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비 / 오렐리아 (구) 문지 스펙트럼 7
제라르 드 네르발 지음, 최애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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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한 문학작품을 역자를 달리하여 감상하는 즐거움은 제법 있다. 우선 해당 문학작품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진지한 이해가 가능해진다. 아울러 역자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는 작품에 대한 인식이 비슷하나 똑같지는 않은 감흥을 제공하며, 때에 따라서는 새로운 작품을 접하는 듯 한 생경함을 주기도 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반복에 대한 지겨움을 감내한다는 전제가 따른다.

네르발의 글을 읽으면 아직 달빛이 그 힘을 잃지 않은 늦은 밤중 내지 새벽 어스름이 연상된다. 그것은 네르발이 추구하는 꿈과 몽상의 서술이 주는 선입견만을 아닐 것이다. <실비>는 달빛이 교교한 밤이다. 대낮처럼 눈부시고 화사하지 않지만 달빛이 주는 애틋함과 마음을 정화하는 정서가 남다르다. <오렐리아>는 안개가 자욱한 새벽이다. 사위는 온통 흐릿한데 갈길 모르는 나그네는 사물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든다.

두 작품 모두 작가가 정신착란을 일으켜 요양소에서 고생을 하던 시절에 씌어졌다. <실비>가 보다 내·외적 일관성을 갖추고 간결과 투명함을 잃지 않았던 것은 아직 그의 정신이 몽상의 세계에 빠지지 않았던 듯하다. 그래서 독자는 그의 글에서 아무런 징후도 발견하지 못한다.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는 <실비>의 배경이 되었던 파리 북부 근교 즉, 발루와 지방의 지도가 첨부되어 있어 작품 배경과 주인공의 여로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는 점이다. 고향과 유년시절로의 회귀라는 특성상, 지리적 배경이 없으면 머릿속이 오락가락해진다. 

<오렐리아>의 비논리성과 정신적 자유분방함은 물론 몽상의 산물이다. 꿈이 낮에도 계속되는 것, 그러한 환상이 오렐리아의 전체적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다. 다만 <칼리프 하킴 이야기>를 읽은 이후 좀 더 추가된 이해가 있다면, 그의 몽상은 단순히 정신착란 이후의 산물이 아니라 그가 더 일찍 해시시를 복용하면서 얻은 체험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점이다. 이 작품에서 환각의 묘사 장면은 정신약물 복용 후의 환각과 놀랄 정도로 흡사하다. 그의 해시시 복용이 어느 수준인지 알 수 없지만 그의 만년 정신이상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섣부른 추론이다.

네르발에게서 빼놓을 수 없는 영원한 여인상은 복합적이다. 상실한 모성에 대한 동경, 이시스 여신으로 표상되는 오리엔트적 지향, 그리고 제니 꼴롱에 대한 이루어지지 못한(아마도 네르발 자신의 귀책사유로 인한 듯) 사랑과 그리움 등. 여기에 발루와 지방의 유년시절의 인상이 깊이 결합되어 있다.

그래서 네르발의 작품은 읽을 때마다 느낌이 미묘하게 다르다. 적절한 분량과 정서적 다양성이 주는 현실적, 예술적 기쁨이 계속하여 반복 독서를 유도하는 동기부여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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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24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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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시시클럽
샤를 보들레르 외 지음, 조은섭 옮김 / 싸이북스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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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 칼리프 하킴 이야기/제라르 드 네르발
2. 해시시의 시/샤를 보들레르
3. 해시시 클럽/테오필 고티에
4. 해시시 소고/쟈크 드 모로
5. 해시시 하이 이야기/발터 벤야민
6. 해시시 묵시록/피츠 휴 러드로우
7. 해시시 심리학/알리스터 크로울리

<칼리프 하킴 이야기>는 <시바의 여왕과 정령들의 왕자 솔로몬 이야기>와 더불어 <동방여행기>의 축을 이루는 또 다른 중요한 작품이다. 이집트를 배경으로 한 점은 역시 오리엔트 지향적인 네르발의 취향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 작품이 엉뚱하게 해시시와 관련된 이 책에 포함된 이유는 사건 전개에 있어 해시시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있다. 칼리프 하킴은 미행 도중에 유수프를 만나 해시시를 접하게 되고 그 환상적인 효능에 빠져든다. 환각은 여동생 세탈뮐크에 대한 숨겨둔 사랑을 공개하도록 만들며, 와중에 수상 아르제방이 전횡을 일삼는 것도 알게 된다.

미행 중에 아르제방의 음모로 정신병자 수용소에 갇히게 된 왕은 엄숙한 외양과 언행으로 점차 정신병자들 사이에 정신적 지도자로 자리 잡고 마침내 폭동을 일으켜 탈출에 성공한다. 다시 왕좌를 되찾은 하킴은 그러나 세탈뮐크가 보낸 자객으로 생명이 위태롭게 된다.

해시시 복용은 칼리프가 순수한 청년 유수프를 만나고, 정신적 각성을 이루는 계기가 되는 동시에 금지된 사랑의 도덕적 빗장을 열어젖히는 방아쇠가 되기도 한다. 하킴이 죽었는지 여부는 확실치 않다. 공식기록에서는 사망이지만, 다른 곳에서는 목숨을 구한 하킴이 왕좌에 염증을 느껴 세속을 떠나 드루즈교를 창시하고 그 신도들이 레바논에서 드루즈인들의 국가를 건설하였고 한다.

네르발은 <시바의 여왕과 정령들의 왕자 솔로몬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역사와 전설 내지 신화를 교묘하게 중첩하여 호기심 가득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 드루즈인 - 시리아에 살면서 이슬람교와 관계 깊은 특수교인 드루즈교를 신봉하는 사람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한편, 해시시 환각 상태의 칼리프 하킴이 유수프에게 말하는 여동생에 대한 사랑 고백에서 작가 자신의 여성관의 편린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누이가 남자와 몸을 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마치 신성모독처럼 혐오감과 두려움을 내게 준다네...그녀가 속세의 이름은 지녔지만 신성한 내 영혼의 아내네. 탄생하는 순간부터 운명적인 내 여자였던 것일세...내가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한다면 내 안에서 뛰고 있는 그 세상의 영혼을 강간하고 타락시키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고 있네...”(P.21)

네르발의 모성 동경은 제니 꼴롱과 그 아바타를 끊임없이 갈구하면서도 결혼에 대한 두려움을 유발하고 있다.

19세기에 유럽에 들어온 해시시는 당대의 일부 문인들에게 깊은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이 책은 해시시를 다루거나 그에 영향 받은 글들을 모은 것이다. 해시시는 인도대마를 농축 처리한 것인데, 마치 요즘 대마초나 히로뽕, 코카인 등과 같은 마약류다.

마약이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폐해는 자못 크지만, 대마초에 대해서는 심심찮은 반발이 단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가벼운 마약은 이성이 억누르는 정신의 자유를 확장시켜 상상력과 감성을 증폭함으로써 예술 실현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이다.

테오필 고티에의 <해시시 클럽>은 해시시를 복용한 화자의 체험담을 기술하고 있으며, 샤를 보들레르의 <해시시의 시>는 해시시가 미치는 영향을 고찰하고 있다. 해시시, 아니 소위 환각제가 예술과 문학 창작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이 가능할까? 보들레르는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그는 순수한 환상은 이성의 도구를 빌리지 못하면 아무 존재 의의를 지니지 못한다고 본다. 몽상에 빠진 채 끄적거리는 문장과 붓의 놀림이 어떤 표현의 결과물을 산출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이해하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지 의문스럽다. 창작한 본인이 뚫어져라 바라보더라도 난감할 텐데, 항차 정상인이야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 책은 해시시를 매개로 당대 및 후대의 관련된 글들을 모아놓고 있다. 미지의 영역과 체험을 외부에서 바라보는 것은 꽤나 흥미진진하지만, 호기심 보다는 해시시라는 약물에 의존한 예술행위의 무의미성에 대한 인식을 강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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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24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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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의 여왕과 정령들의 왕자 솔로몬 이야기 (보급판) 지만지 고전선집 71
제라르 드 네르발 지음, 이준섭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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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르발은 그의 말년에 집중적으로 작품을 출간한다.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예지를 한 듯이. 그가 1851년에 발간한 <동방 여행기>에는 두 편의 독립적인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칼리프 하킴 이야기>와 <시바의 여왕과 정령들의 왕자 솔로몬 이야기>가 그것이다.

다행이도 두 편 모두 국내 번역본이 시중에 나와 있다. 전자는 <해시시 클럽>이라는 모음집에 수록되어 있고 후자는 지만지고전천줄의 단행본으로 나왔다. 다만 시리즈의 특성 상 원본의 약 70%를 발췌 수록하고 있다고 하니 일말의 아쉬움.

시바의 여왕과 솔로몬 왕의 일화는 구약성경에 유래한다. 시바왕국은 오늘날 아라비아반도 남부의 예멘에 있던 나라인데 전성기에는 아프리카 북동부 지역까지도 세력권에 넣었다고 한다. 하여튼 솔로몬 왕의 명성을 듣고 시바의 여왕이 사절단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왕의 지혜를 시험하였다고 한다. 전설에는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 왕의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에티오피아를 건국하였다는 내용도 전한다.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은 솔로몬 왕, 시바의 여왕 발키스(코란에는 빌키스로 기록되어 있음), 그리고 솔로몬 신전의 건축가 아도니람이다. 아도니람은 성서에 간략하게 등장하는 인물인데, 프리메이슨[석공 결사]에서는 석공의 시조로 간주한다.

간단한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시바의 여왕은 신전을 구경하고 솔로몬과 결혼하고자 방문한다. 그러나 솔로몬이 자신과 같은 고귀한 핏줄이 아니라 야합의 출신임을 인식하고, 오히려 아도니람이야말로 카인의 후예, 성스러운 핏줄임을 깨닫고 발키스는 아도니람과 결합한다. 발키스는 시바로 돌아가며 아도니람은 나중에 시바에서 재회하기로 하고 솔로몬을 떠나지만, 신전 건축의 장인 중 아도니람에 불만을 가진 자들이 아도니람을 살해하고 만다. 한편 솔로몬은 시바의 여왕이 준 반지로 정령과 바람과 동물을 지배하며 차차 타락하게 되고 만다. 솔로몬의 파멸자로 예정된 역할을 결국 사후 아도니람이 수행한 것이다.

네르발 특유의 신비하고 비전(秘傳)적 속성을 지닌 인물이 아도니람이다. 그는 신전 건축의 총책임자로서 노동자들을 절대적 권위로 통솔하면서 타인들과는 달리 솔로몬을 업신여긴다. 유대의 전성기라는 솔로몬의 치세를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런 그는 신전 건축의 절정인 놋바다 주물 작업에서 실패를 맛보고 홀로 용광로가에 머물다 유령같은 존재이자 자신의 조상인 두발가인을 마주친다. 그리고 방황하는 어린 영혼은 그를 따라 지구의 중심인 불의 성소에서 자신의 시원인 카인을 만난다. 카인은 구약에 나오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재해석하여 들려주며, 아도나이(여호와)가 일으킨 대홍수를 미리 알아차리고 그의 후손들이 지하세계로 들어가 숨어산다.

그리고 두발가인의 입을 통해 아도니람의 운명이 언급된다. 즉 아도니람은 “아도니람의 충실한 하인인 솔로몬을 파멸시키기로 예정”되어 있고, “네가 이 땅에 없게 될 때, 지칠 줄 모르는 노동자들의 집단이 너의 이름으로 결집될 것”이며, “언젠가는 노동자와 사상가들의 공동체가 왕들의 맹목적인 권력과 아도나이의 독재적 사제들의 힘을 꺾어놓을 것”(P.105)이라고.

네르발에게 동방 오리엔트 사상, 즉 구약과 이집트 신화의 영향은 지대하다. 그는 한차례의 동방여행 후 다시 한 번 동방여행을 꿈꾸었으나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의 작품 곳곳에서 이시스와 오시리스가 재현되며, 성서와 이교적 환상이 교차한다.

이 작품에서 네르발은 시바의 여왕과 솔로몬의 이야기를 당대 시각에서 자신의 관점으로 독창적 재해석을 이루어낸다. 그리고 18세기 이후 식자계층에 많은 영향력을 미쳤던 프리메이슨을 결부시켜 흥미진진한 구성을 만드는데 성공한다. 비록 깊은 작품성을 기대하지는 못하더라도 그의 색다른 시도는 상찬할 가치가 있다.

언뜻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네르발의 주요 작품 모음집에 <불의 딸들>이 있다. 이것이 아도니람이 찾아가는 불의 성소, 불의 정령과 모종의 관계가 있을 것 같다. 불에 대한 숭배는 또한 조로아스터교(배화교)가 아니던가. 

한편 아도니람이 발키스를 “나의 누이, 나의 신부”라고 지칭하는데, 네르발이 깊은 관심을 가졌던 이시스와 오시리스의 관계도 남매간이자 부부간이기도 하다. 또다른 작품인 <칼리프 하킴 이야기>에서도 칼리프가 자신의 누이동생을 사랑하여 결혼하고자 시도하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렇게 사고를 확대하면 제니 꼴롱에 대한 네르발의 사랑도 결국 같은 성격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단순 남녀간의 사랑이 아니라 남매간의 사랑 같은. 신화와 전설에는 근친간 결혼이 가능하지만, 근현대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네르발은 사랑하면서 괴로워하고 맺어지지 못하였던가.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아드리엔느, 오렐리아 등은 상실한 모성의 그리움이자 제니 꼴롱의 분신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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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24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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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딸들
제라르 드 네르발 지음 / 장원 / 199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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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네르발의 대표작 <불의 딸들>에서 <실비>, <발르와 지방의 노래와 전설>, <옥따비>, <이지스(이시스)>를 포함하고, 또 다른 대표작 <오렐리아>를 합본하였다. 따라서 <불의 딸들>의 완역본은 아니지만, <오렐리아>를 비롯한 네르발의 주요 작품을 한눈에 조망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실비>는 ‘몽상과 환상’이라는 네르발의 특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실비는 현실이며, 아드리엔느는 이상이다. 네르발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이상을 좇는다. 그것이 몽상이라고 할지라도. 아드리엔느의 대체재로 오렐리를 택하지만 그것이 성공할 리 없음은 당연하다. 마지막 장에서 실비와 자신의 젖친구의 결혼 생활을 보면서 네르발은 중얼거린다. “저것이 어쩌면 행복일지도 몰라. 하지만......” 이 혼잣말의 단서구가 네르발의 정신을 대표한다.

<발르와 지방의 노래와 전설>에서 작가는 소박함을 찬양한다. 고대에 대한 찬미도. <실비>의 부제가 ‘발르와의 추억’이며 발르와 지방으로 회귀하는 여로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실비>와 이 작품은 동질적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옥따비>는 마르세유와 나폴리에서 만난 한 영국 아가씨와의 우정과 사랑을 몽상적 문체로 그려내면서 여성에 대한 작가의 우유부단한 면을 다시 드러낸다.

<이지스(이시스)>는 네르발의 관심대상인 동방(오리엔트)적 고대의 찬양이다. 여기서 이시스 여신은 작가의 어머니이자 영원한 여인상의 근원이다. “이 구원자이며 성스러운 어머니”(P.142)인 여신은 자신의 상실한 유년 시절과 현재의 고통스러운 삶에 대한 회복의 기원을 담고 있다.

<오렐리아>는 네르발의 가장 신비스러운 작품으로 평가된다. 정신 발작으로 고생하던 작가의 혼란스러운 정신세계가 반영되어 일견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하지만 작가 자신이 밝혔듯이 내적으로 비논리적인 일관성이 존재함을 작품을 읽어본 이라면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작가는 죽음과 사후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전작에서 몽상은 현실과 과거로 향하고 있다. <오렐리아>에서는 꿈을 통해 영혼과 신을 향하고 있다. 마치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듯이.

꿈과 몽상은 이성의 통제에서 벗어난 영역이다. 우리는 밤에 무수한 꿈을 꾼다. 잠에서 깨어나면 꿈의 기억은 희미하고 잊혀지며, 살아남은 편린도 단절되고 비논리적이다. 만약 꿈(또는 몽상)을 그대로 기술한다면 이것이 초현실주의 사조에서 주창하는 자유기술이다. 이런 관점에서 <오렐리아>를 보면 그 독특한 산만과 비논리가 자연스런 흐름으로 이해된다.

“매혹적이면서도 두려운 이 공상을 길들이고, 우리 이성을 농락하는 이 밤의 정령들에게 하나의 규칙을 부과하는 것이 불가능할 일일까?......외부세계와 내부세계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이해할 것만 같았다. 단지 정신의 무관심 내지 혼란으로 인해 그 두 세계 사이의 명백한 관계가 왜곡되는 것 같았다.”(P.250)

아드리엔느와 오렐리아는 그의 영원한 연인, 제니 꼴롱의 아바타이다. 그리고 제니 꼴롱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네르발의 잃어버린 어머니의 현세의 현현이기도 하다. 네르발의 삶과 작품은 모성에 대한 갈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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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24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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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샤 2012-03-25 0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네르발의 작품이 자서전적 성격이 짙다고 해서 아드리앤느나 오렐리아를 제니 콜롱의 분신으로 규정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어찌 잘못된 네르발의 신화는 아직도 계속되나. 프랑스에서는 70년대로 끝이 났다. 정신분석학이나 신화비평에 너무 의존하면 네르발의 깊은 세계가 너무 제한된다. 작가와 작품이 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네르발 자신이 밝힌다고 해서 반드시 둘을 동일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독자의 관심을 끌기 위한 작가의 전략이라고도 볼 수 있다.
 
네르발 문학의 이해와 감상 58
이준섭 / 건국대학교출판부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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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 일과성에 머물지 않고 필연으로 나아간다면 그것은 더이상 우연이 아니다. 네르발과의 조우가 그러하다.

제라르 드 네르발. 19세기 전반을 살다간 시인이자 극작가이며 소설가. 당대에는 작품성보다 기이한 행동과 정신발작으로 더 잘 알려진 인물. 사후 망각의 세계에 묻혔다가 20세기 전반부에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 선구자로 각광받고 있는 사람.

도서관에서 라마르틴의 소설을 빌리는 과정에서 달랑 한 권만 들고 나오기 뭣해 별 생각 없이 옆에 나란히 놓인 책 <불의 딸들>을 같이 집어들었다. 단순히 표제가 흥미롭다는 이유로.

라마르틴에 이어 네르발의 작품을 읽으려고 하다 앞뒤 표지의 짤막한 소개 문구를 보면서 녹록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몽상과 광기로 쓴 작품이라면 더구나 초현실주의의 선구자라는데, 일반 독자가 쉽사리 감당할 수 있을까 저어되어 먼저 그의 삶과 작품세계에 대한 전체적 이해를 도모하기로 하였다.

다행스럽게 이 책이 여기에 부합된다. 문고판보다 약간 큰 판형에 면수도 100여면 남짓하다. 더구나 저자는 국내 유일의 네르발 전문가이니 더욱 신뢰가 간다.

저자는 네르발의 삶에서 유년기 부모와의 단절을 가장 크게 주목한다. 일찍이 모친을 여의고 외가에서 자란 그에게 전장에서 퇴역한 부친의 군인적 태도는 불신과 적대감을 유발하였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상실한 모성에 꾸준한 그리움을 보낸다.

그의 삶에서 어머니 외에 또 다른 여인, 즉 배우 제니 꼴롱은 절대적 비중을 차지한다. 사랑하지만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는(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어머니로 대표되는 여성성의 순수함을 결혼으로 깨뜨리지 못한 게 아닌가하고 저자는 언급하고 있다) 그녀의 이미지와 사랑은 그의 작품 속에 반복하여 나타난다.

그의 정신발작은 젊을 때부터의 몽상적 기질과 부모를 비롯한 가까운 존재의 잇따른 상실, 작가로서 기대만큼 성공을 거두지 못한 좌절감 등이 복합적으로 반영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실비>와 <오렐리아> 등이 모두 최만년 정신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서술되었다. 아직 그의 작품을 실제 읽지 못한 탓에서 구체적 작품 내용과 성향을 알지 못하나 삶을 통해서도 대체적 인상과 느낌을 가질 수는 있다고 본다.

그는 스스로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나는 여러 작가들 중에서 그들의 삶이 작품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작품들을 보면 그 인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작가들 중의 한 사람이다.”(P.101)

즉 그의 모든 작품은 자신의 체험에 기반하며 그것을 몽상과 교묘히 섞어 버무린 것으로 무엇이 경험이고 무엇이 허구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연구자는 물론 독자도 작품만 따로 떼어놓고는 그의 문학을 거시적으로 조망하는데 한계가 있다. 그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요약하여 소개하는 이런 유형의 소책자가 반가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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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24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10.10.13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