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금 대학로의 마로니에 공원내에 있는 아르코 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차이나게이트 전시의 스텝을 하고있어요! 뭐 스텝이라고 해봤자 일용직 아르바이트지만.... 꽤나 흥미롭고 재미있답니다.

입장권이 2천원 밖에 안되서 초대권을 드리기는 뭐하구요.....

언제든 오시면 무료 입장시켜 드릴테니 시간날때 대학로에 놀러오세요!!  1월 31일까지니까 오시기전에 여기 글 밑에 댓글에 언제 몇명이서 갈께요! 라는 글 남겨주세요!!

날씨 추운데 모두 건강 조심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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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1-17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알리미하겠습니다. 재미있으시겠어요^^

이쁜하루 2007-01-18 0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 많은 분들이 보러 오셨으면 좋겠네요... ^^

2007-02-23 14: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쁜하루 2007-02-23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해요! 전시는 끝났지만 다음 전시하면 그때 초대할테니 시간되면 놀러오세요!!
반갑구요 비밀소녀님도 새해 복많이 받으세용!!
 
남쪽으로 튀어! 2 오늘의 일본문학 4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06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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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에는 많이 헤맸다. 어떤 내용을 다루는지 전혀 알지 못한채 집어든 책이기에 그저 공중그네식의 가벼운 유머가 한가득 들어있는 책이려니 하고 보았는데 이건 웬걸... 혁명당이니, 과격파니, 국가는 필요없다 등등...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 다르게 전개되는 통에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다. 지로에게 촛점을 맞추어 읽어가자니 그것또한 맘에 썩 들지는 않았다. 그래도 오쿠다 특유의 글빨이 있어서 인지 책을 내려놓지는 못하게 하는 매력만은 가득했다. 그리하여 단숨에 2권까지 후다다다닥~~ 읽어재꼈는데 2권에 들어서니 노자 생각이 너무 선명하게 나기 시작했다.

小國寡民 使有什佰之器 而不用 使民重死 而不遠徙
소국과민 사유십백지기 이불용 사민중사 이불원사
雖有舟輿 無所乘之 雖有甲兵 無所陳之
수유주여 무소승지 수유갑병 무소진지
使民復結繩而用之 甘其食 美其服 安其居 樂其俗
사민부결승이용지 감기식 미기복 안기거 낙기속
隣國相望 鷄犬之聲相聞 民至老死 不相往來
인국상망 계견지성상문 민지노사 불상왕내

나라는 작고 백성은 적다. 많은 기계가 있지만 사용하지 않으며
백성들로 하여금 생명을 소중히 여기게 하고 멀리 옮겨다니지 않도록 한다
배와 수레가 있지만 그것을 탈 일이 없고
무기가 있지만 그것을 벌여놓을 필요가 없다
백성들은 결승문자를 사용하던 문명이전의 소박한 생활을 영위하며
그 음식을 달게 여기고, 그 의복을 아름답게 여기며, 거처를 편안하게 여기며 풍속을 즐거워한다.
이웃나라가 서로 바라볼 정도이고 닭 울음소리와 개짖는 소리가 서로 들릴 정도로 가까워도
백성들은 늙어 죽을때까지 내왕하지 않는다.

자급자족을 하며 경쟁하지 않으며 서로 돕는 단순한 삶의 모양새가 마치 노자가 말했던 이상국가와 비슷하게 느껴졌고 철학콘써트에서 비유했던 [동막골]에 그 생각이 멈추었다. 아버지가 꿈꾸던 삶은 바로 동막골의 삶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동막골에서 리수화[정재영]가 촌장에게 어떻게 하면 이렇게 주민들을 잘 다스릴 수 있냐며 영도의 비결을 묻자 촌장은 "뭐이를 많이 먹여야 해" 라고 대답한다. 이 말에 부응이라도 하듯 남쪽으로 튀어의 지로를 비롯한 모든 등장인물들은 참으로 잘 먹는다. 컨디션에 난조가 보일때는 세그릇 그렇지 않을때는 네그릇의 밥을 먹는다. 이리오모테섬에서도 그들은 서로 먹을 것을 가져다 주느라 정신이 없다. 먹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없어진 지로나 모모코 모두들 생활에 조금씩 만족을 한다. 동막골이니 노자의 이상국가니 어쩌면 내가 너무 앞서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책을 다 덮고 난 후 얼른 노자와 관련된 책들을 꺼내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은 주체할수가 없었다.

초반에 내가 헤맨 이유는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공산주의니 혁명이나 아나키스트니 이런 이야기를 하는거야! 라는 것과 사람들은 대체 이 책을 뭐가 그리 재미있다고 그 난리들인거지! 하는 생각들 때문이었다. 너무 선전에 혹~ 하신것들 아니야? 아님 공중그네의 여파인가? 뭐 등등..여러가지 생각들이 한꺼번에 들었다. 그러나 책이 점점 말미로 갈수록 또 이 작가가 공중그네 이전에 썼던 책들에 관한 이야기를 읽는 순간 이 작가의 정치적 이상은 언제나 한가지였구나! 라는 결론이 들면서 대박 터지는 웃음이 아닌 블랙유머쯤의 씁쓸한 웃음이 퍼지기 시작했다.

1권을 읽었을 즈음에는 이 책을 읽고 싶다는 친구에게 이 책이 무슨 내용인지나 알고 그런 마음을 갖는거냐며! 그저 혹~ 해서 읽으려거든 읽지마라! 식으로 별것 아닌 책으로 치부했는데 2권을 마친 지금은 꼭 그친구에게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고 나도 아버지처럼 (어째 아버지 이름이 이리 기억이 안나누...^^;;) 내 안에 나만의 이상국가 아니 이상낙원을 꿈꾸며 실천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 뱃 속에는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벌레가 있어서 그게 날뛰기 시작하면 비위짱이 틀어져서 내가 나가 아니게 돼. 한마디로 바보야, 바보 라고 고백한 아버지의 말이 내 심장을 후벼파고 나에게 뭔가를 충동질하게 만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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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울지 않아
야마모토 후미오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06년 12월
평점 :
품절


책 내용이 어떻든간에...책 내용의 평가에 앞서..난 일본 소설을 살때마다 솔직히 돈이 아깝다고 생각한다. 다른 책들은 아무리 열심히 읽어도(짬짬히 읽어야 하기에...) 최소 이틀은 걸린다. 다음 이야기가 기대가 되고 빨리 빨리 읽고 싶지만 꽉 채워진 내용들로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기가 참 오래 걸린다. 그런데 최근 나오는 일본 소설들은 줄간격도 넓고 자간도 넓고 테두리 여백도 넓고... 솔직히 이 책을 다른 소설책 만들듯 만들면 200p는 말도 안된다. 50p면 끝날것 같다. 그래서 1-2시간안에 다 읽어버릴 수 밖에 없는 일본 소설은 솔직이 돈이 아깝다.... 그러므로 양장본으로 빳빳하게 만들며 페이지수만 늘려 9000원이라는 돈을 받지 마시고 제발 알차게 꽉!~~ 찬 책을 만들어 가격을 조금 다운 시켜주셨으면 하는 바이다. (지금껏 최근 너무 날로 먹는듯한 느낌을 주는 이 책을 비롯한 일본 소설들에 대한 개인적인 소견이였습니다)

내 나이 서른 둘... (어느새 이렇게 먹었나...) 변변한 직장도 없이 일용직으로 미술관에서 지킴이를 하고 있다. 이걸 직업이라고 하기엔 너무 누추하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고 하기에도 웬지 꺼림직하다. 얼마전까지는 입시 학원에서 아이들을 두들겨 패며 과학이라는 과목을 이해 과목이 아닌 암기 과목으로 만드는데 일조를 하며 지냈었다. 그런 생활이 싫어서 뛰쳐나와 방황하다가 자리를 잡고 흥미를 갖기 시작한 것이 미술이고 그것에 인연이 닿아 지금 이곳 미술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일을 하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한다. 이쪽 공부를 더해서 일용직이 아닌 전문직 직장인이 되볼까..라든가, 지금 하고 있는 공부를 마치고 다른 과에 편입해서 다른 공부를 더 해볼까 라든가... 아직도 나는 방황중이고 뭘 해야할지 고민중이다.

여기 나오는 열 여섯명의 여성들을 보니 고민도 많아 보이고 불안해보이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뭔가 놓치지 않는 그무언가를 하나씩은 붙들고 있는 것 같다. 그 무엇 하나 때문에 그들이 절대 울지 않을 수 있는 것 같다. 내게 그 하나는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해봐야겠다. 그래서 나도 절대 울지 않고 내가 하고자 하는일이 다른 사람들 눈에 정말 별것 아닌일로 보이더라도 밀고 나갈 힘을 길러야겠다.

야마모토 후미오의 책은 처음 접해본다. 문체가 정말 간결하다. 어렵지도 않고. 그래서 나도 모르게 이런 글은 나도 쓰겠다....라는 말도 안되는 시건방진 생각을 하게되었다. 그래서 그녀의 다른 책을 읽어보기로했다. 절대 울지 않아 샀을때 함께 준 플라나리아. 그 책에는 어떤 이야기와 어떤 색깔들이 숨어 있을까.. 살짝 기대가 된다. 그리고 비록 책 값은 비싸더라도 계속해서 야마모토 후미오의 책을 사 읽는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을 사볼때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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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마스테
박범신 지음 / 한겨레출판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나마스테를 만난건 내게 우연이였다. 그리고 지금은 그걸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학교 도서관에서 찾고자 하는 책이 있어 뒤적 거리다가 어렵게 구한 후 나오려는데 반납함에 이 책이 보였다. 얼마전 친구의 결혼식에서 주례선생님으로 서있던 이 작가분을 보고 참으로 호기롭고 유머러스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이분의 책을 몇권 사기는 했지만 아직 읽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 책만큼은 나마스테가 주는 따뜻한 어감 때문인지 잘 읽을수 있을것 같았다. 작가 자체에 대한 기대감과 제목이 주는 따뜻함 만으로 책을 집어들고 학교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나는 지금 미술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관람객이 없을때면 한쪽 구석에 앉아 책을 읽곤 하는데 자꾸 흐름이 끊어져서 읽기가 쉽지가 않았다. 그런데 나마스테를 처음 펼친 날은 손님이 왕창 몰렸다가 확~~ 빠져나간 후 여백의 시간이 많이 남았다. 난 한줄 한줄 책을 읽어내려갔다. 처음에는 세상이 화~~ 안해요..라는 말을 남긴 저 청년이 대체 누구일까...라는 호기심으로 책을 읽어 나갔고 점점 읽어 나갈수록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치부했었던 외국인 노동자 에 대한 관심으로 생각이 옮겨졌다.

솔직히 그랬다. 술집에서 외국인 노동자라도 만날라 치면 저 돈모아서 잘살 생각은 안하고... 뭐 이딴식으로 생각하길 잘했다. 괜히 슬슬 피하기도 하고... 그런데 재작년 보았던 인권위원회에서 만든 만화영화 별별이야기 자전거 편을 보면서 많이 반성하고 깨닫게 되었고 그 후 사회문제에 대해서 관심의 폭을 넓히기로 하였다. 켤고 나와 상관없는 일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며... 그러나 그저 내생활에 떠밀려 살다보면 또 한구석으로 그들에 대한 생각을 밀어버리고 만다. 다시 이책을 읽으며 반성하게 되었고 내 나라가 부끄럽게 여겨지고 분통이 터지고 눈물이 났다.   

그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물론 사랑이야기이다. 그 사랑의 범위가 작은 것이 아니라 인류애처럼 넓디 넓게 퍼진 사랑이여서 그렇지... 오랜 시간 [락슈미 여신] 이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여신까지는 안되더라도 내 초등학교 시절 꿈은 자선사업가였다. 나처럼 가난하고 하고 싶은것, 먹고 싶은것 못 하고 못 먹는 친구들 위해서 살고 싶다며... 그런 꿈을 꾸곤 하였는데 지금 내 삶은 내 입에 넣기 바쁘고 내 살 찌우기 바쁘다. 참 이기적인 사람으로 변했다.

나마스테... 처음 마주친 그 단어는 따뜻함이였는데 지금의 나마스테는 평화로움이다. 나만 평화롭다고 평화로울수 없다는 걸 안다. 세상에 대한 관심을 조금은 넓히면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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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씩하니 2007-01-12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주아주 감동적으로 읽었지요..
멀리서 출퇴근할 때인데..이 책 읽고 나서,,,갑자기 길가에 지나는 외국인노동자들을 보면 태워주고 싶은 생각이 생겨서,,,혼났어요..ㅎㅎㅎ

프레이야 2007-01-12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마스테, 란 인삿말에서 말 그대로 평화가 느껴져요..

이쁜하루 2007-01-16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마음을 열기란 참 쉽고도 어려운것 같아요...나마스테...따뜻한 인삿말정도는 나누며 살고 싶네요... ^^
 

[북데일리] 평생 아내와 아이들을 그리워하며, 예술가로서의 입지를 갈구하며, 그리움과 병든 몸에 초라하게 죽어간 이중섭. 한국의 대표화가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현재에도 모조품 논란 등의 구설수에 올라 50주년을 맞이한 2006년에는 그를 기리는 소박한 행사마저 조심스러웠을 정도로 여전히 그의 인생은 쓸쓸하다.

이중섭, 그는 보고 싶지만 보지 못하는 아내 앞에서 사랑을 그리워하는 남자였고, 두 아들이 장난꾸러기가 되어가는 것을 눈으로 지켜보지 못하고 엽서와 편지로만 안부를 묻는 아버지였다. 그의 이런 현실적인 모습이 <이중섭 1916~1956 편지와 그림들>(다빈치. 2003)에 여실히 드러나 있다.

보고 싶은 가족을 위해 그림을 포기해 버리겠다는 선언도 서슴지 않고, 자신을 알아봐주지 않는 대중에 대한 일갈도 서슴지 않는 한 인간으로서의 이중섭은 너무도 인간적이고 너무도 평범하기에 오히려 인정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의미 없는 일이지만 젊은 날의 강렬한 한 장의 그림을 남기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거나 최고의 자리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하는 예술가들과 비교해도 굶주림과 병마, 그리고 가족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으로 쓸쓸히 죽어간 그의 모습은 비참하고 처량하다. 아니, 자신의 손으로 그림을 죽이고 삶의 의지를 놓아버렸으니 그의 죽음 역시 처절한 자살에 가깝다.

그의 편지와 그림들은 대부분 자신과 가족에 대한 지키지 못한 약속이다. 그가 꿈꾸는 가족의 품에서, 그를 인정해주는 대중들 품에서 배부르게 예술을 하며 대작을 그리고 말겠다는 그의 지켜지지 않은, 지키지 못한 약속들인 것이다.

이중섭의 편지와 그림들이 이중섭 본인의 사사로움을 담고 있다면 <아름다운 사람, 이중섭>(문학과지성사. 2000)에서는 그의 그림을 바라보는 통사적인 시각을 다루고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바라보는 이중섭은 요절한 천재, 정신이상 행위 등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 때문에 이중섭의 그림과 우리 사이에는 미묘한 거리가 있다. 그 거리가 종종 이중섭과 그의 그림에 천재적이라는 수식어로 평가를 높여주는 반면, 그와 그의 그림을 바로 볼 기회를 잃게 한다.

그는 못 다 핀 천재, 기이한 행동을 일삼던 광인이기 이전에 한없이 우리와 가까웠던 대한민국의 아버지, 아들, 그리고 친구였다. 그것이 바로 작가 전인권이 이 책을 통해 이중섭을 바라보고자 하는 시각이다. 우리네 화가 중 이중섭만큼 분석이 지나친 작가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분석은 대부분 그의 범상치 않은 정신세계와 그 시각에 따라 조명된 작품에 집중한다. 어떤 경우에는 그의 작품이 가족의 테두리 안에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유의 발로라고 폄하되기도 한다.

이 두 갈래의 이중섭을 바라보는 시각은 상이하지만 닮은 구석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중섭을 기이한 천재의 테두리 안에 가둬두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평론이라는 것, 특히나 작가의 변을 더 이상 덧붙일 수 없는 작품의 평가는 다분히 평론가가 작가를 어떤 틀에서 바라보느냐에 달려있다. 때문에 극단적으로 치닫는 작가의 평가는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전인권이 말하는 이중섭 역시 어떤 면에서는 극단적인 시각의 틀에 짜 맞춰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중섭이란 화가를 대중성을 가진 존재로 부각시키는 노력은 그리 흔치 않은 고무적인 일이다.

작가가 이 책을 통해 주목하고 있는 이중섭 그림의 특징은 ‘대중성’이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대중성’이라는 단어가 주는 식상함이나 흔함의 거부감을 생각하자면 이중섭의 작품에 이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와 우리와의 거리가 얼마나 가까웠는지를 표현하기에는 대중적이라는 말이 그의 작품을 대변할 수 있다. ‘아름다운 사람, 이중섭’의 작가가 이중섭을 우리와 가까운 대중적 작가로 부각시키는 요점은 다음과 같다.

먼저, 그가 평생을 통해 그려온 너무나 유명한 소그림을 예로 들어보자. 그가 고집스럽게 소그림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분열되는 자아도 개인적인 상실감도 아닌 우리네의 아들로서의 이중섭이고 그의 울타리였던 어머니였고 가족이었다. 또한 그가 표현하는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비단 그만의 가족이 아닌 전체적인 공동체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그가 집착했고, 평생을 통해 그렸던 소그림은 해체와 수렴을 거듭하며 공동체를 향해 다가서는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두 번째로, 작가가 소그림 이상으로(개인적으로 나 또한) 주목하고 있는 군동화를 통해 그의 그림을 살펴보자. 이 군동화 역시 소그림만큼이나 많은 평론가들의 도마 위에 오르내리곤 한다. 군동화를 통한 이중섭의 정신세계에 대한 프로이트적 분석과 그의 성적인 불안감을 파고들기도 하면서 말이다.

이 책의 작가 역시 그런 분석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최대한 그림 외적인 논쟁을 자제하면서 이중섭과 대중의 거리를 줄이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런 노력의 산물은 그의 그림에서 발견한 큰 원에 있다. 이중섭이 그린 것은 결국 그것이 고집스러운 소그림이었든, 장난스러운 아이 이중섭을 담은 군동화, 또는 절절한 사랑과 욕망을 담은 에로티시즘이었던 우리네 공동체를 큰 원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 큰 원은 그렇게 우리를 담고 이중섭 본인을 담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중섭의 작품이 자신과 가족의 테두리에만 국한된 좁은 세계관의 갇힌 그림이라는 평가를 짚어보자.

그의 그림이 그런 평가를 받는 원인은 그의 작품만큼이나 유명한 엽서그림이 가족을 위한 사사로운 그림이었고, 은지화 같이 어디에서 그린 그림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고,(그림의 크기로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 우습지만 종종 그 크기와 대작의 평가가 비례하는 경우가 많다) 이중섭 자신이 자신의 그림을 대작을 그리기 전의 미흡한 작품으로 평가한 사실 등 여러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 이중섭이 자신의 그림을 언제나 부족한, 그렇기 때문에 언젠가는 대작을 그리겠다는 욕망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만 보면 그의 그림이 한계에 빠져 좁은 세계에 갇혀있다는 평가가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작가의 대작을 향한 간절한 염원일 뿐 그의 작품을 폄하하는 합당한 이유는 되지 못한다.

이상의 작가 전인권이 집어내고 있는 이중섭이 아름다운 이유 중 몇가지이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분석적인 원인이 아니다. 그 어떤 것보다 우리가 이중섭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의 그림이 보는 이의 가슴을 찢고 지나가는 강렬한 선과 소처럼 눈을 껌뻑이며 멍하게 바라보게 하는 색채로 대중과 이중섭, 그리고 우리 모두의 가족이 하나로 엮인 커다란 원을 무의식 속에 심어준다는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그림을 보는 자신의 시선에 타인의 시선을 겹치는 일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기에 좋아하는 작가의 그림에 대한 평론가의 거창한 분석에 상당한 거부감을 갖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작가에 대해 알고 싶어지면 질수록 그와 관련된 서적에 빠지게 된다. 또한, 화랑을 찾아 쉽게 볼 수 없는 작품이라면 도판을 통해 그림을 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관련된 책을 더 가까이 할 수밖에 없다.

이중섭의 경우도 그렇다. 어린 시절 과자상자에 더불어 온 그의 그림이 담긴 엽서 한 장으로 그를 마음에 품게 된 이후로 조금 더 그를 알고자 하는 욕망도 커져갔다. 하지만 그 욕망을 채워가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황소그림의 엽서를, 현대미술관에서 본 닭그림(부부였던 것 같다)을 처음 보고 느낌 순수한 감동이 흐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중섭의 인간적인 감정이 고스란히 담긴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을 읽고 나서는 너무도 인간적인 그의 모습에 배신감이 들기도 했고, ‘아름다운 사람, 이중섭’을 읽는 동안에는 대중과 이중섭의 거리를 좁히려는 작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생각에 지배를 받는다는 의심에 도리어 작가와의 거리 두기에 몰두하기도 했다. 어쩌면 나 역시 나만의 틀에 이중섭을 가둬두고, 그 틀을 벗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너무도 인간적인 편지에 나타난 이중섭과 전인권이라는 평론가가 보고 있는 공동체 안의 이중섭의 모습, 이 두 가지 모두 그가 가진 얼굴일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익히 알고 있듯, 자연스럽게 그의 작품에 눈을 빼앗기는 것이다. 눈을 빼앗기고 마음을 빼앗기고 나면, 그림과 화가에 대한 관념이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뻗치는 순간이 오게 되고, 그 때가 되면 그 생각을 잡으려고 하지 않고 방치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드러낸 전라의 이중섭과 광기어린 천재가 아닌 우리의 공동체 속의 이중섭을 품고 있는 그가 평생을 그린 커다란 원이 있기 때문이다.

[이광준 시민기자 yakwang7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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