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선감의록 문학동네 한국고전문학전집 10
이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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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문학전집 010.

481면 중 289면에서 454면까지는 한문 원본의 교주본을 수록하였다. 원본에 관심이 크거나 한문에 조예가 깊은 일부를 제외한 대다수의 독자는 본문과 해설을 포함하면 실질적으로는 300면이 약간 넘는 분량이라고 받아들이면 된다. 여러모로 적절한 분량이다.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허구의 날줄과 씨줄을 교묘하게 짜올린 작품으로, 역사적 배경인 명나라 시기의 중국 전역에 대한 정확한 지리적 인식을 갖고 서사를 전개한 점이 놀랍다. 서두의 중국 지도와 비교하면 무척 흥미롭다.

 

고전소설의 구성 상 특징인 뛰어난 재주를 가진 주인공이 불우한 환경을 극복하고 갖은 시련을 헤친 끝에 마침내 성공하여 역사적으로 명성을 떨치는 전형적 라인을 따라가고 있다. 다만 여기서 주목할 점은 형제간의 불화와 갈등이다. 자기 자식보다 우월한 이복자식을 시기하여 계모가 구박하는 작품은 더러 있지만, 여기처럼 동생을 대놓고 학대하는 내용을 담은 고전소설은 언뜻 떠오르지 않는다.

 

물론 이 소설에서 형제간 불화의 전초는 화진에 대한 화욱의 편파적 애정 탓이기도 하다. 재주가 뛰어나 가문을 빛낼 동생에게 마음이 쏠릴 수 있겠지만, 형제간 우애, 집안의 장자에 대한 존중 등 가정 내 훈육 관점에서는 아버지의 처사가 올바르다고 하기 어렵다. 계모 심씨와 형 화춘의 마음속 쌓인 앙금이 결국 화진을 향해 분출되었고, 주인공과 윤옥화, 남채봉은 참으로 백척간두의 위기를 겪으며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주인공들에 대한 계모의 박해는 하도 극심하여 현실적으로 과연 가능할까 의구심이 들 정도다.

 

그렇다고 작중에서 계모와 화춘은 악인의 전형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양자 모두 생사의 위기에 직면하여 화진의 변치 않은 효성과 우애를 깨닫고 개과천선의 미덕을 발휘한다. 악인은 따로 있으니, 화춘의 첩 조월향과 친구 범한과 장평이다. 그들은 화춘의 어리석음을 이용하여 통정하고 재물을 훔쳐 달아난다. 여기서 화춘이라는 인물을 판단하는 관점이 달라진다. 화진에 대한 화춘의 태도는 주변의 재촉과 꼬드김에 마지못해 사태에 휩쓸리는 듯한 양태를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결과론적으로는 분명 악인적 요소가 있지만 귀가 얇고 사려분별이 미숙한 인물로 보는 게 오히려 합당하다. 작품해설에 따르면 다양한 판본이 존재하며, 이본에 따라 인물, 서술 및 세부묘사에서 무시 못 할 차이가 있다고 한다. 따라서 한 편의 판본만 보고 작품에 대한 섣부른 예단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

 

<창선감의록>의 이본들은 줄거리는 동일하지만, 서술방식이나 등장인물의 캐릭터, 갈등구도 면에서 미묘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를 통해 당대 독자들이 읽었던 <창선감의록>은 하나가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중략)......다양한 <창선감의록>의 모습은 오늘날의 독자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수많은 이본 중에서 어떤 텍스트를 선택하는가에 따라 작품의 주제는 다르게 파악되며, 작품에 대한 평가도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P.460)

 

소설의 주제는 표제에서 확연하다. ()과 의()가 그것이다. 단언하면 은 화진의 변치 않는 효성과 우애이며, ‘는 그의 굳건한 충성이다. 그렇다고 소설의 내용이 따분하고 획일적으로 흐르지는 않는다. 화진의 처남 윤여옥을 둘러싼 흥미로운 사건들이 반영되어 있고, 부정한 인물인 조월향과 범한 등은 오히려 소설에 사실미를 부여한다. 또한 청원 스님과 곽선공의 존재는 전형적 유가풍의 분위기에 불가와 도가적 색채를 불어넣어 작품을 다채롭게 꾸미는 데 일조한다.

 

개인적으로 화진의 무조건 순응의 태도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비길 데 없이 학식이 뛰어나고 재주가 많은 주인공이 계모와 이복형의 처분에 무력하게 목숨을 내맡기고 일체의 꿈틀거림도 비치지 않는 모습은 존경스럽다기보다는 무기력해 보일 따름이다.

 

작자는 그가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당위가 현실에서도 실현된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이 점이 바로 작자가 소설 <창선감의록>을 쓴 이유이다. <창선감의록>그래야만 하는당위가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허구적 공간이다. (P.467)

 

작품해설은 작가의 의도를 현실에 대한 당위로 받아들인다. 글쎄 그것이 당대의 추앙받는 가치관이라면 봉건사회가 무너지길 잘했다는 생각이다. 단지 허구적 극단화라면 이건 교각살우(矯角殺牛)에 가깝다. 어찌 되었든 작가의 의도는 궁금하다. 속으로 답답하기 그지없으면서도 열심히 책장을 넘기는 나의 모습은 막장드라마에 심취한 애호가와 다를 바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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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유럽, 발칸유럽을 읽는 키워드 - 개정판
김철민.김원회 지음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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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발칸유럽을 소개하는 입문서가 아니다. 발칸유럽 국가마다 하나의 키워드를 정하여 보다 세부적인 내용을 전달하고자 한 연구서다. 키워드는 저자가 나름대로 현시점에서 나라별로 주목할만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범위는 정치, 역사부터 경제, 산업 및 언어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11장 분량을 원칙으로 하는데, 어떤 연유인지 루마니아는 빠져있고 불가리아는 두 개의 장에 걸쳐있다. 키워드는 각 장의 부제로 제시되어 있고, 서론 앞에 한 페이지 분량의 내용 요약이 있어 요약만 일독하더라도 기본적 내용 이해가 가능하다. 여하튼 발칸유럽 기본서를 읽은 후 이 책을 펼친다면 꽤나 흥미로운 심층적 이해가 가능할 것으로 생각한다. 1장 슬로베니아부터 제7장 알바니아는 김철민교수가 집필했는데, 서론, 본문, 결론의 구성을 갖춘 전형적 논문 형식이다. 8장과 제9장은 불가리아로 김원회교수가 맡았다.

 

슬로베니아 편은 유로존 가입 이후 슬로베니아가 당면한 경제와 사회 현황을 기술하고 있다. 발칸유럽 국가들은 정치 안정과 경제 발전을 위해 EU와 유로존 가입을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정책이 긍정적인 면 못지않게 어려움에 맞닥뜨릴 수 있다는 점과 이때 어떻게 대응이 이루어질지를 통합 유럽 진입이 가장 빠른 슬로베니아를 통해 먼저 전망할 수 있을 것이다.

 

예능프로그램을 통해 인지도가 대폭 향상된 크로아티아의 관광산업을 짚어보는 대목도 흥미롭다. 크로아티아가 원래부터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관광 대국임을 미처 알지 못하였는데, 저자는 크로아티아의 다채로운 자연환경과, 로마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 풍부한 문화유산, 그리고 다양한 음식 및 축제 등을 언급하면서 풍부한 인프라를 바탕으로 한 환경친화적 관광산업 육성정책의 지속성”(P.71)을 강조한다.

 

불가리아 편은 특별한 현안보다도 그 특유의 언어와 민속을 소개하는 내용으로 다른 장들과 성격이 다소 다르다. 불가리아인들은 과연 자신의 언어에 자부심을 품을만하다. 끼릴과 메토디에서 비롯한 슬라브 문자-글라골리짜와 끼릴리짜 창제를 통해 고대 불가리아어가 표준이 되어 슬라브족 전체로 확산 전파되었으니. 이러한 불가리아어의 역사는 다소 전문적인 서술이지만 그 의의는 충분히 짐작할만하다. 아울러 출생, 결혼, 죽음의 일생의례를 통해 본 불가리아인들의 민속은 확실히 슬라브적이면서도 아시아적 속성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나머지 국가들의 장은 정치민족의 두 단어로 압축할 수 있다.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되면서 촉발된 민족과 종교의 가면을 쓴 정치분쟁으로 연방은 산산이 쪼개졌고 분열의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 않고 있다. 유럽 한복판에 커다란 무슬림 세력이 존재하게 된 연유와 그들이 오스만 터키의 퇴각 후 기독교 세력에 의해 포위되어 핍박받게 된 역사적 흐름, 그리고 알바니아가 독립과정에서 세르비아 남부와 마케도니아 서부의 무슬림 동족과 통합하지 못하면서 알바니아 민족주의의 불씨가 잔존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 여파가 코소보 전쟁과 마케도니아 내전으로 이어졌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편과 세르비아 편, 알바니아 편이 이를 다루고 있다.

 

한편 유고 내전과 보스니아 내전, 코소보 전쟁 등 20세기 말의 구 유고연방 내전은 모두 세르비아과 관련되어 있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세르비아니즘, 즉 세르비아의 팽창 지향적 민족주의도 간과할 수 없다. 최대의 전성기였던 14세기 두샨 왕 시절의 영토를 회복하고자 하는데 우리로 치면 현시점에서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영토 회복을 주장하고 나서는 것과 마찬가지이리라. 세르비아니즘이 존속하는 한 주변국과의 분쟁은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코소보가 세르비아인에게 있어 민족 성지라는 민족 정서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면, 몬테네그로 지역은 세르비아에게 있어 전략적, 경제적 중요성이 매우 높은 지역이라 할 수 있다. (P.172)

 

그럼에도 대세르비아의 관점에서 보자면 세르비아가 코소보를 포기 못 하고 몬테네그로에 연연하며, 마케도니아에도 끈을 놓지 못하는 연유도 다소간 이해할만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솔직히 몬테네그로와 마케도니아가 국가와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며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을 갖게 되었다. 저자의 전망처럼 양국의 내적 안정성은 발칸유럽 지역의 정세 변화에 따라 커다란 영향을 받게 될 수밖에 없는 역학구조를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다. 몬테네그로와 세르비아의 역사적 친연성, 몬테네그로의 독립 투표에서 찬성률이 과반을 겨우 넘겼다는 사실, 그리고 몬테네그로에 거주하는 무시 못 할 세르비아인의 숫자 등등. 마케도니아는 더욱 복잡하다.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스가 마케도니아에 대한 역사적, 문화적, 인종적, 언어적 동질성을 주장한다. 코소보와 서부 마케도니아의 알바니아인들에 대한 국제사회의 대응 방침은 주변국들의 이해관계를 요동치게 할 것이다. 민족과 영토의 일치를 허용할 것인가에 대한 사안은 스페인, 터키 등 EU 내 국가에도 관련된 중요한 사안이며, 하물며 유럽 내 뿌리 깊은 반무슬림 정서는 복잡성을 한층 가중한다.

 

발칸유럽에 대알바니아 국가를 수립하려는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의 의도에 대해 발칸의 여타 국가와 민족들이 세르비아의 주장에 공감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P.228)

 

발칸유럽은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로 불린다. 민족 간, 종교 간 상호 조화가 이루어지면 아름다운 예술작품으로 승화된다. 그것의 조화가 깨지면 세계의 화약고’-발칸유럽의 또 다른 별칭-로 전락하고 만다. 1차 세계대전이 여기서 발발하였으며, 20세기 말의 크고 작은 국제분쟁도 이곳이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더구나 이것은 현재진행형이다.

 

발칸유럽의 평화와 안정은 세르비아니즘과 알바니아 민족주의, 그리고 발칸유럽 각국의 영토적 민족주의가 균형을 이루고, 여기에 미국, 러시아 및 서방세계의 이해관계가 접점을 찾을 때 기대할 수 있을 텐데 정말로 쉽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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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계월전 문학동네 한국고전문학전집 19
조광국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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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문학전집 019.

조선시대 불세출의 여자 홍계월! 갇혀 있던 여성영웅서사에 생생한 숨결을 불어넣다’. 이렇게 책 뒤표지에 홍보문구가 적혀 있다. 봉건적인 조선 시대에 여성이 영웅으로 등장하는 소설이라니! 억눌린 여성의 체제 내 한계 극복을 위한 분투 성과를 담았을 것이라 지레짐작했다. 독후감은 한마디로 한풀이, 교각살우(矯角殺牛).

 

평국이 눈물을 흘리고, 남자가 되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겼다. (P.68)

계월은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분해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P.73)

 

평국은 봉건사회의 남성우위에 극도의 거부감을 지니고 있다. 남존여비로 지칭되는 조선 시대에 어찌 콤플렉스가 없겠는가마는 평국의 반응은 한결같이 매우 격렬하다. 또한 정도가 지나쳐 오히려 여성성을 낮추고 남성성을 높이는 부작용마저 드러낸다.

 

평국은 친구 겸 형제이자 남편이 된 보국을 무시한다. 개인적 능력 면에서 우월한 자신이 보국을 남편으로 높여 섬겨야 하는 게 마뜩잖은 것이다. 작품 내 지속적으로 보이는 평국의 보국 괴롭히기와 조롱하는 장면은 여기에서 비롯한다. 군대 최고 지휘관으로서 남편을 부하로 부리고 군례를 받으며, 전장에서 보국의 멱통을 잡아 천자 앞에서 욕보인다. 또한 남편의 애첩을 시기하여 교만하여 예법을 어겼다고 뜬금없이 군법을 적용하여 목을 베어버린다. 사정이 이러하니 보국이 평국, 즉 계월에 온전히 마음을 주지 못함은 당연할 것이다.

 

이후부터는 예로써 남편 보국을 섬기니, 보국은 한편으로 기뻐하고 한편으로 두려워했다. (P.90)

 

보국의 뛰어난 역량과 거칠 것 없는 용맹은 과연 영웅이라고 할만하다. 반면 포용력과 잔인함은 부정적 여성성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보국은 남편을 힘으로 꺾어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한다. 부모의 원수를 갚는 대목의 지나친 잔인성은 여태까지 평국의 긍정적 이미지마저 가려버린다.

 

작품해설은 둘째 아들의 성씨를 홍으로 하여 평국의 성을 따르게 한 점을 페미니즘 측면에서 강조하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 이는 과도한 의미부여다. 천자는 위국공을 초왕에, 여공을 오왕에 임명한다. 여공의 아들이자 위국공의 유일한 사위인 보국은 승상으로 천자를 보좌하여야 하므로 첫째 아들을 오왕의 태자로, 둘째 아들을 초왕의 태자로 보낸 것이다. 위국공이 홍씨이므로 태자의 성을 동성으로 변경한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일개 사인이라면 논란이 있을 수 있으나 왕실의 대통을 잇는 사안임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여성영웅이 등장하는 전통소설로 자체로서 의의가 있고 내용 자체는 제법 흥미진진하다. 작가의 글 쓴 의도를 존중하더라도 이 작품을 페미니즘의 긍정적 지향점으로 삼기에는 미흡하다는 생각이다. 한편 소설 자체는 그리 길다고 할 수 없다. 책의 후반부는 원본을 수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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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종교문화사
이보 안드리치 / 문화과학사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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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이보 안드리치가 역사가임을 알지 못하였다. 그의 고향이 보스니아이므로 그 지역의 역사를 연구하였음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하필 종교 문화를 다루었는지는 보스니아가 유럽 내 종교의 모자이크라는 별칭을 통해 이해할 만하다. 가톨릭, 정교, 그리고 이슬람교가 화합과 경쟁, 반목과 충돌을 반복하는 게 발칸 유럽, 특히 보스니아에 해당한다. 더구나 보스니아에는 보고밀교라는 기독교 분파가 한때 세력을 지녔다.

 

보고밀교 교인들은 스스로 보스니아 교회로 불리기를 즐겨하였다. 이 보고밀교는 독립 보스니아 시절의 정치, 종교 생활의 영역에서 가장 커다란 영향과 의의를 지녔던 보스니아의 세 가지 지배적인 종교 중의 하나였다. (P.28)

 

저자는 오스만 점령 이전의 보스니아에서 보고밀교의 역할을 중시한다. 보고밀교가 큰 세력을 형성하였기에 보스니아는 가톨릭과 정교 양 세계의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였다. 좋게 말하면 독자성을 유지할 수 있었고 반대로 표현하면 유럽의 주류 문화권에서 배제당한 셈이다. 그 후 이슬람에 점령당하면서 고립은 한층 심화되었다.

 

유럽인에게 있어 오스만의 수백 년간 발칸 유럽 지배는 수치이자 역사의 퇴보이다. 근현대 세계사의 지배자로 우월감을 지닌 그들로서는 당연할 것이다. 반면 여기에 참여하지 못한 보스니아 등 피점령지역들은 한층 애석함을 품는다. 그들에게 오스만의 제 방면이 긍정적으로 비칠 리는 없고, 부정적 편향으로 인식됨이 현저하다. 저자는 나름대로 온건한 표현을 사용하지만 기저에 흐르는 인식은 어쩔 수 없다. 이슬람교의 사회적 행정적 제도가 비무슬림 주민의 생활에 미친 영향은 한마디로 부정적이다. 자고로 지배국가가 피지배국가의 진정한 행복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사례는 전무하다. 게다가 종교와 문화가 이질적 세력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니 응당 이웃 기독교 세계와 단절이 생기고 고립되었다. 보고밀교에 이어 양 세계의 주변부로서 소외와 고립, 그것이 보스니아의 역사적 운명이 되고 말았다.

 

터키 지배하에서 카톨릭교회와 프란체스코 수도회 회원들의 공적이 서구와의 끊임없는 관계를 계속해서 유지시켜 준 것이라면, 세르비아 정교회는 민중들 속에서 그들의 생생한 힘을 보호 유지시켰으며, 새로운 시대까지 지적 생활과 민족 전통을 단절되지 않고 계승되도록 하였다는 데 그 공적과 의미가 있을 것이다. (P.150)

 

안드리치는 오스만 지배 아래 가톨릭과 정교가 자신들의 종교적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분투한 모습과 그 결과 보스니아 지적 전통을 보전할 수 있었음을 상세히 보여준다. 억압받는 가운데서도 양 종교는 괴멸되지 않은 채 종교적 전통을 지킬 수 있었고, 민중들과 함께 계속 숨 쉴 수 있었다.

 

저자는 이미 20세기 초에 종교 문화의 지성사 측면에서 오스만 지배 보스니아를 역사적으로 조망하고 있다. 20세기 말에 보스니아를 휩쓸었던 종교 분쟁을 목도한 우리로서는 저자의 선구적 혜안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 책의 미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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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의 역사
마크 마조워 지음, 이순호 옮김 / 을유문화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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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 유럽을 소개하는 강좌를 K-MOOC에서 수강하며, 발칸 유럽에 참으로 무지하다는 사실을 절감할 수 있었다. 유럽의 화약고,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 티토이즘, 독재자 차우셰스쿠, 참혹한 유고 내전과 코소보 사태. 이게 내가 아는 그 지역의 대략적인 전부다. 그네들의 개별 국가와 지역의 현황은 차치하고 발칸 유럽의 역사조차도 서구 중심의 역사 체계에서는 변두리에 불과하다.

 

이 책은 엄밀한 의미에서 독자가 통상 기대하는 사서류-시대적 흐름에 따른 왕조의 변천을 다루고 사회, 문화 설명이 뒤따르는-와 다르다. 미시사와 대비되는 발칸에 대한 거시사라고 할 만하지만, 발칸 유럽의 통사도 아니고 저자의 관심은 전적으로 근대로 맞추어져 있다. 발칸의 명칭에 대한 고찰에 이어 영토와 주민들을 소개하고, 본격적으로 쇠퇴하는 오스만제국 치하와 부상하는 서구 열강 사이에서 발칸지역 민족들의 근대 민족국가 건설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고찰한다. 즉 발칸 유럽의 근대를 개별 국가들의 국가 건설의 관점에서 조망하고 있다.

 

오스만제국 치하의 발칸 유럽은 서구의 정통적 관점에서 보면 매우 이질적인 현상이다. 유럽 세계의 안위를 위협하고 오랜 기간 상당한 지역을 지배한 막강한 제국이 인종, 종교와 문화가 상이한 생경한 동방 민족이라니. 근대와 현대의 독립 발칸 유럽 국가들이 독립투쟁과 그 성과를 지고의 가치로 높이고 오스만제국 지배 시절을 암흑기로 규정하며 제국 자체를 부정적으로만 기술하면서 역사 인식의 편향은 더욱 심화되었다.

 

하지만 가까운 1990년대에 벌어진 일련의 반인륜적 사건들-보스니아 내전, 코소보 사태 등-에서 이성이 무너지고 종교와 인종에 기반한 집단학살이 공공연히 자행되는 모습은 오스만제국 시절과 대비되어 참혹함이 두드러져 민족과 국가의 가치가 무엇인지 근원적 의문을 제기하게끔 한다.

 

저자의 발칸 유럽사는 깊이와 폭에 있어서 나의 얄팍한 역사 이해 수준을 뛰어넘기에 매 대목마다 감탄을 일으킬만한 신선한 자극을 제공한다. 발칸 유럽, 나아가 19세기와 20세기 초 유럽 정세를 이해하는데 정말로 큰 지적 자극이 되었음을 밝힌다. 학창 시절 제1차 세계대전을 제국주의 간 충돌이라고 배웠는데 왜 하필 사라예보에서 발발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독립투쟁 과정에서 벌어진 발칸 전쟁과 러-투전쟁, 그리고 양차 세계대전으로 발칸 유럽의 국경선은 종교와 민족이 분리되는 결과를 빚어냈고, 해당 국가들은 여전히 웅대했던 기억의 편린을 놓지 못하고 여기에 선동정치가 등장하여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킨 역사적 정황은 비단 과거뿐만 아니라 오늘날도 유효하다.

 

발칸 정치에서 사명감의 추진력이 된 것은 영토 확장에 대한 꿈이었다. 모든 나라는 강대국들에게서 분배받은, 다시 말해 자국 영토 외곽에 놓인 회복 안 된이웃사촌들의 땅이나 역사적 땅은 모두 자국 땅이라 고집했다. (P.165)

 

그들은 오스만제국의 압제에서 벗어나 스스로 독립국가를 형성할 독자적 역량을 보유하지 못하였다. 19세기 말에도 오스만제국은 쇠약했지만 여전히 왕성하여 서구 열강의 강력한 원조와 개입이 없었다면 발칸의 독립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저자는 단언한다. 그는 20세기의 혼란을 19세기와 연계하여 발칸 국가들의 국가 건설을 위한 어지럽고 기나긴 투쟁 과정으로 인식한다.

 

따라서 발칸 지역과 그들의 역사를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은 긍정적이다. 발칸 유럽에 비판적인 서구 일반의 시각-유럽에 있지만 유럽이 아닌-을 오히려 비판한다. 발전한 서구인에게 갓 독립하여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 발칸 유럽은 같은 유럽이라고 칭하기에 부끄러웠을 것이다. 같은 의미에서 20세기 후반 문명의 중심지에서 발생한 대규모 유혈사태 또한 곤혹스럽기 그지없었으리라. 다만 저자의 발칸 유럽 옹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인종 청소는 발칸에만 있는 특수 현상이 아니었다. 히틀러 전쟁이 치러지는 동안과, 전쟁이 끝난 바로 직후 중동부유럽의 많은 지역에서도 인종 청소는 일어났다......따라서 최근의 인종 청소와 같은 이 같은 만행의 뿌리는 발칸인들의 사고 체계에서 찾을 게 아니라, 현대 기술자원으로 치르는 내전에서 찾을 일이다. (P.239)

 

발칸 유럽의 폭력성을 변호하기 위한 발언이지만, 2차 세계대전 전후와 21세기를 목전에 둔 시대적 차이를 외면하고 양자를 동일시한다. 저자에 따르면 50년 동안 인류사회는 이성과 도덕의 가치 측면에서 한치의 발전도 없었던 셈이다. 저자의 발칸 유럽에 대한 애정을 엿볼 수 있지만 이것이 저작 전체의 신뢰성과 가치를 저하시키고 있어 한편 아쉽다.

 

독재정권의 몰락, EU 가입과 유로존 합류 등 오늘날 발칸 유럽도 정치, 사회적으로 안정을 찾고 평화와 발전의 내일을 전망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다만 세르비아와 코소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스릅스카공화국의 존재는 아직도 불씨가 상존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일진광풍이 불어닥치는 순간 불씨는 일순간 걷잡을 수 없는 불꽃으로 피어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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