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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멘호수 외
테오도르 슈토름 지음, 우호순 옮김 / 혜원출판사 / 2006년 3월
평점 :
<임멘 호수>만큼 시적 사실주의의 대가라는 슈토름의 명성에 걸맞은 작품이 달리 있을까? 다시 읽어 보아도 절제된 감정 묘사, 비유적 상황 암시가 독자로 하여금 아련한 인상을 갖도록 한다. 게다가 은은하면서 애상적인 분위기가 작품 자체를 지배하고 있다. 이따금 밝은 장면조차도 구름 사이로 간혹 내비치는 햇살과도 같이.
이미 작품의 결말은 서두 부분에 예시되어 있다. 나중에 인도로 같이 가자는 라인하르트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엄마와 같이 가야한다고 망설이다가 결구 같이 간다고 하지만, 라인하르트는 “하지만 그렇게는 안 될 거야. 네겐 용기가 없잖아.”(P.15)라고 진지하게 말한다. 그 후 이어지는 홍방울새와 카나리아의 대비는 결정적인 암시가 되며, 아무리해도 다가갈 수 없는 흰 수련의 존재는 곧 엘리자베스에 다름 아니다.
결국 ‘푸른 산 뒤편에 사라진 청춘’은 모든 라인하르트와 엘리자베스의 돌이킬 수 없는 첫사랑을 지칭한다.
<대학시절>은 신분제 사회에서 한 여성의 현실과 이상의 갈등을 비극적으로 그리고 있다.
우연히 맛보게 된 상류사회의 화려한 단면, 하층계급에 속하는 자신의 신분으로는 자력으로 헤어나갈 길이 없다. 그대로 단념하고 평범하지만 안정적인 현실에 안주하며 마음 한 편에 밀어두며 살아나가면 되련만 뜨거운 욕망은 이를 용납지 않는다. 결국 댄스파티에서 상류층 자제와 가까워지나 그의 진심은 자신에게 향하지 않고 일개 노리개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하게 되고 다시 현실로 복귀할 수도 없게 된 그녀의 선택을 달리 없었다.
여기서 필립은 로레 보르가르를 좋아하지만 신분을 초월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로레의 반박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일 수 없었던 것이다.
“난 다 알아. 언젠가는 너도 저 고상한 숙녀들 중 한 명하고 결혼할 거라는 걸.”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나는 말문이 막혔다. 이 반박에 나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 무시무시한 일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으므로 그에 대해 대답할 말이 없었다.“ (P.130)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시민계급의 당당한 일원인 필립에게 로레와의 풋사랑은 일종의 통과의례로서 가볍게 여겨졌다. 그래서 필립은 이 일을 한낱 추억으로 기억하게 된다.
여기서 로레 보르가르를 비난하기는 쉬운 일이다. 자신의 처지와 한계를 돌아보지 않고 헛된 꿈만 쫓아다니는 허망한 여성이라는. 하지만 개인적 선택과 관계없이 선천적인 요인으로 인간을 옭아매는 계급사회의 틀이라는 함정이 존재하는 모든 사회에서는 수많은 로레가 나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슈토름의 ‘대학 시절’은 미래의 푸른 꿈이 아닌 잿빛 회상이 낮게 드리워진 시절이 되고 만다.
<인형의 집>으로 여성해방을 드높이 외친 헨릭 입센의 동시대에 슈토름도 여성문제를 고민하고 있다. <삼색 제비꽃>이 바로 그러한 작품인데, 엄밀히 말하자면 가정문제라고 하겠다. 계모와 전처소생의 자식 간의 관계. 그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많은 갈등의 소재가 되어 왔다. <신데렐라>와 <콩쥐팥쥐전>을 보라.
독일에서는 제비꽃을 계모꽃이라고 한다는데, 표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러한 가정문제를 다루고 있다. 아내를 잃은 루돌프의 후처가 된 이네스는 전부인의 딸 네지와 친하게 지내지 못한다. 그녀에겐 그 집의 모든 것 하나하나가 모두 전부인의 그림자에 싸여 있다. 남편인 루돌프조차도 전부인 마리를 못 잊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네스의 괴로움은 스스로를 더욱 옥죄는데, 후처로서 전처의 모든 흔적을 지운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으면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데서 연유한다. 루돌프의 말대로 저택의 모든 곳에 전처의 손길이 닿아 있으니 말이다.
많은 재혼한 가정에서 행복한 생활을 이루어 나가지 못하는 많은 사유가 이네스와 같은 태도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전부인 또는 전남편의 자취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억지로 생부, 생모와 비교하지 않으려고 해야 그들의 자식들도 보다 자연스럽게 대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말미에 가서 죽음을 앞둔 이네스가 병석에서 일어나고 새로운 삶과 가정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된 것도 결국 현실을 자체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슈토름은 철저한 사실주의 작가가 아니다. 그의 작풍은 항상 압축과 생략, 비유와 상징을 선호한다. 따라서 치열한 갈등과 고뇌가 작품에 우러나오지 않으니 <임멘 호수>와 같은 서정적인 작품에서는 빛을 발하지만, <대학 시절>이나 <삼색 제비꽃> 등에서는 뭔가 모를 아쉬움 내지 부족감을 채울 길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