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이록 : 현대어본 조선 왕실의 소설 3
임치균.이래호 옮김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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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재본 소설을 현대어로 옮겨 조선 왕실의 소설이라는 명칭으로 소개하고 있다. 목록을 보니 익히 들어보지 못한 작품들이어서 기대된다. 이 작품은 중국 송나라를 배경으로 손기라는 영웅적 인물의 활약상을 기술하고 있다.

 

위인의 탄생은 불쑥 이루어지지 않는다. 존경할만한 부모, 천상의 간택, 신비한 태몽, 그리고 앞날의 예언 등 모든 필요충분조건이 갖추어져 독자가 마땅히 그러할 수밖에 없음에 고개를 끄덕여야 한다. 손기 또한 마찬가지다. 다만, 손기에게는 치명적 약점이 있었으니 초라한 외모와 어리숙한 언행이 그것이다. 손아랫동서인 소운성의 총명과 활달한 언행과는 더욱 극적으로 대비된다.

 

소운성의 희롱으로 수모를 당한 손기가 가출하여 단기간에 신선의 도를 깨우치는 과정은 간략하게 기술되는데, 신이한 자질이 그에게 내재되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 책은 도교의 배경이 두드러진다. 옥황대제, 숭산 북궁, 옥허관 여도사 등은 모두 손기의 탄생과 연관되어 있다. 손기가 동서에게 신선의 도를 설명하는 대목은 매우 인상적이어서 이 소설의 작가가 도교에 정통해 있음을 알게 해준다. 손기가 신통력을 발휘하여 업룡을 격퇴하고 천사(天師)가 되어 부귀영화를 누리는 훗날의 장면도 신통력과 도술이라는 능력에 힘입은 바가 크다. 또한 소운성 일행이 천사부를 방문할 때 겪게 되는 그 위엄과 웅장함은 비록 과장되었지만 임금의 스승으로 일인지하의 자리에 있는 고귀한 지위를 현저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영웅은 시대와 나라가 역경에 처할 때 홀연히 나타나 세상을 구원하는 법. 손기도 이에 다르지 않다. 궁중에 뿌리 깃든 요괴인 업룡의 출현과 임금의 와병. 초월적 존재이므로 세속의 수법으로는 퇴치가 불가능하다. 결국 도술의 힘에 의존해야 하는데 당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안록산과 주전충을 낳게 할 정도로 사악함으로 가득 찬 정령이므로 범상한 도사의 능력으로는 대처할 수 없다.

 

손기가 다섯 마리의 용을 소환하기 위하여 준비를 하는 과정은 장엄함이란 측면에서 제갈량이 동남풍을 빌기 위하여 단을 쌓는 장면을 상기시킨다.

 

업룡의 머리를 베지 못하여 그 해가 백년 후 동북방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P.128)

 

업룡은 물리쳤지만 화근을 제거하지는 못하였고, 손기는 예언한다. 훗날 여진족의 금나라로 인해 송나라가 전란에 휩싸이게 됨을 암시.

 

언뜻 보기에도 허황되기 이를 데 없는 제재와 전개가 시종일관인 소설. 여기서 당대 사람들은 무슨 의미와 가치를 추구했는지 궁금하다. 단순히 재미였을까. 현대인들도 영화나 TV 드라마에서 비루한 현실을 초월하는 환상 속에서 대리만족을 찾는다.

 

작품 해설에 따르면 이 작품은 대하소설인 <소현성록>의 등장인물과 사건을 차용하여 재구성한 파생작이라고 한다. 원작이 당대에 상당히 인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을 뿐더러 원작에서 아쉬움과 동정의 대상이었던 인물을 환골탈태시키고자 하는 독자의 바램을 짐작케 한다.

 

무엇보다도 농후한 도가적 색채가 인상 깊다.

 

신선의 도는 멀고 깊어 천지와 하나이니 어찌 평범한 사관이 붓을 들어 전부를 기록할 수 있으리오? 신선의 도는 천지의 글자도 옥에 새기고 금으로 잠가 명산대천에 깊이 감추어 신령이 삼가 지키고 있다네. (P.98)

 

하늘에는 신선이 있고 인간 세상에는 재상이 있으니 천상천하의 그 귀한 것이 다를 바가 없는 법이네. (P.101)

 

미소개 소설의 대중화에 초점을 두었기에 주석이 거의 없음에도 전체적 줄거리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은 없다. 다만 시대적, 문화적 지식이 요구되는 대목은 깊은 독해를 위하여 부가적 설명이 뒤따랐으면 한층 좋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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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은 흐른다 (합본) 다림 청소년 문학
이미륵 지음, 윤문영 그림, 정규화 옮김 / 다림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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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출신의 독일 작가가 모국과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쓴 작품이다. 일찍이 범우사에서 반복하여 소개하였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이게 뭐지, 하며 가벼이 넘겼는데 문득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때마침 아이들에게 읽힐 만한 적당한 책도 찾고 있었기에 주저하지 않고 펼쳐들었다.

 

구한말 황해도 해주 출신의 작가는 경성으로 유학 왔으나 삼일운동에 가담한 후 체포를 피해 유럽으로 도피한다. 독일에 정착한 작가는 현지인들에게 낯선 자신의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소개를 겸하여 자전적인 작품을 독일어로 집필한다. 이 소설은 당대 가장 빼어난 독일어 문학작품으로 평가받아 교과서에도 수록될 정도였다. 이 정도까지 대략적인 작품 소개라고 할 수 있다.

 

1940년대의 독일 사람에게 있어 작가는 낯선 나라의 일개 동양인에 불과했을 것이며, 한국, 혹은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라는 인식밖에 없었을 것이다. 제아무리 유구한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식민지는 찰나에 불과하다고 강변해봤자 그들에게 먹혀들 리 없을 터이니 작가는 차라리 모국을 배경으로 아름답고 정겨운 경치와 소박하고 따뜻한 사람들, 화려하지 않지만 은근하고 독자적인 문화를 지닌 나라와 사람들을 글로써 소개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을 것이다.

 

이 예술인이 발걸음을 조금씩 옮기며 흥이 나서 조용한 밤을 향해 타령을 계속 불어 대는 동안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고, 말소리 또한 내지 않고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새 일본인 거리 남쪽에서는 수많은 불빛이 반짝거렸고, 북쪽의 옛 한국인 지역은 어둠 속에 잠들어 있었다. 삼각산 위에는 벨벳처럼 검은 밤하늘이 펼쳐졌고, 옛 창덕궁은 과거 속으로 잠겨 들었다. (P.164)

 

번역본만으로도 이토록 아름다운 글인데, 빼어난 독일어 원문으로 표현된 문장을 접한 이국인들의 감회는 어떨지 궁금함을 자아낼 정도다.

 

모국을 떠나온 지 약 이십 년이 지나버린 시점. 작가 자신의 입장에서도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머나먼 조국에 대한 한 가닥 인연과 추억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았으리라. 나이 들수록 선연해지는 향수와 어린 시절의 갖가지 추억은 그에게 가슴 속에만 담아두지 않고 글로 형상화하여 주변에 공유하길 요구하지 않았을까. 그리운 가족과 친구들을 비록 현실에서는 재회하지 못하더라도 문장 속에서나마 영원히 기억하고 싶었으리라.

 

이 작품은 또한 성장소설에 해당한다. 일개 철부지였던 소년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구한말 시골의 정서, 건강 악화로 인한 요양 생활과 일제 지배가 시작된 후 변질되는 사회 세태, 부모와 속 깊게 교감하던 장면들, 그리고 유학생활과 식민지배에 대한 반감과 전환되는 인식. 일경의 단속을 피해 불안과 초조에 숨어 지내던 체험, 그리고 목숨과 일생을 건 출국 시도. 연대기 순에 따른 단순한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어린이에서 소년을 거쳐 타지에 홀로 남게 된 당당한 청년에 이르는 성장은 개인과 시대를 함께 아우른다.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초기에 이르기까지 아직 때 묻지 않은 옛날의 우리네 사람들의 삶과 문화와 정서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읽으면 충분할 것이다. 두드러지거나 대단한 게 아님에도 문득 회상하면 정겨움이 배어나오는 그 아련함. 우리 아이들이 과연 그것을 알 수 있을까. 이미 백 년도 훌쩍 경과한 첨단 현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이. 한편 그것을 알지 못한다면 참으로 딱하고 불쌍함마저 드는 것은 어떤 연유일까.

 

작가 이미륵의 독일에서의 삶도 평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의 혼란과 나치의 대두, 그리고 히틀러 치하의 독일과 제2차 세계대전. 그런 그가 꿋꿋이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잊지 못할 모국과 고향, 가족에 대한 그리움 아니겠는가. 그런 면에서 작가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지병으로 세상을 뜬 것은 차라리 다행이라고 하겠다. 비록 갓 오십을 넘은 이른 나이지만, 가뜩이나 별 볼일 없는 신생 국가가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사분오열되는 모습을 목도한다면 가슴은 찢어지고 말았을 테니.

 

표제는 작가가 중국으로 탈출하며 바라본 압록강의 풍경에서 가져왔다. 이제 떠나면 다시는 보지 못할 수도 있는 모국. 국경선을 따라 쉼 없이 흐르는 강줄기는 처연함마저 안겨준다.

 

오랜 옛날부터 우리 고국을 이 무한한 만주 벌판과 분리시키고 있는 국경의 강은 쉬지 않고 흐르고 흘렀다. 이쪽은 모든 것이 크고 어둡고 진지했으나, 저쪽은 모든 것이 작고 맑게 보였다. 초가집들이 언덕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벌써 저녁 연기가 이 집 저 집의 굴뚝에서 솟아올랐다. 저 멀리 맑은 가을 하늘 아래에 산들이 잇달아 늘어서 있었다. 산은 햇빛에 빛나고 있었고, 황혼의 아름다운 빛에 물들었다가 서서히 푸른 노을 속으로 잠겨 갔다. (P.187~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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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와 초콜릿 공장 (양장) - 로알드 달 베스트
로알드 달 지음, 퀸틴 블레이크 그림, 지혜연 옮김 / 시공주니어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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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본 동명의 영화의 잔상이 뇌리하게 강렬하게 남아 있다. 원작소설 읽기에는 대체로 불리한 게 일반적이지만 이 경우는 유익한 점도 있다. 무엇보다 화려한 색채의 그로테스크함과 색채들의 선명한 대비는 상상력을 시각화하는 영상의 장점이다. 그만큼 이 소설에서 색채적 효과는 두드러진다. 초콜릿 공장뿐만 아니라 찰리의 가족과 집에서도.

 

작품은 현실을 기반한 듯 하면서 기이한 상상을 불어넣고 있다. 윌리 웡커는 초콜릿 공장을 일행에게 안내하면서 무엇이 바쁜지 연신 달음박질 한다. 언뜻 지적으로 뛰어난 듯 보이지만 허술한 구석이 노골적이다. 게다가 움파룸파 사람들이라니. 지리 교사인 솔트 부인이 알지 못하는 움파룸파에 대해 웡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희한한 얘기만 늘어놓는다. 불리하거나 원치 않을 경우에는 슬그머니 못들은 척 외면하는 습관이 곧 알 수 있다.

 

작가가 던지는 메시지는 움파룸파 사람들의 노래를 통해 명백하다. 멍청한 욕심쟁이 아우구스투스 굴룹, 껌만 씹어대는 버르장머리 없고 못돼 먹은 바이올렛 뷰리가드, 버르장머리 없는 버루카 솔트, 텔레비전만 보는 마이크 티비. 특히 버루카 솔트와 마이크 티비는 그 책임이 부모에게 있음을 강조한다. 웡커가 어리석은 네 친구들이라고 부른 네 아이는 결국 중간에 탈락하고 찰리만이 끝까지 남는다. 찰리가 남게 된 이유는 네 아이와 비교하면 쉽사리 이해할 수 있다. 그가 사고와 행동 면에서 다른 아이들과 전혀 다르다는 점은 비교적 길게 소개된 찰리의 가족관계와 어려운 가정형편, 그리고 웡커의 특별한 초대장을 얻기 위한 노력에 동참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통해 분명하다.

 

이 작품이 발표된 1960년대는 미국이 대량생산 체제 중심의 자본주의 경제가 극도로 발전을 거듭하며 경제적으로 세계 초강대국으로 거듭나던 시절이다. 또한 사회에서 전통적 가치관이 쇠퇴하고 자유분방함이 최고의 덕목을 떠오르던 시절이다. 이를 감안하면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추론이 가능하다. 극심해지는 빈부의 격차와 사회적 가치의 불안정을 찰리네 가족과 네 아이들 가족으로 전형화하고 있다. 처음 네 장의 초대장이 발견되었을 때 이들에 대한 뉴스를 접한 찰리네 가족의 반응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또한 웡커가 찰리에게 대하는 태도가 나머지 아이들과는 확연히 차이가 있음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찰리의 질문에는 친절하게 답하는 반면, 다른 아이들의 말은 무시하거나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특히 마이크 티비에게 유독 정도가 심하다. 이로써 웡커가 찰리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점과 마지막 승자가 찰리임은 예정된 수순이라고 볼 수 있다. 모든 동화의 공통점인 행복한 결말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작품이 현대 미국의 대표적 동화로 성공한 연유는 무엇보다 초콜릿의 힘이 크다. 각양각색의 초콜릿과 사탕, 껌 등 아이들이 좋아하는 군것질거리를 소재로 하여 여기에 초콜릿 폭포와 강, 텔레비전 초콜릿, 식사대용 껌 등 기상천외한 상상력과 결부하였으니 독자들이 열광하지 않을 수 없다. 대놓고 지적하는 따끔한 교훈과 훈계마저도 거부감을 없앨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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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체스코의 작은 꽃들 세계기독교고전 14
우골리노 지음, 박명곤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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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체스코에 관한 성자담 모음집이다. ‘작은 꽃들은 명문집을 뜻한다고 한다. 프란체스코 사후 1세기 후에 전승되고 수집한 이야기들이므로 당대의 신앙적 현장감이 그대로 남아있다. 더욱이 프란체스코뿐만 아니라 버나드 형제, 레오 형제, 주니퍼 형제와 길레스 형제들을 포함한 그의 제자들의 행적도 다수 수록하고 있어 초기 프란체스코 교회의 면모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앞서 읽은 헤르만 헤세의 프란체스코 글을 통해 기본적인 지식을 가지고 책에 접근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전 특유의 낯섦과 충실함에 놀라게 된다. 종교적 차이 여하를 떠나서 일단 이야기 자체가 흥미롭다. 비이성적이고 터무니없을 것 같은 행위에서 종교적 가르침이 배어나며, 마귀를 쫓아내며 이적을 행하는 등 전설과 설화에서 기대할 법한 일화들이 가득하다.

 

이 모든 어록과 행적이 지향하는 바는 동일하다. 프란체스코가 신앙 면에서 얼마나 뛰어난지를 입증한다. 그는 말 그대로 예수를 그대로 따르고자 하였다. 가족을 버리고 자발적 가난을 추구하며, 한없는 겸손과 고행을 실천하며 묵상과 설교의 길을 따랐다. 이러한 행적을 보여주는 일화들에서 수도사들과 민중들은 1천여 년이 지나면서 때가 묻고 간과되었던 그리스도의 참 가르침이 무엇이며 이를 따르는 올바른 길이 어떠한지를 묻고 있다.

 

그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위하여 기도하시고, 한 사람 곧 가난한 작은 거지 프란체스코를 통하여 자신의 생활과 수난을 새롭게 하시기를 원하셨다. (P.244)

 

무엇보다도 그 유명한 오상(五傷)’에 얽힌 실체를 알 수 있는데, 헤세는 언급하지 않았던 사항이다. 그는 행위와 생애 자체로써 뛰어난 전형적 인간을 찬미한 것이지, 기적과 같이 초자연적으로 인간 자체를 가리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쨌든 오상(五傷)이 있었기에 프란체스코는 사후 성인으로 추증되었고,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여지껏 존속하고 있다. 다만, 오상(五傷)을 단지 흔적에 불과한 피상적으로만 이해했는데, 프란체스코 자신에게는 큰 고통을 수반하였다고 하니 현실적 상처임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너에게 나의 수난의 상징인 오상을 주어 너로 하여금 나의 기수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 또한 내가 죽던 날 이 거룩한 상처의 공로로 말미암아 연옥에서 발견한 모든 영혼들을 구원해낸 것처럼, 너의 죽음의 날에 네가 연옥으로 내려가서 그 오상의 덕으로 너의 세 수도회......와 네게 헌신한 모든 사람의 영혼을 데리고 천국으로 인도해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노라. (P.218)

 

프란체스코는 계시에 따라 묵상과 전도에 동등한 가치를 부여하였다. 깨우침을 얻기 위한 수행과 묵상도 중요하지만, 자신과 수도원 내에 가둬두지 않고 어리석고 고통 받는 민중들을 구제하는 데 진력하였다. 물론 오만하고 권위적이며 시혜적인 태도가 아니라 낮은 곳에서 섬기는 자세로 말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술탄을 회개시키거나 새에게 설교하는 유명한 장면도 이러한 시각에서 전모를 이해하게 되었다. 훗날 성 안토니가 물고기에게 설교하는 장면은 이에 대응하는 대목이다.

 

서론 부분을 통해 우리는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결코 평탄하게 발전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당대부터 수행과 전도의 비중에 대한 내부적 갈등이 존재했고, 프란체스코의 사후 신앙적 분열로 이어져 커다란 혼란을 빚게 되었다는 점도 알게 된다. 따라서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 중 몇 편은 이런 역사적 배경을 반영하고 있다. 엘리아스 형제는 이 분열을 초래한 주동자로 작품 내에서는 철저히 배신자이자 부정적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마사의 야고보 형제가 본 나무의 환상에 따르면 보나벤투라 교황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다. 이 모두가 작자의 종파적 입장과 관련되어 있음을 서론의 해설에서 가리킨다. 나무의 환상은 프란체스코 사후 수도회가 고난에 처할 것이며, 프란체스코와 요한 형제를 거치 자신들에게 이어지는 정통파만이 진정한 교회의 후계자라는 입장을 명백히 반영한다.

 

주님께서 달콤한 성령의 은혜를 충만히 채워 주셨기 때문에 프란체스코와 제자들은 함께 자신들의 몸을 벗어나 황홀경에 빠졌다. 그들은 죽은 사람들처럼 완전히 의식을 잃은 채 바닥에 누워 있었다. (P.83)

 

행적들을 읽다 보니 몇 가지 반복되는 전형이 눈에 띤다. 프란체스코와 수도사들은 깊은 묵상을 통해 그리스도와 직접적 교감하고 황홀경에 빠져 기절하곤 하였다. 수행 과정에서 엄격한 절제와 고난을 무릅쓰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세상을 경멸하는 현실 경시적 인식을 일관하였는데, 청빈과 겸손은 이의 일환으로 이해된다. 그는 현세의 고난을 무릅씀이 내세의 구원에 가깝게 될 것으로 믿었다. 앞서 읽은 헤르만 헤세의 글에서 이해된 프란체스카와는 상반된 모습이다. 이 작품에 따르면 밝고 유쾌하기는커녕 속세의 타락을 통렬히 비난하며 묵언과 고행의 수행으로 일관하는 음울한 수도사들이 연상된다.

 

그 모든 악과 모욕과 매질을 기쁨과 인내로써 참으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인하여 그 고난을 인내로써 참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 레오 형제요! 그것이 완전한 기쁨이라고 기록하라. (P.69)

 

승천 축일이 되자 성 프란체스코는 엄한 극기와 절제로 자신의 몸을 고행하고, 뜨거운 기도와 철야와 채찍질로 자신의 영혼을 위로하며 금식을 시작하였다. (P.208)

 

프란체스코와 그 형제들의 참모습이 무엇인지 혼란스럽다. 아무래도 다른 자료들을 더 읽어봐야만 할 것 같다.

 

신자가 아닌 탓에서 가톨릭 내에서 프란체스코의 위상이 어떠한지 알지 못한다. 이 책의 저자를 포함한 수도사들은 프란체스코를 제2의 예수 또는 예수의 최측근으로 이해하는 게 분명하다. 오상(五傷)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는 것, 프란체스코가 계시와 이적의 능력을 보유했다는 점, 또한 그가 고난에 처하고 임종을 맞이할 때 마귀들이 넘볼 수 없을 정도로 주위에 천사들이 지키고 있었다는 등등의 언급이 그러하다.

 

이 모든 것을 떠나서 인간 자체만으로 그의 행동은 매우 탄복할 만하다. 쉽지 않은 길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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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헤르만 헤세 컬렉션 (열림원)
헤르만 헤세 지음, 정성원 옮김 / 열림원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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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성 프란치스코[프란체스코]를 궁금해 왔다. 도대체 어떤 인물이고 무슨 활동을 하였는가. 분명히 기독교의 성인 중 한 명임은 틀림없을 텐데 별도의 관련 책도 있고, 리스트나 오네게르 같은 음악가 들이 그를 다루는 작품을 썼는지. 마침 도서관 서가를 지나치다 친숙한 헤르만 헤세가 그에 관한 글을 남긴 사실을 알게 되어 입문서 삼아 읽는다.

 

이 책은 작가의 머리말과 간략한 전기, 그리고 작가가 선별한 다섯 편의 성인담과 마지막으로 맺음말로 구성된 얄팍한 글이다. 부록으로 그림과 서평, 단편을 추가로 곁들였다. 이 글의 본문은 1904년에 발표되었다. 이때는 헤세가 그의 저명한 작품들을 발표하여 이름을 처음으로 알리기 시작한 시기와 맞물린다.

 

십대와 이십대 초의 열정의 시기에 무려 10여 년이라는 시간을 헤세는 프란치스코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고 하는데 무슨 연유였는지 머리말을 통해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세상의 주인인 로마 교회는 인류의 평화에 매진하기보다는 군비 확충, 동맹과 외교, 금지와 처벌에 더 기를 썼다. 두려움에 휩싸인 민중에게는 심각한 위기가 닥쳤다. (P.10)

 

세계가 자신의 욕심을 충족하기 위하여 가녀린 평화를 사정없이 깨뜨릴 때 고초를 겪는 것은 무수한 힘없는 평민들이다. 헤세는 제국주의가 절정으로 치닫던 시절 임박한 어둠과 고난의 시절을 예감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더더욱 평화를 지향하고 애호하던 한 인물에 주목했는지도.

 

순수하고 고귀한 사람의 삶은 늘 거룩하고 신비롭다. 그 삶은 엄청난 힘을 발산하고 저 먼 곳에까지 영향을 끼친다. 이 점은 그 옛날의 다른 영웅과 위대한 인물 들 대부분보다 아시시의 가난한 사람의 삶에서 훨씬 더 또렷이 드러난다. (P.65)

 

프란치스코는 극적인 삶의 방식을 살아간 사람이다. 한없는 방탕함에서 세상 누구보다 낮고 가난함으로. 세속의 명예를 추구하기 위한 출전에서 문득 계시를 받고 이후로는 세속의 영광은 뒤돌아보지 않는다. 심지어는 혈연관계마저도. 그의 온 몸과 마음은 오로지 하나님을 섬기는데 헌신한다.

 

프란치스코를 예수 바로 아래 위치시킨 오상(五傷)에 대해 헤세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 성자 프란치스코를 찬미할 뿐, 이성의 관점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적의 힘에 기대지 않는다. 따라서 기독교 성인으로서의 프란치스코를 알고자 한다면 헤세의 글쓰기에 다소 불만족을 느낄 수도 있겠다.

 

헤세가 바라본 프란치스코의 진면모는 그가 우월한 지위에서 민중을 경시하거나 훈도하지 않고 항상 낮은 곳을 지향하며, 동굴에 틀어박혀 세속과 단절되어 깨달음과 구원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프란치스코는 수행과 순례를 등가로 보았다.

 

프란치스코는 결코 우울한 빛을 띠며 참회하거나 세상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웃음 가득한 말과 기분을 북돋우는 유쾌한 말을 즐겼고, 아무리 고단하고 힘겨운 날이 닥쳐도 그 누구에게도 우울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P.45)

 

헤세는 이렇게 말한다.

 

영혼이 똑같이 순수하고 고귀했던 다른 성인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남들보다 조금 더 기억될 뿐이다. 프란치스코는 천진난만한 시인, 사랑의 위대한 스승, 모든 피조물의 겸손한 친구이자 형제였다. 사람들이 그를 잊는다면 돌과 샘, 꽃과 새 들이 그에 대해 이야기를 할 것이다. (P.33)

 

프란치스코가 마세오 형제의 질문에 답하는 성인담에서 그의 한없는 겸허함을 알 수 있으며, 새들에게 설교하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한 장면이다. 헤세는 프란치스코를 훗날 르네상스를 이끌어낸 선구자로 찬양한다. 그의 소박한 인간미와 온화한 품성을 예술로 재현하려는 정신이 교회의 경직된 틀을 탈피할 수 있는 영감과 활력을 주었다는 것이다. 진위 여부를 떠나서 매우 참신한 논거라고 하겠다.

 

프란치스코의 성인담은 풍부하게 남아있는데 비해 헤세는 <태양의 노래>를 포함한 여섯 편만을 선별하여 싣고 있다. 그의 창작의도가 프란치스코의 이적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점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 서평은 <성 프란치스코의 작은 꽃다발> 독일어판에 대한 것이며, 단편은 프란치스코의 유년 시절의 에피소드를 상상하여 그려낸 것이다. 한편 중간에 포함된 조토의 프란치스코 연작화는 프란치스코의 일생의 주요 대목을 프레스코화로 재현해 낸 것으로 13세기 당대에 성인 프란치스코의 위상을 짐작케 한다.

 

마지막으로 프란치스코에 대한 헤세의 종합적 평가를 되새겨 보고자 한다.

 

하늘의 천사가 씨앗을 뿌리듯 민중에게 근원적인 힘과 가슴속에서 불타오르는 말과 영원에 대한 생각과 태곳적 인류의 그리움을 뿌리는 사람은 드물다. 그리고 아름답게 꾸민 글과 예술이 아니라 오로지 순수하고 고귀한 존재로 수 세기에 걸쳐 사랑과 찬미를 받고, 지고지순한 곳에서 우리를 비추는 복된 별로 서 있으며, 어둠 속에서 이리저리 헤매는 인류를 위해 미소 짓는 찬란하고 온유한 길잡이와 통솔자인 사람 또한 드물다. (P.7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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