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59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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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극한의 상황에 처했을 때 실존적 인식이 발생한다. 현실에 순응하는 사람,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엇나가는 사람, 그리고 부조리한 현실을 바꿔보고자 분투하는 사람. 이렇게 다양한 행동유형을 이 작품에 적용해 볼 때, 가즈코의 어머니가 첫째 유형, 나오지와 우에하라가 둘째 유형, 그리고 가즈코가 마지막 유형에 분류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몰락하고 있는 귀족계급 출신이라는 게 그렇게 커다란 멍에였을까. 패전의 후유증과 사회개혁의 여파로 귀족의 지위가 무참히 스러져 박탈과 상실의 감정을 가짐은 당연하겠지만 시대가 변하였음을 인정한다면 행동 양식도 변해야 할 것이다. 가즈코의 어머니는 구시대의 인물로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여 스러지게 되더라도 나오지는 다를 수 있었을 텐데. 출신에 대한 한계보다도 순수함이 인정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절망이 컸으리라.

 

당대의 시대적 분위기를 겪지 않은 방관자의 섣부른 억측일 수도 있다. 이는 가즈코가 나오지와 우에하라를 비난하지 않고 이해하고자 애쓰는 태도를 통해 짐작하게 된다. 삶을 저버리고 죽음을 추구하는 생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때 그네들의 방랑과 타락도 어찌 되었든 살고자 하는 몸부림치는 현상으로 바라봐야 할 것이다. 이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남은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놀면서도 전혀 즐겁지 않았다는 나오지, 살아 있는 게 슬퍼서 죽을 작정으로 마신다는 우에하라. 부조리한 현실에서 자신들의 처절한 무력감을 발견할 때 우리는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비난은 쉽지만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우리는 과연 다를 수 있을까.

 

이 사람들도 내 사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렇게라도 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어떡해서든 끝까지 살아야만 한다면, 이 사람들이 끝까지 살기 위한 이런 모습도 미워할 수 없는 게 아닌가. (P.136)

 

어머니와 나오지의 죽음으로 역설적이지만 가즈코는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의 처지가 되었다. 더 이상 핑계와 변명으로 회피하고 안주할 명분이 사라진 것이다. 가즈코의 선택은 생명의 추구다. 세상에 태어난 이상 무엇 보다 살아야 한다. 적대적인 세상에 맞서 호락호락하지 않은 길을 개척해야 한다.

 

산다는 것, 살아남는다는 것. 그건 몹시 추하고 피비린내 나는, 추접스러운 일처럼 느껴진다......천박해 보인들 상관없어. 나는 살아남아 마음먹은 일을 이루기 위해 세상과 싸워 나가련다. (P.119)

 

추저분하고 천박하더라도 끈질기게 목숨의 줄을 붙잡고 버텨내는 것, 그럼으로써 태어난 보람의 결실을 보는 것 그것이 가즈코의 선택이자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다. 그녀는 어머니와 동생과는 다른 길을 걸어갈 것이다. 세상에서 불량한 사람으로 딱지 붙더라도 그게 뭐 그리 대수겠는가. 어차피 당대 세상 자체가 부조리한데.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것, 그것은 살아 있는 존재의 본원적 소명이자 본능적 소망이다. 그래서 가즈코는 아기를 갖고 싶어 한다... 가즈코가 참으로 우에하라를 사랑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부차적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이, 저의 도덕 혁명의 완성입니다.

당신이 저를 잊는다 해도, 또한 당신이 술로 목숨을 잃는다 해도, 저는 제 혁명의 완성을 위해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P.163)

 

전시와 전후 일본 사회의 시대적 틀에 갇혔다면 오늘날 다자이의 문학이 유효할 까닭은 없다. 과거로부터의 단절 및 부조리한 현실 인식에 대한 개인의 행동 등 전쟁을 제쳐놓더라도 그의 화두는 현대사회에서 여전히 존재의의를 지닌다. 이렇게 볼 때 다자이의 죽음 지향은 역설적으로 새로운 생명, 그것도 순진무구한 존재에 대한 열렬한 희구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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