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인문학 - 클레멘트 코스 기적을 만들다
얼 쇼리스 지음, 이병곤.고병헌.임정아 옮김 / 이매진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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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인문학>은 시골집 담장안에서 만난 수돗물같다.

주변을 돌아봐도 물 한 통 구할 수 없는 산길.우연히 인가를 만났을 때 느끼는 반가움.곧 깨끗한 물이 갈라진 논바닥 같은 내 목청을 타고 흘러내길 것이라는 기대감. 발걸음이 빨라진다.낯선 집이지만 주인은 절대 물을 찾는 사람을 그냥 보내지 않는다.수돗물을 콸콸 틀어 입을 적시고 있으면 주인은 컵에 차가운 보리차를 담아 온다.  '아...왜 그걸 마셔...찬물 떠왔는데'

얼 쇼리스의 '클레멘트 코스'는 희망과 절망의 롤러코스터를 하루에도 몇 번씩 타는 내게 머리통이 짜릿할 만큼의 차가움을 주었다.기분좋은 차가움은 살바토르 달리의 시계처럼 일상의 햇살 아래 흐물흐물 녹아가고 있는 내 의식에 죽비 한 방을 날린다.더 겸손하게 더 많이 공부하고 더 충실하게 살라고 말이다.

'가난'의 해법은 세계 7대 수학난제보다 어렵다.문제는 다층적이고 역사적이다.또한 광범위하게 만연해 있다.결국 사람들은 '가난은 나랏님도 구하지 못한다.' 라는 말로 더 이상 '가난'을 나의 문제,우리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다.TV의 축복 아래 '전쟁'만 네모난 전자상자속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다.'가난' 역시 'TV 속 드라마'로 성격을 바꾸었다.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우리는 이제 TV속에서 만난다.그리고 그들을 동정한다.ARS 모금방식은 혁신적인 아이디어였다.우리는 ARS 전화 버튼을 누른다.마음 따뜻한 사람들을 위해 2번까지 가능하게 만들었다.얼마나 배려깊은 장치인다.이제 우리는 '가난'에 대해 할만큼 다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나 '시혜적 지원'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근본적인 답을 제공하지 않는다.(그것마저도 외면하는 상류층들이나 국가에 대해서는 언급할 가치도 없다.내게 그들은 저주받아야 마땅한 적들일뿐이다.) 얼 쇼리스는 '가난'이 '무력'에 대한 포위라고 말한다.

빈민에게 영향을 미치는 수물여섯 종류의 무력들을 다음에서 예시하려고 한다.이것들 중 어느 것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빈민들은 하나나 둘 ,또는 대여섯 개 정도의 무력에만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다.그들은 무력에 둘러싸여 갈아간다.....포위전략들이 역사를 거듭하면서 살인이나 사냥을 할 때 이용됐다.이 작전은 두 가지 이점이 있다.우선 사냥감을 고립시키고 탈출 가능성을 줄인다.하지만 아마도 더 중요한 것은 포위망에 걸린 동물이나 인간의 행동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일 것이다.자신이 포위당했다는 것을 알아채는 순간 사냥감은 절망에 빠져 외로워지고,격노하거나 자포자기하여,생각할 능력을 상실한다.탈출의 희망을 잃은 사냥감은 운명 앞에 굴복한다.자신이 포위당했음을 인식하는 그 순간,죽어야만 하는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려는 일말의 저항심마저도 증발해버린다.오직 영웅만이 죽지 않는다.문제는 그런 영웅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빈민을 둘러싼 '그들'이 어찌할 수 없는 '무력'은 이런 것이다.'굶주림,소외,가정 폭력,비열함,질병,감옥,정부,총,타인의 시선,학대,인종대립,지적 폭력....'

'클레멘트 코스'는 이 '무력의 포위망'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탈출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인문학'이라는 무기를 꺼낸다.얼 쇼리스도 그리고 이 책을 읽는 이들도 과연 이것이 가능할까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다.'당장 먹고 살기도 힘든 사람에게 인문학이라니? ''못배운 가난한 사람들이 플라톤을 이해할까?' <희망의 인문학>은 이러한 편견이 어떻게 깨어지는지 천천히 보여준다.'인문학'은 가난한 이들에게 '정치적 삶'과 '성찰적 삶'을 깨우치게 한다.즉 사회와 역사로 부터 배제된 자신들을 그 다시 복원시키는 것이다.이 복원작업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은 자기 존중감과 자기통제를 얻게 되고 이것은 '무력'과 대치 되는 그들의 '힘'이 된다.우리 속담에도 있는 '아는 것이 힘이다'를 유비하면 여기서 아는 것은 '인문학'이고 '힘'은 '정치적 삶으로의 깨어나게 하는 힘'인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파올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를 떠올렸다. <페다고지>의 원제목은 '억압받은 자들을 위한 교육학'이다.<희망의 인문학>이 추구하는 바가 바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억압의 총체로서 '가난한 사람'들 아닌가? 그렇다면 <페다고지>의 자유주의적 접근이 <희망의 인문학>이 될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해 봤다.물론 역사적 맥락에는 차이가 있다.프레이리식 접근에는 인간해방적인 사고와 전복적인 가치가 담겨있다.얼 쇼리스는 이에 비해 자유주의적인 시각이다.좌파적 시각으로 보자면 인문학을 통한 '부르주아 사회로의 동화'가 한계라는 지적도 가능하다.그렇지만 얼 쇼리스의 인문학 교육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단순한 '사회적응'에만 있지 않기때문에 이 관계를 적대적 관계로 묘사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얼 쇼리스가 '클레멘크 코스'를 확산해가는 과정에 안티오크 대학의 데이비드 엘 트립과의 의견차이는 대표적인 예이며 여러 시사점을 주기도 한다.트립은 '인문학을 가르치는 행위가 잘못된 통합 탓에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형성해 놓은 종잡을 수 없는 공동사회에 빈민들을 편입토록 하여 권력의 위계질서를 새롭게 정립하는 것으로 오인될수 있다;고 주장했다.그는 '맥락화'를 '인문학 코스'에 개입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첫째 우리는 인문학을 그것이 발생하게 된 특정한 사회적,경제적,정치적 맥락 안에 놓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또한 그러한 담론의 긍정적,부정적 기능에 대해서도 동등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인문학이 항상 누구의 이익을 위해 이용됐는지 새롭게 의문을 제기해야 합니다.제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지역사회 인문학 교육이 담아야할 두번째 과제는 학생들이 저항의식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데이비드 엘 트립

얼 쇼리스는 안티오크의 지역사회 인문학 교육이 클레멘트 코스와는 상반된 지점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이는 한세기 전 유행했던 푸코의 사상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교육적 관점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그렇지만 얼 쇼리스는 안티오크의 인문학 코스를 포용한다.결국 빈곤,교육,민주주의에 대해 동일한 윤리적 관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금세기 말에 전개되고 있는 신자유의적 숙명론, 즉 다수의 삶을 희생시키면서 소수가 대부분의 이득을 취하는 시장 윤리에 대해 결단코 반대해야만 한다. 이것은 바꿔 말해서 경쟁할 수 없는 자는 죽는다는 윤리다. 그것은 잘못된 윤리이며, 사실상 윤리가 부재한 윤리다. 나는 계속 인간으로서 살아갈 것을 주장한다...파올로 프레이리

이제 선택은 시장이 주도하는 문화를 선택할 것인지 인문학을 선택할 것인지의 문제이기때문이다...사실 우리는 눈송이들 만큼이나 차이가 나면서도 눈 자체 만큼이나 흡사하다..얼쇼리스

<희망의 인문학>을 읽으면 당연히 '한국의 인문학위기론'이 떠오른다.이 문제는 여기저기서 많이 이갸기 되어서 더할말이 없다.대신 '소비하기 위한 인문학'과  '변화시키는 인문학'에 대해서는 몇 가지 생각이 든다.나는 인문학의 본령은 후자에 있다고 믿는다.우리사회가 '인문학'자체에 별 관심이 없는 사회이기는 하다.그렇지만 그 '인문학'도 나름대로 층을 이루고 찾는 이들이 있다.내가 '소비하기 위한 인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대개 '상징자본'을 획득하기 위한 쟁투에 지나지 않는다.생계문제로부터 조금 여유로와진 중산층이나 경제적 자본만으로 호기가 차지 않는 상류층들은 '인문학'을 택한다.여기서 말하는 인문학은 <희망의 인문학>커리큘럼에도 등장하는 철학이나 예술같은 것들이다.그들은 나름대로 독서를 통해 일정 수준을 얻는다.또한 예술작품의 감상이나 심미안등도 키울 수 있다......그런데 무언가 늘 빠져 있는게 있다는 느낌이 든다.무엇일까? 거기에는  '인문학'의 정수가 빠져 있다.그저 '인문적 지식'만 채우고 가득한 것 뿐이다.그것은 '인문학'의 부활과도 상관없고 '인문학'을 하고 있는 것과도 상관없다.그것은 그저 '인문적 지식'만을 소비할 뿐이고 '누적된 인문적 지식'을 가지고 아마추어 인문학도 흉내를 내고 있는 것 뿐이다.그렇다면 그 정수라는 것은 무엇인가? <희망의 인문학>에서 말하고자 한 모든 바가 '인문학의 정수'이다.이념의 좌우와 상관없이 <희망의 인문학>은 '변화시키는 인문학'으로서 본질에 충실하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일포스티노>야 말로 <희망의 인문학>을 영상화한 최고의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시와 글쓰기도 클레멘트 코스 과목이다) 거기서 네루다는 소크라테스였다.그가 피신한 그 섬은 자체가 시이다.우체부 마리오도 원래 시인이다.단지 네루다를 알기 전에,시를 알기전에 그것들이 단지 돌덩이 바위섬이자 평범한 우체부였을 뿐이다.네루다는 여자꼬시기를 목적으로 하는 마리오에게 시의 은유에 대해 설명한다.예쁜 여자 꼬시기에 성공한 마리오는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이제 자기를 표현하는 법을 알게된 것이다.그는 평범한 우체부에서 정치적 삶과 성찰적 삶을 사는 시인이 되었다.

마리오가 네루다를 위해 섬의 소리를 담는 장면을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다.인문학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깨우친 마리오는 섬의 소리들과 함께 시인으로 완성되었다.인문학의 힘...강당에 있지 않으며 화려한 영상,음향설비가 갖추어진 시청각실에 있지 않다.

추천)바람구두님의 극찬으로 읽게 되었다.좋은 추천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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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 2007-08-12 15:17   좋아요 0 | URL
바람구두님 추천에 먼저 읽은 친구 극찬에,
드팀전님의 리뷰까지...순서를 당겨 읽겠습니다

드팀전 2007-08-12 18:00   좋아요 0 | URL
제게 약간 힘이 되는 책이었어요..^^
그 이야기는 다음에..기회가 닿으면

바람결 2007-08-12 17:39   좋아요 0 | URL
아..저도 구입해놓고 여태 읽지 못한 책인데, 리뷰를 읽고 나니 얼른 들어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 <일포스티노>와 연결도 전혀 새롭네요. 원작은 스카르메타의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란 책이죠? 지난해 아주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드팀전 2007-08-12 18:02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영화는 저도 참 좋아했습니다.그리고 OST도 신선했습니다.유명가수나 예를 들면 스팅같은...유명 영화배우들이 네루다의 시를 낭송하지요.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라는 책 봤지요.^^ 영화속에서 묘사되지 못햇던 성적인 메타포들이 얼굴 화끈하지만 재미있었다는...^^

라로 2007-08-13 03:36   좋아요 0 | URL
추천 안할 수 없네요..
'일포스티노'와 '희망의 인문학'과의 연결,,,
필연적이란 느낌마저 들잖아욧~.^^;;;

드팀전 2007-08-13 09:18   좋아요 0 | URL
^^ 일 포스티노 재미 있었잖아요...요즘 애들은 그 영화를 잘 모르니 안타깝네.

turnleft 2007-08-13 06:57   좋아요 0 | URL
저도 읽으려도 대기 중입니다. 리뷰 잘 읽었습니다 ^^

드팀전 2007-08-13 09:19   좋아요 0 | URL
좌회전 대기중이신가요.깜빡 깜빡...신호 났습니다.좌회전은 짧으니 빨리 끊어셔야 뒤차가 나가겠네요.^^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