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마죠비
피터 젤렌카 감독, 마르틴 미식카 외 출연 / 열린문화원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영화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공연장으로 가는 일군의 배우들의 이동 장면 부터 시작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손자와 메르세데스 벤츠'라는 일화가 배우의 이야기를 통해 등장한다. 이야기는 영화가 끝나고 다시 한번 자막의 형태로 언급된다. 감독의 친절한 배려와 수미상관의 강박때문은 아닌듯 싶다. 피터 젤린카 감독은 배우의 입을 통해 도스토예프스키라는 장으로 유비되는 '서구와 동구의 인식' 차이를 이야기한다. 도스토예프스키라는 고전이 사유되는 방식에 대해 빗금을 긋는 행위이다. 또한 연극 카라마조비를 영화화 하는 젤린카 감독의 해석에 대한 우회적 변이기도 하다.

 

고전이 사유되는 방식에 대해 짧게 이야기하자. 하나의 예술작품이 '위대한 고전'이 되는 시간이 있다. 어떤 작품은 고전의 예감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시간의 연마 또는 모호한 합의의 시간이 필요하다. 고전과 아닌 것의 경계 역시 매우 모호하다. 작품을 분석하고 해석 해야하는 사명을 띤 일군의 직군들을 제외하면 '위대한 고전' 이라는 칭호를 다는 순간 하나의 성좌가 된다. 그리고-이게 중요한 점인데- 위대함에 걸맞게 '상투적' 으로 소비된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품 A단조 작품 173은 한동안 청소차의 후진 경보음이었다.(그 곡은 '엘리제를 위하여'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명화들은 상품 광고에 키치적으로 쓰인다. 모 에어컨 회사의 제품에는 르느와르의 그림이거나 바르비종파의 작품들이 붙어있다.  대중 소비 사회에서 '고전'이라는 브랜드는  레디 메이드 명품의 세련미에는 못미치지만 합의된(?) 고상함이라는 생명장치로 연장되는 브랜드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목록을 통해 아이들을 강요하는 학교와 학부모의 등살 아래서, 또는 일군의 인문학자들의 틈새에서나 역설적인 각광을 받는다.  이런 상투성의 반대 급부에는 무게에 질려 압사직전의 고전이라는 역설적 운명이 함께 공존한다. 친숙해진 초라함이라는 역설 속에 위대한 고전들은 위대한 비평의 역사와 더불어 이미 목이 졸려진체 파르해진 얼굴로 독자와 만나게 된다. 상투성과 무거움의 이중적 구속인 셈이다.  대중사회가 고전을 소비하는 위대한 무관심 또는 위대한 비평의 압력은 문화연구의 재미있는 과제가 될 만하다. 고전에 대한 우리의 접근은 그 사이에 위치해야만 한다. 더 자유로와질 필요가 있다. 무거움과 가벼움을 동시에 털어내야 하는 기묘한 작업이다. 그런 의미에서 특히 고전은 반시대성을 특징으로 한다. 그것은 분명 어떤 역사적 맥락 속에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것이 그 맥락을 뚫고 나올 수 있는 것은 그 안에 초월적 역능이 있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말하는 '소수문학'의 내재적 역능은 우리가 흔히 '고전'이라고 하는 것들 속에서 찾게 된다. 우리는 무수한 해석의 신전 기둥들 속에서 기둥의 부조들을 만져보며 통로를 찾아가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점을 긍정해야 한다. 우리가 고전을 읽고,독해하고, 재해석하는데 훨씬 더 리버럴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 전제 되어야만 한다.    

 

 

 본격적으로 영화의 이야기로 들어가자. 감독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위대한 원작 옆에 조각난 거울처럼 폴란드, 또는 동구의 현재성을 개입시킨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폴란드 극단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공연물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잘 만든 프로덕션을 그대로 영상화한 것이 아니다. 즉 오페라 공연물 DVD처럼 실황 공연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감독은 이것이 영화임을 잊지 않다록 앞서 말한 현실의 장치들을 극의 주변에 배치한다. 관객은 카라마조프의 이야기와 함께 그가 배치시킨 것을 동시에 읽는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다.

 

먼저 감독은 내러티브에 두가지 축을 설정함으로서 영화가 연극상연물이 되지 않도록한다. 

 

내러티브의 첫번째 축은 극단의 연극공연이다. 무대라는 제약을 벗어나 일상의 장소에서 대안적 상연을 하는 셈이다. 영화<카라마조비>에서 극단이 공연할 곳은 폴란드 자유노조가 융성했던 제철 공장이다. 개인적으로 두 가지 장면이 오버랩되었다.  제철 공장이라는 장소는 베로나 오페라 축제의 <일 트로바토레>공연물을 떠올리게 했다. 연극 제작과정 이라는 설정은- 영화 역사에는 이런 영화들이 매우 많다- 특히 카우프만의 <시네도키 뉴욕>을 연상하게 만들었다. (오페라야 싫어하는 분들도 많으니 그렇다쳐도, <시네도키 뉴욕>은 강력 추천이다.<위대한 영화>의 저자인 평론가 로저 에버트가 2010년인던가 '지난 10년 최고의 영화'로 뽑은 작품이다.지난해 리뷰를 쓰려고 사진캡쳐만 해놓고 말았다.)

 

영화는 줄거리를 카라마조프의 재판을 중심으로 압축한다. 아버지의 고약한 질문들 속에 이반과 알료사의 입을 통해 신과 세속, 종교와 구원의 문제가 언급되긴 한다. 하지만 원작품에서의 비중에 비할 수 없다. 매우 유명한 <대심문관>편도 직접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으며, 얄료사의 정신적 지주인 조시마 장로도 극중 배역에 없다. 원본과 비교 운운하는 것은 굳이 이 작품을 떠나서도 별 의미가 없다. 감독이나 연출가는 텍스트를 기본적으로 해석하여 '그의' 작품을 만드는 것이기때문에. 

 

영화<카라마조비>의 주요 등장인물이다. 왼쪽 부터, 스메르자코프, 이반, 누워있는 이가 아버지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 드미트리, 알료사이다. (아시다시피,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이들의 이름은  약칭과 정식명칭과 ...하여간 여러 가지로 불린다. 러시아에서 원래 그런다니 할 수 없다.)

 

 

영화의 두번째 내러티브다. 배우들이 극장을 찾았을 때 약간은 병약해보이며, 슬픈 눈을 가진 금발의 노동자 한명이 그들을 주시한다. 공연 리허설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 역시 그는 멀리서 그 공연에 집중한다. 두번째 이야기가 그에게 있다. 배우들이 공장에 왔을때 공연기획자는 이 공장에서 얼마전 아아기 떨어지는 사고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 노동자는 그 아이의 아버지이다. 영화에서는 넌지시 그것이 보상금을 노린 살해가 아니었는지 비유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소설 <카라마조프 형제들>은 '존속살해' 라는 인류의 오랜죄악에 대한 질문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영화<카라마조비>에 등장하는 노동자의 슬픈 눈은 그런 선상에 있으며 그의 눈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과는 다른 측면을 바라보고 있다. 그의 눈은 죄책감에 미묘하게 떨리고 있다.  불안감과 죄책감이 영화적으로는 카라마조프들의 연기에 그가 몰입할 수 있는 당위성이다.

 

극중 연극의 내러티브는 드미트리의 재판을 중심으로 순차적으로 진행되어 간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연극적 시간과 영화적 시간이 대단히 자연스럽게 넘나든다는 것이다. 영화의 시퀀스는 엄밀하게 보자면 연극 리허설 또는 공연의 한막이나 한장을 단위로 나뉜다. 공연의 에피소드 이후에 무대 뒤의 배우들의 일상이나 관객들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식이다.드미트리를 맡은 배우는 다른 스케쥴때문에 감독과 갈등한다. 배우들 사이에서도 실강이가 발생한다. 평면적으로 보자면 이렇게 '무대 위/무대 바깥'은 분절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감독은 이런 이질감을 현명하게 극복해낸다. 편집이라는 도구가 의식의 연속성을 만들기도 또한 단절을 만들기도 한다면 감독은 씬과 씬의 자연스러운 공간적 연결을 통해 이음새를 없앤다. 즉 첫번째 내러티브와 두번째 내러티브를 같은 공간에서 구현되며 두 개의 사건이 매끄럽게 이어져 나간다.

 

예를 들어 이반역의 배우와 관객인 노동자가 있다. 그들이 나와서 공장 주변을 산책하며 이야기를 나눈다. 한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스메르자코프가 관객인 노동자에게 잠시 인사를 하는 순간, 그 노동자는 영화 속의 행인처럼 취급되고 앞서 노동자와 이야기하던 배우는 다시 이반이 된다

 

 

 

노동자는 배우들 중 왜 이반에게 말을 걸었을까? 왜 하필이면 이반이었을까? '모든 것이 허용되기 때문'에. 그는 연극 대화 중 일부를 가지고 이야기하며 '갈고리'와 '지옥'을 보여준다. 그것은 '죄와 벌'에 대한 이야기이고 자신의 죄책감에 대한 유비적 반응이었다. ' 만약 보상금을 노리고 정말 아이를 높은 곳에서 떠밀었다면, 그 갈고리와 지옥이 자기에게 합당한 처벌일까?' 하는 투다. 그는 그 공연이 벌어지고 있는 그 무대가, 그리고 그들이 투쟁해왔던 그 공장이 이미 오래전에 갈고리와 지옥이었음을 말한다. 아이를 밀어버릴 수 밖에 없었던 그 곳, 조건들이 충만하고 그것이 실천될 수 있는 곳. 지옥이 아니고 무엇인가? 지옥은 천국의 반대편, 염라대왕이나 하데스가 다스리는 곳이 아니라, 도스토예프스키의 도시, 카라마조프의 마을, 폴란드의 공장. 이미 우리 주변에 임재해 있었던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의 질문은 또 다시 사회의 도덕이나 윤리적인 구원의 주변을 맴돌 수 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감독은 영화적 연출에 있어 기존의 두 장르(소설/연극) 사이에소격효과를 발생시켜야할 필요성을 느꼇을 것이다.   '이것은 소설도 연극도 아닌 영화다'라고 말이다. 이는 시선의 개입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를 통해 도스토예프스키가 가진 현재성과 감독이 제기하고픈 메시지 사이에 평화적?) 양립 또는 충돌적인 조우가 가능해진다. 브레히트가 말한 소격효과, 그리고 이를 이어 받은 장 뤽 고다르 등이 점프 컷등으로 변형 시켰던 개입 방식이다. 감독은 충돌하는 격한 방식보다는 전경 샷과 관객 샷의 개입을 통해 이를 이루어낸다. 대표적으로 이런 샷들이 시선의 개입을 전형화하는 방식이다.

 

 

이반과 카체리나가 대화를 나누는 샷이다. 서로의 마음(카라마조프들이니..) 이 폭발하는 대목이다. 오른쪽에  붉은 셔츠를 입은 연극 연출가가 끼어든다. 감독이 마치 이 장면을 연극에 송두리째 빼앗기지 않겠다는 투다. 붉은 옷의 연출가가 이 장면에서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보고 있음'을 드러낸다는 이유 한가지 밖에 말이다. 이 시선의 무게감은 대단하다. 마치 깨끗한 화선지에 커다른 붓으로 대각선 먹선을 하나  훅 긋는 정도의 강력한 시선이다.시선 하나로 영화의 샷은 다른 시간과 공간성을 갖게 되며, 영화와 연극, 또는 현실의 모든 면들이 다시 만들어진다. 영화에서는 이렇게 연극적 몰입을 방해하며, 또한 영화적 맥락과의 접속조차 혼동케 하는 샷들이 여러번 등장한다. 앞서 말했듯이 연극은 여러가지 이유로 수시로 중단되기도 한다. 이런 차단과 혼동은 지속적으로 다른 단위의 시간을 발생시킨다. 이것이 만들어 내는 효과는 무엇인가?

 

 

이제 영화의 마지막 부분이다. 앞서 말한 죄의식과 죄책감에 괴로와하는 노동자다. 연극은  걸려온 전화한 통에 중단된다. 배우들 역시 연극을 중단하고 전화 받는 그의 모습을 관찰하다. 그 전화가 어떤 내용이었는지 누구도 들은바는 없지만, 모두가 그 내용을 알고 있다. 영화는 이제 그 끝으로 향한다. 영화는 몇 장의 아름다웠던 시절 속 사진과 압도적인 갈고리를 관객의 머릿 속에 남기며 끝이 난다. (물론 사진은 그 이전에 배치된 것이지만 말이다.) 배우들은 검은 그림자를 남기며 공장을 빠져나가고 그들은 낡고 닳아서 이제는 쓸쓸해진 제철 공장 위로 흩어진다. 아름다운 시간과 비극적 사건들 사이의 시간. 그 사이에 무엇이 존재했을지, 또 무엇이 사라졌을지...시간을 공간속에 박제화해 놓은 사진들을 볼 때마다 드는 암연과도 같은 질문이다. 아득하다는 말 밖에 달리 덧댈 말이 없다. 깊은 어둠의 소실점으로 향해 나아가고 있는 야누스의 얼굴처럼 우리에게 많은 질문과 대답을 강요하면서 말이다.

 

영화<카라마조비>는 매우 현명하게 만들어진 영화다. 엄청난 배우나 제작비를 쓰지도 않았다. 그저 고전의 명성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질문을 살짝 흔들었을 뿐이다. 과거를 반복한다는 것은 새로움에 대한 반복이며 현재와의 조우이다.  들뢰즈식으로 말하자면, 결국 이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텍스트가 가진 생산적 힘을 반복하는 것, 차이를 반복하는 것이지 단순히 과거를 반복하는 것은 아니다. '유일한 반복은 차이의 반복'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우리에게는 도래할 더 많은 카라마조프들이 있다는 점은 도스토예프스키를 만날 때마다 생기는 기대감이다.

 

P.S)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읽지 않고 영화를 이해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어지고, 또 던져질 것이라고 생각된다. 영화는 영화로서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다. 이것은 소설<카라마조프>가 아니라 영화<카라마조비>이기 때문이다. 단지 영화의 첫번째 내러티브가 뼈대에 가까운 카라마조프 존속살해사건을 보여주고 있기때문에 소설<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읽었다면 좀 더 흥미롭게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고전 '아닌가? 클래식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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