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데일리] 평생 아내와 아이들을 그리워하며, 예술가로서의 입지를 갈구하며, 그리움과 병든 몸에 초라하게 죽어간 이중섭. 한국의 대표화가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현재에도 모조품 논란 등의 구설수에 올라 50주년을 맞이한 2006년에는 그를 기리는 소박한 행사마저 조심스러웠을 정도로 여전히 그의 인생은 쓸쓸하다.
이중섭, 그는 보고 싶지만 보지 못하는 아내 앞에서 사랑을 그리워하는 남자였고, 두 아들이 장난꾸러기가 되어가는 것을 눈으로 지켜보지 못하고 엽서와 편지로만 안부를 묻는 아버지였다. 그의 이런 현실적인 모습이 <이중섭 1916~1956 편지와 그림들>(다빈치. 2003)에 여실히 드러나 있다.
보고 싶은 가족을 위해 그림을 포기해 버리겠다는 선언도 서슴지 않고, 자신을 알아봐주지 않는 대중에 대한 일갈도 서슴지 않는 한 인간으로서의 이중섭은 너무도 인간적이고 너무도 평범하기에 오히려 인정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의미 없는 일이지만 젊은 날의 강렬한 한 장의 그림을 남기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거나 최고의 자리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하는 예술가들과 비교해도 굶주림과 병마, 그리고 가족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으로 쓸쓸히 죽어간 그의 모습은 비참하고 처량하다. 아니, 자신의 손으로 그림을 죽이고 삶의 의지를 놓아버렸으니 그의 죽음 역시 처절한 자살에 가깝다.
그의 편지와 그림들은 대부분 자신과 가족에 대한 지키지 못한 약속이다. 그가 꿈꾸는 가족의 품에서, 그를 인정해주는 대중들 품에서 배부르게 예술을 하며 대작을 그리고 말겠다는 그의 지켜지지 않은, 지키지 못한 약속들인 것이다.
이중섭의 편지와 그림들이 이중섭 본인의 사사로움을 담고 있다면 <아름다운 사람, 이중섭>(문학과지성사. 2000)에서는 그의 그림을 바라보는 통사적인 시각을 다루고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바라보는 이중섭은 요절한 천재, 정신이상 행위 등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 때문에 이중섭의 그림과 우리 사이에는 미묘한 거리가 있다. 그 거리가 종종 이중섭과 그의 그림에 천재적이라는 수식어로 평가를 높여주는 반면, 그와 그의 그림을 바로 볼 기회를 잃게 한다.
그는 못 다 핀 천재, 기이한 행동을 일삼던 광인이기 이전에 한없이 우리와 가까웠던 대한민국의 아버지, 아들, 그리고 친구였다. 그것이 바로 작가 전인권이 이 책을 통해 이중섭을 바라보고자 하는 시각이다. 우리네 화가 중 이중섭만큼 분석이 지나친 작가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분석은 대부분 그의 범상치 않은 정신세계와 그 시각에 따라 조명된 작품에 집중한다. 어떤 경우에는 그의 작품이 가족의 테두리 안에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유의 발로라고 폄하되기도 한다.
이 두 갈래의 이중섭을 바라보는 시각은 상이하지만 닮은 구석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중섭을 기이한 천재의 테두리 안에 가둬두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평론이라는 것, 특히나 작가의 변을 더 이상 덧붙일 수 없는 작품의 평가는 다분히 평론가가 작가를 어떤 틀에서 바라보느냐에 달려있다. 때문에 극단적으로 치닫는 작가의 평가는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전인권이 말하는 이중섭 역시 어떤 면에서는 극단적인 시각의 틀에 짜 맞춰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중섭이란 화가를 대중성을 가진 존재로 부각시키는 노력은 그리 흔치 않은 고무적인 일이다.
작가가 이 책을 통해 주목하고 있는 이중섭 그림의 특징은 ‘대중성’이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대중성’이라는 단어가 주는 식상함이나 흔함의 거부감을 생각하자면 이중섭의 작품에 이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와 우리와의 거리가 얼마나 가까웠는지를 표현하기에는 대중적이라는 말이 그의 작품을 대변할 수 있다. ‘아름다운 사람, 이중섭’의 작가가 이중섭을 우리와 가까운 대중적 작가로 부각시키는 요점은 다음과 같다.
먼저, 그가 평생을 통해 그려온 너무나 유명한 소그림을 예로 들어보자. 그가 고집스럽게 소그림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분열되는 자아도 개인적인 상실감도 아닌 우리네의 아들로서의 이중섭이고 그의 울타리였던 어머니였고 가족이었다. 또한 그가 표현하는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비단 그만의 가족이 아닌 전체적인 공동체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그가 집착했고, 평생을 통해 그렸던 소그림은 해체와 수렴을 거듭하며 공동체를 향해 다가서는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두 번째로, 작가가 소그림 이상으로(개인적으로 나 또한) 주목하고 있는 군동화를 통해 그의 그림을 살펴보자. 이 군동화 역시 소그림만큼이나 많은 평론가들의 도마 위에 오르내리곤 한다. 군동화를 통한 이중섭의 정신세계에 대한 프로이트적 분석과 그의 성적인 불안감을 파고들기도 하면서 말이다.
이 책의 작가 역시 그런 분석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최대한 그림 외적인 논쟁을 자제하면서 이중섭과 대중의 거리를 줄이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런 노력의 산물은 그의 그림에서 발견한 큰 원에 있다. 이중섭이 그린 것은 결국 그것이 고집스러운 소그림이었든, 장난스러운 아이 이중섭을 담은 군동화, 또는 절절한 사랑과 욕망을 담은 에로티시즘이었던 우리네 공동체를 큰 원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 큰 원은 그렇게 우리를 담고 이중섭 본인을 담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중섭의 작품이 자신과 가족의 테두리에만 국한된 좁은 세계관의 갇힌 그림이라는 평가를 짚어보자.
그의 그림이 그런 평가를 받는 원인은 그의 작품만큼이나 유명한 엽서그림이 가족을 위한 사사로운 그림이었고, 은지화 같이 어디에서 그린 그림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고,(그림의 크기로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 우습지만 종종 그 크기와 대작의 평가가 비례하는 경우가 많다) 이중섭 자신이 자신의 그림을 대작을 그리기 전의 미흡한 작품으로 평가한 사실 등 여러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 이중섭이 자신의 그림을 언제나 부족한, 그렇기 때문에 언젠가는 대작을 그리겠다는 욕망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만 보면 그의 그림이 한계에 빠져 좁은 세계에 갇혀있다는 평가가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작가의 대작을 향한 간절한 염원일 뿐 그의 작품을 폄하하는 합당한 이유는 되지 못한다.
이상의 작가 전인권이 집어내고 있는 이중섭이 아름다운 이유 중 몇가지이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분석적인 원인이 아니다. 그 어떤 것보다 우리가 이중섭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의 그림이 보는 이의 가슴을 찢고 지나가는 강렬한 선과 소처럼 눈을 껌뻑이며 멍하게 바라보게 하는 색채로 대중과 이중섭, 그리고 우리 모두의 가족이 하나로 엮인 커다란 원을 무의식 속에 심어준다는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그림을 보는 자신의 시선에 타인의 시선을 겹치는 일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기에 좋아하는 작가의 그림에 대한 평론가의 거창한 분석에 상당한 거부감을 갖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작가에 대해 알고 싶어지면 질수록 그와 관련된 서적에 빠지게 된다. 또한, 화랑을 찾아 쉽게 볼 수 없는 작품이라면 도판을 통해 그림을 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관련된 책을 더 가까이 할 수밖에 없다.
이중섭의 경우도 그렇다. 어린 시절 과자상자에 더불어 온 그의 그림이 담긴 엽서 한 장으로 그를 마음에 품게 된 이후로 조금 더 그를 알고자 하는 욕망도 커져갔다. 하지만 그 욕망을 채워가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황소그림의 엽서를, 현대미술관에서 본 닭그림(부부였던 것 같다)을 처음 보고 느낌 순수한 감동이 흐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중섭의 인간적인 감정이 고스란히 담긴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을 읽고 나서는 너무도 인간적인 그의 모습에 배신감이 들기도 했고, ‘아름다운 사람, 이중섭’을 읽는 동안에는 대중과 이중섭의 거리를 좁히려는 작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생각에 지배를 받는다는 의심에 도리어 작가와의 거리 두기에 몰두하기도 했다. 어쩌면 나 역시 나만의 틀에 이중섭을 가둬두고, 그 틀을 벗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너무도 인간적인 편지에 나타난 이중섭과 전인권이라는 평론가가 보고 있는 공동체 안의 이중섭의 모습, 이 두 가지 모두 그가 가진 얼굴일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익히 알고 있듯, 자연스럽게 그의 작품에 눈을 빼앗기는 것이다. 눈을 빼앗기고 마음을 빼앗기고 나면, 그림과 화가에 대한 관념이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뻗치는 순간이 오게 되고, 그 때가 되면 그 생각을 잡으려고 하지 않고 방치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드러낸 전라의 이중섭과 광기어린 천재가 아닌 우리의 공동체 속의 이중섭을 품고 있는 그가 평생을 그린 커다란 원이 있기 때문이다.
[이광준 시민기자 yakwang79@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