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과 저주의 정치사상 - 20세기와 한나 아렌트 한길신인문총서 9
김비환 지음 / 한길사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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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쉽게 써보자. '정치'는 '양복입고 싸움질하기, 네모 칸에 도장찍기'라고 생각하는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 말이다. 같은 크기의 삼각형에 사각형을 밀어넣는 우를 범할 지라도 깍여나간 부분 말고 나름 작은 효용쯤은 있지 않을까.  

이 책 <축복과 저주의 정치사상, 20세기와 한나 아렌트>는 그녀의 책 <인간의 조건>,<전체주의의 기원>을 중심으로 '정치'와 '정치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간다.(벌써 머리가 아파지는..)   

그럼 먼저 한나 아렌트가 뭐하는 여자인가부터 이야기를 해보자. 길게 말할 자리도 아니니 쉽게 유태인이었으며-수용소 생활도 해봤다- 하이데거의 제자로 썸씽-자기들은 지적인 뭐라지만 성인남녀의 일은 모른다-하여간 그런 20세기 초반의 대표적인 정치철학자이다. 

아렌트 약력 소개끝. 이제 본 판으로 들어간다. 이 책의 저자인 김비환 교수는 아렌트를 둘러싼 비판들부터 소개한다. 좌파와 우파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또 '자유'를 강조했으나 공동체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았고 실존주의적 형이상학이라는 공격도 받았다. 이게 무슨 뜻인고 하니 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이 '독특하다'라는 말이다. 머리 막으면 아래치고 아래 막으면 머리치고...  

아렌트가 말하는 '정치' 또는 그녀의 '정치철학'이란게 뭐냐?   이 책의 저자는 먼저 아렌트의 철학이 경험론적인 실천영역에서 도출된 것이라고 말한다. 밑줄은 경험론적 실천영역에 쫘악...그러니까 아렌트가 콩 볶아 먹는 머리 속에서 정치철학을 만들어낸 게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저자는 나치에 핍박받는 유태인으로서 유태인의 정체성을 자각한 '패리아' 정신이라는 것이 한나 아렌트의 삶과 철학 전체를 관통한다고 말한다.('패리아'라는 것은 원래 인도의 천민을 말하는데,결국 주변인이나 버림받은 자,비인간과 같은 뉘앙스로 이해하면 된다.) 이게 대전제가 되는 셈이다.이 이야기를 저자가 꺼낸 이유는 아렌트 철학에서 전반기와 후반기 사이에 모순이 발생한다는 둥, 연속성이 없다는 식의 비판에 대한 저자의 답변인셈이다. 실제로 비판론자들이 거론한 모순들은 아렌트 철학이 담고 있는 다원성의 양면일 뿐이라는 것이다.  

아렌트에게 '정치'란 무엇인가?  

아렌트는 이를 위해 서구의 전통적인 정치철학을 비판한다. 이른바 플라톤에서 마르크스까지의 총체적 비판이다. 이를 통해 아렌트는 자신이 말하는 '정치'를 우회적으로 설명하는 셈이다.  

흔히  말하는 '정치'란 무엇인가?  사람들이 모여살면서 생기는 문제들-욕구이든,갈등이든-을 제도를 통해 해결하여 사람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것 정도. 사회교과서에 나옴직한 보편적 생각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아렌트에게 '비정치적'이거나 '정치 왜곡'이다. 여기서부터 독창적이지 않은가. 이건 그녀에게 사회적 영역에 종속된 정치적 영역인 셈이다.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영역을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으로 나눈다. 그리고 또 하나 사회적 영역이란 것도 포함시킨다. 흔히들 사회적 영역을 공적 영역과 같이 쓰는데 비해 아렌트는 이를 분리시킨다. 사회적 영역은 오히려 사적 영역의 공적화, 내지는 공적 영역의 사익화를 본의아니게 획책하는 공간이 된다. 아렌트에게 공적 영역은 '정치적 영역이다. 이 말은 아렌트가 '정치 자체의 원리에 입각한 정치'를 강조했다는 말이다. 즉 '정치'라는 녀석이 워낙 여기 저기 개입되어 있다보니 진짜 '정치'는 사라지고 이제 정치는 모두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적 정치. 또는 유토피아를 달성하기 위한 추동력으로서의 목적론적 정치-아렌트적 용어로는 만듦의 정치-가 주가 되었다는 것이 아렌트의 비판이다.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치가 그런 셈이다. 이건 중요하지만 정치에 부차적이란게 아렌트의 견해다. 쉽게 예를 들어 '노동자 천국'을 만들기 위해 정치를 하는 것은 아렌트적 입장에서는 비정치적 행위이다. 무언가 만듦 자체를 위해 정치가 도구화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렌트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조건의 하나로서 순수한(?)의미의 '정치' 복원을 시도한다. (이 말 뜻은 아렌트가 순수학문으로서의 정치이론을 강조한다는 뜻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 아렌트에게 정치는 경험적인 것이고 현상학적인 것이다. 즉 플라톤이 말한 것 같은 두 가지 세상. 이데아계와 현상계 같은 것은 애초부터 없다. 모든 것은 여기의 일이다.) 아렌트의 이러한 시도는 정치와 사회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과도하게 도구화되어 있는 정치 영역을 환원하려는 균형론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 좋다...라고 저자가 말한다.(그게 가능한지는 이견이 있으나 하여간 아렌트를 이해하기위해서는 그렇게 해주는 것이 좋다.)

이런 아렌트에게 가장 적대적인 정치체는  전체주의였다. (나도 그렇다.다 그렇지 않나?) 그녀는 수용소 경험이 있고 아이힌만 재판 참석 경험도 있다. 그녀는 '정치'라는 공적 공간 자체를 말살 한 것이 '전체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미워할 수 밖에 없다. 아렌트가 대표적으로 지적하는 전체주의 사회는 히틀러 체제와 스탈린 체제이다. (그런데 의외로 아렌트비판자 중에는 아렌트의 정치이론이 전체주의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부분이 있다. 저자는 아렌트를 옹호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이해부족에서 오는 곡해라고 말한다. 물론 맞는 말이지만 그 비판 중 일부도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여기서는 넘어가자.) 이런 '전체주의시대의 도래'에 과거 전통적인 정치철학은 무용지물이었다. 그에 아렌트는 그녀만의 독창적인 정치철학을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잠깐 물 한 잔 먹고 와서...꼴깍) 

어디까지 했더라...하여간 여차저차해서 아렌트가 전체주의를 깟다는 것. 특히 한가지 더 이야기 할 것은 아이힌만의 재판을 보면서 아렌트가 전체주의적 사고= 무사고라는 등식을 만들어 냈다는 점은 자주 인용되는 내용이다. 그녀가 자각한 패리아의 정신을 강조한 것과 등치해서 읽어도 좋을 듯 하다. 특히 최근 '언론의 자유 문제'를 이야기할 때 아렌트의 이름이 간혹 언급되는 것을 기억해야 된다. 아렌트에게 '자유'는 모든 정치적 행위의 근간이다. 앞서 말했듯이 아렌트에게 '정치'라는 공간은 순수하게 부각시켜야할 만큼 중요한 과제이다. 그런데 '자유'가 위협받거나 말살 된다면 어떻게 되는가?  뭐 어떻게 되긴? 자유가 없으니 정치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럼 '정치'의 '정치다운 복원'을 외치는 아렌트는 공치는 거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그러니 '자유X = 정치X' 이 되기때문에 자유를 위해서 자유를 살리는 게 아니라 정치를 위해서 또 인간의 삶을 위해서(왜..인간이라고 하는지는 바로 뒤에서 설명한다.) 자유는 중요하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롤즈/맥킨타이어식의 자유주의/공동체주의 틀로다가 구분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아렌트는 자유주의자이구나'라고 할 것이다. 땡!!  대략 정치사상사를 보면 아렌트는 공동체주의자들 속에 이름이 끼여있다. 사실 자유,평등 이라는 개념자체를 이분법적이고 임의적으로 쓰는게 더 문제다. 언젠가 말했듯이 누가 '자유'를 말하면 '어떤 자유?'를 이야기하고, 누가 '평등'을 말하면 '어떤 평등?'을 이라고 되물어야한다. 그만큼 이런 개념들은 이미 자의적으로 활용되어도 누구하나 타바하지 않을만큼 혼합되고 훼손되어 있다.  

왜 아렌트에게 자유=인간=정치이고 또 그럼으로서 공동체주의로 기입되는지 지금부터 볼거다. (하여간 '자유=롤즈=자유주의' 내지는 '노동=마르크스=좌빨' ...이런거는 혼자 집에서 포르노 비디오볼 때 했으면 좋겠다.)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이 이제 중심이 된다. 

아렌트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본성은 알수 없다라고 말한다. 오직 아는 것은'조건지어진 존재'라는 것이다. 하여간 아렌트는 인간의 삶을 두가지로 나누는데 하나는 '정관적 삶'이고 다른 하나는 '활동적인 삶'이다. 아렌트는 뒤에 것에 집중한다. (한가지 더 '역시 실천이야'라고...아렌트는 정관적 삶의 고유한 가치 역시 무시하지 않았다. 아도르노가 정관적 삶을 높이 평가하되 실천적 삶을 무시하지는 않았던 것과 비슷한 위치로 대칭된다.) 하여간 '활동적인 삶'의 정치의 존재론적 기본이 되는데 세가지 활동을 의미한다. 노동. 작업. 행위이다. 노동은 말그래도 먹고사는 노동이다. 작업은 '인공적 사물세계'를 만드는 활동이다. 사람은 인공물의 세계에 산다. 그리고 아렌트에게, 그녀의 정치이론에 가장 중요한 '행위'이다.  여기는 그대로 인용하자 

"사물이나 물체의 매개없이 사람들간에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는 활동으로 다원성이라는 인간적 조건, 다시 말해 한 종류의 인간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이 이 땅에 살고 또 세계에 거주한다는 사실에 조응하는 활동" 이다.  

중요한 지점은 내가 색칠했다. 아렌트에게 정치철학은 -좀 재미없는 말로 -사이 간 자를 써서 '간주체적' 이며 '다원적' 이며 '현상학적'이다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 '행위'라는 개념은 동물과는 다른-동물도 어떤 의미에서는 정치적 활동을 한다.군집활동을 하는 동물들.그런데 그것은 본능적인 행위이지 이성적 행위는 아니다- 인간의 특징이다. 아렌트는 딱잘라  인간이 행복하려면 사적 영역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즉 개인적 취미나 부의 추구, 미적 탐닉 등 사적 행복과 만족은 결국 온전한 삶을 만들어 주지 못하는 반쪽이 행복이란 것이다. 아렌트는 이를 '세계 소외'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다른 건 나 모르고, 또한 예술가도 못되고, 그저 예술작품이나 감상하면서 예술 속에 어쩌구 저쩌구 하며 야코 죽이는 이를 보거든 '어...세계소외 되어 있군?' 이라고 하면 대략 정답이다. 그럼 도대체 뭐가 더 있냐구?  

아렌트에게 인간은 공적 동물이다. 공적 영역에서 활동하며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본능적인 행복의 영역이다. 그러니 사적 행복만 열나게 쫓아봐야 아렌트가 보기엔 그건 결국 100점 맞아도 수능 변환점수 50점인 셈이다.(아...뛰어나게 쉬운 설명이다.) 이러고 보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라는 의미 정도로 보인다. 그런데 아렌트는 거기서 더 나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선택적 의미망 속에 갖혀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정치철학사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세 개의 체제를 주욱 나열하고 그 장단점을 선택한다. 아렌트가 보기에 이건 진짜 정치가 아니다. 내가 누차 누누히 강조했던 '정치'에 대한 이야기가 이거였다. 그렁저렁 하다 노란 깃발이 펄럭일 때 갑자기 과정치화되었다가 노란게 코 묻은 거라고 알고 또 정치에 등돌리다가...알고 봤더니 그 수건이 땀이 배였다는 걸 알고 석과대죄하는게 그게 정치가 아니다. 정치판은 더러운 놈들 쌈질하는 곳이니 관심없다가 거리의 확성기가 울려퍼지면 너나할 것 없이 정치평론가가 되는게 정치가 아니다. 아렌트가 보기에 '정치'는 인간 삶의 전제 조건이다. 그러니까 내가 태어나기 전 부터 정치란 있엇고 내가 살면서도 정치가 있고 또 내가 죽어고 정치가 있다. 오로지 내가 정치적이 되느냐 마느냐의 차이일뿐, 아렌트 식으로 말하자면 정치적으로 자각하여 온전한 삶을 살려고 하느냐 아니면 반푼의 행복에 그치느냐이다. 길어졌는데 하여간 내 말로 하면 '투표는 객관식이지만 정치는 주관식'이다. 아렌트는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을 행위라고 했다.

자..다시 아렌트의 '행위'로 돌아오자. 앞서 '자유' '전체주의 반대''공동체주의' 대충 뭐 이런말을 했었는데...아렌트의 정치적 인간에 대한 강조로 대충 해결되었으리라 생각한다.(아님..직접 책을 읽고 밑줄을 그어라.) 아렌트에게 '행위'란 발언과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이다. '참여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왜 아렌트의 이론중 '발언과 정체성'을 독립시켜 인용하는지 알 수 있다.  아렌트에게 행위는 가장 중요한 개념 중에 하나이고 또한 이것이 현시적 특징을 갖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폭탄 테러범이 테러를 하고도 숨어서 가만히 있으면 그건 '정치'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어떤 이유때문에 테러했소.부시 물러가라'라고 하는 순간 그건 '정치'가 된다.(음..간략하니 쉬운 설명이다.) 마르크스 부사령관이 '우리의 말이 무기이다'라고 했을 때 그것은 언로를 통한 이데올로기 정치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런 '행위'로서의 발언과 정체성의 문제였다.  전체주의 사회의 예를 들어보자. 말을 못하게 한다. 또는 말을 못하게끔 기획한다. 또는 말을 하면 겁주려고 조사한다. 결국 '말을 못하게 행위를 못하게'한다. 그게 모든 전체주의는 아니지만 전체주의의 주요 속성 중에 하나이다. 이제 '행위'와 '전체주의' 간에 이야기는 대략 정리되었다.

그러니까 인간답게 살려면, 인간의 실존적 조건에 충일하게 살려면 '정치'를 해야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행위'는 여기에 필수적이다. 그 '행위'를 통해서 '정체성'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축복과 저주의 정치사상 20세기와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인간의 조건>을 전반부로 해서 <전체주의의 기원>,<혁명론>,<과거와 미래사이> 등으로 아렌트의 사상을 짚어나간다. 책 중반부에서는 전체주의에 대한 아렌트의 생각과 서구 정치철학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룬다. 저자는 아렌트에 쏟아진 비판들을 보여주고 아렌트의 의도를 읽게함으로써 반비판을 행한다. 서구 정치철학 전통에 대한 아렌트의 비판에 대해서는 아렌트가 특정 요소만을 부각해서 의도적 칼질을 하고 있다는 균형도 보여준다. 물론 마르크스의 문제에 대해서는 저자 역시 아렌트와 비슷한 지평위에서 말을 한다. 물론 저자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경제결정론자들이 아님을 강조하지만 '순수'정치학의 의미에서 경제에 정치를 종속시킨 서구 철학의 마지막 대변자였다고 본다. 아렌트는 마르크스를 '노동하는 동물' 의 세계를 만든 철학자라고 비난한다. 마르크스 부분에 대해서는 읽다가 주섬주섬비판적 메모를 해둔 내용들이 꽤 있다. 예를 들어 '노동'이 생애 가장 긴 시간을 차지하는 곳에서 행위의 근거가 어디서 출발할 수 있는지? 또는 아렌트의 발언행위가 주체의 측면에서  엘리트적인 측면이 강조된 것은 아닌가? 이성의 언어로 발언할 수 없는 상황이나 그에 종속된 주체는 어떤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가? 또한 노동자 여가가 소비로 귀결되는 체제에서 이 문제를 돌파하려는 마르크스주의적 문화연구의 부분은 간과되어도 되는가. 아렌트의 목적초월적 정치함의가 갖는 문제점, 행위 담론의 수행성을 강조하다 보니 발생하는 문제점. 정치 영역의 독자성의 강조가 학문적 범주의 외연에서 갖는 문제점 등등...  

 아렌트 철학의 독창성만큼 아렌트 비판자들의 주장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대목들이 많다.마르크스에 대한 아렌트의 비판은 몇 몇 지점을 빼놓으면 허술하다. 이런 점들이 함께 고려되어야만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릴 수 있을 성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적 영역을 인간의 존재론적 위상까지 도달시켜놓은 점, 그리고 인간의 자발적 행위와 발언,그리고 새로운 창조의 정치를 강조한 점들은 어쩔 수 없다는 대의제적 비관주의와 경제올인,정치 외면의 무관심 속에 분명히 새기고 넘어가야할 지점들이다. 

오랜만에 단 한퀴에 썻다. 헉헉...점심 시간 30분전에 쓰기 시작했는데 이제 끝났다. 회사 지하 식당 아직 밥주나. 아줌마... (생각나면 수정할 마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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