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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엔테오베후나 ㅣ 지만지 고전선집 556
로페 데 베가 지음, 김선욱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스페인의 셰익스피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황금세기 문학의 거장 로페 데 베가의 국내 유일한 번역본이다. 그는 코미디아를 1,800편, 성찬신비극을 400편 가까이 쓴 엄청난 다작가이기도 하며, 후배 칼데론, 몰리나 등과 함께 당대 스페인 희곡을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린 대가이다.
‘푸엔테오베후나’는 마을 이름이다. 마을 이름을 작품명으로 삼은 연유는 단지 장소적 배경에 기인하지 않는다. 이것은 등장인물들의 갈등이 벌어지는 무대이며, 정의를 실현하는 주체이다.
대체적으로 칼데론의 <살라메아 시장>과 흡사한 구조를 보인다. 군대가 등장하고 군대 장교의 독선적이고 안하무인적 태도가 그러하다. 지배자의 폭압에 항거하는 평민인 마을사람들의 봉기, 그리고 정의 실현의 화룡점정 역할을 담당하는 국왕의 결정과 이에 대한 찬미!
15세기 스페인 통일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는데, 아직 왕권이 미치지 못하는 푸엔테오베후나는 칼라트라바 기사단령이다. 페르난 고메스 사령관은 마을의 지배자이지만, 계급관념이 확실하다. 그는 마을을 억압하면서 강제적으로 여성들을 취한다. 일개 평민의 저항은 안중에도 없고 필요하면 무력 사용도 불사한다.
하지만 명예 관념은 비단 지배층의 전유물이 아니다. 칼데론의 크레스포는 예외적 현상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은 고메스 사령관에게 명예 존중을 요구하나 비웃음만 당한다.
“시의원1: 각하께서 말씀하신 건 옳지 않습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희들의 명예를 욕보이시면 안 됩니다.
사령관: 그대들에게 명예가 있는가? 이런 칼라트라바 기사님들을 보았나?
...
사령관: 어떻든 간에 그대들의 부인들에게는 명예로운 일이오.
시장(알론소): 그런 말들이 바로 그들을 불명예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아무도 그걸 믿을 사람도 없고요!” (P.66~67)
“제 아비는 명예로우신 분입니다. 각하만큼 고귀한 신분은 아닐지라도, 지금까지 살아오신 동안의 행실은 각하보다 훨씬 더 고귀하십니다.” (P.78)
마을 처녀 하신타의 정당한 반박은 사령관의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히려 병사들로 하여금 집단 강간하도록 한다. 그리고 시장의 딸 라우렌시아의 결혼식을 방해하고, 시장을 폭행하며, 신부를 겁탈하려 한다.
마을 사람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여 아래로부터의 폭동이 일어난다. 역사를 볼 때 수많은 민란과 하층민들의 저항은 어김없이 지배층의 폭압과 약탈에 기인한다. 어리석은 지배층은 자신들이 바다 위의 쪽배에 타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온화한 바람과 잔잔한 물결이 변치 않으며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어디든 나아갈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한다. 대양의 거대함을 알지 못한 채.
이 작품에 주목되는 점은 여성들의 적극성이다. 라우렌시아는 소극적인 여성상이 아니다. 그는 남자들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다가 프론도소의 용기를 보고 구애를 받아들인다. 남자들이 봉기를 할 것인지 망설일 때 라우렌시아는 산발한 모습으로 들어와 그들을 비난하여 결국 봉기의 도화점이 된다.
“당신들이 잘난 남자들인가? 당신들이 아버지들이고 친척들이냐고요? 당신들은 이렇게 고통을 당한 걸 보고 아무렇지도 않나요? 겁쟁이들! 내게 무기를 줘요...오, 신이시오, 저희 여자들 스스로가 압제자들로부터 명예와 피를 되찾겠습니다...” (P.104)
“마을의 여인들이여! 이리로 모이세요. 우리들의 명예는 우리들 힘으로 되찾아야 합니다. 모두 모이세요.” (P.105)
국왕은 평민들이 봉기하여 귀족 지배자를 처단한 것에 경악하며 심문관을 급파한다. 심문관은 마을 사람들을 가혹하게 심문하며, 특히 노약자 등을 집중 고문한다. 마을사람들의 유일한 대답은 오직 하나, 즉 푸엔테오베후나가 그렇게 했다는 것. 결국 국왕은 모두를 죽이든가 용서하든가의 갈림길에서 더 이상 수사를 진행할 수 없으므로 모두를 사면시킨다.
푸엔테오베후나가 사령관을 죽였다는 대답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한 개인의 원한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게 아니다. 지역공동체의 공분(公憤)의 대상으로 타도된 것이다. 마을과 마을사람들을 존중하지 않는 지배자는 언제든지 전례가 반복될 수 있음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작품명이 마을과 마을의 집단정신의 상징, 푸엔테오베후나가 된 것은 매우 합리적이다.
한편 기실 국왕이라고 평민계급이 지배계급에 항거하는 것을 용서할 명분은 없다. 자칫하면 이는 왕권에 대한 도전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절대주의 왕권체제가 갖춰지지 못하고 국왕권과 귀족권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귀족권의 몰락은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된다. 실제로 푸엔테오베후나도 기사단령에서 국왕령으로 귀부를 요청하고 있다. 그래서 국왕은 모호한 사면령을 내려 무마한 것이다.
이 한 편에서 로페 데 베가의 진면목을 독해할 수 없다. 다만 이 짤막한 코미디아에서 데 베가는 장황하게 중언부언하지 않고 간명하면서도 긴박감 넘치는 극적 전개와 서술로 등장인물의 특징적인 인물 묘사와, 등장인물 간 팽팽한 대결 구도를 독자에게 제시하고 있다. 결말에서는 정의의 승리와 국왕에 대한 찬가를 통해 당대 민중과 국왕 모두를 만족시키는 절묘함으로 그가 어떻게 국민작가의 칭호를 얻었는지 추측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