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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당나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매직하우스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서기 2세기 로마의 작가 아풀레이우스의 작품으로, 소설의 고전적 원형이라고 하겠다. 시기적으로 보면 페트로니우스의 <사티리콘>과 롱고스의 <다프니스와 클로에>의 중간에 위치한다.
소설은 현대에도 가장 강력한 문학 장르이다. 근대 이전 아직 소설이 양식적으로 정착되기 이전에 씌어진 소위 ‘이야기’는 소설의 본질적 속성이 서사의 핵심이다. 소설은 서사시와 명확히 구별된다. 서사의 공통점을 제외하면 산문과 운문이라는 근본적 차이가 존재한다. 소설은 신화와도 다르다. 신화는 말 그대로 신들의 이야기다. 신화에서 인간은 부수적 존재에 불과하다. 반면 소설은 인간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들이 나서 자라고, 사랑하고 싸우다가 죽는 인간의 라이프 사이클의 전체 또는 부분이 소설에는 담겨 있다. 신화의 시대가 끝나고 소설의 시대가 등장했다는 것, 그것은 인간이 주인이 되는 때가 도래했음을 반영하는 사실이다.
아풀레이우스는 <황금당나귀>에는 많은 신화적 요소가 개입되어 있다. 마법사의 주술적 요소가 사건 전개의 원동력이지만, 당나귀로 변신한 루키우스의 모험과 고난은 곳곳에 그리스 로마 신화가 당대를 강력히 지배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로마 제국은 거대한 용광로와 같았다. 그리스 신화는 물론이고 그들이 지배하고 점령한 지역의 모든 신들을 한데 끌어 모았다. 루키우스가 작품 말미에서 이시스 여신에게 탄원하여 인간의 모습을 되찾는 부분은 당대 로마에서 이집트 출신의 이 여신과 남편 오시리스 신이 얼마나 막강한 지위를 누리고 있었는지를 입증해 주고 있다. 이는 또한 아직 기독교가 제국을 휩쓸기 이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기독교의 확산에 대한 작가의 부정적 인식이 드러난 장면은 흥미로운 동시에, 중세의 혹독한 시절에 이 작품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의아스럽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묘미는 당나귀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의 모습이다. 루키우스는 하필 당나귀로 변신하였을까? 당나귀는 당시에 “우주에서 가장 천한 짐승”(P.375)로 간주되었다. 즉 루키우스는 로마 시민에서 가장 밑바닥의 동물의 처지로 전락하여 숨어있던 세상의 진면목을 겪게 되는 것이다. 후대 스페인의 유명한 후배 작가가 쓴 <개들이 본 세상>과 의도 면에서 유사성을 보여준다. 당대 세상은 후대의 종교적 선입관과는 달리 전혀 성스럽지 않으며, 오히려 비열하고 천박한 동시에 음란으로 넘쳐난다. 욕설과 폭력이 난무하며, 약자에 대한 동정보다는 악인의 횡행이 두드러진다. 당나귀는 도둑들에게 붙잡혀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죽음의 위협에 시달리다 간신히 도망쳤으나, 목동에게 괴롭힘을 당하며, 내시 사제들의 가증스러움을 목도한다. 방앗간으로, 이어서 가난한 채소 재배업자에게 팔리는 등 당나귀의 고초는 한이 없다.
작가는 당나귀의 고행 중간 중간에 등장인물들이 겪게 되는 다양한 일화와 신화의 에피소드를 삽입하여 성과 속을 아우른다. 세속의 일화는 인간사의 다양한 속성을 가감 없이 보여주며, 신화의 에피소드는 작품의 분위기 전환을 도모하는 동시에 예술적 향기를 더해주고 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이야기가 ‘쿠피도[큐피드]와 프쉬케의 사랑 이야기’다. 이 에피소드는 후대 무수한 예술가에게 영감을 준 것으로 유명한데, 프쉬케라는 이름이 여기에 연관되는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이시스 여신의 구원으로 포르투나의 속박에서 벗어난 루키우스. 마지막 장은 그가 이시스 여신의 사제가 되어 입신 의식을 치르는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이제까지 분위기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종교적 분위기는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결코 단순히 당나귀의 고행이 아님을 알게 된다. 마법의 거짓 유혹에 빠진 루키우스가 고난과 시련을 통해 정화되어 드디어 만인이 우러르고 선망하는 사제가 되어서, 마침내 황금당나귀로 승화된 것이다.
세르반테스와 보카치오가 가식 없는 인간의 모습을 구현한 시초로 알고 있었는데, 일천 여년을 훌쩍 앞선 아풀레이우스의 존재는 매우 놀랍다. 그의 글은 시대적 제약을 뛰어넘어 인간의 보편성을 밝혀낸 진정한 원형의 가치가 있다. 더욱이 전혀 진부하지 않으며 재미와 생동감이 넘쳐흐르는 진정한 고전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