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위에서 바라본 풍경
아더 밀러 지음, 이한섭 옮김 / 예니 / 198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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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작품의 서문 격인 제법 장문의 <사회극에 대하여>가 부록으로 권말에 수록되어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작가는 이 희곡을 사회극으로 규정한다. 이에 따르면 작가는 개인과 사회[폴리스]가 분리되지 않는 고대 그리스 연극을 이상으로 삼아서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을 연극이 주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새로운 연극은 희랍적이어야 할 것이며 이렇게 됨으로서 연극은 인간을 사회적 동물로 대하고 과거의 연극의 그 자잘구레한 편파성에 말려들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P.95)

 

작가는 일개 날품팔이 노동자인 에디에게 비극적 영웅의 면모를 부여한다. 본디 선하고 좋은 사람인 에디는 피할 수 없는 운명에 의해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고, 자신의 비극적 운명을 회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선다. 그러기에 독자는 에디 카본을 차마 비난할 수 없고 다만 그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맹목성을 안타까워할 뿐이다. 변호사 알피에리가 말미에 토로하듯이.

 

(알피에리) 에디가 얼마나 잘못했고 그의 죽음이 얼마나 무익한 것이었는지를 잘 알면서도 또한 그의 순수성을 추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적어도 자신에 관한 진실을 밝히고 죽어간 것입니다. (P.78)

 

작중에서 에디의 사고와 행동을 관통하는 두 가지 이슈가 있다. 먼저 애정과 욕망의 문제. 조카딸 캐더린을 향한 에디의 사랑을 아내와 알피에리는 근친상간적 욕망이라고 해석한다. 베아트리스는 특히 예민하게 인식한다. 하지만 캐더린의 장래와 결혼에 대해 에디가 유달리 까다롭게 구는 것을 성적 욕망의 투영이라고 해석하는 게 올바른지 모르겠다. 깊이 사랑하는 딸에 대한 아버지들의 집착에 가까운 사랑이 있는 게 사실이다. 만약 캐더린이 조카딸이 아닌 친딸이라고 할 때도 이런 해석이 유효한지 궁금하다.

 

다음으로 관습과 법률의 문제. 캐더린과 결혼하려는 로돌포의 의도를 의심하는 에디에게, 밀입국자를 밀고한 에디의 행위를 규탄하는 마르코에게 알피에리는 동일한 대답을 한다. 법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에디와 마르코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나름의 방안을 모색한다. 그것이 관습과 실정법에 위배된다고 할지라도

 

로돌포의 머리카락 색깔, 노래를 잘 부르고 풍부한 유머를 지닌 것, 그리고 힘들게 모은 돈을 홀라당 소비해버리는 행태 등. 무엇보다 캐더린과의 결혼 의도가 미국 시민권을 얻기 위한 사기적 목적이라는 의심. 에디가 로돌포를 싫어하는 원인은 분명치 않다. 욕망 대상을 향한 경쟁자인 탓인지 아니면 남들은 알아차리지 못한 로돌포의 숨은 면모를 발견한 것인지. 어쨌든 로돌포의 모습은 악인이 아니라는 것을 마르코와 에디의 대적을 막으려 애쓰는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에디) (비탄에 차서 외친다.) 나를 그렇게 생각했단 말이지. 내가 그런 생각을 했다구? (P.77)

 

에디가 원하는 건 바로 캐더린이었을까? 베아트리스의 주장에 에디의 반응은 위와 같다. 그는 비탄과 실의로 가득하다. 그가 법률보다도 엄중한 시칠리아계의 관습을 어기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캐더린의 장래를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색안경을 끼고 바라본다는 사실. 심지어는 캐더린마저도 자신을 의심하고 꺼린다는 현실. 게다가 이미 마르코에 의해 되돌릴 수 없이 실추된 명예. 그것은 살아도 살아 있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한 징벌이다.

 

사적 처벌을 강행하는 마르코를 앞에 두고 에디 카본이 원하는 건 단 한 가지. 잃어버린 자신의 이름을 돌려달라는 것이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자신은 생존의 이유를 갖지 못한다. 마르코의 괴력을 알고 있는 에디는 정면으로 그와 맞선다면 목숨을 유지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당당하게 맞선다. 목숨보다도 더 소중한 그 무엇을 지키기 위해. 비록 남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알아주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런 에디 카본에게서 거역할 수 없는 운명에 스러지는 고대 그리스의 비극적 영웅의 자취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에디) 이웃 사람들 앞에서 내 이름을 누더기로 만들었지! 내 이름을 돌려다오! (천천히 마르코를 향해 간다.) ! 내 이름을 돌려다오. (P.77)

 

출간된 지 오래된 책이다. 절판된 지도 한참 되어 시중에서는 도저히 구할 방안이 없다. 편집도 글꼴도 고색창연한 느낌이다. 신간이 절실히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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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10 0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성근대나무 2021-10-10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죄송합니다. 저도 도서관에서 빌려본 책이라서요.
 
키다리 아저씨 그 후 이야기 Classics in Love (푸른나무) 9
진 웹스터 지음 / 푸른나무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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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원제는 <Dear Enemy>. 화자 샐리 맥브라이드가 고아원 의사 로빈 맥클레이에게 보내는 서신의 첫 문구다. 번역본에서는 싸움꾼 선생께로 옮기고 있어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우호적이지 않음을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이 작품을 통상 <키다리 아저씨> 속편으로 간주하는데, 주인공이 성공한 전편의 주인공 주디의 친구라는 점, 그리고 형식이 대부분 주디에게 보내는 샐리의 서신으로 이루어졌다는 점, 그리고 배경이 주디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존 그리어 고아원이라는 점 등이다. 다만 주디와 저비스는 글 속에서만 존재감을 드러낼 뿐 실제 작품 속에는 활동하지 않으며, 이 작품의 화자이자 주인공은 전적으로 샐리 맥브라이드이다.

 

샐리의 서신에 따르면 고아원의 환경이 매우 열악하다는 점, 그리고 고아원의 운영이 너무 권위적이고 획일적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고아원의 본질적 설립 목적을 되새겨볼 때 존 그리어 고아원은 지금껏 고아들을 위한 단순 수용시설에 불과하였다.

 

저를 이 고아원에 오게 했던 낭만적인 매력은, 시적인 상상력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일 뿐이에요. 이 곳은 정말 끔찍하답니다. 어둠침침하고, 을씨년스럽고, 불쾌한 냄새가 나는, 정말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곳이에요. (P.20)

 

여기서 이 작품의 사회소설로서의 면모가 확연히 드러난다. 전작에서 고아원의 비참한 현실은 주디의 서신에서 가끔씩 언급될 뿐이며 그 자체가 작품의 주도적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면, 여기서는 소설 전개의 핵심적 사안이다. 샐리는 고아원 원장으로서 고아원을 변화시키고 싶어한다. 좀 더 밝고 인간적인 곳, 즉 진정 아이들을 돌보는 곳으로. 샐리는 주디 부부와 샌디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얻어 서서히 고아원을 개혁한다.

 

애정만으로 결혼해서 내 모든 인생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그리고 난 내 삶을 발견하기 위해 곰곰이 생각해 봐야겠어. 결혼하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그만둬야 할 테니까. (P.226)

 

더불어 그녀 자신도 바뀌게 되는데, 원장직을 한시바삐 그만두려던 생각은 사라지고 고아원 운영의 보람과 재미를 발견하게 되는 점이다. 그녀가 고아원에 매진하면 할수록 불가피한 갈등과 선택의 순간이 다가온다. 약혼자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녀는 평범한 여성의 삶에 안주할 마음이 없다. 여성의 자아실현과 자기 주도적 삶의 선택이라는 점에서 여성주의 문학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한편 샐리는 원장직을 수행하면서 샌디와 사사건건 대립한다. 그래서 ‘Dear Enemy’라는 표현이 나오게 되었다. 샌디는 비록 완고하고 무뚝뚝하지만 자신의 직무와 아이들에 대한 사랑은 헌신적이다. 초창기 주디에게 샌디를 향한 불만을 토로하던 샐리는 업무를 공유하고 대화를 해나가면서 서서히 샌디에 대한 인식이 변하게 된다. 더불어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고아원의 탈바꿈이라는 동일한 지향점을 지닌 그들이 여러 오해와 편견에도 불구하고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음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 소설 역시 러브 스토리이다. 평범한 가치관을 소유한 젊은 여성으로서 샐리의 장래는 성공한 정치가의 아내로 몇 명의 아이와 함께 남편을 정성으로 내조하는 여성상으로 예정되어 있다. 존 그리어 고아원 원장만 맡지 않았더라면, 아니면 재빨리 원장직을 그만두었더라면 말이다. 우여곡절 끝에 샐리가 자신과 부합하는 진정한 사랑을 찾게 되었다는 점에서 러브 스토리는 결실을 이루었다고 보겠다.

 

이 작품은 전작에 비하면 대중적 흥미를 끌어내는 요소가 약하다. 열악한 환경의 젊은 여성의 신데렐라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 있는 통속적 소재에 비하면 샐리의 이야기는 고아원 운영에 깊이 편중되어 있다. 가벼운 소설책에서 무겁고 진지한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정면으로 마주하고자 하는 이는 많지 않다. 게다가 저비 도련님과 미스터리한 키다리 아저씨에 비하면 고든 씨와 샌디는 호감도도 낮은 편이다. 특히 고든 씨는 매우 평면적 이미지로 묘사되어 있어 흡입력이 약하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단순히 <키다리 아저씨>의 속편으로 치부되기에는 아깝다. 샐리의 말처럼 주디 부부의 모습은 이상적이어서 오히려 비현실적이다. 주디 이야기에 비하면 샐리 이야기가 훨씬 더 현실적이다. 샐리는 보다 진취적이고 현실 참여적이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행동에 가식이 없다. 고아원 운영의 중요한 업무를 처리하는 사람은 결국 샌디가 아니라 샐리 자신이다. 그녀의 책임감과 사명의식이 있기에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작품이 전작의 명성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가치를 인정받길 기대한다

 

참고로 아래아한글에서 맞춤법 검색을 하니 고아원의 표준어는 보육원이라고 계속 지적한다. 직설적인 표현을 순화시킨 용어인데, 당사자의 감정을 고려한 변경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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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웃 이야기 동화는 내 친구 65
필리파 피어스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고경숙 그림 / 논장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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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품>

1. 우리 이웃 이야기

2. 한밤중에

3. 목초지에 있던 나무

4. 프레시

5. 가만 있는 짐과 말 없는 짐

6. 검은 딸기 소동

7. 다시 물 위로

8. 운 좋은 아이

 

필리파 피어스의 첫 번째 단편집이다. 작가명이 생소하여 별 기대감이 없었는데, 알고 보니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로 유명한 작가라고 한다. 나중에 천천히 다른 작품들도 읽어봐야지.

 

작가는 개별 단편에서 특별하고 거창한 사건을 전개하지 않는다. 대다수는 사실 사건이라고 불리기조차 애매한 일상의 자잘한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어찌 보면 흔하고 눈에 띄지 않아 스쳐 지나가기에 십상임에도 작가의 눈은 허투루 넘어가지 않는다. 동화책의 주인공은 아이들이므로 그네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개별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대표적인 게 <다시 물 위로>인데, 연못 바닥으로 처음 오리 잠수하는 아이의 체험을 독자에게 그대로 전달한다. 물속 빛과 색의 변화 모습과 기대와 불안을 품고 있는 아이의 심정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한밤중에>처럼 부모 몰래 야식을 먹었던 경험은 대부분이 갖고 있을 텐데, 슬쩍 눈감아주는 아빠의 행동에 미소를 짓게 된다.

 

<프레시><목초지에 있던 나무>는 상실에 대한 이야기다. 민물조개는 강바닥에, 느릅나무는 목초지에 있어야 자연스러운 존재다. 사촌 동생의 채집과 안전을 위한 벌목의 불가피성은 이성적으로 납득하지만 마음속 내밀한 감정은 다르다. 댄은 자기 마음을 들여다봐도 알 수 없으며, 리키는 한밤에 까닭 모를 슬픔을 느끼며 눈물을 흘린다. 민물조개를 잡은 이가 댄이고, 늙은 나무를 넘어뜨리는데 리키가 기꺼이 동참하였기에 그들의 심정은 미묘하다.

 

<검은 딸기 소동><가만 있는 짐과 말 없는 짐>은 둘 다 가족의 본질을 생각하게 한다. 둘 다 일상의 친숙한 공간을 벗어난 모험 이야기가 핵심을 이룬다. 전자의 밸은 아빠의 호통을 피해 낯선 곳에서 만난 부부의 가정집에서 평온과 소소한 행복을 맛본다. 아빠의 손수건을 찾기 위해 함께 다시 그 지역을 돌아다니지만 밸은 굳이 그곳을 찾고 싶은 생각이 없다. ‘따뜻하고 달콤한 냄새가 나던 부엌의 흐뭇한 추억을 잃고 싶지 않으므로.

 

후자는 어린 손자와 늙은 할아버지의 따스하며 아름다운 관계를 그린다. 외로울까 봐 심심할까 봐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씨는 다른 가족들에게서 발견하기 어려운 미덕이다. 리틀발리 소풍을 통해 두 사람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쌓지만, 배타적이 아니라 다른 가족 구성원과 공유하고 소통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 이웃 이야기><운 좋은 아이>는 장소도 사건도 전연 다르지만 이웃과의 교류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다만 아이와 이웃 어른의 관계는 긍정적이지 않은 결론으로 이어진다. 전자에서 딕 아저씨와 메이시 할아버지의 사안은 돌연 주인공과 딕 아저씨의 것으로 변질된다. 자신에게 우호적이라고 믿었던 주인공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한 딕 아저씨는 이웃 사람들한테 넌더리가 나서집을 떠난다. 후자의 팻은 전혀 운 좋은 아이가 아니다. 자유로운 오후 시간을 어쩔 수 없이 루시와 고달픈 모험으로 보내버린다. 게다가 버스 안에서 차장과 이웃 주민 승객의 차가운 시선과 한심하게 여기는 동정이란. 팻은 모든 사람한테서 외면한 채 눈물을 흘린다.

 

공간 배경이 영국의 시골 지역이다. 자그마한 동네와 주변의 한적한 교외를 무대로 삼다 보니 도시의 복잡함과 혼잡함이 없이 편안하고 정적이다. 주요 등장인물도 가족과 이웃 등 몇 명 이내로 그치고 있어 아담하고 친숙한 느낌을 준다. 작품은 다양한 성격이 혼재되어 있다. 흐뭇한 미소를 자아내는 전형적인 유형 외에도 생경하고 이질적인 감상을 품게 하는 이야기들도 제법 있다. 동화가 반드시 아름답고 행복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없으리라. 우리네 현실 자체가 항상 밝고 즐겁고 행복한 것은 아니므로 차라리 이것이 더욱 현실에 가깝다. 다만 작가는 지나치게 적나라하고 직설적으로 기술하지 않고 슬쩍 에둘러 표현함으로써 독자 스스로가 생각해보도록 유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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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59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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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극한의 상황에 처했을 때 실존적 인식이 발생한다. 현실에 순응하는 사람,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엇나가는 사람, 그리고 부조리한 현실을 바꿔보고자 분투하는 사람. 이렇게 다양한 행동유형을 이 작품에 적용해 볼 때, 가즈코의 어머니가 첫째 유형, 나오지와 우에하라가 둘째 유형, 그리고 가즈코가 마지막 유형에 분류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몰락하고 있는 귀족계급 출신이라는 게 그렇게 커다란 멍에였을까. 패전의 후유증과 사회개혁의 여파로 귀족의 지위가 무참히 스러져 박탈과 상실의 감정을 가짐은 당연하겠지만 시대가 변하였음을 인정한다면 행동 양식도 변해야 할 것이다. 가즈코의 어머니는 구시대의 인물로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여 스러지게 되더라도 나오지는 다를 수 있었을 텐데. 출신에 대한 한계보다도 순수함이 인정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절망이 컸으리라.

 

당대의 시대적 분위기를 겪지 않은 방관자의 섣부른 억측일 수도 있다. 이는 가즈코가 나오지와 우에하라를 비난하지 않고 이해하고자 애쓰는 태도를 통해 짐작하게 된다. 삶을 저버리고 죽음을 추구하는 생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때 그네들의 방랑과 타락도 어찌 되었든 살고자 하는 몸부림치는 현상으로 바라봐야 할 것이다. 이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남은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놀면서도 전혀 즐겁지 않았다는 나오지, 살아 있는 게 슬퍼서 죽을 작정으로 마신다는 우에하라. 부조리한 현실에서 자신들의 처절한 무력감을 발견할 때 우리는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비난은 쉽지만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우리는 과연 다를 수 있을까.

 

이 사람들도 내 사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렇게라도 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어떡해서든 끝까지 살아야만 한다면, 이 사람들이 끝까지 살기 위한 이런 모습도 미워할 수 없는 게 아닌가. (P.136)

 

어머니와 나오지의 죽음으로 역설적이지만 가즈코는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의 처지가 되었다. 더 이상 핑계와 변명으로 회피하고 안주할 명분이 사라진 것이다. 가즈코의 선택은 생명의 추구다. 세상에 태어난 이상 무엇 보다 살아야 한다. 적대적인 세상에 맞서 호락호락하지 않은 길을 개척해야 한다.

 

산다는 것, 살아남는다는 것. 그건 몹시 추하고 피비린내 나는, 추접스러운 일처럼 느껴진다......천박해 보인들 상관없어. 나는 살아남아 마음먹은 일을 이루기 위해 세상과 싸워 나가련다. (P.119)

 

추저분하고 천박하더라도 끈질기게 목숨의 줄을 붙잡고 버텨내는 것, 그럼으로써 태어난 보람의 결실을 보는 것 그것이 가즈코의 선택이자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다. 그녀는 어머니와 동생과는 다른 길을 걸어갈 것이다. 세상에서 불량한 사람으로 딱지 붙더라도 그게 뭐 그리 대수겠는가. 어차피 당대 세상 자체가 부조리한데.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것, 그것은 살아 있는 존재의 본원적 소명이자 본능적 소망이다. 그래서 가즈코는 아기를 갖고 싶어 한다... 가즈코가 참으로 우에하라를 사랑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부차적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이, 저의 도덕 혁명의 완성입니다.

당신이 저를 잊는다 해도, 또한 당신이 술로 목숨을 잃는다 해도, 저는 제 혁명의 완성을 위해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P.163)

 

전시와 전후 일본 사회의 시대적 틀에 갇혔다면 오늘날 다자이의 문학이 유효할 까닭은 없다. 과거로부터의 단절 및 부조리한 현실 인식에 대한 개인의 행동 등 전쟁을 제쳐놓더라도 그의 화두는 현대사회에서 여전히 존재의의를 지닌다. 이렇게 볼 때 다자이의 죽음 지향은 역설적으로 새로운 생명, 그것도 순진무구한 존재에 대한 열렬한 희구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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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다리 아저씨
진 웹스터 지음, 한영환 옮김 / 문예출판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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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독해하는 여러 가지 관점을 나열해 본다.

 

첫째, 내용 그대로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전통적 견해. 고아원 출신의 어린 여학생이 후원자의 도움으로 대학에 진학하고 우여곡절 끝에 후원자인 신사와 결혼을 약속하게 된다. 전형적인 신데렐라식 해피엔딩. 주디는 키다리 아저씨와 저비 펜들턴이 동일 인물임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자신의 생활과 저비와의 관계를 세세하게 편지로 알려준다. 저비는 단순한 후원자의 처지에서 처음엔 주디의 편지를 통해, 나중에는 신분을 숨긴 채 주디와의 만남을 통해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의 감정을 갖게 된다. 작가는 대학 생활과 친구들과의 교제를 통해 주디가 저비와 어울릴 만한 지적, 정서적 수준을 갖춘 숙녀로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일종의 성장소설로 간주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커다란 기쁨들이 아니라 작은 기쁨들에서 많은 기쁨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아저씨, 저는 행복의 비결을 발견했어요. 그것은 현재를 사는 거예요. 과거를 영원히 후회하거나 미래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순간에서 가능한 최대의 것을 얻는 것입니다. (P.169)

 

둘째, 남성주의적 시각. 주디처럼 똑똑한 학생이 키다리 아저씨와 저비가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록 윌로우 농장과 연극 관람이라는 명백한 증거를 주디는 외면한다. 주디의 편지는 은연중 자신의 매력-성격, 지성 그리고 특히 미모를 어필하는 대목을 담고 있다. 주디가 예쁘지 않았다면 저비와 인연이 발전될 수 있었을까? 게다가 엄연한 사회적 신분과 연령의 차이에도 일말의 고민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있다. 꿋꿋한 지성으로 충만한 주디 애벗의 존재는 마지막 장면에서 사라지고 사랑에 들뜬 평범한 여성으로 전락하고 만다.

 

저는 예뻐요.

저는 정말 예쁩니다. 제 방에 거울을 셋이나 걸어놓고도 제가 예쁜 것을 지금까지 알지 못했다니 저도 엄청난 바보죠! (P.165)

 

우리는 이제 거짓으로 꾸민 것이 아니라, 정말 진짜 서로의 것입니다. 제가 드디어 누구의 것이 된다는 것이 야릇하지 않아요? 제가 누구의 것이 된다는 것은 아주, 아주 달콤한 듯합니다. (P.234)

 

셋째, 여성주의적 시각. 주디는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현대적 여성의 표본이다. 고아의 처지에서도 자포자기하지 않고 항상 삶을 개선하려는 자세를 보였기에 후원의 행운을 얻을 수 있었다. 대학에 가서도 후원자의 뜻에 휘둘리지 않고 독자적인 삶의 개척 의지를 표방하고 있다. 더욱이 남성중심적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함께 진보적인 정치 성향도 내비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저는 구걸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저는 정식으로 받게 된 것 이외에 따로 더 자선을 받고 싶지는 않아요. (P.115)

 

제가 참정권을 갖는다면 훌륭한 유권자가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저는 지난주에 스물한 살이 되었어요. 저와 같이 정직하고, 교육을 받은, 양심적이고, 총명한 시민에게 선거권을 주지 않다니 이 나라는 굉장히 낭비적이군요. (P.161)

 

여자도 시민입니까?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P.188)

 

왜 목사들은 남자 대학에 가서 머리를 너무 씀으로써 남성다운 기질을 말살시키지 말라고 역설하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P.207)

넷째, 사회소설의 관점. 자신이 성장했던 존 그리어 고아원에 대한 주디의 인식은 매우 부정적이다. 고아원이라는 환경의 특수성을 감안할 때 긍정적 반응을 기대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주디의 의견을 통해 당대 고아원의 실상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이는 이 작품 이후 고아원에 대한 여론과 자선사업이 활발해졌다는 전언을 통해서도 단순히 작가가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려고 고아원이라는 배경을 도입한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저는 일주일 내내 매일 다른 애들은 나가 노는 동안 말썽꾸러기 강아지처럼 뒷마당의 말뚝에 묶여 있었어요. (P.102)

 

상상력이 친절하고 동정심 있고 이해력 있는 사람을 만들지요. 상상력은 어려서 개발되어야 해요. 그러나 존 그리어 고아원은 상상력이 조금만 비쳐도 그것을 짓밟았어요. 그곳에서는 오직 의무감만을 장려했어요. (P.122)

 

 

문학작품 중에는 청소년기에 읽었을 때와 어른이 되어서 읽었을 때 감흥이 완전히 달라지는 유형이 꽤 있다. <키다리 아저씨>도 여기에 속한다. 불행히도 나는 어른, 그것도 중년이 되어서야 읽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세상의 때가 덕지덕지 묻어서일까. 제루샤 애벗과 저비 펜들턴의 인연과 만남, 그리고 행복까지 너무 이상적으로 그려진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세상에 주디같은 신데렐라 사례가 과연 얼마나 될지. 혹시 이러한 로또식 최면에 젖어 소망과 환상을 품고 산다면 그게 여성 자체의 관점에서 바람직할 것인지. 이 작품이 전달하는 메시지가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것인지 등등. 그래서 일부러 비판적 관점으로 독해를 시도했다. 소설 자체는 매우 흥미로웠다는 점을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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