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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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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시간의 손아귀에 있다.
진실은
인간이란 태초부터,
길의 중간에 멈춰 있음을,
아는 것이다.
                     옥타비오 파스 <산 일데폰 소야곡> 중에서..
.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디딜때 마다 흑진주 빛 코울타르 위를 걷는 마음이었다. 곤충을 유혹하여 생의 마지막 숨결을 앗아가는 거대한 식충 생물의 위장 , 책 장 한 장 한 장을 넘기는 것이 그 위액을 덮어쓰는 것 같아서 두려웠다. 책의 겉표지가  끈끈이 주걱의 거대한 아가리였던 셈이다. 이미 하얗게 벌린 입 속으로 들어온 이상 아무런 선택의 여지가 없다. 식충 식물의 진액 속에서 화사한 봄 날을 상상하는 것은 오히려 현재의 지옥보다 더 큰 '지옥의 추억'이다.

코맥 맥커시의 <로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왜 온통 지구가 잿빛으로 변했는지, 왜 그들이 남쪽으로 내려가야 하는지, 왜 까마귀가 없는지, 왜 곡식들은 밑둥만 남고 말라버렸는지... 이 불친절함과 하드보일드한 문장들은 대가의 아우라가 주는 차가운 매력이다. 조각가 자코메티의 움직이는 사람들을 글로 만나는 듯 문장과 단락들을 포정의 칼 솜씨로 뚝뚝 잘라내는 매커시의 능력은 그의 이름이 결코 허명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한다. 무뚝뚝하고 뼈만 남은 문장이지만 역설적이게도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살덩어리들이 문장들을 꾹꾹 채우고 있다.

매커시는 '지구 최후의 날'-정확히는 '인류 최후의 날'-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단 한 문장도 언급하지 않는다. 이 소설은 '인류 최후의 날' 이후에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커시의 디스토피아를 유추해 볼 수는 있을 듯 하다. 그의 시대에는 '3차 세계대전'이니 '핵전쟁'이니 하는 말이 일상적인 공포로 작동할 수 있던 시대였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런 말들은 헐리우드 영화 속에서도 진부한 것이 되었다. 대신 '지구온난화',(영화 '투모로우) , '치명적 바이러스' ( 영화 '지구 최후의 날', '둠스데이') 같은 말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30대 이상의 세대에게 그것은 SF적인 상상력이면서도 언제나 '실존'하는 공포의 하나였다. 영화 < 그 날 이후>와 <요한계시록>의 '불로써 심판하는 하나님' 과 '노스트라다무스'의 종말론이 하나의 팔레트 위에서 섞이던 시절이었다. 매커시의 주인공들이 역시 '핵전쟁' 이후의 세대처럼 그려진다. 햇빛을 포함한 모든 빛들이 잿빛 안개 속에서 희미하다. 식물들도 동물들도 그 흔적을 찾기 힘들다. 바다는 이미 검은 폐유처럼 변했다. 핵겨울을 연상시키듯 비와 눈이 시시 때때로 엄습한다.

'인류 최후의 날' 이후 두 남자가 남는다. 아버지와 아들. 나는 감정이입에 아주 능란한 작자여서 그런지 소설의 설정 자체부터 가슴이 쿨렁 내려앉았다. 절망적인 길을 가는 두 남자와 화분 가에서 일일초를 바라보며 연신 방긋거리는 우리 부자를 같이 떠올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다 보니 소설을 소설답게 읽어나갈 수가 없었다. 학문하는 자로서는 치명적이겠으나 소설읽는 자로는 오히려 긍정적인 상황일 수도 있다고 위안했다. 그 때문인지 나는 '인류 최후의 프로메테우스'들을 보면서 몇 번이나 책을 내려 놓아야 했다. 따뜻한 차 한 잔을 목구멍으로 넘기며 내려 앉은 가슴을 손으로 더듬 더듬 찾아서 다시 원래 자리에 갖다 놓아야 했다.

공포는 공기처럼 가득하다. 단 한 순간도 단 한 공간도 그들에게 안전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 공포는 때로는 의식의 영역을 넘어서 잠자는 순간에도 찾아온다. 세상에는 그들 말고도 살아남은 자들이 있다. '살을 먹는 자들'이다. 그들이 이런 재앙의 원인제공자도 아니고 재앙을 이용해서 세계를 지배하려는 무리들도 아니다. 인간과 야만 사이에서 생존의 이름으로 '살을 먹는자' 들로 떠도는 것이다. 마치 영화 <매드맥스>나 영화<둠스데이>의 생존자들처럼 말이다. 물론 영화 속 무리들처럼 <로드>의 무리들은 중무장을 하지도 조직화되지도 않았다. 그저 생존을 위해 무리를 짓고 무리 중 죽은자가 생기면 먹는 것이다. 길을 가다가 만나게 될 사람들도 그렇게 처리할 것이다.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가 있냐?" 고...부디 당신이 그렇게 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남자는 공포와 존재론적 절망 속에서 죽음에 대한 유혹을 가까스로 참아낸다. 죽음은 오히려 이 모든 것을 '초월'하여 영원한 '무'를 가져다 줄 것이다. 차라리 그 영원한 '무'에 이르러야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자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것은 죽음과 자기 사이에 그가 살려내야만 할 한 아이가 있기때문이다.

아이는 여러번 묻는다. "우리는 좋은 사람인가요?" ....남자는 "좋은 사람이야" 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그도 이제는 그런 확신을 할 수 없다. 그는 아이를 보호하고 생존을 이어가기 위해 훨씬 더 복잡한 그물 속에서 발바둥쳐야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남자는 약탈자 무리 중 한 명을 처치해야했고 함께 가기에 짐이 되는 아이를 길에 내버려 두어야 했다. 길에서 만난 눈 먼 노인을 그냥 지나치려했고 그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는 것에 대해 언쟁을 해야 했다. 소설 속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이고 가장 절박한 것은 배고픔이다. 이 둘 사이의 변증법은 홉스가 인용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 구약 욥기의 '리바이어던'의 시대가 우리에게 체현된 것이다. '리바이어던'의 공포 사이에서 오락가락 하다보면 얼음비를 맞은 것처럼 온 몸이 오싹 거린다. 하지만 이런 긴장감은 책읽기를 힘들게 한다. 그 때쯤 되면 매커시는 지하 벙커의 풍족한 먹거리를 주인공들에게 제공해서 독자까지 그런 텐션으로 부터 이완시켜준다. 공포 영화에서 쫓고 쫓기는 장면 뒤에 나오는 아침 장면 같은 그런 긴장의 이완말이다.  

아이는 묻는다. "우리는 좋은 사람인가요? "   

선(善), 우리가 원한 것은 선이었다.
               세상을 올바르게 하는 것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의지가 아니었다.
                부족한 것은 겸손함이었다.
선을 원했던 우리 역시 결백하지 못했다.
계율과 개념,
              신학자들의 오만함.
십자가가 몽둥이로 변하고,
                사람들의 피를 제물로 바치며,
죄악의 벽돌로 집을 짓고,
의무적인 성찬의 전례를 공포하는 것.

                                      옥타비오 파스 <산 일데폰 소야곡>

하지만 소설 <로드>는 처음부터 이 소설이 이렇게 고생만 진창하다고 끝나지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두 남자는 자신들을 스스로 위안하며 '불을 운반하는 사람' 이라고 말한다. 신화는 말해주지 않던가? 불은 운반하는 사람은 그 불을 인류에게 전달하는 소임을 마친다.  지금 우리가 불을 자유자재로 쓰고 있고 있는 것이 그 예가 아니던가. 유럽 고성에서 기어나온 유럽작가들의 디스토피아가 영구순환적인 디스토피아에서 끝난다면 헐리우드도 사랑한 이 미국 대가는 애초부터 '희망'이 있음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끝을 알 수 없는 긴 우울 속에서 몇 번을 책을 내려놓았다.하지만 '그들의 품 안에 불있다' 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은 또 다른 추동력이 되었다. 십 만 번의 절망 속에도 단 한 번의 희망이 있다면 갈 수 있는 것이 '인간의 힘' 아니던가?

여기서 끝으로 가기에 앞서, 소설 <로드>의 속의 긴장감과는 다른 재미있는 구석이 있어서 잠깐 생각해본다. 그것은 '총'이다. 소설 속에서 '총'이라는 존재는 절대적이다. 이것은 다분히 미국적 환경에서 나올 수 있는 미국적 소재이다. 주인공은 애초에 세발의 총탄을 가지고 있다. 한 발은 자존감을 위해 여자가 써버렸고 또 하나는 주인공이 가족의 보호를 위해 썼다. 주인공은 항상 아이와 떨어져서 염탐해야하는 상황에서 아이에게 총을 준다. 적을 죽이라고 주는 것이 아니다.소설 속에서 아버지가 아이에게 목구멍 깊이 총구를 넣으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자식에게 자살하는 방법을 알려주어야만 하는 그 심정은 다른 말이 필요치 않을 만큼 절절하다. 또 한편으로는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에서 죽음의 공장 앞에서 카토프의 선택 같은 희생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카토프의 선택보다는 쉬웠을 것이다. 아버지라면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기때문에. '총의 소유'는 이 곳에서 '힘'의 소유,'안전의 소유'와 상당히 연관깊다. 약탈의 무리들 역시 제대로된 총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스포일때문에 조심스럽다.) 작가는 '산탄총과 탄창'이라는 진보된 총을 한 번 언급함으로써 독자에게 단기적이지만 미래에 대한 모종의'안도감'을 선사한다. 흔히 매커시를 서부 개척시대라는  통속소설의 주제를 문학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고 평가한다. 그런데 <로드>에서 등장하는 디스토피아 역시 서부 개척 시대의 무법 상태와 비슷한 판형이다. 또한 미국 수정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는 '무기 사용'에 대한  '자유주의적 접근' 역시 미국적 정서에 바탕을 둔 부분이 있다.소설은 한편에서는 유럽의 신화적인 디스토피아에서 아이디어를 빌어오면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미국적 도판들이 또 인용되고 있는 셈이다.

소설<로드>에서 아이는 '우리가 괴물과 싸우기 위해 괴물이 되지 않아야 함' 을 계속 상기시킨다. 어쩌면 이것은 '인간'이라는 한계를 넘어서는 과도한 요구일지도 모른다. 눈먼 노인에게 아버지는 '만약 이 아이가 신이라면 어쩌겠습니까? "라고 묻는다. 인간의 아이는 신이 사라진 시대에,인간에게 이런 요구를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점을 일깨운다. 홉스적인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인간'이다. 아무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설 <로드>속의 세상도 그러하다. 하지만 아이는 신뢰할 수 없는 인간 만큼이나 우리들처럼 좋은 사람이 있다는 하나의 희망에 대해 놓치지 않는다. 믿을 수 없는 인간이지만 또 인간을 믿지 않고는 인류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역설이 여기서 작동한다. 험난한 여정을 마치면서 노작가는 온몸을 다 던질 수 있는 단 하나의 사랑이 살아 있다면 인류는 아직도 희망이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본다.

우리도 그들 처럼 '길'의 중간에 멈춰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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