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어트 리틀 - 숲속나라 책마을 12
E.B. 화이트 지음, 가스 윌리엄즈 그림, 문명식 옮김 / 숲속나라 / 2004년 4월
평점 :
품절


동명의 애니메이션으로 먼저 제목이 각인되었던 작품이다. <샬롯의 거미줄>의 작가가 쓴 세 편의 동화 중 첫 번째다. 스튜어트 집안의 둘째로 태어난 스튜어트 리틀이 생쥐를 닮은 외모에 키가 7cm 밖에 되지 않아 발생하는 갖가지 우스운 상황과 모험담을 재미있게 그리고 있다. 아이들이 썩 재미있게 읽을 만하다.

 

작가의 무심한 듯한 시치미가 인상적이다. 인간 가족에게서 생쥐가 태어난다는 기묘한 설정과 자연스레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가족들의 태도. 인간과 동물 간의 스스럼없는 의사전달. 대양의 항해마냥 박진감 넘치는 공원 연못의 돛단배 경주. 모형자동차를 타고 마갈로를 찾아 떠나는 스튜어트 리틀의 여행길. 일일 교사가 되어 제법 그럴듯하게 선생티를 풍기며 학생들을 가르치는 장면. 작은 생쥐라는 점을 제외하면 인간과 구분이 없다.

 

동물 애니메이션의 주인공들의 행동 양태는 하나같이 인간과 유사하다. 작가가 인간이니만치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이 작품에서도 스튜어트 자신은 물론 고양이 스노벨과의 적대 관계와, 새 마갈로와의 친구로서의 우정 등이 두드러진다. 가끔은 순수한 동물의 본성은 무엇일까 궁금하다. 본능과 충동에 충실하며 위선과 가식이 없는 것에 우리는 끌리지 않던가. 그런 면에서 주인공이 자신과 비슷한 크기의 해리엇 양과 데이트를 하려고 준비하는 장면과 카누가 망가져 설레던 데이트가 망쳐서 분개하는 대목에서 오히려 묘한 공감과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제아무리 그럴듯하게 포장을 해놓더라도 인간과 생쥐는 한 가족으로서 살아갈 수 없다. 성년이 된 자식은 슬하를 떠나 자신만의 삶을 개척하기 마련이다. 스튜어트는 인간이라면 아이에 불과하지만 생쥐로서는 성인이다. 마갈로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필연적으로 그는 떠나게 될 수밖에 없다. 스튜어트는 마갈로를 찾아 북쪽으로 간다.

 

북쪽에는 뭔가가 있지. 다른 방향들하고는 확실히 다른 무엇 말이다. 내 생각이지만, 북쪽으로 가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실수하지 않을 거야. (P.163)

 

전화선 수리 기사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똑바로 북쪽으로 가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라고도 말하지만, 스튜어트는 목숨이 다할 때까지 가겠다고 의지를 드러낸다. 여기서 북쪽은 단지 방위가 아니라 스튜어트의 삶이 지향할 방향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그 길은 힘들지만 올바르면서 밝은 길이다.

 

눈앞에 펼쳐진 드넓은 땅을 바라보니, 길이 무척 길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하늘은 맑았습니다. 스튜어트는 어쨌든 자신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P.16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투명인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66
허버트 조지 웰즈 지음, 임종기 옮김 / 문예출판사 / 200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투명인간에 대한 세인의 인식은 이중적이다. 갈망과 공포. 갈망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의 획득에서 비롯한다. 대개는 비도덕적 욕구로 드러나지만, 예컨대 여탕 훔쳐보기 등. 공포는 근원적이다. 사람은 원래 미지의 것에 불안과 두려움을 품게 마련이다. 내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존재가 분명 눈앞에 실존하는데 정체를 알 수 없다면 얼마나 짜증나고 답답하고 무섭겠는가.

 

투명인간 그리핀을 향한 독자의 감정도 복합적이다. 그의 딱한 처지에 동정심이 생긴다. 당초 그는 순전한 과학적 호기심에서 연구를 시작하다 투명인간이 되고 말았다. 특이한 체질은 연구를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을 터. 막상 투명인간이 되고 보니 사람들 앞에 떳떳이 드러낼 수 없어 숨어 다녀야 하며, 옷도 입지 못하고 먹을 때도 조심해야 하는 등 애로사항이 만만치 않다.

 

나는 인간이 욕망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던 거야. 물론 투명성으로 인해 인간으로서는 얻을 수 없는 것들을 얻을 수 있었지. 하지만 그것들은 얻는 순간 그것들을 마음대로 향유할 수 없게 되었어......바로 이런 이유로 나는 베일에 싸인 불가사의한 존재, 인간의 몸뚱이, 나 자신을 붕대로 감싸 가둔 괴물이 되고 만 거야! (P.194)

 

반면 동정심보다 더한 적개심도 어쩔 수 없다. 그를 악화일로의 길로 몰고 간 것은 결국 그의 인성 탓이 크다. 어느 모로 보나 그는 선인이 아니다. 투명인간이 되고자 하는 의도와 사악한 욕망, 투명인간로서 보여주는 폭력과 절도 행각 등. 투명인간 자체는 본래 선악의 시비 대상이 아니지만 그리핀으로 인해 투명인간은 보다 더 악인과 결부되고 말았다.

 

이제 포트 버독은 내 지배 하에 있어. 공포 정치! 오늘은 투명인간의 새로운 시대, 신기원, 첫 회의 첫날이야. 나는 투명인간 1세다. 통치는 우선 쉬운 것부터 처리할 것이다. 첫날은 본보기로 한 놈만 처형할 거야. (P.215)

 

그리핀의 말마따나 보이지 않는다는 건 이상한 것이지만 범죄는 아니”(P.64). 사람들은 범상한 것에는 무관심하다. 반면 이상한 것에는 주의와 감각을 기울인다. 호기심 외에 경계심이 작용한다. 이상한 것이 나의 안전에 영향이 없을 것을 알게 될 때 비로소 경계를 풀게 된다. 그리핀의 언행은 불행히도 타인의 심리적 무장과 방어본능을 강화시켰다. 보이지 않는 우위를 지배욕과 폭력으로 전환시킴에 따라 그는 친구였던 켐프 박사의 도움마저 잃게 되고 비극적 최후를 맞게 된다. 애석하지만 자초한 결과다.

 

일개 사이코 과학자의 일탈이 초래한 비참한 결말을 보여주기 위한 게 작가의 의도는 아니다. 그가 누구였던가. 그가 창작해 낸 일련의 공상과학소설은 당대 수준에서 최신의 과학 지식을 활용하여 인류 문명의 암울한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그리핀도 본인이 깨우친 과학기술의 장밋빛 전망에 눈이 멀어 그것에 수반되는 도덕적 문제와 덫을 등한시하였다. 마치 모로 박사처럼 말이다.

 

엉뚱하지만 신독(愼獨)이란 자구가 떠오른다. 일찍이 성현은 인간의 약점을 간파하여 홀로 있을 때의 몸가짐을 단속하였다. 그리핀이 이 말씀을 알리가 없겠지만 잠시 멈춰 서서 주위를 돌아볼 수 있었다면 그의 말로가 이처럼 허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옮긴이는 해설에서 보이는 존재와 보이지 않는 존재 상호 간의 두려움을 언급하고 있다. 나아가 다수자의 소수자에 대한 편견, 이질적 존재에 대한 동질적 집단의 배척 등으로 논의를 확대한다. 개인적으로는 과대해석으로 생각하지만 후대 작가의 동명의 소설을 발표한 것으로 보아 일정한 타당성도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투명인간이 그다지 좋은 방책은 아닌 성 싶다. 일단 너무 불편하고 게다가 몸 자체에 생화학적 변화를 일으키는 게 탐탁지 않다. 해리 포터의 마법 망토가 효과성과 편이성 면에서 한층 뛰어나다고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곶감과 수필 태학산문선 301
윤오영 지음, 정민 엮음 / 태학사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수필문학입문>을 읽고 윤오영을 다시 알고 싶어졌다. 수필문학을 향한 뜨거운 애정, 수필문학을 정립하기 위한 단호한 의지와 정연한 논리 등은 일개 단순한 글쟁이로 치부할 수 없는 높은 식견과 고고한 기상을 보여준다. 명수필가 피천득의 외우(畏友)라고 하니 범인은 분명 아닐 성 싶다.

 

그의 글은 간결하고 명료하다. 일체의 구질구질함과 중언부언이 없으며 가식 없는 담백함이 배어난다. ‘측상락(厠上樂)’을 읽으면 그의 성품을 알 수 있다. ‘처빈난(處貧難)’에서는 그의 오롯한 삶의 태도를 깨닫게 된다.

 

......대단스럽지도 못한 남들과 어깨를 맞추기 위하여 자기의 신조와 고집을 꺾고, 한가로운 자유의 행복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P.171)

 

윤오영은 수필문학은 작가의 삶과 일상에 토대를 둔 것이야 한다고 믿는다. 그의 많은 작품들은 일상의 단편을 계기로 촉발한 수상(隨想)이다. ‘방망이 깎던 노인’, ‘마고자같은 잘 알려진 글들뿐만 아니라 사발시계도 무 구덩이를 파는 아내의 뒷모습에서 예전에 시계를 파묻던 기억을 되살린다.

 

수필문학은 청춘의 글이 아니요 중년과 노년의 글이다. 독자의 가슴을 요동치게 하는 격정적인 글이 아니다. ‘곶감과 수필’, ‘엽차와 인생과 수필’, ‘양잠설등 비유 대상은 다르지만 작가의 뜻은 오롯하다. 평범한 생활에서 위대성을 낚아 올리려면 수양과 연륜이 필요한 법이다.

 

평범한 생활 속에서 향기를 거두고 품을 쌓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수필이란 거기서 우러난 차향이다. 평범한 생활 속에서 진실을 깨치고, 그것을 아끼고, 또 음미하고 기뻐하고, 눈물과 사랑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 즐길 수 있는 글이다. (P.150)

 

윤오영의 호는 치옹(痴翁)’이다. 무엇이 그리 어리석을까. 그도 일개 생활인으로서 분명 야망을 품었을 것이다. 야심을 좇고자 하면 꼿꼿함을 버리고 낮은 곳으로 몸을 숙여야 한다. 그는 도저히 그리 할 수가 없다. ‘찰밥’, ‘치아에서 배어나는 씁쓸함은 시속의 명리에 맞추지 못하고 고집스럽게 고결함을 추구한 데 대한 일말의 자탄이리라.

 

어머니! 야망에 찼던 어머니의 아들은 이제 찰밥을 안고 흰 터럭을 바람에 날리며, 손등으로 굵은 눈물을 닦습니다. (P.36)

 

그의 글쓰기는 중국 명과 청 시대의 소품 및 연암 박지원을 전범으로 삼는다. 전자에서 동양적 수필문학의 현대적 근원을 발견한다. 연암의 글을 열애하지만 한계도 잊지 않는다. 여러 작품들에서 등장하는 한국적, 전통적 제재가 단지 회고적 취향을 벗어나 은은한 여운을 현대 독자에게도 드리우는 연유다. ‘촌가의 사랑방’, ‘오동나무 연상등이 풍기는 정서가 그러하며, 작가가 동매실주인(桐梅室主人)’이란 호를 사용한 것도 같은 뜻에서일 것이다.

 

한 세기 전에 태어났고 반세기 전에 발표된 글에 당대적 감각을 요구할 수 없다. 그의 사상적, 문학적 배경은 분명히 우리 고전과 인문학적 소양에 근거한다. 그럼에도 진부하지 않고 잔잔한 여운을 주는 까닭은 그의 문장이 사상의 표피가 아닌 심금을 건드려서일 것이다. 이 점이 이전 독서에서 내가 간과하거나 덜 주의를 기울인 부분이다.

 

모름지기 바램은 윤오영의 수필작품들과 <수필문학입문>이 한데 모아져 괜찮은 장정을 입히고 당당한 단행본으로 출판되었으면 한다. 남긴 저작도 그다지 없으니 이 자체가 그의 문학전집이 될 터이니.

 

마지막으로 그의 독서론에서 인상 깊은 대목을 따온다.

 

나는 옛사람의 글을 읽고, 내 체험 위에서 내 인생을 음미하며, 내 영혼은 천고미도(千古未到)의 사색의 길을 끝없이 걸어간다. (P.2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할머니의 연애시대 창비청소년문학 3
벌리 도허티 지음, 선우미정 옮김 / 창비 / 200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름 없는 너에게>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어 본다. 청소년문학이지만 도허티의 주인공은 여전히 고교과정을 마치고 대학 진입을 앞둔 제스라는 여학생이다. 작가가 유달리 이 나이 때의 주인공을 선호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청소년과 성인의 과도기이자 접점이기에 생각할 여지가 많다고 판단해서일까.

 

나는 허물을 벗고 있는 한 마리 뱀이었다. 반짝거리는, 생명을 가진 그 무엇, 짙은 풀숲에 웅크린 보석 같은 것. 나는 진저리를 쳤다. 소름이 돋았고, 무서웠다. (P.18)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다>라는 영화가 있다. 본 적은 없지만 제목만은 친숙하다. 비밀, 가장 친한 친구, 연인, 부부 또는 가족 사이에도 비밀이란 존재는 빠지지 않는다. 꽁꽁 숨겨놓은 비밀, 그저 하찮다면 무시하고 외면해버릴 텐데, 그로 인해 마음을 온전히 열어놓지 못하고 오해와 갈등을 유발한다면 어찌할지. 창피함과 두려움과 아픔을 무릅쓰고 서로의 비밀을 공유한다는 것이 용이할까.

 

가족이란 매우 소중하고 친밀한 관계이지만 역설적으로 가까우면서도 먼 관계이기도 하다. 상처 입으면 회복되기 어렵기에 오히려 더한층 조심하고 피하게 된다. 가족 간에 비밀을 털어놓고 울고 웃으며 마음의 벽을 허무는 게 가능할까. 밝고 행복하고 평온한 얼굴의 이면에 가슴 아픈, 시릴 듯이 눈물겹고 파문을 일으킬 과거사. 더구나 그것이 가족사에 얽힌 것이라면.

 

대학 입학을 위해 떠나는 걸 축하하는 파티에서 제스의 가족들은 서로의 비밀과 사랑 이야기를 공유한다.

 

제스 외조부모 브라이디와 잭의 사랑 이야기. 가톨릭과 개신교의 종교적 차이 극복은 물론 사랑 하나에 전부를 걸고 홀로서기를 시도하는 대담한 로맨스. 사랑은 용기다.

 

백마 탄 왕자님을 꿈꾸는 여늬 소녀들과 다를 바 없는 제스의 할머니 도로시. 무도회에서 만난 왕자님과의 극적인 로맨스를 꿈꾸지만 공상에 허우적대는 대신 현실을 인정한다. 삶은 현실이므로.

 

제스의 아버지 마이클의 결혼 이야기는 제스 자신에게도 중요한 관심거리이므로 제법 길게 이어진다. 사고뭉치이자 스스로 실패작이라 여기는 그가 맘에 드는 여자친구를 사귀기 위해 동분서주 애쓰는 장면, 반면 마음씨는 모질지 못해 자신을 쫓아다니는 여자애를 끊지 못하고 쩔쩔매는 마이클의 모습이 절묘하게 오버랩 되면서 제스 엄마와 만나게 되는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사랑은 동정이 아니다. 루씨가 마이클에게 말했듯이.

 

이게 바로 사랑에 대한 내 생각이야. 평등하지 않다면, 그 사랑은 진짜가 아니야. 그리고 진짜가 아닌 사랑은 소유할 가치도 없는 거지. (P.118)

 

제스에겐 큰오빠가 있었다. 몸이 성치 못하고 어른이 될 때까지 살 수 없었던. 대니에 대한 추억은 가족 간 아련함의 근원이다. 그리고 죄책감도. 첫째 아이와는 사뭇 달랐던 제스의 작은오빠 존. 가족 간은 혈연의 끈으로 묶여 있지만 그것이 친밀과 공감, 유대를 담보하지는 못한다. 서로 간에 마음을 열고 상대를 받아들이기 위한 의식적 노력은 타인과의 관계에서만 해당하지 않는다. 비둘기 돌보기를 통한 제스 아빠와 작은오빠 간에 메워지는 간극. 사랑은 노력이다.

 

운하 길의 데이비 할아버지 편에서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 역시 사랑의 의미에 대해서다. 지탄받고 처벌받을 당사자는 열일곱 살의 기억에 갇혀 있는 노인네이지만, 제스는 달리 생각한다. 외롭고 상처받은 이를 따스하게 보듬을 수 있는 마음. 사랑은 따뜻함이다.

 

그제야 나는, 할아버지가 어떤 의미로 사랑이란 키스하고 껴안는 게 전부가 아니라고 말한 건지 이해할 수 있었다. (P.178)

 

루이 이모할머니와 길버트 할아버지 간의 관계 역시 사랑의 한 형태임에 틀림없다. 그것이 행복한 사랑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랑을 위해 일체의 것을 포기해야 하며, 그 사랑이 어둡고 슬픈 결말로 이어질 것을 알고 있다면. 카슨 매컬러스의 주인공들만큼이나 기이하며 슬픈 사랑이다. 사랑은 사랑 자체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제스 자신의 이야기. 도로시 할머니처럼 디스코장에서 만난 멋진 남자. 탄로 난 정체와 상처 입은 첫사랑. 그리고 스티브와 만남과 작별. 사랑은 깨우침이다.

 

제스가 타고 떠나는 기차는 어린 시절을 벗어나 성년으로 향하는 여정을 상징한다. 축하파티는 일종의 통과의례다. 가족에서 사회로, 독자적인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기 위한 기쁨과 고통이 교차하는.

 

하지만 나는 어린애가 아니었다. 그리고 절대로, 결코, 두 번 다시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지 못할 터였다. 뱀이 드디어 허물을 벗은 것이다. (P.22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필문학입문
윤오영 지음 / 태학사 / 2001년 5월
평점 :
절판


윤오영의 수필작품에 대한 소감은 <방망이 깎던 노인>(범우사) 편에서 이미 밝혔다.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개인적 호오가 병존한다. 교과서에 실릴 정도라면 참으로 빼어난 수필문학 작품일 텐데 심경에 썩 그리 다가오지 못하는 뭔가 애매함이랄까. 여기에는 결국 일개 고등학교 선생님이 끄적거린 신변잡기적 에세이가 아니겠는가 하는 폄하의식도 반영되었을 것이다.

 

그가 쓴 수필문학 개론서가 있다 길래 호기심에 슬쩍 읽어보았다. 대충 보다 재미없으면 덮어버리라 생각하고. 그리고 단숨에 끝쪽까지 읽고 말았다. , 이분 보통분이 아니시구나. 절로 탄성이 나온다.

 

문학 장르를 구분할 때 시, 소설, 희곡 그리고 수필로 분류한다. 전자의 셋은 성격이 분명하고 작가의 문학적 위상도 높다. 후자의 경우는 학창시절의 교과서에도 앞의 셋을 제외한 일체의 문학적 글. 또한 붓 가는 대로 쓴 글등으로 표현하고 있던 게 기억난다. 게다가 미셀러니니 에세이니 하는 구분도 떠오른다. 물론 시중에는 모두 수필류를 에세이로 지칭하지만.

 

저자는 문학으로서 수필의 정체성과 체계를 확립하기 위해 일평생 노력하였다. 이 책은 그 노력의 산물이며 수십 년이 경과한 지금 시점에도 여전히 신선한 자극을 준다. 전체 2부와 부록으로 구성되었는데, 1부는 수필문학 글쓰기, 2부는 수필문학 개론으로 구분된다.

 

저자에 따르면 훌륭한 수필 쓰기는 웬만한 시나 소설 쓰기보다 어렵다. “수필은 인생의 낙수”(P.24)란 표현처럼 수필은 작가의 개인적 체험과 사상을 바탕으로 하며 익명과 허구의 탈을 쓸 수 없기에 벌거벗듯이 작가 자신을 독자에게 노출해야 하는 부담이 있다.

 

문맥(文脈), 문세(文勢), 문정(文情)과 서사(敍事), 설리(說理), 서정(敍情), 사경(寫景)은 본격적 수필 쓰기에 필요한 기법에 관한 내용이다. 소제목 자체가 생경한 한자투여서 딱딱한 느낌을 주지만 막상 내용 자체는 이해에 어려움이 없다. 각 항목을 설명하는 저자의 어조는 명쾌하며 단호하기조차 하다.

 

내용의 줄거리를 따라 정서를 실어가는 물줄기가 수필의 문맥이라면 이 물줄기를 밀고 나가는 기세가 곧 문세다. 이것이 없으면 글의 힘이 없고, 생생하게 넘쳐 흘러 독자를 육박하는 긴장이 없다. (P.41)

 

설리에 낭만이 없으면 문장이 각색하고 기경한 표현을 동반하지 아니하면 청신한 맛이 없고, 유머가 없으면 문장의 고갈을 면하기 어렵고, 정열이 없으면 진실감을 주기 어렵고, 묘사의 구사가 아니면 독자에게 기쁨을 주기 어려우니, 문장이란 실로 어려운 것이다. (P.77)

 

저자는 동시대에 명수필로 회자되던 글들을 자신의 엄격한 잣대로 평가한다. 피천득, 김용준, 이은상, 박종화, 양주동, 계용묵, 정비석, 김진섭 등의 글이 좋은 문장으로 예시되거나 줄줄이 흠결을 눈앞에 드러낸다.

 

저자는 무엇보다도 수필의 문학성을 확립하고 싶어 한다. 통상의 수필에서 비문학 유형을 배제한 순수한 문학으로서의 수필을 저자는 수필문학으로 지칭한다. 이하에서 잠시 저자의 수필관을 들여다본다.

 

수필은 자유로운 산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문학작품으로서의 산문이라야 한다. (P.161)

 

다른 문학은 마음 속에 얻은 것을 밖으로 펴지만, 수필은 밖에서 얻은 것을 안으로 삼킨다. 그러므로 수필의 대상은 자기다. 결국 수필은 외로운 독백일 수밖에 없다. (P.174)

 

수필과 인생은 생활의 연마 속에서 함께 형성되어 가는 것이다. (P.188)

 

수필은 그 전체에서 하나의 시격(詩格)을 얻어야 한다. 이것이 특히 동양적인 수필의 높은 경지다. (P.199)

 

솔직히 수필문학을 이렇게 본격적으로 고찰한 저서는 처음 접해 본다. 대개는 문학개론의 일개 지나가는 파트에 불과할 뿐인데. 더군다나 수필문학을 대하는 저자의 태도는 엄정하며 확고하다. 그것은 문학으로서 수필을 바로잡고자 하는 저자의 노심초사의 산물일 것이리라.

 

이쯤에서 저자 윤오영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렇듯 높은 기준을 설정한 그였다면 자기 자신의 글도 이 기준을 적용하였을 것은 분명하다. 그의 수필문학 작품들의 수가 그리 많지 않은 것은 엄정한 비판의 잣대에서 살아남은 글들만 세상에 공개하였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제대로 된 평양냉면은 초심자가 처음 맛보면 그 무미함에 실망을 느낀다고 한다. 이후 수차 기회를 갖다보면 서서히 담백하며 미묘한 맛에 빠져든다. 나 또한 그러한 경험을 하였다. 그의 방망이 깎던 노인마고자등 일련의 수필작품은 수십 년 전의 시대적 배경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교과서 수록작이기에 어쩔 수 없이 묻게 된 진부한 손때를 벗겨보면 집필 당시 순수한 민낯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