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다리 아저씨
진 웹스터 지음, 한영환 옮김 / 문예출판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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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독해하는 여러 가지 관점을 나열해 본다.

 

첫째, 내용 그대로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전통적 견해. 고아원 출신의 어린 여학생이 후원자의 도움으로 대학에 진학하고 우여곡절 끝에 후원자인 신사와 결혼을 약속하게 된다. 전형적인 신데렐라식 해피엔딩. 주디는 키다리 아저씨와 저비 펜들턴이 동일 인물임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자신의 생활과 저비와의 관계를 세세하게 편지로 알려준다. 저비는 단순한 후원자의 처지에서 처음엔 주디의 편지를 통해, 나중에는 신분을 숨긴 채 주디와의 만남을 통해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의 감정을 갖게 된다. 작가는 대학 생활과 친구들과의 교제를 통해 주디가 저비와 어울릴 만한 지적, 정서적 수준을 갖춘 숙녀로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일종의 성장소설로 간주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커다란 기쁨들이 아니라 작은 기쁨들에서 많은 기쁨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아저씨, 저는 행복의 비결을 발견했어요. 그것은 현재를 사는 거예요. 과거를 영원히 후회하거나 미래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순간에서 가능한 최대의 것을 얻는 것입니다. (P.169)

 

둘째, 남성주의적 시각. 주디처럼 똑똑한 학생이 키다리 아저씨와 저비가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록 윌로우 농장과 연극 관람이라는 명백한 증거를 주디는 외면한다. 주디의 편지는 은연중 자신의 매력-성격, 지성 그리고 특히 미모를 어필하는 대목을 담고 있다. 주디가 예쁘지 않았다면 저비와 인연이 발전될 수 있었을까? 게다가 엄연한 사회적 신분과 연령의 차이에도 일말의 고민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있다. 꿋꿋한 지성으로 충만한 주디 애벗의 존재는 마지막 장면에서 사라지고 사랑에 들뜬 평범한 여성으로 전락하고 만다.

 

저는 예뻐요.

저는 정말 예쁩니다. 제 방에 거울을 셋이나 걸어놓고도 제가 예쁜 것을 지금까지 알지 못했다니 저도 엄청난 바보죠! (P.165)

 

우리는 이제 거짓으로 꾸민 것이 아니라, 정말 진짜 서로의 것입니다. 제가 드디어 누구의 것이 된다는 것이 야릇하지 않아요? 제가 누구의 것이 된다는 것은 아주, 아주 달콤한 듯합니다. (P.234)

 

셋째, 여성주의적 시각. 주디는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현대적 여성의 표본이다. 고아의 처지에서도 자포자기하지 않고 항상 삶을 개선하려는 자세를 보였기에 후원의 행운을 얻을 수 있었다. 대학에 가서도 후원자의 뜻에 휘둘리지 않고 독자적인 삶의 개척 의지를 표방하고 있다. 더욱이 남성중심적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함께 진보적인 정치 성향도 내비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저는 구걸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저는 정식으로 받게 된 것 이외에 따로 더 자선을 받고 싶지는 않아요. (P.115)

 

제가 참정권을 갖는다면 훌륭한 유권자가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저는 지난주에 스물한 살이 되었어요. 저와 같이 정직하고, 교육을 받은, 양심적이고, 총명한 시민에게 선거권을 주지 않다니 이 나라는 굉장히 낭비적이군요. (P.161)

 

여자도 시민입니까?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P.188)

 

왜 목사들은 남자 대학에 가서 머리를 너무 씀으로써 남성다운 기질을 말살시키지 말라고 역설하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P.207)

넷째, 사회소설의 관점. 자신이 성장했던 존 그리어 고아원에 대한 주디의 인식은 매우 부정적이다. 고아원이라는 환경의 특수성을 감안할 때 긍정적 반응을 기대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주디의 의견을 통해 당대 고아원의 실상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이는 이 작품 이후 고아원에 대한 여론과 자선사업이 활발해졌다는 전언을 통해서도 단순히 작가가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려고 고아원이라는 배경을 도입한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저는 일주일 내내 매일 다른 애들은 나가 노는 동안 말썽꾸러기 강아지처럼 뒷마당의 말뚝에 묶여 있었어요. (P.102)

 

상상력이 친절하고 동정심 있고 이해력 있는 사람을 만들지요. 상상력은 어려서 개발되어야 해요. 그러나 존 그리어 고아원은 상상력이 조금만 비쳐도 그것을 짓밟았어요. 그곳에서는 오직 의무감만을 장려했어요. (P.122)

 

 

문학작품 중에는 청소년기에 읽었을 때와 어른이 되어서 읽었을 때 감흥이 완전히 달라지는 유형이 꽤 있다. <키다리 아저씨>도 여기에 속한다. 불행히도 나는 어른, 그것도 중년이 되어서야 읽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세상의 때가 덕지덕지 묻어서일까. 제루샤 애벗과 저비 펜들턴의 인연과 만남, 그리고 행복까지 너무 이상적으로 그려진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세상에 주디같은 신데렐라 사례가 과연 얼마나 될지. 혹시 이러한 로또식 최면에 젖어 소망과 환상을 품고 산다면 그게 여성 자체의 관점에서 바람직할 것인지. 이 작품이 전달하는 메시지가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것인지 등등. 그래서 일부러 비판적 관점으로 독해를 시도했다. 소설 자체는 매우 흥미로웠다는 점을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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