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위에서 바라본 풍경
아더 밀러 지음, 이한섭 옮김 / 예니 / 1987년 2월
평점 :
절판


이 작품의 서문 격인 제법 장문의 <사회극에 대하여>가 부록으로 권말에 수록되어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작가는 이 희곡을 사회극으로 규정한다. 이에 따르면 작가는 개인과 사회[폴리스]가 분리되지 않는 고대 그리스 연극을 이상으로 삼아서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을 연극이 주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새로운 연극은 희랍적이어야 할 것이며 이렇게 됨으로서 연극은 인간을 사회적 동물로 대하고 과거의 연극의 그 자잘구레한 편파성에 말려들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P.95)

 

작가는 일개 날품팔이 노동자인 에디에게 비극적 영웅의 면모를 부여한다. 본디 선하고 좋은 사람인 에디는 피할 수 없는 운명에 의해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고, 자신의 비극적 운명을 회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선다. 그러기에 독자는 에디 카본을 차마 비난할 수 없고 다만 그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맹목성을 안타까워할 뿐이다. 변호사 알피에리가 말미에 토로하듯이.

 

(알피에리) 에디가 얼마나 잘못했고 그의 죽음이 얼마나 무익한 것이었는지를 잘 알면서도 또한 그의 순수성을 추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적어도 자신에 관한 진실을 밝히고 죽어간 것입니다. (P.78)

 

작중에서 에디의 사고와 행동을 관통하는 두 가지 이슈가 있다. 먼저 애정과 욕망의 문제. 조카딸 캐더린을 향한 에디의 사랑을 아내와 알피에리는 근친상간적 욕망이라고 해석한다. 베아트리스는 특히 예민하게 인식한다. 하지만 캐더린의 장래와 결혼에 대해 에디가 유달리 까다롭게 구는 것을 성적 욕망의 투영이라고 해석하는 게 올바른지 모르겠다. 깊이 사랑하는 딸에 대한 아버지들의 집착에 가까운 사랑이 있는 게 사실이다. 만약 캐더린이 조카딸이 아닌 친딸이라고 할 때도 이런 해석이 유효한지 궁금하다.

 

다음으로 관습과 법률의 문제. 캐더린과 결혼하려는 로돌포의 의도를 의심하는 에디에게, 밀입국자를 밀고한 에디의 행위를 규탄하는 마르코에게 알피에리는 동일한 대답을 한다. 법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에디와 마르코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나름의 방안을 모색한다. 그것이 관습과 실정법에 위배된다고 할지라도

 

로돌포의 머리카락 색깔, 노래를 잘 부르고 풍부한 유머를 지닌 것, 그리고 힘들게 모은 돈을 홀라당 소비해버리는 행태 등. 무엇보다 캐더린과의 결혼 의도가 미국 시민권을 얻기 위한 사기적 목적이라는 의심. 에디가 로돌포를 싫어하는 원인은 분명치 않다. 욕망 대상을 향한 경쟁자인 탓인지 아니면 남들은 알아차리지 못한 로돌포의 숨은 면모를 발견한 것인지. 어쨌든 로돌포의 모습은 악인이 아니라는 것을 마르코와 에디의 대적을 막으려 애쓰는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에디) (비탄에 차서 외친다.) 나를 그렇게 생각했단 말이지. 내가 그런 생각을 했다구? (P.77)

 

에디가 원하는 건 바로 캐더린이었을까? 베아트리스의 주장에 에디의 반응은 위와 같다. 그는 비탄과 실의로 가득하다. 그가 법률보다도 엄중한 시칠리아계의 관습을 어기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캐더린의 장래를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색안경을 끼고 바라본다는 사실. 심지어는 캐더린마저도 자신을 의심하고 꺼린다는 현실. 게다가 이미 마르코에 의해 되돌릴 수 없이 실추된 명예. 그것은 살아도 살아 있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한 징벌이다.

 

사적 처벌을 강행하는 마르코를 앞에 두고 에디 카본이 원하는 건 단 한 가지. 잃어버린 자신의 이름을 돌려달라는 것이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자신은 생존의 이유를 갖지 못한다. 마르코의 괴력을 알고 있는 에디는 정면으로 그와 맞선다면 목숨을 유지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당당하게 맞선다. 목숨보다도 더 소중한 그 무엇을 지키기 위해. 비록 남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알아주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런 에디 카본에게서 거역할 수 없는 운명에 스러지는 고대 그리스의 비극적 영웅의 자취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에디) 이웃 사람들 앞에서 내 이름을 누더기로 만들었지! 내 이름을 돌려다오! (천천히 마르코를 향해 간다.) ! 내 이름을 돌려다오. (P.77)

 

출간된 지 오래된 책이다. 절판된 지도 한참 되어 시중에서는 도저히 구할 방안이 없다. 편집도 글꼴도 고색창연한 느낌이다. 신간이 절실히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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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10 0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성근대나무 2021-10-10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죄송합니다. 저도 도서관에서 빌려본 책이라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