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를 위해서

폐기되어야 하는 것...

 

..무중심성에 대한 환호 , 비폭력에 대한 강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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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08-06-26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명박 정권이 이글을 반면교사로 삼은 듯
 

요즘...아마 여름 끝날 때까지는 즐겨들을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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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를 해야겠다....

여기 저기 백날 도움도 안되는 말들을 흩어놓고 다녔다.

내가 제대로 아는 바가 부족하니 제대로된 소통도 드물었다.

소통의 창구로 여기는 곳에서 소통이 안된다고 느끼는 것은

더 큰 비참을 불러 오기 마련이다.

 

알라딘이 좀 지루하기도 했고,

알라딘에 약간 중독 증상이 생기는 것 같기도 했다.(나는 중독을 싫어한다.)

 

우울증에 걸리지 않기 위해 오래전부터 결벽증은 버렸으나

답답함은 가끔 그 촉수를 건드린다.

 

오랜 시간 걸려서 알게 된 것인데

나는 어디서든 인정받지 못했다.

그것은 나의 부유하는 정서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나는 내가 정상'이라고 생각한다는 거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그런 내가 정상'이 아니라는 시각이 내 편이든 네 편이든 많다' 는 거다.

 

 '아방가르드' 해서 그런가? 

 

어쨋거나.

당신들이 있건 없건 썼으니까 ...

리뷰는 계속 쓸것 같구, 음악과 관련된 글들도 가끔은 쓸 것 같다.

하지만 댓글들에 대한 답과 댓글들을 남기지 않기로했다.

또한 습관적으로 보는 즐찾의 서재 브리핑도

필요에 의한 것을 서너개 빼놓고는

대폭 삭제하기로 했다.

갑자기 방과 후 남겨진 학교처럼 되어버렸다.

조용하니 좋다.

 

답글이 남지 않았다고 서운해 하지 마시길...

결국 아주 비루한 방식으로 '소통 중단'을 선언하는 거다.

너는 너 대로 나는 나 대로...

 

희망을 버렸냐구?

아니...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희망을 보고 싶으면 어느 봄날 들녁에 나가

-당신이 정말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실제로 단 10분이라도 꼼꼼히 봐주길 바란다-

이름 모를 수 많은 새순이 돋는 것을 보시라.

희망이 얼마나 많은 이름으로 존재하는지...

 

알라딘은 다시 내게 완전히 사적 미디어로 돌아온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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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6-23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오래 전에 라디오에서 들은 얘기예요. 아이들이 태어나고 있다는 것, 세상이 그만큼 새로워지고 있다는 거라구요. 늘 변화하고 있다는 거겠지요. 조용해서 좋으시다니 그걸로 된 듯해요. 가끔 글도 기다릴게요.

2008-06-24 15: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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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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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시간의 손아귀에 있다.
진실은
인간이란 태초부터,
길의 중간에 멈춰 있음을,
아는 것이다.
                     옥타비오 파스 <산 일데폰 소야곡> 중에서..
.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디딜때 마다 흑진주 빛 코울타르 위를 걷는 마음이었다. 곤충을 유혹하여 생의 마지막 숨결을 앗아가는 거대한 식충 생물의 위장 , 책 장 한 장 한 장을 넘기는 것이 그 위액을 덮어쓰는 것 같아서 두려웠다. 책의 겉표지가  끈끈이 주걱의 거대한 아가리였던 셈이다. 이미 하얗게 벌린 입 속으로 들어온 이상 아무런 선택의 여지가 없다. 식충 식물의 진액 속에서 화사한 봄 날을 상상하는 것은 오히려 현재의 지옥보다 더 큰 '지옥의 추억'이다.

코맥 맥커시의 <로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왜 온통 지구가 잿빛으로 변했는지, 왜 그들이 남쪽으로 내려가야 하는지, 왜 까마귀가 없는지, 왜 곡식들은 밑둥만 남고 말라버렸는지... 이 불친절함과 하드보일드한 문장들은 대가의 아우라가 주는 차가운 매력이다. 조각가 자코메티의 움직이는 사람들을 글로 만나는 듯 문장과 단락들을 포정의 칼 솜씨로 뚝뚝 잘라내는 매커시의 능력은 그의 이름이 결코 허명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한다. 무뚝뚝하고 뼈만 남은 문장이지만 역설적이게도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살덩어리들이 문장들을 꾹꾹 채우고 있다.

매커시는 '지구 최후의 날'-정확히는 '인류 최후의 날'-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단 한 문장도 언급하지 않는다. 이 소설은 '인류 최후의 날' 이후에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커시의 디스토피아를 유추해 볼 수는 있을 듯 하다. 그의 시대에는 '3차 세계대전'이니 '핵전쟁'이니 하는 말이 일상적인 공포로 작동할 수 있던 시대였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런 말들은 헐리우드 영화 속에서도 진부한 것이 되었다. 대신 '지구온난화',(영화 '투모로우) , '치명적 바이러스' ( 영화 '지구 최후의 날', '둠스데이') 같은 말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30대 이상의 세대에게 그것은 SF적인 상상력이면서도 언제나 '실존'하는 공포의 하나였다. 영화 < 그 날 이후>와 <요한계시록>의 '불로써 심판하는 하나님' 과 '노스트라다무스'의 종말론이 하나의 팔레트 위에서 섞이던 시절이었다. 매커시의 주인공들이 역시 '핵전쟁' 이후의 세대처럼 그려진다. 햇빛을 포함한 모든 빛들이 잿빛 안개 속에서 희미하다. 식물들도 동물들도 그 흔적을 찾기 힘들다. 바다는 이미 검은 폐유처럼 변했다. 핵겨울을 연상시키듯 비와 눈이 시시 때때로 엄습한다.

'인류 최후의 날' 이후 두 남자가 남는다. 아버지와 아들. 나는 감정이입에 아주 능란한 작자여서 그런지 소설의 설정 자체부터 가슴이 쿨렁 내려앉았다. 절망적인 길을 가는 두 남자와 화분 가에서 일일초를 바라보며 연신 방긋거리는 우리 부자를 같이 떠올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다 보니 소설을 소설답게 읽어나갈 수가 없었다. 학문하는 자로서는 치명적이겠으나 소설읽는 자로는 오히려 긍정적인 상황일 수도 있다고 위안했다. 그 때문인지 나는 '인류 최후의 프로메테우스'들을 보면서 몇 번이나 책을 내려 놓아야 했다. 따뜻한 차 한 잔을 목구멍으로 넘기며 내려 앉은 가슴을 손으로 더듬 더듬 찾아서 다시 원래 자리에 갖다 놓아야 했다.

공포는 공기처럼 가득하다. 단 한 순간도 단 한 공간도 그들에게 안전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 공포는 때로는 의식의 영역을 넘어서 잠자는 순간에도 찾아온다. 세상에는 그들 말고도 살아남은 자들이 있다. '살을 먹는 자들'이다. 그들이 이런 재앙의 원인제공자도 아니고 재앙을 이용해서 세계를 지배하려는 무리들도 아니다. 인간과 야만 사이에서 생존의 이름으로 '살을 먹는자' 들로 떠도는 것이다. 마치 영화 <매드맥스>나 영화<둠스데이>의 생존자들처럼 말이다. 물론 영화 속 무리들처럼 <로드>의 무리들은 중무장을 하지도 조직화되지도 않았다. 그저 생존을 위해 무리를 짓고 무리 중 죽은자가 생기면 먹는 것이다. 길을 가다가 만나게 될 사람들도 그렇게 처리할 것이다.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가 있냐?" 고...부디 당신이 그렇게 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남자는 공포와 존재론적 절망 속에서 죽음에 대한 유혹을 가까스로 참아낸다. 죽음은 오히려 이 모든 것을 '초월'하여 영원한 '무'를 가져다 줄 것이다. 차라리 그 영원한 '무'에 이르러야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자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것은 죽음과 자기 사이에 그가 살려내야만 할 한 아이가 있기때문이다.

아이는 여러번 묻는다. "우리는 좋은 사람인가요?" ....남자는 "좋은 사람이야" 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그도 이제는 그런 확신을 할 수 없다. 그는 아이를 보호하고 생존을 이어가기 위해 훨씬 더 복잡한 그물 속에서 발바둥쳐야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남자는 약탈자 무리 중 한 명을 처치해야했고 함께 가기에 짐이 되는 아이를 길에 내버려 두어야 했다. 길에서 만난 눈 먼 노인을 그냥 지나치려했고 그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는 것에 대해 언쟁을 해야 했다. 소설 속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이고 가장 절박한 것은 배고픔이다. 이 둘 사이의 변증법은 홉스가 인용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 구약 욥기의 '리바이어던'의 시대가 우리에게 체현된 것이다. '리바이어던'의 공포 사이에서 오락가락 하다보면 얼음비를 맞은 것처럼 온 몸이 오싹 거린다. 하지만 이런 긴장감은 책읽기를 힘들게 한다. 그 때쯤 되면 매커시는 지하 벙커의 풍족한 먹거리를 주인공들에게 제공해서 독자까지 그런 텐션으로 부터 이완시켜준다. 공포 영화에서 쫓고 쫓기는 장면 뒤에 나오는 아침 장면 같은 그런 긴장의 이완말이다.  

아이는 묻는다. "우리는 좋은 사람인가요? "   

선(善), 우리가 원한 것은 선이었다.
               세상을 올바르게 하는 것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의지가 아니었다.
                부족한 것은 겸손함이었다.
선을 원했던 우리 역시 결백하지 못했다.
계율과 개념,
              신학자들의 오만함.
십자가가 몽둥이로 변하고,
                사람들의 피를 제물로 바치며,
죄악의 벽돌로 집을 짓고,
의무적인 성찬의 전례를 공포하는 것.

                                      옥타비오 파스 <산 일데폰 소야곡>

하지만 소설 <로드>는 처음부터 이 소설이 이렇게 고생만 진창하다고 끝나지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두 남자는 자신들을 스스로 위안하며 '불을 운반하는 사람' 이라고 말한다. 신화는 말해주지 않던가? 불은 운반하는 사람은 그 불을 인류에게 전달하는 소임을 마친다.  지금 우리가 불을 자유자재로 쓰고 있고 있는 것이 그 예가 아니던가. 유럽 고성에서 기어나온 유럽작가들의 디스토피아가 영구순환적인 디스토피아에서 끝난다면 헐리우드도 사랑한 이 미국 대가는 애초부터 '희망'이 있음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끝을 알 수 없는 긴 우울 속에서 몇 번을 책을 내려놓았다.하지만 '그들의 품 안에 불있다' 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은 또 다른 추동력이 되었다. 십 만 번의 절망 속에도 단 한 번의 희망이 있다면 갈 수 있는 것이 '인간의 힘' 아니던가?

여기서 끝으로 가기에 앞서, 소설 <로드>의 속의 긴장감과는 다른 재미있는 구석이 있어서 잠깐 생각해본다. 그것은 '총'이다. 소설 속에서 '총'이라는 존재는 절대적이다. 이것은 다분히 미국적 환경에서 나올 수 있는 미국적 소재이다. 주인공은 애초에 세발의 총탄을 가지고 있다. 한 발은 자존감을 위해 여자가 써버렸고 또 하나는 주인공이 가족의 보호를 위해 썼다. 주인공은 항상 아이와 떨어져서 염탐해야하는 상황에서 아이에게 총을 준다. 적을 죽이라고 주는 것이 아니다.소설 속에서 아버지가 아이에게 목구멍 깊이 총구를 넣으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자식에게 자살하는 방법을 알려주어야만 하는 그 심정은 다른 말이 필요치 않을 만큼 절절하다. 또 한편으로는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에서 죽음의 공장 앞에서 카토프의 선택 같은 희생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카토프의 선택보다는 쉬웠을 것이다. 아버지라면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기때문에. '총의 소유'는 이 곳에서 '힘'의 소유,'안전의 소유'와 상당히 연관깊다. 약탈의 무리들 역시 제대로된 총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스포일때문에 조심스럽다.) 작가는 '산탄총과 탄창'이라는 진보된 총을 한 번 언급함으로써 독자에게 단기적이지만 미래에 대한 모종의'안도감'을 선사한다. 흔히 매커시를 서부 개척시대라는  통속소설의 주제를 문학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고 평가한다. 그런데 <로드>에서 등장하는 디스토피아 역시 서부 개척 시대의 무법 상태와 비슷한 판형이다. 또한 미국 수정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는 '무기 사용'에 대한  '자유주의적 접근' 역시 미국적 정서에 바탕을 둔 부분이 있다.소설은 한편에서는 유럽의 신화적인 디스토피아에서 아이디어를 빌어오면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미국적 도판들이 또 인용되고 있는 셈이다.

소설<로드>에서 아이는 '우리가 괴물과 싸우기 위해 괴물이 되지 않아야 함' 을 계속 상기시킨다. 어쩌면 이것은 '인간'이라는 한계를 넘어서는 과도한 요구일지도 모른다. 눈먼 노인에게 아버지는 '만약 이 아이가 신이라면 어쩌겠습니까? "라고 묻는다. 인간의 아이는 신이 사라진 시대에,인간에게 이런 요구를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점을 일깨운다. 홉스적인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인간'이다. 아무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설 <로드>속의 세상도 그러하다. 하지만 아이는 신뢰할 수 없는 인간 만큼이나 우리들처럼 좋은 사람이 있다는 하나의 희망에 대해 놓치지 않는다. 믿을 수 없는 인간이지만 또 인간을 믿지 않고는 인류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역설이 여기서 작동한다. 험난한 여정을 마치면서 노작가는 온몸을 다 던질 수 있는 단 하나의 사랑이 살아 있다면 인류는 아직도 희망이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본다.

우리도 그들 처럼 '길'의 중간에 멈춰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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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리웃의 잘생긴 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각본도 쓰고 제작에 참여한 영화 <11번째 시간>이다.

이 영화는 과거 디카프리오가 출연한 기존의 영화와 장르도 주제의식도 다르다. 한마디로 하면 '환경 다큐멘터리'이기 때문이다.

디카프리오는 중간 중간에 <그것이 알고 싶다>의 문성근처럼 등장해서 다큐멘터리를 이끌어간다. 러닝타임은 100분에 조금 못 비친다. 기억에 의하면 너댓번 정도 디카프리오의 얼굴을 본 듯 하다.  

영화는 환경운동가, 과학자,(스티브 호킹도 나온다), 저술가, 정치가(고르바초프와 전 CIA국장 제임스 울시도 나온다)  등 등이 나와  주제와 과련된 인터뷰를 한다. 주로 지구환경과 관련된 생태학적주제들을 구들장에 앉아서 새끼 꼬듯 엮어간다.

이 영화 이전에 나왔던 엘 고어의 <불편한 진실> 보다 <11번째 시간>은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한다. 애써 비교하자면 <불편한 진실>은 진보적인 주류 환경론과 현실주의의 접합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면 <11번째 시간>은 생태학적인 인식전환에 더 큰 비중을 둔다. 현재 도래하고 있는 환경 위기(온난화,숲의 파괴, 해양오염등) 는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과 생태계의 모순 사이에서 생긴 '증후' 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두 영화다. "지금 당장 구체적 행동에 들어가자" 라는 액션플랜을 제시한다.  그 액션플랜들은 의지만 있고 그것이 정치적 각성을 통해 습관화된다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공정무역 상품 사용하기, 불필요한 소비 줄이기, 자전거 타기, 재활용 철저히 하기..

<11번째 시간>은 인류의 진화에서 부터 이야기를 끌어간다. 인간이라는 열등한 존재가 생물계에서 번창할 수 있었던 것은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지능'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지능에 바탕을 둔 산업혁명,석유의존형 시스템과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문제점 부터 본격적으로 말을 꺼낸다.

이런 말도 나온다. "사람들은 환경이,지구가 멸망할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말입니다. 지구나 환경은 멸망하지 않습니다. 다만 인류가 멸망할 거구요. 그 이후 다시 지구는 더 빨리 살아날 겁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스미스가 "인류와 바이러스"를 비교한 말이 문득 떠오르지 않는가? 


영화 <11번째 시간>은 지구 온난화, 숲의 파괴, 토양의 파괴, 해수의 오염, 다양한 생물종의 감소 등 등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간다. 그것은 생태학의 근본적 질문과도 같다. 영화 <11번째 시간>은 모든 자연을 소재로만 파악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양식" 에 대해 문제를 삼는다.

영화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기억에 의존하는 것이라 정확한 인용은 아니다)

" 생태계는 더 큰 상위 시스템이고 경제는 하부 시스템이다. 인류는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하부 시스템을 급속도로 확장시켜왔다. 그렇게 되면서 생태계라는 더 상위 시스템의 공간을 줄어들었다."

" 아이들은 하루에 4시간 이상씩 TV에 노출되어있다. 사람들은 하루에 수 천개의 광고에 노출되었고 수 천개의 브랜드를 알고 있다. 그렇지만 집 밖의 수 십개의 동식물들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

" 현재 경영 대학원을 나온 CEO들은 하나 같이 성장을 외친다. 경제 성장이 최대의 가치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수단을 목적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목적은 삶의 질이다. 잘못된 성장은 삶의 질을 망쳐놓는다. 그것을 되찾아야한다."

영화<11번째 시간>은 구체적으로 악화일로를 걷는 환경문제와 인간의 삶을 연결한다. 그 바탕에서는 생태주의적 사고 전환을 요구한다. 결론에서 영화는 이런 움직임들이 '전근대'로의 회귀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히한다. 일상에서 작은 변화들과 함께 '이성의 힘'으로 새로운 대안적 세계를 실현하자고 주장한다. 그것은 재생 에너지와 순환가능한 자원에 바탕을 둔 새로운 세계 디자인을 말한다. 

이 영화는 생태계와 인간을 대립구도로 만들어서 허무주의에 빠지게 하지 않는다. 근본적인 출발점은 인간의 이성과 선의지에 대한 믿음이다.이미 세상에는 자발적으로 모인 생태그룹들과 모임들이 늘어나고 있다. 

영화는 "인간은 아는 만큼 행동한다"는 마지막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서 끝난다.

생태주의적 가치와 환경문제에 대해 알고 싶은데 책 보기가 귀찮다면 이 영화<11번째 시간>이 도움이 될 듯하다.  영화관에서 개봉하지 않았고 DVD로는 나와있다.

( 부산에 계신 학교 선생님들 중에서 학생들과 함께 보려는데  이 DVD를 도저히 못구하겠다고 하신다면 기꺼이 빌려드릴 생각이 있다. 먼저 구해보시구....^^; ) (우체국이나 택배가 빌리는 것보다 더 비싸니까.. )

..근데 왜 갑자기 영화<11번째 시간> 이야기를 꺼냈을까?...^^

알 사람은 알고 모를 사람은 몰라도 되는데...그건 이것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현재 생활 속에서 할 수 있는 한 가지 운동방식이다. ^^

한국의 대표적인 시인들은 거의 참여했다. 고은을 비롯해서 무려 시인 203명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국민이 대운하에 반대하면 안하겠다"라고 어제 기자회견에서 했단다.

단순한게 아주 좋다.^^

그럼 이제 '국민이 반대'하면 된다.

얼마나 쉬운가.^^

 그 XX 탄핵가자..실제로 그렇게 가지도 못하면서 레토닉은 거리에서만으로 충분하다. 광우병 대책회의도 '그건 슬로건'이다라고 슬쩍 꼬리를 내렷다.(처음부터 그런 것 아니었겠나? )

이명박에 반대하는 것도 어디서 출발하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진다. 적 앞에서 반대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적이 사라진 이후까지도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처음 부터 적을 무너뜨릴 현실적 정세나 의지도 그닥 높아보이지는 않는다. 어쨋거나 우리는 그 이후의 세상은 어떻게 되어야 하는 가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즉 구체적 투쟁은 모두에게 중요하지만 그 투쟁이 출발하는 출발점과 방향성에 대한 보편적이고 이론적인 성찰이 부족하면 그 결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난다.

그리고  이론적이고 전망적인 것은 '지식인'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치 않는다. 아고라의 논객들이 아니어도 ,대학에 있지 않아도 일반 대중이 모두 그런 '지식인'이 될 수 있는 정보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이번 촛불집회에도 공과 실이 있을 것이다. 아직 끝은 알 수 없지만...촛불집회가 남긴 공 중에 하나라면 분명히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교육이 아니었을까 싶다. 시위를 하는 것,파업을 하는 것, 이런 것들이 특정한 사람들만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 촛불을 들며 가졌던 연대감과 의식들은 이제 더 깊은 문제까지 이어지질 수 있는 단초가 될 것이다.(물론 거기에는 희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좀 더 근본적 가치에 대한 이해와 인간과 역사에 대한 애정을 무장하고 갔으면 한다. 

한국 시의 절창이라고 할만한 <저문 강에 삽을 씻고>의 정희성 시인의 글을 시집에서 그래도 옮겨온다.



장마가 시작되었다.옥타비오 파스의 <돌과 꽃 사이에서>가 맴돈다..

돌과 꽃 사이에, 인간.
우리를 죽음으로 데려가는 탄생,
우리를 탄생으로 데려가는 죽음.

인간,
돌 위로 줄기차게 내리는 비
화염 사이로 흐르는 강
폭풍우를 이겨내는 꽃
번갯불의 섬광을 닮은 새.
노동과 열매 사이의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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