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권보드래 지음 / 돌베개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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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에 관한 책이다. 저자는 국문학과 교수다. 흠, 뭔가 이상하다. 역사학자 또는 사회과학자도 아닌 인문학자가 3.1 운동을 다룬 책을 쓰다니. 3.1 운동을 문학사적으로 조망하려는 책인가 싶은데 책소개나 서평을 읽어보면 그렇지도 않다.

 

누구나 3.1 운동을 알지만 정작 3.1 운동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무엇이 떠오르는가, 민족 대표 33인, 유관순 열사, 전 국민의 만세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태어나는 계기가 되었음을 아는 사람은 역사에 비교적 지식이 있는 경우다. 하지만 정작 3.1 운동 자체에 대해서는 머릿속에 확 다가오지 않는다. 태극기와 만세운동, 비폭력 저항운동이라는 추상적 이미지뿐.

 

저자가 3.1 운동 백 주년에 맞추어 이 책을 쓴 까닭은 분명하다. 역사 속의 한 장면, 박제된 이미지가 된 3.1 운동을 학술적 차원이 아니라 인간적 온기를 품고 자세히 알아보고 드러내 보이고자 하는 것임을. 3.1 운동이 단지 지나간 역사적 한 사건에 그치지 않고 우리 근현대 역사와 문화에 깊은 족적을 남기고 이른바 판을 뒤흔들어 놓은 세기적 사건이었음을. 나아가 오늘날 우리는 3.1 운동의 지대한 영향 아래 살고 있으면서도 정작 3.1 운동의 본질과 계승에는 여전히 소극적임을 저자는 말하고자 한다.

 

주석, 출전 및 찾아보기를 제외하고도 560면에 이르는 두툼한 책의 내용을 쉽사리 이해하기는 어렵다. 저자는 1부에서 3.1 운동의 전체적 맥락을, 2부에서는 시대적 흐름을, 3부는 실제 인물과 운동 각론을, 4부는 문학적 연계를 고찰한다. 역사와 대중적으로 유명한 민족 대표 33인과 유관순 열사는 거의 다루지 않는데, 민족 대표의 의미와 비중이 절대적으로 낮다는 점과 유관순으로 전형화된 인물 이면에 가려진 민초들의 생생한 모습을 보여주려는 의도다.

 

3월 1일의 밤을 기술하는 저자의 필치는 세심하며 건조한 객관성에 함몰되지 않는다. 온기를 품은 채 흥분을 배제하면서 최대한 온화하고 담담하게 3.1 운동의 현장과 인물을 그려나간다. 그것은 후대에 비판적 평가 대상이 되는 인물과 사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연유로 역사와 인문을 결합한 한 편의 문학작품을 읽은 것과 같은 깊은 여운을 갖게 됨은 전적으로 저자의 역량이라고 하겠다.

 

3.1 운동은 세계사적 맥락에서는 타당하지만, 국내만으로 제한하여 보면 매우 뜬금없고 갑작스러운 출현이었다. 강제 병합 이후 독립투쟁은 국지적 활동을 제외하면 사실상 휴면 상태로 접어들었고, 민족적 역량을 결집할 만한 구심체도 존재하지 않았다. 민족 대표 33인은 독립선언만 하면 그것으로 할 일을 마쳤다고 생각하는 정도였고, 대중적 인식도 독립을 위한 만세인지, 독립에 기뻐한 만세인지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기본적으로 3.1 운동은 태화관 및 탑골공원에서의 작은 해프닝으로 끝나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전국으로 계층을 불문하고 확산되어 갔다.

 

독립의 선언이 곧 독립의 현실을 구성한다는 믿음이야말로 3.1 운동의 비밀이다. ‘와야 할 현실’을 ‘도래한 현실’로 변형시킴으로써, 그러한 정언명령을 표현하고 전달하고 감염시킴으로써, 3.1 운동의 대중은 그 스스로 새로운 현실의 일부가 되었다. (P.52, 1부)

 

강화도 은세공업자 유봉진 사례는 이러한 자발적 주체를 예시한다. 저자는 3.1 운동의 거시적 의의만 천착하지 않고 보다 구체적이고 세밀한 재료에도 관심을 보이는데, 다종다기한 선언서의 변형과, 운동에서 태극기의 출현 시기와 그것의 실질적 의미, ‘만세’ 구호가 갖는 비일상적 상징성 등이 그러하다. 또 민초들에게 독립은 추상적 전망이 아닌 토지, 종교 및 기타 현세적 소망과도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음을, 그것은 일제 식민 통치가 그들에게서 빼앗아갔고 통제함으로써 당대 체제에서는 획득하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재화였음도 빠뜨리지 않는다.

 

세계사적으로 볼 때 3.1 운동은 사회진화론이 표방한 제국주의 정당화 이데올로기를 정면으로 반박함으로써 향후 인류 보편주의가 지배적 이념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이다. 약육강식이 불변의 보편적 원리라고 인정될 때 조선이 일본에 병합되는 사건은 대세 원리에 부합하므로 비난할 명분이 없다. 민족자결주의를 이해했든 곡해했든, 3.1 운동 선언서가 표방하는 인류 보편의 평화와 행복 추구권은 이후 사회진화론을 극복하는 이념적 토대가 되었다.

 

‘세계’와 ‘인류’의 보편주의가 학생과 지식인 사이에서의 동향을 벗어나 일반적인 기류가 된 것은 3.1 운동 이후다. 거꾸로 말하자면 인류 보편주의의 성장에 힘입어 3.1 운동의 이념은 비로소 형성될 수 있었다. (P.211, 2부)

 

정신적 차원뿐만 아니라 물리적 기준에서도 3.1 운동의 영향은 지대하다. 3.1 운동의 영향으로 임시정부가 탄생하였으며, 비폭력 평화주의의 한계를 실감한 이후 무장 독립투쟁으로 노선의 큰 방향 전환이 생겼다. 3.1 운동이 외형상 실패하였음은 자명하다. 다만 이것을 독립 쟁취 여부로써만 판단하는 것은 단견이며, 향후 독립운동의 시발점 역할을 하였고 민중 인식을 근대화시켰다는 점을 유념하면 절반의 성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3.1 운동 직후 무력투쟁이 극렬해졌다는 사실은 3.1 운동기, 특히 초기의 비폭력주의가 결코 불가피한 전략이 아니었음을 알려준다. 3.1 운동의 비폭력은 체계적이거나 수미일관하지는 않았을지언정 의식적인 선택이었다. (P.332, 3부)

 

3.1 운동의 장소라고 하면 태화관과 탑골공원, 그리고 아우내장터가 우선 연상된다. 저자는 운동이 전국적이고 거국적이었음을 보여주기 위해 각 지역 사례를 예시한다. 통일된 중심 조직이 없는 만큼 운동의 양상은 지역별로 제각기 달랐고 전개 과정도 상이하였다. 대체로 비폭력 평화운동이었지만 평남 성천처럼 유혈 충돌이 빚어진 사례도 발생하였다. 장터 같은 번화가, 산꼭대기는 물론 다수의 군중집회, 한두 명의 격문과 태극기와 같이 규모도 천차만별이었다. 지방은 유림, 농민, 천도교도, 도시는 학생과 노동자가 만세를 불렀으며, 신분으로는 양반과 평민, 기생 같은 하층민을 포함하여 진주에서는 백정 아낙들도 참여하였다고 한다. 저자도 언급했듯이 수년 뒤 백정해방운동인 형평사 운동이 진주에서 일어난 게 전혀 의외는 아니다.

 

아산보통학교 교사 박경순, 서울 기생 정금죽, 개성 교회전도사 어윤희 사례는 평범한 여성들이 3.1 운동 참여를 통해 정치, 사상적으로 얼마큼 변화하고 발전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경우라고 하겠다.

 

국문학자인 저자로서는 3.1 운동이 문화계, 특히 문학에 끼친 영향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의 4부는 일제강점기 개괄적 국문학사라고 해도 무방하다. 헤이그 밀사 이위종과 몽골 어의 이태준, 김필순 일가, 홍명희의 방랑 등 3.1 운동 이전에 식민 지배에 좌절하여 탈출을 모색하던 청년층은 운동을 통해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 또는 대한인으로서 정체성을 분명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강용흘과 이미륵의 망명 문학은 3.1 운동 후 해외에서 고유성을 기억하고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무단통치 시기 강력하게 억눌렀던 국문학이 급격하게 발전하기 시작한 계기는 일제의 문화통치 덕분이다. 3.1 운동으로 놀란 일제가 지배 방침을 변경하여 제한적이나마 우리말 교육과 출판을 허용하였기 때문이다. 역으로 말한다면 3.1 운동이 없었다면 일본의 통치 기조는 변함이 없었을 것이고 우리말은 끝내 말살되고 민족의식조차 미구에 소멸되었을 것이란 뜻이다.

 

3.1 운동 과정에서 민중은 일제의 유혈 진압과 핍박, 고문 등의 참상을 겪었다. 이로 인한 트라우마를 부정하지 못한다. 게다가 외형상 운동의 실패는 실망과 좌절, 패배 의식을 고취시켰다. 여기서 절망의 나락에 빠질 것인가, 어두운 현실을 명철하게 진단하고 분석함으로써 개선과 발전의 여지를 찾으려고 노력할 것인가, 현재 상태가 어둠의 밑바닥임을 깨닫고 희망의 빛을 확신할 것인가에 따라 문학적 입장은 달라진다. 저자는 김동인과 이광수, 심훈, 염상섭을 전형으로 제시한다. 운동 이전 동인지 문학에서 주도적 역량을 발휘하였던 김동인과 이광수는 오히려 3.1 운동 이후 타협의 길을 걷는다. 그들에게 3.1 운동은 민족의 독립 역량을 결집하고 표방한 긍정이 아니라 죽음 직전 마지막 비명으로 인식되었다.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 대표적이다.

 

염상섭의 시각마따나 3.1 운동은 종착점보다 출발점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볼 때 적극적 의의를 갖는다. 3.1 운동은 개인적.민족적 층위에서 공히 불회귀적 사건인 동시, 실패냐 성공이냐의 질문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종류의 사건이다. (P.543-544, 4부)

 

저자가 4부에 걸쳐 3.1 운동을 조사하고 분석하고 해석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3.1 운동의 중대한 의의에도 불구하고 단지 역사적 사실, 현재와는 무관한 과거의 사건으로 치부하는 시각을 일신하기 위함이다. 역사성의 거대 담론에만 치우쳐 간과하는, 우리네 민중 개개인의 삶과 행동과 선택이 그 속에 어떻게 녹아들어 있는지를 드러내고자 함이다.

 

3.1 운동을 그 세계사적 맥락으로 되돌리고 3.1 운동에서 토의된 정치.경제.문화적 쟁점들을 오늘에 되살려 보자는 것이다. 3.1 운동은 빛나는 경험이다. 그러나 그 빛은 천상의 순일성이 아니라 지상의 악전고투로 물들어 있다. (P.555, 나가는 글)

 

3.1 운동을 자세히 알고 싶은 호기심과, 국문학자가 3.1 운동을 어떻게 풀어냈을까의 궁금증이 이 책을 읽게 된 동력이었다. 3.1 운동을 다층 다면적으로 이해하고, 개별 인간 차원에서 3.1 운동의 현장을 접근하고 싶다면 읽은 보람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책이라고 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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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V 빌런 고태경 - 2020 한경신춘문예 당선작
정대건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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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류>로 역주행 각광 받는 작가의 데뷔작이다. 표제만 보고 어떤 유형의 작품인지 알기 어려웠다. 영어가 등장하고, ‘빌런’이라는 어휘가 사용되었으니 일종의 SF 소설일 거라고 지레짐작하였다. 막상 소설을 읽기 시작하니 완전히 잘못 짚었다.

 

작가는 영화 연출을 전공하였고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연출한 이력도 지니고 있다. 자신의 영화 현장 경험이 이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고 하면 지나칠까. 이 소설은 일반 독자가 알지 못하였던 영화 제작과 연출의 생생한 이면이 담겨 있다.

 

GV 빌런은 결코 좋은 의미는 아니다. 성공한 감독과 배우라면 웃어넘길 수 있겠으나 화자처럼 무명의, 실패하고 영화인이라면 전혀 다르다. 그들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처럼 예리하게 가슴 속에 파고든다. 화자가 GV 빌런 다큐멘터리에 착안한 계기도 분명 그에 대한 복수심을 무시할 수 없다.

 

어렵사리 빌런의 동의를 구하고 다큐멘터리 촬영을 시작하는 나. 이후 소설의 축은 나와 빌런 고태경의 촬영이 축을 이루는 가운데, 나와 종현의 남녀 관계, 나와 승호의 우정 관계가 주변을 장식한다. 처음에는 단지 빌런으로만 생각했던 고태경의 여러 행동이 영화인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이의 실현을 위한 끊임없는 준비와 공부 과정임을 알게 되면서 서사는 크게 방향을 전환한다.

 

“나 아직 영화인이오.”

고태경이 서늘한 목소리로 내 말을 잘랐다. (P.58)

 

관객은 영화 자체를 중시한다. 영화를 만든 감독과 배우, 그리고 제작진처럼 스크린 뒤의 세계는 잘 알지 못할뿐더러 관심도 약하다. 중요한 건 결과로써의 작품이다. 과정에 연출자의 어떤 고충과 한계가 자리 잡고 있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단지 성공한 영화와 영화인, 그렇지 않으면 실패한 영화와 실패자로 낙인찍힌 영화인. 현재의 고태경과 화자 조혜나도 엄밀히 말하면 이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풍자처럼 촬영을 시작하였지만, 인간 고태경을 알아가면서 화자는 점차 그를 지지하고 응원하게 된다. 그렇다고 그와 같은 처지가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는 게 사실이다.

 

두 사람의 다큐멘터리 촬영이 별 볼 일 없는 결과로 이어진다면 그들은 계속 그 상태에 머물게 될 것이다. 그렇더라도 화자 조혜나 감독은 독립영화지만 어쨌든 영화를 찍었지만 고태경은 불운의 중첩으로 한편도 찍지 못하였다. 그런 그에게 영화 촬영은 우리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게 된다.

 

“완성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야. 모든 완성된 영화는 기적이야.” (P.138)

 

여기서 작가는 이들을 양지로 끌어낸다. 망한 작품으로 평가받던 이전 연출작이 뜬금없이 해외 영화제에 초청받고 특별상을 받는다. 우여곡절 끝에 상영한 다큐멘터리는 세간의 화제를 모으며 성공적인 평가를 받는다. GV 빌런으로 비난의 대상이었던 고태경은 졸지에 유명 인사가 되어 관객들의 주목과 응원을 받게 된다. 무엇보다 고태경의 그녀가 뜻밖의 인물이었던 거 하며.

 

소설의 끝 장면에 이르러서도 그들의 처지는 크게 바뀌지 않는다. 화자 조혜나 감독은 여전히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다만 보다 확실한 삶의 목표는 생겼다. 친구 승호 역시 영화판을 떠났지만 자신의 꿈에 매달린다. 고태경은 이제 빌런 짓을 그만두었을까, 아니다. 그는 자신의 영화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놓지 않았기에 여전히 영화관을 들락거린다.

 

작가는 과장된 인위적 수사를 최대한 자제하고 담담하게 소설을 전개한다. 굳이 큰 웃음, 사건, 극적 효과를 노리지 않아도 서사 자체의 자연스러운 힘으로 소설은 꽤나 가독성 있다. 은근하고 잔잔하지만 계속 책을 들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독자는 누구나 고태경과 조혜나, 승호를 응원하게 될 수밖에 없다. 화자와 헤어졌지만 종현을 우리가 미워할 수 있을까. 작중에서 비교적 악인 역할로 나오는 조병훈 교수 또한 영화에 대해서는 진심이지 않았는가. 박원호 교수와는 결이 다르지만.

 

자기가 좋아한 것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너무 많았다. 우리가 추구하던 꿈과 기대하던 삶이 전부 무너진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P.168)

 

이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가 참으로 영화에 대한 애정이 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화자가 생활에 쩔쩔매면서도 영화를 놓지 못하는 것은 작가 자신의 소망이 투영된 것이 아니겠는가. 현재는 소설가로 활동하지만 언제라도 기회만 되면 영화인으로 복귀하겠다는. 고태경이 시나리오를 무수히 쓰고 고치고를 반복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칫 진부하고 순진한 교훈을 반복하는 유형으로 전락할 수 있는 작품의 구성이다. 독자가 고태경과 채화영의 만남에 긴장과 스릴을 느끼는 심정은 동일하다. GV 빌런이었던 고태경이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으로서 무대에 서서 관객들에게 들려주는 발언 또한 상식적이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영화에의 끈을 놓지 않는 화자가 서서히 영화계에 자리 잡을 전망을 보여준다는 설정도 그렇지 않은가. 이 여러 요소가 소설의 재미와 멋을 흠집 내지 않는 이유는 작가가 보여주는 성실한 애정일 것이다.

 

화해와 성장. GV 빌런 고태경은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으로서 자신의 삶과 세상과 화해하게 되었다. 화자 조혜나 감독은 다큐멘터리의 연출자로서 영화와 인생을 대하는 태도에서 한층 성장하였다. 단단하게 자신의 길을 나아가는 승호도 계속적인 성장을 기대하게 된다. 중간에 비록 실패와 좌절을 겪겠지만 포기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에. 이런 요소들이 우리가 이 소설을 다 읽고 났을 때 갖게 되는 흐뭇한 정서의 기반이 아니겠는가. 나도 그 집 단팥죽을 한 그릇 먹고 싶다.

 

나는 앞으로도 실수하고 후회하고 반복하겠지만, 적어도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미워하지는 않을 거다.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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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명 : 페리지 홀 기획 초청 연주회 - 앙상블 드 로즈마리 : 'The Treasure Box'

일시 : 2026년 8월 3일(월) 19:30

장소 : 페리지 홀

연주 : 앙상블 드 로즈마리

       - 권요안 (피아노)

       - 박지영 (바이올린)

       - 임재성 (첼로)

프로그램

  - 드뷔시, 피아노 트리오 G장조

  - 포레, 피아노 트리오 D단조 Op.120

  - 라벨, 피아노 트리오 A단조


* 세줄평

페리지 홀 첫 방문이다. 기획도 좋다. 인상주의 세 대가가 남긴 유일한 트리오. 연주도 좋다. 세 곡 모두 친숙한 곡은 아니다. 젊은 드뷔시의 열정과 나이 든 포레의 강렬한 사색이 불꽃을 튀긴다. 라벨의 곡은 보다 현대적이다. 3악장에서 그의 비명이 들리는 듯하다. 피아노 트리오가 이렇게나 맹렬한 조합이었던가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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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세계명작 완월회맹연
정창권 지음 / 월인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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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완월회맹연>이라고 하는 조선시대 대하소설의 존재를 알게 된 적이 있다. 무슨 내용인지 알고 읽고 싶었으나 현대어본이 없어 아쉽게 생각하고 훗날로 미루어 두었다.

 

장장 180권 180책의 대하소설인 만큼 모 출판사에서 간행 중인 완역본이 완성된다면 18권에 이르게 될 것이다. 아무래도 일반 독자가 다가가기에는 부담스러운 분량인 건 사실이다. 이 책은 <완월회맹연>을 독자에게 소개하기 위하여 한 권으로 압축하였다.

 

허허, 완월대에 올라 달빛이나 구경할까 했더니 뜻밖에도 자녀들의 정혼이라.... (P.17)

 

<완월회맹연>의 표제는 완월대 연회에서 맺은 약속의 의미를 지닌다. 정씨 집안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소설은 완월대에서 정씨와 장씨, 이씨 친우가 서로 자식을 결혼시키기로 맹세한다.

 

정씨 집안의 적장자 정잠은 대를 잇기 위해 아우 정삼의 장남인 조카 인성을 양자로 들인다. 후처 교완은 자신의 소생인 아들 인중이 인성에게 밀리자 분개하여 어떤 수단으로든 인성을 제거하려고 한다. 교완과 시녀, 하인들이 처음에 시작하였지만 나중에는 인중도 적극적으로 나선다. 전처소생과 계모 간 갈등은 고전소설의 단골 소재이지만, 근본적으로 집안의 후계 구도와 맞물려 있기에 계모는 더욱 치열하게 노릴 수밖에 없음도 또한 당대의 현실이다. 처음에는 인성을 목표로 하는데, 인성이 자염과 혼인하고 아이를 낳게 되자 아이마저 제거하는 것으로 목표를 확대한다.

 

“인성이 정부의 계후가 되어 인중으로 하여금 무용지물이 되게 했도다. 내 반드시 인성을 없애고 인중으로서 계후가 되게 하고 말리라!” (P.66, 교완)

 

인중을 제외한 나머지 형제 남매 간의 우애는 돈독하다. 심지어 인중의 아우 인웅마저 어머니와 형의 그릇된 행동에 반대하고 바로잡으려고 애쓸 정도다. 이 소설에서 인성은 거의 성인군자에 가깝다. 충과 효에 지극하고, 탁월한 풍모에 반한 뭇 미인의 구애에도 한눈팔지 않는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안타까운 여성인 만초란과 석순영의 슬픔과, 해릉공주의 비극은 인성과 무관하지 않다.

 

정씨 집안이 모범적인 인덕의 표본이라면, 정잠의 친우인 장헌은 범인 또는 소인배의 전형이다. 출세를 위해 권력자에게 빌붙고 정혼을 약속한 딸을 왕족의 첩으로 기꺼이 내주려고 할 정도다. 예비 사위인 인광이 어려운 처지에 놓인 상황에서 짐짓 외면하고 여색을 탐하여 월염을 첩으로 취하려고 시도한다. 변장한 인광에게 두드려 맞고 나중에는 계단에서 실족하여 해괴망측한 행동으로 체면을 구기고 사위를 난처하게 만든다. 부인 박씨 또한 남편 못지않아 혼인 후 정씨 집안을 향해 온갖 욕설과 창피한 행동을 서슴지 않을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인광이 부인 성완을 아낄 리 없다. 마지못해 혼인하였지만, 처가의 실덕에 질린 인광은 부인을 박대하고 내쫓으려고 하며 심지어 자결을 요구할 정도다. 이 소설에서 가장 안쓰럽고 딱한 대목이 바로 흠잡을 데 없이 고결한 성완이 친정과 남편 사이에서 어찌할 방안을 몰라서 고통받는 장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도 인광이 너무한 건 사실이다.

 

장헌의 아들 세린과 부인 여씨의 관계 역시 봉건시대의 풍습이 낳은 안타까운 사례다. 자식의 의사는 안중에 없고 오로지 종실과 인척 관계를 맺기만을 바라면서 추녀 여씨와 강제 결혼시키는 장헌의 선택은 비참한 결말로 이어졌을 따름이다. 세린과 여씨 중 누구를 탓하겠는가. 미인을 갈망하는 세린에게 어쨌든 결혼했으니 여씨에게 만족하라고 하겠는가. 여씨는 무슨 잘못으로 시집와서 이리 박대와 수모를 견디라고 하겠는가. 여씨의 언행이 거칠어진 건 결과적으로 잘못된 혼인에 귀인하게 된다. 부부는 등 돌리면 남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차라리 원수다. 대체로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이 소설에서 대표적인 새드 엔딩이다.

 

“소녀 장부와 더불어 무슨 원수를 지었길래, 이십 년도 못 살고 몸을 마치게 되었나이까? 죽으나 사나 장부와 원수가 되었으니 더 이상 이에 머물 바 없습니다. 빨리 소녀를 집으로 데려가 모친이나 보고 죽게 하소서.” (P.176, 여씨)

 

조선시대 대하소설은 가문 소설의 구성을 지닌다. 이 소설 역시 정씨 집안의 4대를 축으로 진행되는데, 90세 넘어까지 장수하는 태부인이 집안의 중심을 이룬다. 주요 사건이 큰며느리 교완의 시기와 질투, 음모. 그럼에도 교완을 친모처럼 극진히 섬기는 인성과 자염 부부. 친정과 남편 인광 사이에서 괴로움과 슬픔을 견뎌내는 성완. 이러한 구도로 소설은 진행되기에 작중인물이 다수 등장하지만 전체적 작품구도는 비교적 단순한 편이다.

 

우리네 고전소설의 특징인 중국을 배경으로 하여 위로는 몽골과 아래로는 안남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중국 전역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교완과 인중은 마침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개과천선하며, 장헌 또한 실덕을 깨닫고 친우와 가족에게 사죄하며 훈훈한 마무리를 한다.

 

<완월회맹연>의 저자는 18세기 초중반 이씨부인으로 추정하고 있다. 방대한 작품을 혼자 창작한 건 아니고 시작은 이씨부인이 하였지만 주변 사람들이 계속 뼈를 늘리고 살을 보태어 오늘날 이처럼 방대한 소설로 남게 된 것이다. <완월회맹연>, 그리고 유사한 장편 가문 소설의 존재는 우리네 현대문학에서 여성이 중심이 되는 대하소설로 면면히 이어져 왔다는 저자의 논평은 새로운 인식이다.

 

어쩌면 이 작품은 17세기부터 싹트기 시작한 가문의식을 집대성하여 완성시킨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이러한 가문의식과 여성 가장의 모습은 <토지>나 <미망>, <혼불> 같은 오늘날의 대하소설에까지 이어져 오는 등 우리 소설사에서도 큰 맥을 형성하고 있다. (P.193, 해제)

 

언제가 될지 솔직히 장담하기 어렵지만 <완월회맹연> 전권을 꼭 읽어보고 싶다. 아마 두 번은 읽지 못할 테니 단순한 버킷 리스트가 아니라 필생의 과업이라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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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진 지음 / e비즈북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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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수집가의 시대>보다 앞서 저술한 책이다. 이 책을 먼저 읽었더라면 굉장히 신선한 감흥을 얻었을 테지만, 이미 차기작을 읽었다면 그보다는 저자의 개념 정립이 출발한 지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차기작과 이 책의 차이라면, 소비자의 새로운 속성으로 인식된 개념이 MZ세대의 특성과 부합된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이 책의 요지를 명시한다. 소비자가 느끼는 불편, 불안, 낭비를 해결하면 성공적인 기업으로 올라설 수 있지만, 한 걸음 나아가 소비자에게 의미, 재미, 상징을 제공할 수 있다면 그 기업은 브랜드 자체가 하나의 아이콘이 되는 수준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 특정 제품과 서비스로 기업을 판단하지 않고, 브랜드 자체가 기업의 가치와 경쟁력을 대변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1부에서 저자는 근년 들어 변화하기 시작한 소비자의 심리를 분석한다. 사실 소비자의 욕구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 없다. 내가 지불한 비용의 대가로 동급 또는 그 이상의 편익을 제공받기를 희망한다. 과거에는 전체적 틀에서 욕구 충족을 판단하였다면, 점차 개인화, 개성화가 중시되는 근년에서는 개인별로 차별화된 욕구의 중요성이 크게 증가하였다. 남이 만족스러워한다고 해서 내가 무조건 추종하지는 않는다. 나아가 개인의 욕구 자체도 전일적이지 않고 분화하기 시작하여 각 지점, 단계마다 원하는 욕구의 유형이나 수준이 같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소비자의 심리를 파악하고 여기에 맞출 수 있어야 기업은 성공할 수 있다. 저자는 이를 ‘감시관’으로 요약한다.

 

이 시대 소비자들의 심리를 요약해 이를 붙이자면 ‘감시관(감정 낭비 싫어요.시간 낭비 싫어요.관심 낭비 싫어요)’이라 하겠다. (P.41)

 

이러한 심리적 불편은 획기적인 신기술이나 새로운 서비스의 제공으로 해결될 수 있지만, 기업이 소비자를 바라보는 태도와 관점만 바꿔도 크게 해소할 수 있다고 하며, 소비자들의 소비활동, 즉 고객 경험 여정을 세밀하게 분석함으로써 각 단계에서 불편 사항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성공적인 대안 제시로 급성장을 이룬 기업 사례를 제시한다. 아마존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국내 기업 중에서 당근마켓, 런드리고, 삼성과 LG의 냉장고 전쟁, 김갑생할머니김, 해외 사례로는 토니스 초코론리, 하인즈 케첩, 태양의서커스를 예시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감시관을 싫어하는 고객의 심리를 포착하고 적합한 불편, 불안, 낭비 해법을 제시하여 고객 경험을 부정적에서 긍정적으로 변화하도록 유도한다. 소비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뭔가가 긍정적 방향으로 달라졌음을 체감하는 순간 해당 기업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선택하게 된다. 기업으로서는 여기까지 올라서기도 용이하지 않기에 불불낭을 해결하는 기업은 성공적인 기업으로 자리매김한다.

 

소비자가 팬이 되는 브랜드에는 특징이 있다. 소비자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보다 소비자가 열망하게 만든다. 이런 브랜드는 소비자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수준을 넘어선다. 문제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P.111)

 

애플은 열렬한 추종자를 지닌다. 기술적, 가격적, 편의성 등에서 경쟁 제품에 취약점이 있더라도 고객은 이에 신경 쓰지 않는다. 영역은 다르지만 스타벅스, 테슬라도 유사하다. 고객은 애플, 스타벅스, 테슬라라는 브랜드 자체를 향유함에 자부심을 지닌다. 그들 브랜드는 더 이상 남의 것이 아니라 바로 고객 자신을 상징한다. 그들은 소비자에게 의미, 재미, 상징을 제공하여 고객이 브랜드를 내재화한 대표적인 사례다. 따라서 그들의 브랜드 로열티는 쉽사리 흔들리지 않는다. 어느 기업이라도 그렇게 되기를 열렬히 바라지만 쉽지 않다. 그것은 기업의 일방적 바람과 노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소비자가 그것을 경험하고 자신의 것으로 수용해야만 가능하다.

 

2부에서 소비자 마음을 얻기 위한 몇 가지 전략을 제시하는데, 이는 성공적 사례에서 역추적하여 추출한 요인이므로 이를 그대로 따라 했다고 해서 무조건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오레오와 블록버스터의 노스탤지어 마케팅은 장수 기업에서 관심 가질만한 전략이다. 포켓몬빵 열풍은 해당 게임에 대한 공통적인 향수를 지닌 세대를 겨냥하였다. 레트로는 과거 복제와 변용 사이의 절묘한 균형감이 중요할 것이다.

 

근년에 급성장한 스타트업으로서는 젠틀몬스터와 트레바리 사례를 다루는데, 젠틀몬스터는 현시점에서 이미 이 단계를 넘어섰다고 봐야 하리라. 나는 가보지 않았지만, 성수동의 사옥은 자체로서 구경거리라고 한다. 유료 독서클럽 트레바리 이름도 여러 차례 들었다. 서비스 특성상 대중적으로 폭발적 각인이 어려움에도 꾸준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고 한다. 양자의 경우 고객은 해당 기업과 서비스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지위를 부여해 주는 상징을 발견한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기업의 성장에는 기술적 요인이 중요하지만, 모든 기업이 기술 경쟁만 하는 건 불가능하다. 기술과 기술 사이의 간극에 잠복해 있는 페인 포인트의 해소, 기술 또는 서비스 경험의 새로운 차원 접근에서 고객이 갖는 만족스러운 구매 경험은 고객이 해당 기업과 브랜드에 무조건적 동질성을 촉진한다. 이러한 단계까지 이를 수 있다면 소비자의 마음을 얻는 브랜드는 영속성을 추구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브랜드에 몰이하고 결속된 소비자는 자신의 데이터를 더 많이 더 기꺼이 제공할 것이다. 데이터와 고객 경험, 브랜드 가치가 서로 연결되는 선순환이 이뤄지는 것이다. (P.247)

 

원체 경영학 분야에 과문하여 변화하는 소비자의 심리를 저자처럼 명쾌하게 파헤친 경우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 우연한 계기에 저자에 대해 알게 되어 그의 책 두 권을 연달아 읽었는데, 경영학도가 아니더라도 그리고 기업체 마케팅 담당자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저자가 계속해서 언급하고 분석하는 소비자의 특성은 특정 부류가 아니라 최근에 이슈가 되었던 MZ세대의 행동 특성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독자가 MZ세대라면 나의 선택과 행동 기저에는 이런 요인이 있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소위 기성세대라면 자신의 자녀와 후배들의 이해하기 어려운 심리와 행동 요인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상당히 흥미롭고 유익한 독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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