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
카렐 차페크 지음, 김규진 옮김 / 리브로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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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호르두발>의 제1부는 주인공의 내적 독백 방식으로 독자가 호르두발의 삶과 내면에 접근할 수 있었다. 이어서 제2부와 제3부는 형사의 수사와 법정의 재판 과정을 통해 호르두발의 죽음에 대한 진실 파헤치기를 시도하고 있다. 여기서는 탐정 기법을 사용하며 주인공의 외면과 인간 관계를 객관적 관점에서 기술한다. 이렇게 주인공의 내부와 외부의 복합적 바라보기를 통해 호르두발의 진실을 알고자 하지만 작가는 언저리만 보여주고 나머지는 독자에게 맡긴다.

 

<유성>의 구성도 전작과 비슷한 방식을 취하고 있다. <유성>에서는 환자 X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대신 보다 주관적이고 신비적인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다.

 

환자 X는 비행기 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어 병상에 누워있다. 악천후 속에 그를 유성같은 속도로 비행하도록 만든 것은 무슨 연유인지 그의 삶은 어떠했는지 사람들은 궁금해 한다. 그리고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한다.

 

간호사 수녀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 그녀는 환자 X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듣는다. 그녀의 꿈은 일종의 예지몽(叡智夢)이라고 할 것이다.

 

묘한 환자인 천리안은 뛰어난 감각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는 인식의 동화를 통해 자신을 환자 X와 일치시켜 그의 실체에 다가선다.

 

시인은 이야기를 창조한다. 그는 직관으로 진실을 발견하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상상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허구가 아닐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모든 것은 순수한 자연이고 꾸민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선생님, 저는 그것을 직관으로 씁니다. 제 자신도 왜 그런지는 모릅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상상이고 직관입니다.” (P.160)

 

의사들(내과의와 외과의) 역시 각자의 학문적 지식에 의거하여 그의 삶의 이력을 추론한다.

 

이처럼 모든 이들이 재구성한 그의 삶은 놀랍게도 큰 공통점을 지닌다. 환자 X는 서인도 제도 지역에서 생활하였고, 비교적 유복한 집안 출신이지만 집안을 박차고 고생을 많이 겪었을 것이라는 점. 여인과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맹렬한 비행을 감행하였을 것이라는 점 등.

 

<호르두발>은 이야기의 흐름이 구체성을 띠고 있어 쫓아가기가 어렵지 않다. 반면 이 작품은 구체성 보다는 추상성, 명료성 보다는 모호성에 치중하고 있다. 하긴 이야기의 재구성이 각자 꿈, 감각, 상상 등에 근거하므로 이는 예정된 것이기도 하다. 특히 천리안이 자신의 인식의 동화 방식의 배경 내지 정당성을 설명하는 내용은 나로서는 도저히 요령 부득이다.

 

전체 이야기 가운데 시인의 이야기가 가장 큰 분량을 차지한다. 역시 작가는 시인의 상상과 직관에 더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는 환자 X가 기억을 상실하고 케텔링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사랑을 성취하려고 고생하다가 문득 기억을 되찾고 부모의 용서를 구하고자 귀향하다가 사고를 당한다.

 

높은 산을 등반할 때 우리는 다양한 등산로를 택할 수 있다. 방위의 동서남북에 따라 오르는 코스가 다르며, 정상으로 바로 올라 내려다보는 호연지기를 누리거나 또는 둘레길을 택하여 산의 속살을 감상할 수도 있다. 누구도 산의 전체를 알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모두가 산에 대하여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환자 X의 참모습은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각자가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고 지어낸다. 이것은 일말의 진실을 내포하지만 완전한 참은 아니다. 어느 정도가 진실인지 참인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다른 접근을 통해 유사한 삶을 추론했다면 그의 삶의 많은 부분이 해명된 것이 아닐까 판단할 수 있다.

 

이 작품과 <호르두발>의 접근 방향은 이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것이 후속작 <평범한 인생>에서는 어떤 프리즘으로 이어질지 자못 궁금하다.

 

같은 옮긴이에 의하여 지식을만드는지식에서 새 번역본이 나와 있다. 당초에는 신간을 읽을 의향이었는데, 애석하게도 신간은 완역이 아니라 절반 정도의 발췌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구간을 대신 읽는다. 그런데 재차 확인해 보니 역시 지식을만드는지식에서 완역본도 후에 출간된 것 같다. 책 면수가 두 배 가까이 차이가 나는 것을 보아하니. 어차피 구간은 절판이므로 관심있다면 신간 완역본을 읽는 편이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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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두발 지만지 고전선집 573
카렐 차페크 지음, 권재일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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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작품에서 호르두발의 철저한 고독에 대하여 깊은 공감을 갖지 못하는 사람은 그 감수성을 의심하고 싶다. 차페크의 소위 철학소설 3부작의 처음인 이 작품은 굳이 철학적 해설을 덧붙이지 않더라도 문학 그 자체로서 충분히 심금을 울릴 수 있다.

 

3부 구성 중에서 핵심은 호르두발의 목소리로 구술되는 1부일 것이다. 분량 면에서도 또한 호르두발 자신의 내면이 표출된다는 점에서. 2부와 3부는 호르두발의 사망 이후 사건 수사와 재판 과정을 다루고 있어 1부에서 간과하였던 호르두발의 태도와 외부 환경과의 관계를 기술한다.

 

호르두발은 미국에 가서 8년간을 고생하며 돈벌이를 한다. 모은 돈은 꼬박꼬박 아내에게로 송금하였다. 적어도 연락이 두절되기 전까지는. 그러다 실직을 하고 문득 귀국을 하게 된다. 미국에서 언어도 통하지 않고 가족과 지인도 없는 가운데 그는 철저히 혼자로 생활한다. 그가 귀국 후 꿈꾸는 것은 따뜻한 일상의 가정사로 복귀하는 것이다.

 

1부를 관통하는 정서의 기조는 외로움과 처량함이다. 그의 기대는 철저히 저버려진다. 아내도 아이도 그를 환영하지 않는다. 집에는 낯선 남자하인이 들어와 있다. 마을사람이 그를 쳐다보는 눈길은 외지인에 대한 그것과 별반 차이 없다. 무엇인 잘못된 것일까?

 

그는 외양간으로 간다. 그곳에서 잠자리를 찾는다.

거기가 그가 있을 장소니까요. 그리고 거기에서라면 적어도 그토록 외롭지는 않을 거예요. 누군가가 숨 쉬는 소리를 들을 수 있거든요.” (P.81)

 

이윽고 우리는 알게 된다. 호르두발이 집을 떠난 동안 그의 아내는 정숙하지 않았으며, 현재 하인 슈테판과도 관계를 가져왔다는 사실. 그에게 연락이 끊기자 하인이 사실상 바깥주인의 역할을 맡아왔다는 사실. 호르두발은 아내를 의심할 수 없다. 그에게 남은 마지막 보루가 무너지게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는 슈테판을 내쫓았지만 결국 다시 들일 수밖에 없다. 오로지 아내를 위해서.

 

호르두발과 슈테판은 여러모로 대비된다. 체코인 대 헝가리인, 농경민 대 목축인, 소의 선호 대 말의 선호. 한쪽은 밭은 농사의 근본으로 여기는 반면 다른 이는 말 사육에 돈을 투자하는 게 훨씬 낫다”(P.61~62)고 주장한다. 출신과 가치관의 차이는 둘 간에 화목이 불가능함을 가시적으로 가리킨다.

 

세 주요 인물을 비교하면, 유라이 호르두발은 거세마이고 슈테판 마야는 종마이다. “거세마는 여전히 머리를 아래로 향하고 있고, 종마는 머리를 하늘로 꼿꼿하게 세우고 있다. 슈테판 또한 머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다니지.” (P.162) 폴라나는 어떤가? 유라이가 묘사하는 폴라나는 언제나 기품 있는 말처럼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다니는 부인”(P.180)이다. 즉 폴라나는 기질 상 유라이 보다는 슈테판과 더 어울린다. 그러기에 그녀는 약삭빠른 여자처럼 남편이 돌아왔지만 여전히 슈테판을 포기하지 못한다.

 

작가가 대독하는 호르두발의 내면세계에 대한 독특한 구술 형식은 19장 이후부터는 이색적 색채를 띠게 된다.

사랑이 이러한데, 사람들아, 모든 것이 잘되어 가고 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P.157)

이제는 청자를 의식하여 직접 청자에게 호소하는 형식이 추가된다. 판소리로 치면 아니리에 가깝다고 할까. 낭독조의 어투에 해학조가 어려 있다.

 

해설에 따르면 이 작품은 차페크의 문학 중 파토스와 이미저리가 가장 풍부한 소설”(P.10)이다. 확실히 나직이 울리는 호르두발의 내적인 독백의 효과는 뛰어나다. 그는 왜소하고 나약한 인물이 아니다. 키도 크고 슈테판을 울타리 너머로 던져버릴 만큼 여전히 힘도 세다. 그럼에도 그는 수동적이다. 차라리 아내를 다그치는 대신 자기희생을 감내한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 자기를 포기하려는 그의 태도는 탄식을 넘어 숭고하기조차 하다.

 

호르두발의 죽음은 병사(病死)인가 타살인가? 자기희생을 무릅쓴 그의 본심은 무엇일까? 그는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인지하고 있었는가? 작가는 주인공의 목소리를 통해(1), 사건을 수사하는 두 형사의 탐문을 통해(2), 법정에서의 재판과정을 통해(3) 호르두발의 참모습에 접근한다. 잡힐 듯 말 듯 하지만 결코 붙잡히지 않는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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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충 극장 열린책들 세계문학 204
카렐 차페크 지음, 김선형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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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렐 차페크의 희곡 선집이다. <로봇(R.U.R.)>을 제외한 주요 희곡을 모두 수록하여 한 권으로 차페크의 희곡 세계를 조감할 수 있는 좋은 기획이다.

 

애초 희곡으로 문학세계를 시작했던 만큼 차페크에게 희곡 장르는 후의 소설과 함께 그의 양대 작품 축을 이루는 중요성을 지닌다. 희곡은 통상적이라면 곧 연극 상연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소설과 달리 관객 앞에서 공연 형식을 통해 내용을 외부로 표출해야 한다. 속성상 외향성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소설과 차이를 보인다.

 

그는 이미 <로봇>을 통해 인간이 기계 문명의 편의에 굴복하고 인간다움을 상실해 갈 때 인류의 미래는 매우 어둡게 됨을 경고하였다. 이 책에 수록된 희곡들에서도 그의 메시지는 뚜렷하다. 즉 인간의 인간다움에 대한 집착이다.

 

차페크의 활동 시기는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불안한 휴지기다. 전대미문의 대전으로 서구의 구체제는 무너져버린 반면 새로운 질서는 아직 태동하지 않고 있어 사회는 혼란스럽고 불안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일각에서는 어두운 악의 세력이 서서히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이때 인간과 세상에 예민한 촉수를 드리운 작가는 무슨 글을 쓸 수 있을 것인가.

 

<곤충 극장>(<곤충의 생활> 또는 <곤충의 세계> 등으로 번역되기도 함)은 기실 외피만 곤충일 뿐 사고와 행동 양태는 인간 그 자체다. 3막의 각 막별로 화려하고 부박한 삶을 쫓는 나비들, 생존을 위한다는 미명하에 끊임없이 살육을 저지르는 맵시벌, 그리고 국익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대대적인 전쟁을 일으키는 개미들이 등장한다. 이들 곤충은 얼핏 기대와는 달리 전혀 희화화되어 있지 않으며, 오히려 직접적으로 인간을 다룰 때보다도 더 비열한 인간 세상의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기에 이건 벌레들이지 인간이 아니라는 여행자의 절규는 역설적으로 처절하다. “다시 인간들을 찾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P.65)

 

그런 면에서 내내 탄생의 고통을 겪는 번데기의 결말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래고 힘든 산고 끝에 무언가 거대함을 내포한 그는 탄생과 거의 동시에 곧 죽음을 맞이한다. 덧없는 찰나의 삶을 살아야 하기에 오히려 하루살이의 생명에 대한 예찬과 갈구는 절실하고 아름답다. 하루살이처럼 민달팽이처럼 스러지고 계속 땅을 기더라도 만물은 모두 살기를 바란다. 겉으로는 하찮고 가치 없이 여겨지더라도 주어진 생명을 경시하지 않고 소박하게 꾸려나가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함을 작가는 주창한다.

 

<마크로풀로스의 비밀>은 야나체크의 동명의 오페라로 유명하다. 사람은 누구나 무병장수를 기원한다. 불로장생은 진시황제만의 꿈은 아니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 환갑은 우스워진지 오래고 백 살도 멀지 않다는 전망도 나오는 요즘.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장수를 넘어 영생을 할 수 있다면 인간의 행복을 지고에 이를 것인가. 앞서의 하루살이와는 반대되는 관점에서 생명의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생의 처방을 받아 수백 년을 살아오고 있는 에밀리아 마르티. 그녀는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하여 여러 개의 이름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최고의 성악가로 청자의 혼을 앗아갈 정도이면서도 그녀의 노래에서는 영혼이 느껴지지 않으며, 그녀와 동침한 프루스는 얼음처럼 차가워 시체를 안고 있는 기분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면서 그녀가 다시 영생을 갈구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그것은 유한한 생명을 지닌 존재의 공통적 두려움일 것이다.

 

모든 게 차갑고 무감각해져. 선에도 무감하고, 악에도 무감하고. 천국에도, 이승에도 무감해져...그런데 당신들한테는 만사에, 만물에 의미가 있잖아. , 하느님, 한때는 나도 당신들 같았는데! 소녀였고, 여자였고, 행복했는데, 나도나도 인간이었는데! 맙소사, 하느님!” (P.224~225)

 

후반부는 전적으로 획득한 영생 처방의 처리에 관한 등장인물 간의 쟁론이다. 일견 어처구니없는 황당한 논쟁이지만, 진정으로 절실하기 그지없는 견해들이기도 하다. 특정인의 소유로 할 것인가, 특정 계급에 국한할 것인가 또는 인류 전체에 공개할 것인가. 이들의 논란은 가장 어린 크리스티나가 제조법을 불태우면서 잠잠해진다. 크리스티나는 말없이 웅변한다. 인간의 인간다움은 삶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감수하는 데 있음을. 유한함 속에서 가치를 더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에 생명의 아름다움이 있음을. 삶의 영원성은 개체 내가 아니라 개체 간을 통해서 실현된다는 것을.

 

<하얀 역병>10여 년 후에 씌어진 작품이므로 시대적 배경을 달리하지만 작품의 분위기와 주제의식은 여일하다. 나치 세력이 이미 역병처럼 유럽을 휩쓸고 있는 시기다. 이 작품에는 임박한 전쟁의 음울한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한편 인류의 불행을 막고 평화를 회복하려는 작가의 심경이 갈렌의 행동을 통해 두드러진다.

 

50대 이상만 걸리며 발병하면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역병. 와중에 독재자인 총사령관은 영국과의 전쟁에 광분한다. 역병과 전쟁, 양자는 모두 인류의 운명에 위협을 주는 요인이다. 지휘권을 가진 이들은 역병의 심각성을 외면한다, 적어도 자신들이 감염되기 전에는. 갈렌은 역병 치료법의 공개 조건으로 전쟁 중지를 요구한다.

 

이 작품에는 다양한 성격과 유형의 개성적 인물이 등장한다. 의사로서의 윤리와 역병 치료법 발견자로서의 명예 사이에서 이중적 언행을 구사하는 시겔리우스, 대조적으로 세속적 영광에 관심 없이 오로지 빈민과 평화 실현에 헌신하는 이상적 인물 갈렌, 국가의 리더로서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지만 막상 감염되자 죽음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히는 크루그 남작과 총사령관. 여기에 경제 침체기의 세대 간 갈등과, 전쟁을 열렬히 구호하는 군중 심리에 휩싸인 국민들의 모습 등. 이것은 조만간 닥쳐올 참혹한 비극의 적나라한 예시라고 할 것이다.

 

작품의 끝은 허무하기조차 하다. 군중에 짓밟힌 갈렌의 최후는 평화 달성의 불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을 뿐더러 동시에 하얀 역병의 치료법이 소실되어 총사령관의 목숨은 물론 인류 전체의 생명이 위태로운 처지에 놓이게 됨을 여실히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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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 슬라브 문학 1
까렐 차뻭 지음, 김희숙 옮김 / 길(도서출판)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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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추억의 만화 영화 마징가Z’, ‘로보트 태권브이’, ‘그랜다이저에서 근년의 ‘A.I.’아이 로봇과 같은 SF 영화에 이르기까지 변치 않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로봇(robot)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 희곡은 로봇이라는 단어를 처음 등장시키고 일반 명사화 시키는데 지대한 공로를 세운 작품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로봇에 대한 초기의 유토피아적 환상은 어느덧 최근에는 로봇에 의한 인간 존재의 위협이라는 디스토피아적 미래관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는 차페크가 이 작품에서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로봇은 인간의 힘든 노동을 대신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기계적 존재 형태로 출발하였다. 20세기 전반 자본주의 전성기에 도달한 당대적 관점에서 가장 훌륭한 노동자는 가장 값싼 노동자였다(P.25). 그런데 인간은 단순하지 않고 감정이 까다로우며 영혼을 가지고 있다. 오로지 능률만을 고려한다면 이들은 모두 불필요한 장식물에 불과하다. 이렇게 로봇은 구상되었다.

 

한편 인간에게서 힘든 노동이 면제되면 여유분의 에너지를 지적, 예술적 활동에 투입함으로써 보다 나은 인류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는 발상은 지나치게 순진하다. 전형적인 기계론자들의 주장이다. 자아실현은 노동과 불가분의 관련성을 맺고 있음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고 있다. 인간에게 노동은 회피하고픈 떨칠 수 없는 천형(天刑)이 결코 아니다. 일을 통해서 그는 자신의 존재 가치와 의의를 인식하고 각성하게 된다. 인간에게서 노동을 박탈하면 스스로 퇴화할 것이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꽃들”(P.77)로 전락한다.

 

노동 기계로 시작된 로봇의 역할은 점차 다양화되고 변질된다. 인간은 로봇을 생산적인 과업에만 이용하지 않으며, 전장에서 인간 상호간을 살상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이는 로봇의 탄생 목적과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다. 인간을 돕기 위한 로봇이 인간을 죽이기 위한 도구로 말이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단순한 기계덩어리로 나타난 로봇은 점차 세련되고 사실적인 형태를 띠게 된다. 아울러 최대한 인간을 닮게 된다. 사람들은 로봇에게 감각과 감정을 부여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자신들을 닮을수록 인간들을 증오하게 될 것을 예상치 못하고. 로봇이 인간화 될수록 그들은 생존 본능을 갖게 되고 자존감을 자각하게 되며 자신들의 부당하고 열악한 지위에 분개하게 된다. 결국 스스로의 생존을 위하여 인간을 멸종시키려는 의도를 갖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며 오히려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도민) “세상에 그 무엇도 인간만큼 인간을 증오할 수 있는 존재는 없어!” (P.118)

 

(로봇 다몬) “너희가 사람처럼 되고 싶다면, 너희는 죽이고 정복해야만 한다.”(P.150)

 

작품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암울하다. 신이 되고 싶어 한 인간의 무모한 도전은 과학기술의 힘을 얻어 로봇을 창조하였다. 하지만 오히려 로봇으로 인하여 인류 세계는 종말을 맞이한다. 그럼 지구는 로봇 세상이 된 것인가? 차페크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로봇은 공장에서 생산되어야 한다. 생명체처럼 생식을 통하여 번식하지 못하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결국 로봇의 운명도 어둡기 그지없다.

 

작가는 시종 여일하게 주장한다. 인간이 인간다움을 유지하는 방법은 인간으로서의 능력과 한계를 자각하고 제한된 삶의 무대에서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을 영위하는데 있다고. 얼핏 왜소하고 화려하지 않지만 그것이 기실 인류 세계를 영속시키는 최상의 장면이라고. 그런 면에서 아래 알뀌스뜨의 강변은 불편하지만 진실이다.

 

(알뀌스뜨) “인간에게 지상낙원을 주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습니다!” (P.75~76)

 

작품의 결말은 매우 시사적이다. 로봇이 인간처럼 아름다움을 인식하고 서로 사랑을 할 수 있다면 로봇은 이제 생명을 지니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쁘리무스와 헬레나처럼. 그래서 최후의 인간 알뀌스뜨는 둘에게 아낌없는 축복을 내리며 생명의 불멸성을 찬양한다. 비록 인간은 사라지지만.

 

차페크의 뛰어난 상상력과 대담한 착상은 창작된 지 일백년 가까이 지냈음에도 전혀 구식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20세기 초의 기계적 산업화 시대를 배경으로 인간과 노동에 대한 당대의 진부한 인식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차페크가 제기한 명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휴머노이드니 안드로이드니 하는 진화한 형태의 로봇의 궁극적 지향점은 결국 인간 자체이다. 그것이 인간과 인류 세계에 순전히 도움이 될지 아니면 독이 될지는 알지 못한다.

 

도서출판 길에서 2002년에 나온 번역본은 이제 절판이 되어 시중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다행하게도 2010년에 리젬에서 청소년용 시리즈로 새 번역본(<로숨의 유니버설 로봇>)이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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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여름 2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8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8
아달베르트 슈티프터 지음, 박종대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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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속독(速讀)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느긋하게 마음을 다잡고 인물 간의 기나긴 대화에 지루해 하지 않으며, 하인리히가 감탄사를 연발하며 꼼꼼하게 세부묘사를 아끼지 않는 예술 작품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작품의 전개에 몸이 근질거려도 재빨리 훑어나가는 우를 범해서는 진정한 묘미를 찾지 못한다.

 

그나마 제2권에서는 사정이 좀 낫다. 하인리히와 나탈리에 간의 관계가 미묘한 듯 하면서 느껴지기 시작하며, 후반부에서 리자흐 남작의 과거 고백에 이르러서는 작품의 흐름이 한층 솟구친다.

 

표제 ‘늦여름’의 의미는 막판에 가서야 등장한다. 리자흐 남작과 마틸데 부인의 첫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인생 후반에 가서야 그들의 관계는 안정적인 우정과 사랑으로 자리 잡는다. 리자흐 남작의 표현대로 “한여름 없이 늦여름을 누렸다”(P.357)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남작은 한여름을 보내지 못한 자신들의 인생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세심한 관찰과 훈육을 통해 하인리히와 나탈리에가 한여름을 보낼 수 있도록 하였다.

 

이로써 이 작품의 외면상 주인공은 하인리히나 실질적 주인공은 리자흐 남작임을 알 수 있다. 하인리히와 나탈리에는 각각 리자흐 남작과 마틸데 부인의 분신이자 재현이다. 선대의 애정 구조는 후대에 순환되고 있으며 반복 속에 빚어지는 변화하고 발전되는 장면을 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다.

 

현실주의 관점에서는 하인리히의 삶이 높은 평가를 받기 어렵다. 청년기에 이르러서도 뚜렷한 직업도 없는 가운데 자신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비생산적 활동에 종사하는, 어찌보면 무위도식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부르조아의 삶.

 

여기에는 당대 현실에 대한 작가의 매서운 질책과 아울러 작가의 창작 배경이 숨어 있다. 슈티프터가 보기에 당대의 사회적 상황은 사람들에게 물질적 욕구 충족을 위해 강제하고 있어 자신을 포기하고 본연의 재능을 썩히게끔 한다는 것이다(P.274). 이른 시기에 장래의 직업을 정하고 여기에 매진한다면 단기적 성과를 기대할 수는 없는 보다 큰 가치를 지니는 인간 본연의 인문학적 진보는 어디에서 기대할 것인가? 이 점에서 리자흐 남작과 하인리히의 아버지는 사고는 일치를 보이고 있으며, 후에 두 사람이 서로에게 깊은 호감을 느끼게 되는 연유이기도 하다.

 

하인리히는 폭넓은 교양을 갖춘 인간으로 거듭 태어났다. 여기에는 리자흐 남작의 도움이 컸지만 중요한 점은 그가 “스스로 발전”(P.397)하였다는 사실이다. 인생과 사회의 첫 출발에서 여러 면에서 부족한 주인공이 학습과 경험과 편력을 통해 성장하고 발전하다는 교양소설의 기본 구도는 다소 차이는 있지만 여전히 지켜지고 있다. 인물의 성장과 발전이야말로 교양소설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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