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곶감과 수필 ㅣ 태학산문선 301
윤오영 지음, 정민 엮음 / 태학사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수필문학입문>을 읽고 윤오영을 다시 알고 싶어졌다. 수필문학을 향한 뜨거운 애정, 수필문학을 정립하기 위한 단호한 의지와 정연한 논리 등은 일개 단순한 글쟁이로 치부할 수 없는 높은 식견과 고고한 기상을 보여준다. 명수필가 피천득의 외우(畏友)라고 하니 범인은 분명 아닐 성 싶다.
그의 글은 간결하고 명료하다. 일체의 구질구질함과 중언부언이 없으며 가식 없는 담백함이 배어난다. ‘측상락(厠上樂)’을 읽으면 그의 성품을 알 수 있다. ‘처빈난(處貧難)’에서는 그의 오롯한 삶의 태도를 깨닫게 된다.
......대단스럽지도 못한 남들과 어깨를 맞추기 위하여 자기의 신조와 고집을 꺾고, 한가로운 자유의 행복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P.171)
윤오영은 수필문학은 작가의 삶과 일상에 토대를 둔 것이야 한다고 믿는다. 그의 많은 작품들은 일상의 단편을 계기로 촉발한 수상(隨想)이다. ‘방망이 깎던 노인’, ‘마고자’ 같은 잘 알려진 글들뿐만 아니라 ‘사발시계’도 무 구덩이를 파는 아내의 뒷모습에서 예전에 시계를 파묻던 기억을 되살린다.
수필문학은 청춘의 글이 아니요 중년과 노년의 글이다. 독자의 가슴을 요동치게 하는 격정적인 글이 아니다. ‘곶감과 수필’, ‘엽차와 인생과 수필’, ‘양잠설’ 등 비유 대상은 다르지만 작가의 뜻은 오롯하다. 평범한 생활에서 위대성을 낚아 올리려면 수양과 연륜이 필요한 법이다.
평범한 생활 속에서 향기를 거두고 품을 쌓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수필이란 거기서 우러난 차향이다. 평범한 생활 속에서 진실을 깨치고, 그것을 아끼고, 또 음미하고 기뻐하고, 눈물과 사랑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 즐길 수 있는 글이다. (P.150)
윤오영의 호는 ‘치옹(痴翁)’이다. 무엇이 그리 어리석을까. 그도 일개 생활인으로서 분명 야망을 품었을 것이다. 야심을 좇고자 하면 꼿꼿함을 버리고 낮은 곳으로 몸을 숙여야 한다. 그는 도저히 그리 할 수가 없다. ‘찰밥’, ‘치아’에서 배어나는 씁쓸함은 시속의 명리에 맞추지 못하고 고집스럽게 고결함을 추구한 데 대한 일말의 자탄이리라.
어머니! 야망에 찼던 어머니의 아들은 이제 찰밥을 안고 흰 터럭을 바람에 날리며, 손등으로 굵은 눈물을 닦습니다. (P.36)
그의 글쓰기는 중국 명과 청 시대의 소품 및 연암 박지원을 전범으로 삼는다. 전자에서 동양적 수필문학의 현대적 근원을 발견한다. 연암의 글을 열애하지만 한계도 잊지 않는다. 여러 작품들에서 등장하는 한국적, 전통적 제재가 단지 회고적 취향을 벗어나 은은한 여운을 현대 독자에게도 드리우는 연유다. ‘촌가의 사랑방’, ‘오동나무 연상’등이 풍기는 정서가 그러하며, 작가가 ‘동매실주인(桐梅室主人)’이란 호를 사용한 것도 같은 뜻에서일 것이다.
한 세기 전에 태어났고 반세기 전에 발표된 글에 당대적 감각을 요구할 수 없다. 그의 사상적, 문학적 배경은 분명히 우리 고전과 인문학적 소양에 근거한다. 그럼에도 진부하지 않고 잔잔한 여운을 주는 까닭은 그의 문장이 사상의 표피가 아닌 심금을 건드려서일 것이다. 이 점이 이전 독서에서 내가 간과하거나 덜 주의를 기울인 부분이다.
모름지기 바램은 윤오영의 수필작품들과 <수필문학입문>이 한데 모아져 괜찮은 장정을 입히고 당당한 단행본으로 출판되었으면 한다. 남긴 저작도 그다지 없으니 이 자체가 그의 문학전집이 될 터이니.
마지막으로 그의 독서론에서 인상 깊은 대목을 따온다.
나는 옛사람의 글을 읽고, 내 체험 위에서 내 인생을 음미하며, 내 영혼은 천고미도(千古未到)의 사색의 길을 끝없이 걸어간다. (P.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