책도 꽤나 보고 있는데, 읽는 책들을 좀 털고 시간 되면 판소리책과 관련된 페이퍼를 하나 올릴까 싶다. 

이 음반에는 조상현, 한애순, 정권진, 박봉술 명창이 참여하고 있다. 조상현 명창은 과거 TV활동을 통해서 그래도 얼굴이 좀 알려진분이고 분이고, 정권진 명창은 보성소리의 적통인 정씨가문의 3대째 명창이다. 그의 아들이 정회석 명창으로 그 집안은 4대째 명창가문으로 동편제 송씨 가문과 대칭될 만한 소리명가다. 한애순 명창은 <노름마치>에도 숨은 진주로 거론되는 분이다. 월북한 박동실 명창의 제자다. 박봉술 명창은 구례사람으로 동편 적벽가의 거장이다. 술을 좋아했다고 하는데 무형문화제 지정 때 심사단이 박봉술 명창의 술을 문제삼자 박록주 명창이 소리로 문화재주는거냐 술로 주는거냐라고 서릿발 같은 호통을 쳤다는 일화가 있다. 박봉술 적벽가의 전승자로 김일구명창과 판소리 불모지 부산에서 오래 활동하신 송순섭 명창이 있다. 

이 음반은 정말 유명한 음반이고 요즘도 헌책방같은 곳에가면 중고LP가 있다. 

비틀즈와 경쟁하고 있는게 바로 <뿌리깊은나무 판소리전집>세트다. 가격이 30만원정도다.   

 지젝의 두꺼운 책이 나왔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이미 로쟈님의 페이퍼나 각 신문의 책 소개글을 통해 알려졌다. 

'잃어버린 대의' 라는 것은 흔히 불확실성 시대,거대서사 종말의 시대에 나침반을 다시 한번 재고하자는 뜻으로 보인다. 지젝이 재독해하는 중요한 철학자 중 한명이 헤겔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사실 상대주의와 포스트모던한 불가지주의에 맞서는 비책 중에 하나는 그것을 과학적으로 검증하겠다고 달려드는게 아닐 수 있다. 바디우 식으로 말하자면 '선언의 충실성' 그것 하나 만으로도 가능하다. 물론 고집스런 신화에 매달리는 성찰의 부재를 옹호함은 아니다. 한방은 체질별로 약을 쓰는데 당위에 지나치게 매여있는 사람들에게는 그에 맞는 또한 불확실성에 너무 매여있는 사람에게는 그에 맞는 처방이 균형감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어떤 분이 '유토피아'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난  마르크스식의 유토피아를 애당초 믿지 않는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사람에 대해 별 불만도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유토피아가 허상임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다. 유토피아는 원래 갈 수 없는 곳 아닌가. 유토피아를 규범적 지향성정도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규범적 지향성이 정도를 넘고 실재로 착각하는 오류는 지적할 필요가 있겠지만 그 정도가 아니라면 문제 될 것 없다. 현실적으로 유토피아를 말하는 이들 중에  유토피아는 마음 속에 그려두고 하나씩 현재의 문제에 개입하여 조금 더 세상을 아름답게 하려는 이들이 많다. 오히려 유토피아가 문제가 아니라 유토피아의 그런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해심 부족이 문제다. 이안 파커의 <지젝>과 지젝이 쓴 <전체주의가 어쨋다고>가 밀려 있어서 당장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책의 분량도 부담스럽긴 하다. 

벤자민 바버의 <강한 시민사회 강한 민주주의>이다. 나온지 꽤 된 책인데 한나 아렌트를 소개한 책을 보다가 알게 되었다.  

책의 후반부 참여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맥퍼슨과 페이트먼, 바버의 글들이 인용되고 있다. 다른 이들의 책은 국내 번역된게 별로 없는 듯 하고 벤자민 바버의 책이 한 권 있다. 이 책보다 더 유명한 책은 <자하드와 맥월드>라는 인상적인 책인 듯 하다. <강한 시민사회 강한 민주주의>는 참여민주주의라는 차원에서 시민사회 영역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는 듯 하다. 책 내용은 직접 확인하면 좋을 듯 하고... <20세기 정치사상 한나 아렌트>에 나온 글은 이렇다. 

"확실한 지식,참된 과학, 절대적 권리가 있는 곳에서는 진리의 통일성에 비추어 해결될 수 없는 갈등이란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정치란 불필요하다." 바버는 이 글에서 형이상학적 진리와 도덕률에 입각한 정치를 반대하고 있다...좋은 내용 아닌가 ^^ 

 셀던 월린의 고전 <정치와 비전>2편이 드디어 번역되었다. 후마니타스에서는 한 권씩 한 권씩 번역하나 보다. 1권에서는 정치철학에 대한 월린의 소견부터 시작해서 플라톤-캘빈까지 서술되었다. 2권은 이제 근대정치의 출발이라는 마키아벨리부터 시작된다. 대략 목차를 보니 홉스, 루소를 거쳐 생시몽과 조직이론 정도에서 마감된다.  

주로 서구 자유주의 전통이 자리를 잡는 시점에 대한 이야기다. 셀던 월린은 참여주의와 직접행동의 전통에 바탕을 두고 정치를 이해하는 학자이다. 촛불세대-난 이런 표현을 디게 싫어하는데- 하여간 우러러마지 않는 촛불세대의 정치사상사로 추천할 만하다. 촛불 말고도 이것 저것 횃불,잔불,꺼진불, 화롯불,성냥불,등잔불 등등...많다는 것 쯤 알 때쯤 봐도 좋을 것 같고...  

자...마지막은 <레드 제플린>이다. 가격이 꽤 센 편이다. 단행본5만원 돈이면 과문해서인지 몰라도 싼 가격은 아니다. 

레드 제플린은 내가 락그룹 중에서 가장 좋아했던 밴드다. 비틀즈보다 나는 레드 제플린이 좋았다. 당연히 중학교 때부터 한장씩 LP를 모아서 마지막 코다 앨범에서 전집 완성을 했다. 지금은 창고 속 박스에 고이 보관되어 있는데 습기먹어 곰팡이 슬지 않았나 슬쩍 걱정된다.  하여간 <레드 제플린>이다. 이런 밴드들 덕분에 음악에 꼽혀서 여기까지 오게 된거다. 그런면에서 지금 이 밴드는 없지만 나는 이 밴드를 아직 보내지 않았다.  

 

이 참에 제플린 음악 하나 듣자. 다시 인켈 오디오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소년이 된 듯 하다. 

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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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과 저주의 정치사상 - 20세기와 한나 아렌트 한길신인문총서 9
김비환 지음 / 한길사 / 2001년 1월
평점 :
품절


 쉽게 써보자. '정치'는 '양복입고 싸움질하기, 네모 칸에 도장찍기'라고 생각하는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 말이다. 같은 크기의 삼각형에 사각형을 밀어넣는 우를 범할 지라도 깍여나간 부분 말고 나름 작은 효용쯤은 있지 않을까.  

이 책 <축복과 저주의 정치사상, 20세기와 한나 아렌트>는 그녀의 책 <인간의 조건>,<전체주의의 기원>을 중심으로 '정치'와 '정치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간다.(벌써 머리가 아파지는..)   

그럼 먼저 한나 아렌트가 뭐하는 여자인가부터 이야기를 해보자. 길게 말할 자리도 아니니 쉽게 유태인이었으며-수용소 생활도 해봤다- 하이데거의 제자로 썸씽-자기들은 지적인 뭐라지만 성인남녀의 일은 모른다-하여간 그런 20세기 초반의 대표적인 정치철학자이다. 

아렌트 약력 소개끝. 이제 본 판으로 들어간다. 이 책의 저자인 김비환 교수는 아렌트를 둘러싼 비판들부터 소개한다. 좌파와 우파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또 '자유'를 강조했으나 공동체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았고 실존주의적 형이상학이라는 공격도 받았다. 이게 무슨 뜻인고 하니 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이 '독특하다'라는 말이다. 머리 막으면 아래치고 아래 막으면 머리치고...  

아렌트가 말하는 '정치' 또는 그녀의 '정치철학'이란게 뭐냐?   이 책의 저자는 먼저 아렌트의 철학이 경험론적인 실천영역에서 도출된 것이라고 말한다. 밑줄은 경험론적 실천영역에 쫘악...그러니까 아렌트가 콩 볶아 먹는 머리 속에서 정치철학을 만들어낸 게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저자는 나치에 핍박받는 유태인으로서 유태인의 정체성을 자각한 '패리아' 정신이라는 것이 한나 아렌트의 삶과 철학 전체를 관통한다고 말한다.('패리아'라는 것은 원래 인도의 천민을 말하는데,결국 주변인이나 버림받은 자,비인간과 같은 뉘앙스로 이해하면 된다.) 이게 대전제가 되는 셈이다.이 이야기를 저자가 꺼낸 이유는 아렌트 철학에서 전반기와 후반기 사이에 모순이 발생한다는 둥, 연속성이 없다는 식의 비판에 대한 저자의 답변인셈이다. 실제로 비판론자들이 거론한 모순들은 아렌트 철학이 담고 있는 다원성의 양면일 뿐이라는 것이다.  

아렌트에게 '정치'란 무엇인가?  

아렌트는 이를 위해 서구의 전통적인 정치철학을 비판한다. 이른바 플라톤에서 마르크스까지의 총체적 비판이다. 이를 통해 아렌트는 자신이 말하는 '정치'를 우회적으로 설명하는 셈이다.  

흔히  말하는 '정치'란 무엇인가?  사람들이 모여살면서 생기는 문제들-욕구이든,갈등이든-을 제도를 통해 해결하여 사람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것 정도. 사회교과서에 나옴직한 보편적 생각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아렌트에게 '비정치적'이거나 '정치 왜곡'이다. 여기서부터 독창적이지 않은가. 이건 그녀에게 사회적 영역에 종속된 정치적 영역인 셈이다.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영역을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으로 나눈다. 그리고 또 하나 사회적 영역이란 것도 포함시킨다. 흔히들 사회적 영역을 공적 영역과 같이 쓰는데 비해 아렌트는 이를 분리시킨다. 사회적 영역은 오히려 사적 영역의 공적화, 내지는 공적 영역의 사익화를 본의아니게 획책하는 공간이 된다. 아렌트에게 공적 영역은 '정치적 영역이다. 이 말은 아렌트가 '정치 자체의 원리에 입각한 정치'를 강조했다는 말이다. 즉 '정치'라는 녀석이 워낙 여기 저기 개입되어 있다보니 진짜 '정치'는 사라지고 이제 정치는 모두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적 정치. 또는 유토피아를 달성하기 위한 추동력으로서의 목적론적 정치-아렌트적 용어로는 만듦의 정치-가 주가 되었다는 것이 아렌트의 비판이다.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치가 그런 셈이다. 이건 중요하지만 정치에 부차적이란게 아렌트의 견해다. 쉽게 예를 들어 '노동자 천국'을 만들기 위해 정치를 하는 것은 아렌트적 입장에서는 비정치적 행위이다. 무언가 만듦 자체를 위해 정치가 도구화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렌트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조건의 하나로서 순수한(?)의미의 '정치' 복원을 시도한다. (이 말 뜻은 아렌트가 순수학문으로서의 정치이론을 강조한다는 뜻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 아렌트에게 정치는 경험적인 것이고 현상학적인 것이다. 즉 플라톤이 말한 것 같은 두 가지 세상. 이데아계와 현상계 같은 것은 애초부터 없다. 모든 것은 여기의 일이다.) 아렌트의 이러한 시도는 정치와 사회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과도하게 도구화되어 있는 정치 영역을 환원하려는 균형론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 좋다...라고 저자가 말한다.(그게 가능한지는 이견이 있으나 하여간 아렌트를 이해하기위해서는 그렇게 해주는 것이 좋다.)

이런 아렌트에게 가장 적대적인 정치체는  전체주의였다. (나도 그렇다.다 그렇지 않나?) 그녀는 수용소 경험이 있고 아이힌만 재판 참석 경험도 있다. 그녀는 '정치'라는 공적 공간 자체를 말살 한 것이 '전체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미워할 수 밖에 없다. 아렌트가 대표적으로 지적하는 전체주의 사회는 히틀러 체제와 스탈린 체제이다. (그런데 의외로 아렌트비판자 중에는 아렌트의 정치이론이 전체주의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부분이 있다. 저자는 아렌트를 옹호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이해부족에서 오는 곡해라고 말한다. 물론 맞는 말이지만 그 비판 중 일부도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여기서는 넘어가자.) 이런 '전체주의시대의 도래'에 과거 전통적인 정치철학은 무용지물이었다. 그에 아렌트는 그녀만의 독창적인 정치철학을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잠깐 물 한 잔 먹고 와서...꼴깍) 

어디까지 했더라...하여간 여차저차해서 아렌트가 전체주의를 깟다는 것. 특히 한가지 더 이야기 할 것은 아이힌만의 재판을 보면서 아렌트가 전체주의적 사고= 무사고라는 등식을 만들어 냈다는 점은 자주 인용되는 내용이다. 그녀가 자각한 패리아의 정신을 강조한 것과 등치해서 읽어도 좋을 듯 하다. 특히 최근 '언론의 자유 문제'를 이야기할 때 아렌트의 이름이 간혹 언급되는 것을 기억해야 된다. 아렌트에게 '자유'는 모든 정치적 행위의 근간이다. 앞서 말했듯이 아렌트에게 '정치'라는 공간은 순수하게 부각시켜야할 만큼 중요한 과제이다. 그런데 '자유'가 위협받거나 말살 된다면 어떻게 되는가?  뭐 어떻게 되긴? 자유가 없으니 정치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럼 '정치'의 '정치다운 복원'을 외치는 아렌트는 공치는 거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그러니 '자유X = 정치X' 이 되기때문에 자유를 위해서 자유를 살리는 게 아니라 정치를 위해서 또 인간의 삶을 위해서(왜..인간이라고 하는지는 바로 뒤에서 설명한다.) 자유는 중요하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롤즈/맥킨타이어식의 자유주의/공동체주의 틀로다가 구분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아렌트는 자유주의자이구나'라고 할 것이다. 땡!!  대략 정치사상사를 보면 아렌트는 공동체주의자들 속에 이름이 끼여있다. 사실 자유,평등 이라는 개념자체를 이분법적이고 임의적으로 쓰는게 더 문제다. 언젠가 말했듯이 누가 '자유'를 말하면 '어떤 자유?'를 이야기하고, 누가 '평등'을 말하면 '어떤 평등?'을 이라고 되물어야한다. 그만큼 이런 개념들은 이미 자의적으로 활용되어도 누구하나 타바하지 않을만큼 혼합되고 훼손되어 있다.  

왜 아렌트에게 자유=인간=정치이고 또 그럼으로서 공동체주의로 기입되는지 지금부터 볼거다. (하여간 '자유=롤즈=자유주의' 내지는 '노동=마르크스=좌빨' ...이런거는 혼자 집에서 포르노 비디오볼 때 했으면 좋겠다.)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이 이제 중심이 된다. 

아렌트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본성은 알수 없다라고 말한다. 오직 아는 것은'조건지어진 존재'라는 것이다. 하여간 아렌트는 인간의 삶을 두가지로 나누는데 하나는 '정관적 삶'이고 다른 하나는 '활동적인 삶'이다. 아렌트는 뒤에 것에 집중한다. (한가지 더 '역시 실천이야'라고...아렌트는 정관적 삶의 고유한 가치 역시 무시하지 않았다. 아도르노가 정관적 삶을 높이 평가하되 실천적 삶을 무시하지는 않았던 것과 비슷한 위치로 대칭된다.) 하여간 '활동적인 삶'의 정치의 존재론적 기본이 되는데 세가지 활동을 의미한다. 노동. 작업. 행위이다. 노동은 말그래도 먹고사는 노동이다. 작업은 '인공적 사물세계'를 만드는 활동이다. 사람은 인공물의 세계에 산다. 그리고 아렌트에게, 그녀의 정치이론에 가장 중요한 '행위'이다.  여기는 그대로 인용하자 

"사물이나 물체의 매개없이 사람들간에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는 활동으로 다원성이라는 인간적 조건, 다시 말해 한 종류의 인간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이 이 땅에 살고 또 세계에 거주한다는 사실에 조응하는 활동" 이다.  

중요한 지점은 내가 색칠했다. 아렌트에게 정치철학은 -좀 재미없는 말로 -사이 간 자를 써서 '간주체적' 이며 '다원적' 이며 '현상학적'이다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 '행위'라는 개념은 동물과는 다른-동물도 어떤 의미에서는 정치적 활동을 한다.군집활동을 하는 동물들.그런데 그것은 본능적인 행위이지 이성적 행위는 아니다- 인간의 특징이다. 아렌트는 딱잘라  인간이 행복하려면 사적 영역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즉 개인적 취미나 부의 추구, 미적 탐닉 등 사적 행복과 만족은 결국 온전한 삶을 만들어 주지 못하는 반쪽이 행복이란 것이다. 아렌트는 이를 '세계 소외'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다른 건 나 모르고, 또한 예술가도 못되고, 그저 예술작품이나 감상하면서 예술 속에 어쩌구 저쩌구 하며 야코 죽이는 이를 보거든 '어...세계소외 되어 있군?' 이라고 하면 대략 정답이다. 그럼 도대체 뭐가 더 있냐구?  

아렌트에게 인간은 공적 동물이다. 공적 영역에서 활동하며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본능적인 행복의 영역이다. 그러니 사적 행복만 열나게 쫓아봐야 아렌트가 보기엔 그건 결국 100점 맞아도 수능 변환점수 50점인 셈이다.(아...뛰어나게 쉬운 설명이다.) 이러고 보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라는 의미 정도로 보인다. 그런데 아렌트는 거기서 더 나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선택적 의미망 속에 갖혀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정치철학사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세 개의 체제를 주욱 나열하고 그 장단점을 선택한다. 아렌트가 보기에 이건 진짜 정치가 아니다. 내가 누차 누누히 강조했던 '정치'에 대한 이야기가 이거였다. 그렁저렁 하다 노란 깃발이 펄럭일 때 갑자기 과정치화되었다가 노란게 코 묻은 거라고 알고 또 정치에 등돌리다가...알고 봤더니 그 수건이 땀이 배였다는 걸 알고 석과대죄하는게 그게 정치가 아니다. 정치판은 더러운 놈들 쌈질하는 곳이니 관심없다가 거리의 확성기가 울려퍼지면 너나할 것 없이 정치평론가가 되는게 정치가 아니다. 아렌트가 보기에 '정치'는 인간 삶의 전제 조건이다. 그러니까 내가 태어나기 전 부터 정치란 있엇고 내가 살면서도 정치가 있고 또 내가 죽어고 정치가 있다. 오로지 내가 정치적이 되느냐 마느냐의 차이일뿐, 아렌트 식으로 말하자면 정치적으로 자각하여 온전한 삶을 살려고 하느냐 아니면 반푼의 행복에 그치느냐이다. 길어졌는데 하여간 내 말로 하면 '투표는 객관식이지만 정치는 주관식'이다. 아렌트는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을 행위라고 했다.

자..다시 아렌트의 '행위'로 돌아오자. 앞서 '자유' '전체주의 반대''공동체주의' 대충 뭐 이런말을 했었는데...아렌트의 정치적 인간에 대한 강조로 대충 해결되었으리라 생각한다.(아님..직접 책을 읽고 밑줄을 그어라.) 아렌트에게 '행위'란 발언과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이다. '참여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왜 아렌트의 이론중 '발언과 정체성'을 독립시켜 인용하는지 알 수 있다.  아렌트에게 행위는 가장 중요한 개념 중에 하나이고 또한 이것이 현시적 특징을 갖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폭탄 테러범이 테러를 하고도 숨어서 가만히 있으면 그건 '정치'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어떤 이유때문에 테러했소.부시 물러가라'라고 하는 순간 그건 '정치'가 된다.(음..간략하니 쉬운 설명이다.) 마르크스 부사령관이 '우리의 말이 무기이다'라고 했을 때 그것은 언로를 통한 이데올로기 정치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런 '행위'로서의 발언과 정체성의 문제였다.  전체주의 사회의 예를 들어보자. 말을 못하게 한다. 또는 말을 못하게끔 기획한다. 또는 말을 하면 겁주려고 조사한다. 결국 '말을 못하게 행위를 못하게'한다. 그게 모든 전체주의는 아니지만 전체주의의 주요 속성 중에 하나이다. 이제 '행위'와 '전체주의' 간에 이야기는 대략 정리되었다.

그러니까 인간답게 살려면, 인간의 실존적 조건에 충일하게 살려면 '정치'를 해야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행위'는 여기에 필수적이다. 그 '행위'를 통해서 '정체성'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축복과 저주의 정치사상 20세기와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인간의 조건>을 전반부로 해서 <전체주의의 기원>,<혁명론>,<과거와 미래사이> 등으로 아렌트의 사상을 짚어나간다. 책 중반부에서는 전체주의에 대한 아렌트의 생각과 서구 정치철학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룬다. 저자는 아렌트에 쏟아진 비판들을 보여주고 아렌트의 의도를 읽게함으로써 반비판을 행한다. 서구 정치철학 전통에 대한 아렌트의 비판에 대해서는 아렌트가 특정 요소만을 부각해서 의도적 칼질을 하고 있다는 균형도 보여준다. 물론 마르크스의 문제에 대해서는 저자 역시 아렌트와 비슷한 지평위에서 말을 한다. 물론 저자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경제결정론자들이 아님을 강조하지만 '순수'정치학의 의미에서 경제에 정치를 종속시킨 서구 철학의 마지막 대변자였다고 본다. 아렌트는 마르크스를 '노동하는 동물' 의 세계를 만든 철학자라고 비난한다. 마르크스 부분에 대해서는 읽다가 주섬주섬비판적 메모를 해둔 내용들이 꽤 있다. 예를 들어 '노동'이 생애 가장 긴 시간을 차지하는 곳에서 행위의 근거가 어디서 출발할 수 있는지? 또는 아렌트의 발언행위가 주체의 측면에서  엘리트적인 측면이 강조된 것은 아닌가? 이성의 언어로 발언할 수 없는 상황이나 그에 종속된 주체는 어떤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가? 또한 노동자 여가가 소비로 귀결되는 체제에서 이 문제를 돌파하려는 마르크스주의적 문화연구의 부분은 간과되어도 되는가. 아렌트의 목적초월적 정치함의가 갖는 문제점, 행위 담론의 수행성을 강조하다 보니 발생하는 문제점. 정치 영역의 독자성의 강조가 학문적 범주의 외연에서 갖는 문제점 등등...  

 아렌트 철학의 독창성만큼 아렌트 비판자들의 주장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대목들이 많다.마르크스에 대한 아렌트의 비판은 몇 몇 지점을 빼놓으면 허술하다. 이런 점들이 함께 고려되어야만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릴 수 있을 성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적 영역을 인간의 존재론적 위상까지 도달시켜놓은 점, 그리고 인간의 자발적 행위와 발언,그리고 새로운 창조의 정치를 강조한 점들은 어쩔 수 없다는 대의제적 비관주의와 경제올인,정치 외면의 무관심 속에 분명히 새기고 넘어가야할 지점들이다. 

오랜만에 단 한퀴에 썻다. 헉헉...점심 시간 30분전에 쓰기 시작했는데 이제 끝났다. 회사 지하 식당 아직 밥주나. 아줌마... (생각나면 수정할 마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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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춘이 엄마 

          -윤제림 

재춘이 엄마가 이 바닷가에 조개구이 집을 낼 때
생각이 모자라서, 그보다 더 멋진 이름이 없어서
그냥 `재춘이네`라는 간판을 단 것은 아니다.
재춘이 엄마뿐이 아니다
보아라, 저
갑수네, 병섭이네, 상규네, 병호네.

재춘이 엄마가 저 看月庵(간월암) 같은 절에 가서
기왓장에 이름을 쓸 때
생각나는 이름이 재춘이 밖에 없어서
`김재춘`이라고만 써놓고 오는 것은 아니다
재춘이 엄마만 그러는 게 아니다
가서 보아라. 갑수 엄마가 쓴 최갑수, 병섭이 엄마가 쓴 서병섭,
상규 엄마가 쓴 김상규, 병호 엄마가가 쓴 엄병호.

재춘아. 공부 잘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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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에서 TV를 거의 보지 않는다. 잠시 뉴스를 보려고 채널을 돌리다 SK 기업광고를 보았다. '재춘이네 집' 위로 자막이 떳다.   

자막. 어?

저 카피...눈에 익은데. 

윤제림!! (그는 시인이자 카피라이터라고 한다.) 

시집에서 어렵게 찾을 필요도 없다. <그는 걸어서 온다>의 첫번째 시가 '재춘이 엄마' 이기 때문이다.  

아내가 "저 CF 좋네." 라고 한다. 

지난 주에 상가집을 세번 갔다. 

모두 지병이 있으셔서 유족들에게 갑작스런 죽음은 아니었다. 한편에서는 위로차 '호상'이라고는 하지만 유족들의 입장에서 다시는 고인의 모습을 볼 수 없음은 늘 크나큰 슬픔이다. 아무리 영혼의 생존, 기억들의 잔존을 이야기해도 살갗을 만질 수 있는 그 육체성을 영원히 빼앗겨 버린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큰 슬픔을 만든다. 

나이가 40줄에 드니 이제 부모 세대들의 부음 소식을 종종 듣게 된다. 20대나 30대 초반에는 결혼소식을 듣게 되다가 조금 더 지나면 부음 소식을 듣게 되는게 사람살이다. 그리고 이게 인간의 시간이다. 

장례식장을 빠져 나오며 가을바람이 마음이 스산했다. 언젠가는 나도 내 생의 마지막 손님들을 이 곳에서 맞게 될 것이라는 것. 두려움 때문은 아니다.  거역할 수 없는 인생의 통과의례라는 엄정한 서늘함 때문이다. 

집으로 오는 길에 아버지께 전화를 드렸다.  

"요즘 눈 앞에 거미줄 같은게 왔다 갔다하고....비문증이라고 하데. 기계도 오래되면 녹스는 것 처럼 이제 하나 둘 고장이 나는 때가 됐나보다." 라고 하신다. 

남의 부모만 늙고 병드는게 아니라 내 부모 역시 세월의 흐름을 거역할 수는 없다. 뻔히 아는 이야기지만 '그래...그렇구나. 그렇게 되는 거구나...' 라 생각하며 마음 한 구석이 스르륵 녹아내렸다. 

나는 남들보다 좀 늦된다.  

 태어나기를 어리석게 태어났으니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그저 어리석음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기는하지만 그건 언젠가 모두 표가 나기 마련이다. 이제는 어리석음과의 동거에도 익숙해져서 그런 늦됨을 탓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도종환 시인의 말처럼 늦되어서 남들 다 떠나간 자리라도 끝까지 지켜 앉을 수 있다면 그것도 한 삶의 모습으로 나쁘진 않을 성 싶을 뿐이다.  

나는 남들 10대때 한다는 가출을 20대나 되어서야 했다. 10대에는 매달 모의고사때문에 가출할 수 없었다. 나를 삐뚤어지지 않게 해준 건 입시지옥이었다. 이 역설적 위대함이려니... 20대에 가출했을 때도 고작 열흘. 친구 집에 얹혀있었다. 친구의 눈칫밥도 그렇고 해서 열흘만에 쪼르르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하여간 그 와중에 부모님과 좀 다투기도 했었다. 그 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부모한테 그렇게 이야기하는거 아니다. 너도 자식 나아서 키워봐라" 

20대의 성마른 나는 그 때에도 '뭐...내가 못할 말 했나. 결국 그런 거 아니야....자식...핏...자식 나을 생각 없거든요. 뻔한 소리...'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통속적인. 그래서 단 한번도 인정하지 않았던, 궁지에 몰린 부모들의 외떨어진 항변, "자식 나아 봐야 부모심정 안다" 는 말...나이 40줄에 두 아이의 아빠가 되어보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이렇게 늦된다.

... .. .

오늘은 아기 재원이가 태어난지 100일 되는 날이다.  

아기가 건강하게 잘 커줘서 고맙고, 어른들이 그래도 건강하시니 고맙고, 내가 건강해서 어른들과 아이에게 상심을 주지 않아서 고맙다.  
 

재원아...공부 잘해라.

(행여..알라딘에 꼭 헛발질하는 분들이 계셔서 첨언한다. 시인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공부 잘해라'라를 '학력 지상주의'를 독려하는 말로 쓰고 있는게 아니다. ... 거기서 '공부'는 포괄적인, 잘사는 삶의 전체적인 상징이다. 글만 읽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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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같은 가을이 

                    최승자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 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 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폐수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 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 

  첫구절은 너무 유명해서 '개같은 가을' 마저 일단멈춤 할 것 같다. 

그 외에 별로 하고 싶은 말이 없다. 

리뷰도 쓰기 싫다. 

그래도 가끔 대화는 하고 싶은데 모두와의 대화가 아니라 몇 명과의 작은 이야기 정도. 

어제는 '미망'으로 마음이 어리둥절 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한 명에게만 길게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런데 늦은 오후 상가집을 다녀왔고 그렇게 저녁을 맞았고...그렇게 하루는 지나갔다. 미망의 파문은 여전하다. 

바다 위에 자기의 늑골을 드러내고 누운 다리 위에서 보랏빛 저녁 구름떼를 보았다. 가을 바람은 서늘하고, 나는 볼륨을 높여 차창을 타고 유혹하는 바람의 소리를 잠재웠다.  

<여행자의 노래4>

그러다가  멀리 더 멀리... 낯선 더 낯선 곳으로 가고 싶어졌다. 

임의진씨 처럼....안녕. 하고 말이다. 

...임의진의 <여행자의 노래>시리즈는 모두 내가 좋아하는 음반이다. 월드 뮤직에, 포크음악이니 더할 나위 없다. 그 중에서 자켓에 어느 몽고 마을의 풍경을 담고 있는 <여행자의 노래4>는 요맘때 더욱 좋다. 

.... 

할 말 없다고서 말이 많다. 그래도 '개같은 가을'보다 더 견디기 귀찮은건 '개같은 자'들이다. 

 

 어제 이야기하고 싶었던 사람에게 <여행자의 노래4>에 들어 있는 노래 두 곡을 보낸다. 언제라도, 멀리서도 이 노래가 그대의 가슴에 닿기를... 여행가고 싶다. 

 글랜 한사드  sleepling 

사이토 테츠오 바이바이 사라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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