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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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에서 예를든 확률스펙트럼에 의하면 나는 6번과7번 사이이다. 사실상 무신론자와 강한 무신론자 사이다. 즉 무신론자다. 나는 유물론적이며, 또한 과학적 세계관을 존중한다. 인문학적인 관용으로 보자면 '매력적 무신론'이라는 범신론과 무신론 사이다. 물론 '나는 유물론자다.'라고 하면 가끔 '나는 공산주의자다'라고 할 때와 비슷하게 목덜미가 서늘해진다. 도킨스가 미국에서 '나는 무신론자다'라고 할 때 받을 수있는 싸늘한 불편함 같은 것을 한국에서는 '나는 유물론자다'라고 할 때 받는다. 주로 유물론이 뭔지 관념론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말이다.  도킨스가 <만들어진 신>에서 전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아브라함의 신' 즉 개신교,천주교, 이슬람교의 신이다. 서양을 지배하는 신이기 때문에 서양인으로서 도킨스는 그 신만 상대한다. 반면 한국에서 '유물론자'라고 하면 종교적인 관점과 함께 이데올로기적 눈총도 받아야 한다.한국서 '무신론자'라고 하면 비기독교인 정도로 받아들여진다.  유교는 예절 잘지키고 그냥 문안드리는 차원에서 조상 귀신께 제배나 잘하면 되니까, 불교는 '네 안에 신있다' 라고 서로의 신을 보라고 하니까. 물론 불상 앞에서 열심히 절하는 분들도 많다만. 하지만 '유물론자'라고 하면 상황이 다르다. 아마 유교 쪽에서는 하늘에서 뚝 떨어졌나 조상 귀신의 은덕도 모르고 라고 나올테고, 불교측에서는 영성도 없는 것들 이라고 나올거다. (아..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데 왜그러세요.박영규 버전이다.)  거기에 일단의 관념론적 사회 분위기는 이런 '편협한 놈들' '메마른 놈들' 이라고 공격을 해올 것이다. 유물론을 무슨 책상 신이나 벽돌신을 믿는 사람 정도로 생각하는 지도 모르겠다. 오랜동안 '유물론자'는 '빨갱이' 와 동의어였다. 정치적 상황이 예전에 비해 달라졌다지만 지금도 그런 사회적 정서는 끈적한 테이프 흔적같다. 무신론자가 받는 오해는 유물론자가 받는 오해와  닮아 있다. 이 둘은 사실 쌍둥이이다. 영혼도, 정서도, 감정도 없거나 - 좀 더 세속적으로 가면- 물질만능주의,황금만능주의자 정도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한국에서 유물론의 전통이 마르크스주의적인 유물론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스스로의 사회철학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규정했다. 즉 마르크스는 과학적 필연성으로 자신의 이론을 특화시키길 원했다. 그 역시 과학적 세계관에기댄바가 크다. 하지만 우리에게 가장 큰 오해의 시작은 '국민윤리' 과목에 있었다. '유물론=마르크스주의=좌경용공' 이란 자연스러운 흐름을 탄다. 내가 아는 어떤 유물론자도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인간적 가치들과 내면성의 여러가지 양식들을 모두 가치 없거나 존재하지 않는 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농담처럼 말하자면, 가슴이 따듯한 사람은 정말 가슴이 따뜻한게 아니라, 뇌가 따뜻한(?) 것이다. 영혼은 가슴에 있지 않고 뇌에 있다. 그런데 문학적으로 '왼쪽 가슴 아래께 있다'고 하는게 관습적인 미감에 더 어울린다. 우리는 어떤 최소의 기원 또는 범주를 이야기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일들을 극소로 환원할 필요는 없다. 인간을 인간 유기체로 대하지 분자들의 조합으로 대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도 굳이 말하자면 감정을 느끼는 것은 안타깝게도 심장이 아니라 뇌다. 고답적으로 해버리면 대중가요는 매우 우습게 되긴 한다. 핫브레이커가 아니라 브레인브레이커.ㅎㅎ 가슴아파서 목이 메어서...가 아니라 뇌가 아파서...왠 두통약 CM송이람.. 인간은 바다에서 왔던지, 뭐에서 왔던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하등적인 존재에서 여기까지 왔다. 앞으로도 좀 더 갈 것 같다.)   

 

  신의 문제는 사실 오래된 철학의 문제였다. 하지만 이제 철학자들은 캐캐묵은 신에 대해서 별로 이야기 하지않는다. 서양의 관념론은 신을  떨쳐내는데 매우 오랜 시간을 썼다. 근대 이성을 정초했다는 데카르트 역시 그랬다.이원론적 형식을 통해 인식의 주체를 내부에서 구했던 칸트 역시 <실천력비판>에서 신의 문제에서 '신의 요청'이라는 교묘한 방식으로 이를 슬쩍 넘어간다. 물론 19세기- 다윈과 헉슬리 이후- 진화론적 세계관은 중요한 포인트였다. 생물학자들이 다윈을 뉴튼의 반열에 올려 놓는 것은 그래서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이후 과학은  세계의 비밀을 하나 둘 풀어낸다. 하지만'신'은 여전히 건재하다.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현대에 내려와서 생기는 일을 그린 철학적 만화 <신신>에는 "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신을 창조해냈을 겁니다." 라는 말이 나온다. 아마 존재하고 있지 않았을때도 그랬을 것이다. 도킨스가 인용한 '화물숭배의식'처럼 말이다.  

 

<만들어진 신>에서 도킨스는 신 문제에 매우 단호한 태도를 취한다. 그의 전투성은 두가지 측면으로 보인다. 하나는 과학자로서의 소신, 다음으로는 네오콘을 중심으로 한 부시정부의 신정 정치의 복원이라는 출간 당시의 상황 때문이다. 그가 사나운 늑대처럼 달려드는 것은 지적설계론의 반격같은 반동적 움직임에 대한 대응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도킨스가 우려하는 정세적인 측면은 사실 한국에서 그대로 이해하긴 쉽지 않다. 한국의 기독교가 강력한 헤게모니 그룹이긴 하다. 특히 이 정권에 들어서면서 그 모습이 더 노골적으로 들어났다. 하지만 한국의 풍부한 종교적 전통은 묘한 정서적 균형을 이루는 힘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처럼 '지적설계론'을 교과서에서 가르쳐야 한다고 압박할 수 없다. 굳이 비종교인들이 나서지 않아도 말이다. 머리 깍은 분들과 갓 쓴 분들이 좌시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신정분리의 세속 정치를 지지하는 이는 '이이제이'를 통해서도 그런 시끄러운 사태를 막을 수 있다.  

 

내 개인적으로는 신의 존재 문제를 증명 또는 반증명 하는 것보다는 신의 효과 문제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내게 종교는 문화적 문제에 가깝다. 다이엘 대닛의 용어를 빌자면, 진화의 지향적 자세들 중에 하나이다. 나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지만, 종교나 신을 믿는 사람들 또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것을 자기의 선택의 자유 범위 안에 가두어 둔다면 달리 말하고싶지 않다. 실제 종교가 환상이라 할지라도 누구나 다른 브랜드의 환상을 가지고 있다. 도킨스는 종교환상이 악성이라는 것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종교인 개인이 사회적 합리성을 유지하려 애쓰고, 비사회적 행동을 혐오하고, 자신이 믿는 종교를 자기에게 한정한다면 나는 그가 어떤 종교를 갖더라고 인정한다. (물론 여기에도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 정도가 타협의 근본선이다.) 물론 이는 내가 과학적 민감성이 리처드 도킨스 만큼 부족하고 종교 문제에 어느 정도는 포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킨스는 이런 인식의 나이브한 태도를 비판한다. 굴드의 '겹치지 않는 교도권'(NOMA)에 대해서 타협적인 태도로가 비판한다. 굴드 자신이 진화론자이고 무신론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겸손이라는 미덕 속에서 불가지론으로 치환시킨다는 것이다. 사실 대개의 무신론자라고 하는 사람들도 이 정도 지점에서 종교와 선을 긋고 있을 성 싶다. 결국 영원히 풀리지 않을 가치관이기 때문에 실용적인 입장에서 '너와 나'의 경계를 긋고 독립적인 위치를 점유하는 것말이다. 물론 이 세속의 경계를 종교 측에서 넘나들면 반격도 기대하는 것이 합당하다. 도킨스는 과학자들의 이런 모호한 태도 때문에 종교와 신의 문제가 더욱 풀리기 어려운 미궁으로 들어간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는 여러번 무신론자들을 위로하고 발굴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더 많은 무신론자들이 나와야 세상이 종교가 만드는 환상과 해악으로 부터 빠져 나올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는 좀 다르다. 그것은 종교가 있어도 또는 없어도 반복될 것이다. 기존의 종교가 모두 없어진다고 할지라도  다른 종류의 이름의 종교, 예를 들자면 광신적 애국주의같은 형태로라도 반복될 것이다.) 도킨스가 진화론과 과학적 방법론 외에 대해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타협적 인식이 일종의 '침묵의 나선'효과를 만든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나는 무신론자다.'라고 당당히 선언하는 입장이 환상으로서의 종교에서 탈출 할 수 있는 시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 이야기하고 있는 바에는 매우 동의한다. 공정을 기하기 위해 신가설과 과학가설이라고 동치에 놓고 봐다. 과학가설의 열린 가능성이 타당하게 보인다. 즉 과학은 새로운 증거가 나오면 수정할 수 있지만 종교는 그렇지 않다. 유리한 증거가 나오면 신이 있다는 결정적 과학 증거라고 하고 또 불리한 과학증거가 나오면 믿음으로 돌아가버린다. 특히 도킨스의 강력한 주장 중에 특히 어린이에 대한 종교 강요 문제는 무슨 법제화라도 시켜서 막고 싶은 심정이다. 일부 종교인들은 모태종교를 무슨 대단한 자랑으로 생각한다. "진골귀족인 양 ,모태종교에요" 라고 발랄하게 이야기한다. 본인들은 '저는 점지 받을때 부터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임했답니다. 그리고 여전하지요." 라는 식이다. 우습긴 한데, 하나님이 아이들을 준다쳐도, 그대를 더욱 축복하고 사랑했을 것이라는 나르시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아담때문에 연좌제로 시달리는 것도 괴로운데,또 가족의 크나큰 믿음이 세습적 축복까지 내리니 참으로 귀족형 자본주의 모델이 아닌가 싶다. 모태종교에 대한 축복은 아마 성경 어느 구절을 뚝잘라서  주변 목사님과 장로님과 권사님들이 하신 말씀에 힘입은 바가 클 것이다. 종교 리더의 말이 하나님의 말이 되는 순간이다. 웃기는 일이다. 리처드 도킨스라면 '모태종교' 라는 말은 이렇게 해석할것이다. '저 태어날 때 부터 폭력...." 그만하자.

 

내가 설령 도킨스의생각에 동의하더라도 그처럼 전투적일 수는 없을 것같다. 수많은 조용한 종교인들과-또는 가끔 환자 소리도 듣지만, 비교적 조용히 자기신앙생활을 하고있는 종교인들과 공존해야 하는 생활인의 입장에서 그런 도발적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종교와 세속 정치를 섞는 부류들, 그리고 그것에 흔쾌히 동조하는 세력들에 대해서는 욕을 해야만 한다. 종교의 이름을 벌어지는 몽매주의 역시 마찬가지기며 종교근본주의 역시 그렇다. 흔히 말하는 술자리에서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 두 가지가 '정치' 이야기와 '종교'이야기다. 왜 그럴까? 그건 답이 안나온다는 것 때문이다.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이 서로 어색함을 더는 길이다. 그런데, 바로 이렇게 소통으로 해결될 수 없는 가치, 이 차이가 바로 가장 중요한 정체성의 중핵이 아닌가?  '정치'와 '종교' 이야기를 뺀다는 것은 그 사람의 가치관과 접촉하지 않겠다는 이야기인 셈이다. 가치관의 소통은 어찌되었거나 술자리에서 부담스럽다. 그리고 나머지 자리에서도 만찬가지다. 이 시대의 소통이란 물론 그정도의 것이다. (여담인데, MB정권이 준 특이한 묘한 역설은 술자리에서 이 두가지를 동시에 거론해도 될 수 있게 된 상황이다.) 하여간 문제적인 작가 리처드 도킨스의 노력에는 경의를 표한다. 일부 그룹에서는 원초적으로 거부당하는 작가로 취급받겠지만 말이다. 참고로 나는 예수를 좋아한다.석가모니도 좋아한다. 공자도 그렇고 맹자도 그렇다. 그 분들을 인류의 위대한 현자라고 생각해서 좋아하는 것 뿐이다. 주제 사라마구의 <예수의 제2복음>(예수복음)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다. 도킨스는 물론이고 종교 근본주의자들 또는 무오류주의자들을 바라보는 우리들이 걱정하는 바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셈이다. 

 

 "자기 옆구리에서 흘러나가 지구를 온통 뒤덮을 피와 고통의 강을 기억하면서, 예수는 미소를 띠고 있는 하느님이 조이는 활짝 열린 하늘을 향해, 인류여, 하느님은 자기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지 못하고 있으므로 그분을 용서라라라고 크게 외쳤다."

 

여담삼아 내 종교 경험은 이렇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 조금 더 일찍 나왔다면- 예를 들어 내가 고등학교 때쯤- 자율학습 시간의 종교난상토론에서 훨씬 유리한 위치를 취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초등5-중2까지 교회를 다녔다. 아버지는 종교선택의 자유를 인정해주는 기독교인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헌법의 종교자유 구문을 우연히 알게 되었고 그 부분을 강조하며, 아침 TV 애니메이션 대신 교회가자고 꼬득이는 부모님을 혼자 보냈다. (흐흐흐 스스로 대견하다. 시민의 권리를 헌법에 기대서 주장하다니.)  헌법에 의한 권리 보장이 깨진 것은 아버지가 주일학교 교장인가를 맡으면서였다. 결국  교회 내에서의 묘한 포지셔닝 문제로 내가 교회에 나가게 된것이다. "자기 아들 하나 전도하지 못하면서 무슨" 이런 비난 어린 시선들을 우려했을 것이다. 결국 길바닥에서 1시간 넘는 싸움 끝에 교회에 가게 되었다. 오래된 싸움에 항복하고 나니 진짜 마음은 편하더라.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엄석대에 항복한 주인공의 마음이 그러했으리라. 사람들은 '신'을 영접해서 그렇다고 했는데, 나는 그때 굴복의 달콤함이 저항의 고달픔보다 심하다는 것을 알았다. 교회 선생들이 기쁜 마음으로 두 손 잡고 기도할 때, 내 마음은 그런 투항자의 안이함과 함께 묘한 비굴함을 느꼇다. 그리고 교회의 끝은 중2때, 교회 안에서 깝죽 거려대는 녀석에게 주먹 한 방 날리고 '나 진짜 교회랑 끝이다' 하고 나온게 정말 끝이다. 따지고 보면 그 깝죽이와 신은 별개의 문제였지만 말이다. 그런데 중 3때 친한 친구 3인방 중 한 녀석이 순복음교회 광신도였다. 교회가서 한 나절이상 사는. 이 친구를 공박하느라 또 많은 시간을 썼다. 그러다 고등학교를 미션스쿨을 다니게 되었다. 교가만큼이나 '실로암'이라는 복음성가를 자주 부르는 곳이었다.(아직도 그 노래를 기억한다. 어두운 밤에 캄캄한 밤에 새벽을...) 매주 한 번 씩 예배를 봐야했다. 교회 안다니는 아이들은 단어장 가지고 가거나 아님 졸았다. 당시 목사의 축원 아래 고개 숙이고 있는 사람들을 실눈으로 보며, 만약 이것이 무지나 환상의 대상에 대한 응대라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가와 그들이 '하나'의 무엇에 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인 것에 대한 모종의 공포감 같은 것을 느꼈다. 자율학습 시간에는 반에 절반 쯤 되던 기독교인들과 리처드 도킨스가 <만들어진 신>에서 꺼냈던 그런 이야기들을 가지고 타율학습의 긴 시간을 때우기도 했다. 도킨스를 고등학교 때 쯤 만날 수도 있는 요즘 고등학생들이 부러울 뿐이다.얼마나 싸우기 용의한가. 30년 교회를 다니던 아버지도 수 년전에 교회와 연을 끊으셨다. 이유는 아버지가 감사로 있을 때다. 교회와 사학 재단 설립자의 후계자이자 그 교회의 장로인 자의 재산 해외 은닉 비리를 폭로했기 때문이다. 지역 신문에 조그맣게 보도되기도 했던 사건이었다. 아버지를 정작 화나게 한 건 젊은 장로의 비리가 아니었다. 장로의 비리에 대해 누군가 옹호하며 그 분이 그럴 분이 아니다. 오해가 있다며 그 분을 위해 기도하자고 할 때 대부분 그에 호응하며 머리 숙여 기도했다는 점이다. 아버지 표현을 그대로 전하자면 "그딴 새끼들의 기도나 들어주는 하나님이라면" 이라고 일갈하고 접었다. 당시나는 오래도록 믿던 신을 인간의 어리석은 행위들 때문에 저버리는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고 말해드렸다.( 오히려 비종교인이 종교를 버리는 걸 신중하게 생각하라는 조언을 하다니. 역설적이다.) 교회가 싫은 거지,믿던 신이 싫은 것이 아니라면 다른 교회를 다니시거나, 함석헌 목사처럼 무교회주의같은 건 어떠냐고 말이다. 70 넘으신 분이 갑자기 가치를 바꾸는게 쉽지 않을거라는 생각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신의 존재 문제도 오래도록 믿음과 의심사이를 오고갔다고 했다. 아버지는 30년 동안 생물 선생님이셨다.ㅎㅎㅎ 리처드 도킨스라면 아마 70 이면 어때, 그때라도 환상의 터널에서 빠져나온 것이 좋은 것이고 지금 부터 또 즐거운 세상을 살면되지라고 할 것이 분명하다. 지금은 나도 그렇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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