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 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
박태균 지음 / 책과함께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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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은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이하는 해다. 좀 늦었지만 일련의 한국전쟁 관련 서적을 읽어볼 계획이다. 왜냐고? 그건 내가 이 나라의 국민이며 이 나라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타이틀 부제처럼 한국전쟁은 ‘끝나지 않은 전쟁’이며, ‘끝나야 할 전쟁’이다. 우리나라의 미래는 한국전쟁의 진정한 종전 이후에 가능하다.

한국전쟁, 솔직히 아직은 6·25사변이라는 명칭이 더 입에 익숙하다. 수십 년간 교육받은 결과는 하루아침에 바꿔지지 않으니까. 한국전쟁은 종결된 전쟁이 아니며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리고 잊혀진 것도 아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여전히 우리의 가족 중 연장자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가지고 살아왔다. 나는 해당 없다고 섣불리 단언하지 말라. 우리 현대사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방면에서 좋건 나쁘건 한국전쟁과 그 후폭풍에 압도적인 영향을 받아왔다.

그런데 우리는 한국전쟁을 잘 알고 있는가? 교과서에서 나열된 단편적인 상식, 그리고 가끔씩 TV에서 보여주는 낯선 흑백화면들. 무척 잘 알고 있을 듯하지만, 사실은 대부분 혹은 전혀 실상을 알지 못한다. 그 원인은 무엇이고, 전개과정은 우리가 알 듯 영웅적이었는지, 휴전 협정과 그 이후는 어떠했는지 말이다.

저자는 대단히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가급적 한 발짝 떨어져서 차분한 어조로 한국전쟁에 관한 각종 주장과 학설들을 소개하고 비판한다. 물론 그도 뜨거운 한국 사람인지라 부분적으로 감정이 치솟는 것을 억제하지 못하는 때도 있다. 그것을 단점으로 칭한다면 가혹한 일일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여기서 한국전쟁에 관한 모든 것을 다루려고 하지 않는다. 개론서의 미덕에 충실하다. 여기서 드라마틱한 전쟁 장면의 전개를 기대한다면 실망할 것이다. 나도 조금은 실망하였다. 하지만 작가의 진짜 관심은 전쟁 그 자체가 아니라 전쟁으로 피해 받은 인간과 사회이며, 여기에 안타까움과 애틋함을 감추지 않는다.

한국전쟁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는 과거 분분한 논의가 있었다. 전통적인 전격 남침설에, 브루스 커밍스의 유명한 저작에 힘입은 수정설, 그리고 일부의 북침설 등. 그동안 학교에서 교육받은 원인은 물론 전격 남침설이다. 피에 굶주린 북괴가 전격적으로 38선을 넘어와 평화롭게 살아가던 남한을 일대 아수라장으로 몰고 갔다는 것이다.

브루스 커밍스의 공헌은 한국전쟁에 대한 기원을 단지 1950년에 맞추었던 인식을 1945년으로 끌어올린 데 있다. 해방과 곧 이은 분단, 그리고 분단의 고착과정이 전쟁의 진정한 원인이며, 1950년은 고조된 긴장이 분출된 시점이었다. 저자 박태균은 좌우익의 대립이라는 내적 기원론과 미국과 소련에 귀인하는 외적 기원론을 세심하게 분석 및 비판하고 있다. 부분적 책임은 있지만 전체를 귀인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다.

“한국전쟁의 기원을 정치세력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는 당시 정치세력들 사이에는 갈등의 골을 메울 수 있는 공통분모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P.55)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식민지 지역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이라는 문제에 부딪혔던 것이다...미국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정책을 실시해야 했다. 그리고 그러한 정책이 한반도의 분단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P.71)

“문제는 외세가 어떻게 한 나라를 분단시킬 수 있었는가를 해명하는 점이다. 이는 외세의 힘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분단을 하려는 외세의 힘에 부합하는 내부의 힘이 있어야 한다. 앞서 살펴본 다양한 정치세력의 갈등, 그리고 그 갈등을 통합으로 풀기 보다는 외세와 결탁하여 특정 지역에서라도 주도권을 장악하려 했던 정치적 이해관계가 바로 분단의 충분조건이 되는 것이다.” (P.81)

우리 현대사의 비극은 과거사가 청산되지 못한 상황에서 민족보다 개인의 야망이 우연성과 결부하여 필연성으로 나아갔다는 점이며, 그 여파는 21세기의 대한민국을 여전히 옥죄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재평가하자는 논의를 제기하고 있지만, 이승만은 건국의 아버지가 아니라, 올바른 건국을 망치고 민족과 국가에 영영 씻어낼 수 없는 상처를 만든 장본인이라는 명약관화한 사실은 결코 외면되거나 은폐할 수 없다.

“이승만 정부의 북진통일론은 이승만이 주장한 민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보여준다. 그가 주장한 민족은 보통 국민들로 구성된 민족은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민족 구성원들을 또다시 죽음으로 몰아넣는 북진통일론을 주장하지 말았어야 했다. 민족 구성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 대관절 어떤 민족을 구하려 했단 말인가? (P.297)

저자는 분단과 분단극복 활동에 특별히 한 장을 할애하여 서술하고 있다. 저자의 좌우합작세력에 대한 지지와 여운형의 실패에 대한 아쉬움은 무엇보다 그것의 성공이 분단의 조기 극복과 장차 다가올 거대한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는 유일한 해법이라는 인식에서이다. 하지만 역사는 주전파와 매파의 선명성을 선호하며, 주화파와 비둘기파는 언제나 회색분자로 매도당하기 십상이다.

“여운형은 통일국가가 수립되었을 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정치인이었다. 통일국가가 수립되었을 때 다양한 정치세력들을 포괄하면서 미국과 소련의 합의를 끌어낼 인물이 그 말고는 없었다.” (P.107)

“역사에는 결과론적으로만 평가해서는 풀리지 않는 측면이 있다...분단국가가 수립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국민 정서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당시 좌우합작운동과 남북연석회의는 사회적인 공감대를 충실하게 반영한 것이었다.” (P.109)

한국전쟁은 기본적으로 내전이다. 전개과정에서 미군과 유엔군의 참전, 중공군의 참전이 잇달아지면서 국제전으로 확전되었지만, 발발 최초에는 남과 북의 군대 간 힘겨루기였다. 미국과 소련의 정보 공개 이후 밝혀진 내용에 따르면 김일성의 남침 요청에 스탈린은 매우 망설였다. 그러다가 1949년 이후 정세 변화에 따라 개전해도 미국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고, 단시일 내에 전쟁을 종결지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전쟁을 승인하였다.

“전쟁 계획을 입안한 것은 북한이었다. 다만 개전 후 외부 세력이 개입할 경우 북한 단독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는 어렵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북한 지도부는 동분서주했다. 소련과 중국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다.” (P.170)

“전쟁은 기습적이고 신속해야 합니다. 남조선과 미국이 정신을 차릴 틈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강력한 저항과 국제적 지원이 동원될 시간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P.167)

전쟁의 전개과정을 저자는 남과 북의 각각 실패과정으로 파악한다. 북한은 당초 구상대로 조기에 남한을 통일하는데 실패하였다. 그리고 미군은 간신히 낙동강방어선을 확보하고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북한국의 허리를 끊는데 성공했지만 완전히 제압하는데 실패하였고 무분별한 북진으로 중공군의 참전과 뼈아픈 후퇴를 겪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의 연구에서 한국전쟁의 전개과정에 대한 서술은 대개 ‘성공’의 과정으로만 그려져 왔다...그러나 이제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참혹한 이 전쟁은 앞에서 보았듯이 실패의 연속과정이었다. 그렇기에 어느 누구도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P.243)

그런데 전쟁은 단순한 정치적 게임이 아니다. 전쟁의 피해는 고스란히 군인과 민간인에게 돌아간다. 대개의 경우 그들의 피해는 드러나지 않거나 공론화되지 않을 뿐이다. 최근에서야 노근리 학살사건 등 민간의 전쟁 피해의 실체가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저자는 민간인 피해와 세균전 의혹 등에 대해서도 언급하지만, 이는 개론적 차원에 국한하고 있다. 다른 저자의 <전쟁과 사회>가 전자에 대한 본격적 연구서이며, 후자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 연구가 진행되지 못하였음을 토로한다.

“불행한 사실은, 실패의 피해는 전적으로 병사들이나 후방의 민간인들에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전쟁 지휘자들이 실패에 대해 지는 책임은 지극히 적거나 또는 전혀 책임지지 않는 경우도 많다.” (P.244)

“전쟁에서 가장 직접적인 피해를 입는 것은 전선에서 싸우는 군인들이다. 그러나 전쟁은 전선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후방에서도 벌어지기 때문에 군인 아닌 민간인도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민간인학살과 같은 피해도 있고, 정치적 갈등이나 경제적 곤란 같은 피해도 있다...민간인학살과 이산가족 문제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P.328~329)

한국전쟁의 결과는 무수한 인명과 막대한 재산의 손실만이 아니다. 전쟁은 잠정 분단을 영구화하였고, 이후 미국과 소련의 외교정책에 영향을 미쳐 국제 정세는 이데올로기 간 첨예한 냉전 체제가 강화되었다. 게다가 남과 북은 모두 김일성과 이승만에 의한 독재 체제가 구축되어 북쪽에서는 여전히 그리고 남쪽에서는 최근까지도 억압이 끊이지 않았음을 상기해야 한다.

“한국전쟁은 분단을 고착화시켰다. 단지 눈에 보이는 분단을 넘어서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분단을 고착화시킨 것이다.” (P.360)

“한국전쟁의 경험은 베트남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을 가로막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점 또한 한국전쟁이 미국의 대외정책에 미친 중요한 변화가 될 것이다. 38선 이북으로의 진격이 가져왔던 엄청난 실패는 그 후 10년이 지나도록 미국이 제3세계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못하는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P.362)

이 책이 한국전쟁 전반을 아우르는 총서가 아니다. 400면 남짓한 분량으로 우리 역사와 사회에 처참한 상흔을 남긴 일대 전쟁의 전모를 어찌 담아내겠는가. 그래서 저자는 중요한 쟁점을 중심으로 논점을 명확히 하거나 과거의 관습적 인식에 날카로운 분석의 칼을 던지고 있다. 이를 통해 한국전쟁의 성격이 무엇이고 그 여파에 오늘날까지 드리워져 있음을 독자에게 일깨우고 싶었던 게 아닐까?

*  앞으로 천천히 읽어나갈 한국전쟁 관련 책들이다. 앞으로 갈길이 아득하지만, 우리 현대사를 올바르게 인식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콜디스트 윈터 (데이비트 핼버스탬) : 미군의 시각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백선엽) : 한국군 최고지휘관의 시각
마지막 한발 (앤드류 새먼) : 영국군의 시각
한국전쟁1 - 맥아더·클라크·리지웨이 보고서 (미 해외참전용사협회) : 미군 최고지휘관의 시각
전쟁과 사회 (김동춘) : 민간인피해
한국전쟁의 진실과 수수께끼 (A.V.토르쿠노프) : 전쟁 발발의 기원
한국전쟁 (정병준) : 한국전쟁의 총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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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할 수 없는 사랑의 가벼움
마리아 데 사야스이 소토마요르 지음 / 현재 / 1999년 10월
평점 :
절판


17세기 스페인 여류 문학가 마리아 데 사야스 이 소토마요르. 그녀는 세르반테스의 후세대로서 보카치오와 세르반테스의 강한 영향을 받아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독자적 작품을 남겼다. 각 10편으로 이루어진 <Novelas amorosas y ejemplares>(1637)와 <Desengaños Amorosos>(1647)이 그것이다. 각각 ‘사랑의 모범소설 또는 사랑에 눈먼 이야기’와 ‘사랑의 환멸’로 번역될 수 있다.

특히 전자는 작품명에서 세르반테스의 <모범소설>의 직접적 영향을 드러낸다. 세르반테스를 제외하고 국내에서 그다지 없는 스페인 황금세기 문학, 더구나 여류작가의 작품이 부분적이나마 출간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경이롭다.

이 책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의 가벼움>은 바로 <Novelas amorosas y ejemplares>에서 5편을 발췌하여 번역한 것이다.

수록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용서할 수 없는 사랑의 가벼움
- 나는 모자란 여자가 더 좋아
- 속고 속이는 사랑의 종말
- 대가없는 사랑은 없다
- 순결한 사랑은 마법보다 강하다

전체적으로 데카메론 유형의 가벼우면서도 당대 현실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필치가 자못 흥미롭다. 읽는 데 있어 전혀 부담을 주지 않는다. 더구나 제재가 영원한 테마 ‘사랑’에 관한 것이므로.

흔히들 기독교적 가치관의 강력한 지배와 명예와 정조 관념이 투철한 당대 스페인 사회(비단 동시대 유럽도 마찬가지지만)에서는 귀족층의 경우 도덕적으로 순결성이 유지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이 한낱 착시에 불과함을 이 작품은 일거에 산산조각 낸다. 더구나 여성에 의한 적극적 고발이기에 참신함과 설득력을 배가한다.

그럼으로써 옮긴이의 말마따나 “외모와 돈으로 표상되는 공허한 사랑의 굴레는 현대 사회의 특유한 현상이 아니라 시대를 초월한 인간 사회의 변함없는 엄연한 진리”(P.236)임을 깨닫게 된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랑의 가벼움>에서 아민타의 순결을 빼앗고자 하는 하신토를 돕는 정부 플로라의 마음가짐이 이채롭다. 연인의 바람기를 돕는다! 하지만 그녀의 속셈은 참으로 무섭다.

“플로라는 하신토가 아민타를 품에 넣고 나면 금세 지겨워할 것이고, 또 아민타도 이제 곧 불행의 늪으로 빠질 거라 생각하면서 그들을 신방으로 안내했다. 플로라는 하신토가 아민타에게는 치욕과 불행만 남기고, 다시 자기 품안으로 돌아올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P.31)

결국 아민타는 자신의 명예를 깨뜨린 하신타와 플로라를 죽임으로써 복수에 성공하고 마르틴과 결합하여 행복하게 살았다. 해피엔딩이다!

그런데 정말 행복한 결말일까? 아민타의 입장에서는 행복하다. 하지만 본인의 실수로 인한 작은아버지와 가문의 불행과 불명예는? 약혼자인 사촌 루이스의 입장은? 여기에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작가는 주인공의 운명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은연중 타인의 피해와 불운은 외면하는 당대의 세태를 여실히 보여준다.

<나는 모자란 여자가 더 좋아>의 파드리께를 비난할 수 있는 이는 없다. 그는 자신의 잇달은 체험으로 신념을 강화시켰다.

“나쁜 여자가 있으면 좋은 여자도 있다. 모두가 한결같을 수 없는 법이다. 하지만 그는 여자들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특히 똑똑하고 현명한 여자일수록 더 믿을 수 없다는 거였다.” (P.66)

그래서 공작부인의 설득력 있는 반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멍청한 여자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잘 모른답니다. 오히려 총명한 여자가 그런 위험에서 자신을 지킬 줄 알지요. 그건 당신의 편견이에요. 모든 이치를 깨달은 총명한 여자가 훨씬 나을 거예요.” (P.96)

파드리께는 똑똑함과 굳은 정조를 동일선상으로 파악하는 우를 범했다. 똑똑하면서 소위 헤픈 여성도 있지만 진실로 현명함과 정조를 동시에 갖춘 여성도 있는 법이다.

설사 그렇게 믿었는데 그게 아니라면? 그것은 파드리께의 깨달음에서 찾을 수 있다.

“파드리께는 그제야 똑똑한 여자들이 체면을 지킬 줄 알며, 만의 하나 체면에 어긋난 행동을 해도, 명예에 금이 가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는 공작부인의 말을 떠올렸다.” (P.110)

이는 씁쓸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만의 하나 정조를 깨뜨려도 남의 이목에 드러나지 않게 행동하는 게 똑똑한 여자의 미덕이다. 세상의 남자들이여 여자의 정조를 믿지 마라. 그대들이 여성들을 유혹하려 드는 것처럼.

<속고 속이는 사랑의 종말>에서는 마르코스의 불행에 불쌍함을 금할 수 없다. 마르코스의 잘못은 절정기에 다다른 스페인의 사치와 낭비의 관습에 동참하지 않은(사실은 동참할 여력도 안되지만) 사실이다. 근검절약으로 돈을 모아 오붓한 가정을 꾸리고자 하는 그를 악인으로 볼 수 없다. 따라서 우습지만 차마 웃을 수 없음에 마음이 아프다.

<대가없는 사랑은 없다>를 보면, 작가는 작품에서 권선징악을 의도하지 않음을 명확히 알게 된다. 사실 선과 악의 명확한 경계를 설정하기 어렵다. 평범한 주인공이 한 순간 악인으로 변했으나 다시 선인으로 돌아와 뒤늦은 행복을 누린다. 호르헤는 그렇게 콘스탄사를 포기하고, 테오도시아를 얻었다. 호르헤의 동생 페데리코, 질투에 눈 먼 형에게 죽임을 당하는 불운을 맞이하는 그는 쓸쓸히 잊혀졌다.

<순결한 사랑은 마법보다 강하다>를 읽으며, 후대의 제인 오스틴을 떠올린다. 사랑과 결혼이 인생의 주된 과제인 여성. 이는 여성의 지위가 남성 즉, 남편에 의해 좌우되는 현실에서 여성에게는 가장 첨예한 이해가 달린 사안인 탓이다. 현실은 17세기에도 그리고 21세기의 요즘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변함없다. 그래서 독자는 페르난도에 대한 후아나의 질긴 사랑과 운명에 동정을 보내며, 클라라의 헌신과 현명한 처신, 그리고 되찾은 행복에 박수를 보내게 된다.

마리아 데 사야스 이 소토마요르의 작품집이 온전한 형태로 국내에 출간될 수 있다면, 그만큼 우리의 문학적 이해도와 감수성을 더욱 폭넓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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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엔테오베후나 지만지 고전선집 556
로페 데 베가 지음, 김선욱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스페인의 셰익스피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황금세기 문학의 거장 로페 데 베가의 국내 유일한 번역본이다. 그는 코미디아를 1,800편, 성찬신비극을 400편 가까이 쓴 엄청난 다작가이기도 하며, 후배 칼데론, 몰리나 등과 함께 당대 스페인 희곡을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린 대가이다.

‘푸엔테오베후나’는 마을 이름이다. 마을 이름을 작품명으로 삼은 연유는 단지 장소적 배경에 기인하지 않는다. 이것은 등장인물들의 갈등이 벌어지는 무대이며, 정의를 실현하는 주체이다.

대체적으로 칼데론의 <살라메아 시장>과 흡사한 구조를 보인다. 군대가 등장하고 군대 장교의 독선적이고 안하무인적 태도가 그러하다. 지배자의 폭압에 항거하는 평민인 마을사람들의 봉기, 그리고 정의 실현의 화룡점정 역할을 담당하는 국왕의 결정과 이에 대한 찬미!

15세기 스페인 통일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는데, 아직 왕권이 미치지 못하는 푸엔테오베후나는 칼라트라바 기사단령이다. 페르난 고메스 사령관은 마을의 지배자이지만, 계급관념이 확실하다. 그는 마을을 억압하면서 강제적으로 여성들을 취한다. 일개 평민의 저항은 안중에도 없고 필요하면 무력 사용도 불사한다.

하지만 명예 관념은 비단 지배층의 전유물이 아니다. 칼데론의 크레스포는 예외적 현상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은 고메스 사령관에게 명예 존중을 요구하나 비웃음만 당한다.

“시의원1: 각하께서 말씀하신 건 옳지 않습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희들의 명예를 욕보이시면 안 됩니다.
사령관: 그대들에게 명예가 있는가? 이런 칼라트라바 기사님들을 보았나?
...
사령관: 어떻든 간에 그대들의 부인들에게는 명예로운 일이오.
시장(알론소): 그런 말들이 바로 그들을 불명예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아무도 그걸 믿을 사람도 없고요!” (P.66~67)

“제 아비는 명예로우신 분입니다. 각하만큼 고귀한 신분은 아닐지라도, 지금까지 살아오신 동안의 행실은 각하보다 훨씬 더 고귀하십니다.” (P.78)
마을 처녀 하신타의 정당한 반박은 사령관의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히려 병사들로 하여금 집단 강간하도록 한다. 그리고 시장의 딸 라우렌시아의 결혼식을 방해하고, 시장을 폭행하며, 신부를 겁탈하려 한다.

마을 사람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여 아래로부터의 폭동이 일어난다. 역사를 볼 때 수많은 민란과 하층민들의 저항은 어김없이 지배층의 폭압과 약탈에 기인한다. 어리석은 지배층은 자신들이 바다 위의 쪽배에 타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온화한 바람과 잔잔한 물결이 변치 않으며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어디든 나아갈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한다. 대양의 거대함을 알지 못한 채.

이 작품에 주목되는 점은 여성들의 적극성이다. 라우렌시아는 소극적인 여성상이 아니다. 그는 남자들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다가 프론도소의 용기를 보고 구애를 받아들인다. 남자들이 봉기를 할 것인지 망설일 때 라우렌시아는 산발한 모습으로 들어와 그들을 비난하여 결국 봉기의 도화점이 된다.

“당신들이 잘난 남자들인가? 당신들이 아버지들이고 친척들이냐고요? 당신들은 이렇게 고통을 당한 걸 보고 아무렇지도 않나요? 겁쟁이들! 내게 무기를 줘요...오, 신이시오, 저희 여자들 스스로가 압제자들로부터 명예와 피를 되찾겠습니다...” (P.104)
“마을의 여인들이여! 이리로 모이세요. 우리들의 명예는 우리들 힘으로 되찾아야 합니다. 모두 모이세요.” (P.105)

국왕은 평민들이 봉기하여 귀족 지배자를 처단한 것에 경악하며 심문관을 급파한다. 심문관은 마을 사람들을 가혹하게 심문하며, 특히 노약자 등을 집중 고문한다. 마을사람들의 유일한 대답은 오직 하나, 즉 푸엔테오베후나가 그렇게 했다는 것. 결국 국왕은 모두를 죽이든가 용서하든가의 갈림길에서 더 이상 수사를 진행할 수 없으므로 모두를 사면시킨다.

푸엔테오베후나가 사령관을 죽였다는 대답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한 개인의 원한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게 아니다. 지역공동체의 공분(公憤)의 대상으로 타도된 것이다. 마을과 마을사람들을 존중하지 않는 지배자는 언제든지 전례가 반복될 수 있음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작품명이 마을과 마을의 집단정신의 상징, 푸엔테오베후나가 된 것은 매우 합리적이다.

한편 기실 국왕이라고 평민계급이 지배계급에 항거하는 것을 용서할 명분은 없다. 자칫하면 이는 왕권에 대한 도전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절대주의 왕권체제가 갖춰지지 못하고 국왕권과 귀족권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귀족권의 몰락은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된다. 실제로 푸엔테오베후나도 기사단령에서 국왕령으로 귀부를 요청하고 있다. 그래서 국왕은 모호한 사면령을 내려 무마한 것이다.

이 한 편에서 로페 데 베가의 진면목을 독해할 수 없다. 다만 이 짤막한 코미디아에서 데 베가는 장황하게 중언부언하지 않고 간명하면서도 긴박감 넘치는 극적 전개와 서술로 등장인물의 특징적인 인물 묘사와, 등장인물 간 팽팽한 대결 구도를 독자에게 제시하고 있다. 결말에서는 정의의 승리와 국왕에 대한 찬가를 통해 당대 민중과 국왕 모두를 만족시키는 절묘함으로 그가 어떻게 국민작가의 칭호를 얻었는지 추측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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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파 2012-11-12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너무 잘 봤습니다. 이 책은 완역본인가요?

성근대나무 2012-11-14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분량이 많지 않으므로 전체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라 셀레스티나 을유세계문학전집 31
페르난도 데 로하스 지음, 안영옥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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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에 쓰인 스페인의 고전문학이다. 이 작품의 의의는 “‘만일 스페인에 <돈 키호테>가 없었다면 대신 그 영광을 누렸을 작품’이란 말 한마디로 설명된다.”(P.379)고 옮긴이는 설명한다. 수많은 독자와 평론가들이 인류 최고의 문학 유산으로 손꼽는 <돈 키호테>에 버금가는 작품이라니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이 작품은 특이한 구성을 택하고 있다. 대화체 소설 또는 희곡의 성격을 모두 갖추고 있어 명확한 장르 규정이 어렵다. 아직 문학의 세밀한 분화가 이루어지기 전이므로 이렇게 형식상 혼용이 이루어지고 있는 듯하다. 이는 우리 고전문학에서 판소리와 판소리체 소설의 관계와 유사하다.

우연히 만나게 된 칼리스토와 멜리베아. 칼리스토는 멜리베아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중개인으로 셀레스티나를 요청한다. 셀레스티나의 계책으로 멜리베아도 칼리스토를 사랑하게 되고 두 사람은 사랑을 나눈다. 이때 중개 성공에 대한 보상의 분배로 칼리스토의 두 하인은 셀레스티나와 다투다가 죽이게 되고 자신들도 교수형을 당한다. 한편 칼리스토는 담장에 걸쳐놓은 사다리를 급히 넘어오다가 실족하여 목숨을 잃게 되고 절망한 멜리베아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문학상 영원한 테마인 남녀 간의 사랑이 이 작품의 핵심 소재이다. 하지만 여기엔 사랑과, 탐욕, 질투와 시기 등 인간사의 적나라한 모습이 가감없이 그려져 있다. 중세의 신성을 벗어나 서서히 르네상스로 이행하는 과정의 세계상이다.

칼리스토는 당당하게 멜리베아에게 청혼하지 않는다. 아니, 전혀 결혼 등 미래에 대한 언약을 언급하지 않는다.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가문 간에 철천지원수 사이도 아니다. 귀족과 평민(또는 천민) 등 신분상 격차가 존재하지도 않는데. 통상적인 만남과 교제 절차를 따랐다면 연인 간, 하인과 셀레스티나의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칼리스토는 처음부터 은밀하게 만남을 주선할 방책만을 강구하였다. 그래서 셀레스티나가 개입할 여지가 발생한 것이다.

이에 대해 옮긴이는 과거 번역본에서 이렇게 해설을 덧붙였다. 칼리스토는 정통 스페인 귀족가문이며, 멜리베아 집안은 개종한 유대인이라는 사실. 따라서 귀족이라는 타이틀은 획득했지만 정상적인 통혼은 꿈도 꾸지 못할 관계라는 것. 이 점을 염두에 두면 칼리스토와 멜리베아의 세간의 이목을 피하는 사랑과 괴로움이 다소 이해된다. 그런데 이번 완역본에서는 관련 내용이 모두 빠져있다. 오히려 작품을 읽다 보면 멜리베아 집안이 칼리스토보다 더 신분이 높은 게 아닐까 추정되는 대목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멜리베아와 나 사이에 신분의 위엄으로 봐도 그렇고, 그녀의 냉랭한 태도를 봐도 그렇고, 순종의 가능성으로 봐도 도저히 좁혀질 수 없는 거리가 있는데,” (P.84)
“그 여자는 집에 하인이 많으니 주인님과 주인님의 종인 저희들을 그들의 제물이 되게 할 거예요.” (P.234)
“당신의 순수 혈통과 행실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저이기에 저 자신이 정말 칼리스토인지를 고쳐 보게 된답니다.” (P.247)
“이 마을에서 우리와 연을 맺기를 거부할 사람이 누가 있겠소? 어느 누가 우리 딸과 같은 보배를 배우자로 삼아 행복해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소? 어떤 규수가 결혼에 요구되는 네 가지 필수 조건을 우리 딸만큼 갖췄겠소?” (P.299)

연인 간의 불명예스러운 사랑은 어두운 결말이 예정되어 있다. 무엇보다 그들의 심야 만남은 법적으로 도덕적으로 떳떳하지 못하다. 더구나 두 하인들이 죽음을 당한 바로 그 날에도 칼리스토는 멜리베아와의 밀회의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는다.

“자기들을 위해 수고한 하인들은 광장에서 목이 잘렸는데, 서로 껴안고 좋아 죽겠다 하고 있는 저들을 보라고.” (트리스탄, P.278)

이러한 점과 더불어 칼리스토의 두 하인에 대한 언사, 특히 파르메노가 충직한 하인에서 일탈하는 과정은 과연 칼리스토라는 인물이 사랑에 빠져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소위 말하는 뛰어난 인물인지 의심스럽게 만든다.

“악마가 널 이기든지, 비운으로 사라져 버리든지, 죽을만큼 지독한 고통이 영원히 널 따라잡든지, 그래서 세상에 뭣과도 비교되지 않을 고통으로 앓다가 죽어 자빠지든가 해라! 염병에 걸려 뒈질 놈, 거기 있지 말고 빨리 내 침실에 들어가 잠자리나 펴라!” (P.34)
“이 망나니가 매를 벌고 있구나, 나쁜 종 같으니. 너는 어찌 내가 사랑하고 있는 것을 그토록 나쁘게 생각하는지 말해 보아라.” (P.85~86)
“입 닥쳐라, 입 닥쳐! 망할 놈 같으니! 나는 앓고 있는데, 너는 개똥철학을 하고 있구나.” (P.87)
“입 닥쳐! 미친놈아, 돼지 같은 놈아, 의심쟁이들아! 천사들이 나쁜 일을 꾸민다고 설득시킬 작정이구나!” (P.235)

작품의 표면상 주인공은 두 연인이지만, 실질적 주인공은 셀레스티나다. 그래서 작품 표제도 애초 <칼리스토와 멜리베아의 희비극>에서 <라 셀레스티나>로 변천하였다. 셀레스티나는 마녀로 불리는 노파로, 창녀들의 포주이며, 마을의 만능해결사이기도 하다. 그녀는 약품을 사용하여 창녀의 머리털 색을 바꾸거나, 피부를 매끄럽게 하고 심지어는 숫처녀로 감쪽같이 위장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사기꾼이기도 한 셈이다. 여하튼 그녀는 복합적 속성을 지닌 존재로서, 작품 전개의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칼리스토의 두 하인, 셈프로니오와 파르메노, 그리고 셀레스티나와 같이 지내는 두 창녀, 엘리시아와 아레우사도 각기 당대 서민사회의 참모습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중요하다. 칼리스토와 멜리베아의 귀족적 고상과 우아함과 대비되는 속인들의 생생하면서도 비속하기까지한 일상을 네 남녀는 말과 행동으로 숨김없이 예증한다.

이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어는 사랑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셀레스티나는 멜리베아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것(감미로운 사랑)은 숨겨진 불이자 즐거운 상처에 달콤한 독약이자 감미로운 비통함이며, 유쾌한 고통이자 상처에 즐거운 격정이고 달콤하면서도 끔찍한 상처이며 부드러운 죽음이지요.” (P.221)

그리고 이 작품을 지배하는 가치관은 바로 철저한 현세주의다. 인생은 죽고 나면 아무 소용없는 것, 한창 젊고 아름다울 때 인생을 즐겨라 늙어지면 못 노나니! 곧 쾌락주의이기도 하다.

“인간은 본래 슬픈 것을 피하고 쾌락과 함께하려는 본능이 있으니 움츠러들거나 낙심하지마라. 향락은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여자를 즐기는 것을 뜻하는데, 특히 사랑 놀음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는 게 즐겁지.” (셀레스티나, P.74)
“너희들은 너희들의 싱싱한 젊음을 즐겨. 시간 있을 때 그러겠다고, 더 좋은 때가 오면 하겠다고 하다가는 후회할 시간만 온단다.” (셀레스티나, P.204)

이 작품의 기본 사상을 염두에 두고 칼리스토와 멜리베아의 연애를 다시 살펴본다. 칼리스토와 멜리베아는 당대의 도덕률은 염두에 두지 않는 현세적 쾌락주의자다. 칼리스토의 경우 셀레스티나를 통해 멜리베아에게 접근하려는 태도, 명예로운 청혼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점, 그리고 밀회 시 멜리베아의 육체에 대한 끊임없는 탐닉 등으로 명확하다. 그런데 멜리베아는? 언뜻 그녀는 보수적이고 도덕적 정조관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녀의 발언과 칼리스토의 죽음 이후 부모를 저버리고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모습에서 지고지순함을 떠올리기 어렵다.

“부모님이 지친 노년을 즐기시려면 나로 하여금 젊은 시절을 즐기시도록 내버려 두셔야 할 거야. 내가 나를 알고나서 가장 애석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분을 알지 못하고 보낸 시간, 그분을 즐기지 못하고 보내 버린 시간이다. 나는 남편을 원하지 않고 결혼의 신성함을 더럽히고 싶지도 않고, 다른 사람이 걸었던 결혼 생활을 다시 밟고 싶지 않아.” (P.302)

종교재판이 횡행하여 까딱하면 목숨을 잃기 쉬운 당대에서 <라 셀레스티나>는 중세 엄격주의와 신성주의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도발이었다. 그래서 작가는 종교 검열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모면하고자 안전핀을 마련하는 궁여지책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또한 작품에 대한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기도 하다.

“이 작품은 무질서한 욕망의 포로가 되어 여인을 자기의 신이라고 부르는, 미친 사랑에 빠진 사내들을 비난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물론 뚜쟁이와 사악한 아첨쟁이 하인들의 속임수를 알리기 위한 목적도 있다.” (P.29)

작품 말미 멜리베아의 아버지 플레베리오의 탄식은 긴 여운을 남긴다. 그는 무남독녀의 어처구니없는 죽음 앞에서 절규한다. 그는 변덕쟁이 운명을 저주하며, 거짓부렁이 세상을 비난하며, 사랑에 대하여 노년에 대하여 그리고 딸의 죽음을 한탄한다.

과연 그의 처절한 심경을 멜리베아는 예상이나 하였을까? 알았다면 높은 탑에서 뛰어내릴 생각을 하였을까? 이 작품은 곱씹을 결말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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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라는 거대한 연극.살라메아 시장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19
페드로 칼데론 데 라 바르카 지음, 김선욱 옮김 / 책세상 / 2004년 8월
평점 :
절판


<세상이라는 거대한 연극>은 칼데론 극작 세계의 한 중요한 축이었던 성찬신비극에 속한다. 성찬신비극이란 성서를 기반으로 인물과 의인화된 사물을 등장시켜 주의 영광을 칭송하고 가르침을 따를 것을 훈계하는 일종의 도덕극이다.

이 작품에서 칼데론은 창조주와 세상을 등장시켜 천지창조 부분을 극화하고 있다. 그런 후 부자, 농부, 왕, 거지, 지혜(사제), 아기, 미인 등을 세상에 나오게 하여 각자에게 지위와 신분에 맞는 역할을 수행하도록 한 후 세상에서의 공과로 사후세계에 천국과 연옥, 지옥에 영원한 자리를 배정한다. 지극히 상투적인 기독교적 가치관에 뿌리박고 있다고 하겠다.

주목할 장면은 상대적으로 나쁜 역을 맡는 데 대해 거지와 농부가 불만을 제기하자, 창조주가 설득하는 논리다.

“애정과 혼을 가지고
연극에서 거지 역을 훌륭히 연기해낸다면,
왕의 역할을 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만족스러운 일이다.
...
모든 인생은
연극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부여된 역을 제대로 한 사람은
연극이 끝나면
내게서 합당한
보상을 받을 것이다.” (P.28)

여기서 두 가지 사상을 읽어낼 수 있다. 하나는 <인생은 꿈입니다>에서도 나왔던 것처럼 인생은 꿈 또는 연극에 불과하며, 진정한 삶은 꿈 또는 연극이 끝난 후, 즉 사후세상이라는 것이다. 현재의 삶은 사후세상에서 천국과 지옥에 가기위한 사전 단계에 불과하다는 어찌 보면 염세적 가치도 다소 내포하고 있는 것은 기독교의 본질적 요소가 아닐까 생각한다.

한편, 기독교적 세계관을 현세에 정착시키려면 부득불 현세의 정치체제와 모종의 타협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민평등은 이론적으로 그럴듯하지만 현실사회에서는 지극히 위험하다. 왕과 귀족, 평민, 천민은 어떤 식으로 구분되어야 한다. 따라서 계급제도를 합리화하기 위한 방편이 바로 인생은 연극이라는 논리다. 현세에서 맡은 역할이 다소 불만스럽더라도-아기, 농부, 거지- 연극에서 자기역할을 기독교적 가치관에 부합하게 충실히 연기한다면 사후세계에서 창조주에 의하여 보답받을 것이다. 따라서 현실의 부당함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지 말라는 지극히 지배층의 논리라고 하겠다.

그런 면에서 <살라메아 시장>이 훨씬 더 흥미롭고 뛰어난 문학성을 보여주는 것은 당연하다. 이 작품은 코메디아에 속하는데, 오늘날 희곡 개념에 보다 부합한다.

훗날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미하엘 콜하스>의 작품 정신과도 일맥상통한다. 평민이 귀족계급의 부정과 비리에 능동적으로 대응한다는 점에서 페드로 크레스포와 미하엘 콜하스는 닮은꼴이다.

크레스포의 뛰어난 미모의 딸 이사벨을 두고 하급귀족 돈 멘도가 탐을 내던 중, 잠시 머무르던 군대의 돈 알바로 대위는 물리적 힘으로 크레스포를 감금하고 그녀를 납치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운다. 돈 알바로 대위는 귀족으로서 평민인 이사벨을 동등한 반려자로 맞아들일 생각이 추호도 없다. 단지 자신의 정욕 해소를 위해 평민 여성의 처녀성을 짓밟은 것이다.

크레스포-어떤 부모가 가만히 참고 있으랴!-는 분노에 치를 떨고, 복수를 준비하던 중 자신이 시장에 임명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시장으로서의 권한은 십분 활용하여 대위를 체포하고 심문한 후 사형에 처한다. 사실 민간인이 군대 장교를 직접 처분하는 것은 법에 어긋난 것으로서 신분차이를 떠나 사이가 좋았던 지휘관 돈 로페 장군과 대립하게 된다. 이때 국왕이 나타나서 정의의 손을 들어준다.

크레스포는 부유한 농민으로, 자존심과 명예 관념이 매우 강한 인물이다. 군대가 오면 반드시 품행이 나쁜 장교들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딸을 다락방에 숨기는 예방책을 사용하지만, 열 장정이 한 도둑 못 막는다는 속담은 여기도 적용된다.

사건이 발생한 후 크레스포는 돈 알바로 대위에게 자신과 딸의 명예 회복을 위하여 딸과 결혼하도록 간청하지만, 오히려 돈 알바로에게 비웃음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귀족 신분인 자신이 평민과 결코 혼인할 수 없다는 돈 알바로의 사고는 당대 귀족들의 보편적 가치관의 반영에 다름 아닐 것이다. 평민 처녀는 그저 즐기고 버리는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여성으로서 예우를 해주고 존중하는 것은 같은 신분에만 적용된다.

미하엘 콜하스처럼 크레스포도 복수를 이행한다. 콜하스가 법적 절차로 해결 안 되자 무력을 동원하여 올바른 법적 절차를 요구한 것처럼, 크레스포는 시장으로서 자신의 법적 권한을 최대한 활용한다. 여기서 귀족에 대한 평민의 계급의식 타파 의식이 조금씩 발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국왕에 의한 사태 해결은 결국 국왕이야말로 당대 사회질서와 정의 수호의 최고 판관임을 보여주며, 자연스레 연극관람자들에게 국왕에 대한 존경을 제고하는 목적이 배어있다. 일개 시장이 장교를 처단한 것은 비록 엄밀한 의미에서 위법이지만, 국왕은 부당한 처사에 반발한 시장과 평민들의 정의감에 힘을 실어준다. 이것은 일석이조이다. 귀족에게는 경고인 동시에, 평민에게는 충성 요구.

칼데론의 수백여 편의 극작품 중에 겨우 세 편을 통해 그의 다양한 작품세계를 섣불리 판단하는 것은 금물이다. 무엇보다 그는 17세기 당대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충실히 반영하였다. 그는 주로 왕실의 비호 아래 창작활동을 하였으므로 그의 작품에서 종교와 국왕에 대한 찬양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더구나 극작품은 상연을 전제로 하는 것이므로 글로만 이해하는 것은 명백한 태생적 한계를 내포한다. 그럼에도 <인생은 꿈> 및 <살라메아 시장>을 통해서 현재와 미래를 조화롭게 모색하는 작가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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