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인생
카렐 차페크 지음, 송순섭 옮김 / 리브로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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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네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노년에 과거를 회상할 때 비교적 평탄한 인생을 살아온 것으로 자평하곤 한다. 물론 자신의 일생을 책으로 엮으면 대하소설이 될 것이라고 할 정도로 드라마 같은 삶은 누린 일부 사람들도 있지만.

 

이 소설은 차페크의 철학소설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아울러 가장 탁월한 작품이라는 게 주관적인 나의 평가다. 그만큼 이 작품이 주는 흡입력은 앞의 두 작품을 훌쩍 뛰어넘는다. 그것은 나 자신 또한 평범한 인생을 살고 있기에 작가가 던지는 화두가 남다르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작품은 노년에 다다른 한 노신사가 심장에 이상이 있음을 깨닫고 자신의 삶을 정리할 생각을 품으면서 시작한다. 소위 말하면 자서전, 즉 자신에 대한 전기를 쓰는 것이다. 전기는 위대한 인물의 삶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것일진대 평범한 사람이 전기를 쓰는 게 온당할지 화자는 회의한다. 이것은 우리들 모두의 의구심이기도 하다.

 

화자의 삶은 스스로 밝히듯이 단순하고 정돈된 삶”(P.19)이었다.

 

나의 삶에서는 비일상적이고 극적인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돌이켜보면 내 뒤에 놓인 직선적이고 분명한 길을 걸어온 것이 기쁘다.”(P.23)

 

그는 평범한 삶에 대한 전기를 쓰는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인생이란 별난 모험이 아니고 일상적 법칙의 흐름이다. 삶에 나타나는 특이하고 비일상적인 것은 단지 삶의 바퀴가 덜컥거리는 소리일 뿐이다. 오히려 정상적이 평범한 삶을 찬미해야 옳지 않을까?”(P.24)

 

전체 34장 가운데 전반부 19장까지는 화자의 삶의 기록이다. 소소한 돌출은 있을지언정 그는 비교적 평탄한 생을 누렸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삶의 역정을 추적하는 일은 더구나 지루하기는커녕 자못 재미가 있다. 역시 범인(凡人)의 삶도 타인의 한살이는 자신의 그것과 비교하여 저절로 반추하게 되며, 자신이 겪지 못한 또 다른 인생 행로를 탐험하는 듯한 기분을 자아낸다.

 

그는 반복적으로 자신의 생이 평범하였다고 진술한다.

 

강물 물결처럼 늘 똑같고 늘 새로운 생활...늘 똑같고 늘 새로운 반복...이것이 인생이란 말인가? 그렇다. 이것이 인생이다.”(p.86)

 

그리고 자신의 일생은 아름답고 단순한 질서”(P.90)로 이루어져 있음을 자각한다. 어릴적 철도의 추억, 프라하의 철도 플랫폼, 그리고 철도청의 취직 등.

 

단순한 우연에 기인하는 것은 아무것도, 거의 아무것도 없었고 모두가 필연의 사슬로 연결되어 있었다.”(P.87~88)

 

인생은 보이지 않는 연관성들로 점철된 심오하고 필연적인 단일체로 나타났다.”(P.90)

 

이렇게 평범한 인생의 가치와 미학의 발견에 아름다운 의미를 부여하는 게 이 작품의 미덕이구나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칠 즈음, 내면의 다른 목소리가 등장한다.

 

20장부터 등장하는 또 다른 나의 존재는 화자의 삶이 앞선 기술만큼 평범하지도 단순하지도 않았음을 강력히 주장한다. 표면적 평범성 속에 사실은 자아의 갈등과 억압과 타협이 잠복되어 있음을! 이제 화자의 삶에 대한 정반대의 해석이 가능하다.

 

그건 행복한 인생이 아니었고 끔찍한 삶이었어. 그걸 모른단 말인가?”(P.150)

 

전반부의 평화롭고 행복한 나날은 새로운 조명을 받는다.

 

남자에겐 자신의 일을 몰두할 수 있는 곳이 가정처럼 느껴지는 법이다.”(P.119)

이것은 가정, 즉 아내와의 거리가 멀어졌음을 시사한다.

 

놀랍게도, 우리가 사랑을 시작할 때와 신혼시절에 대해서도 거의 회상하지 않는다. 제일 많이 떠오르는 생각은 우리들의 역에서 보낸 조용하고 변화 없는 시절이다.”(P.123)

그는 역과 가정의 주인이었어. 그것은 작고 폐쇄된 세계였지만 그의 것이었고 그를 숭배했어. 그때가 사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은 아내를 회상할 때면 실은 바로 이 시기를, 그의 자존심을 강하고 건강하게 만족시켜 주던 이 시기를 생각하는 거야.”(P.147)

 

이후 숨어있던 다양한 자아 또는 인생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모두 8개의 삶인데, 그 중 평범한 자아, 억척스런 자아, 우울증 환자인 자아의 3개는 외부로 표현되어 화자의 공식적 삶을 대변하는 속성이 되었고, 나머지는 잠재되어 이따금 은밀히 표출되곤 하였다.

 

여기서 또다시 인생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제시된다.

 

인생은 여러 상이하고 가능한 삶들의 집합이며 그 중에서 단지 하나 또는 몇 개만이 실현되고, 반면 다른 삶들은 단편으로서나 가끔 발현되든지 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P.212)

 

이 집합은 자체의 단일성을 지니면서도 내적 긴장과 갈등 또한 내포하고”(P.214) 있다. 이러한 집합 내의 갈등이 인생의 드라마를 구성한다.

 

여기에 개체를 초월하여 세대로 이어진다면 무수한 사람들의 총합이 가능하다. 즉 우리가 선택 가능했던 삶의 경우의 수는 거의 무한대로까지 확장된다. 그래서 화자는 이렇게 깨닫는다.

 

내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이 평범한 삶의 흐름이 갑자기 내게 전혀 다르게, 한없이 위대하고 신비스럽게 보인다. 그건 내가 아니었고 우리였다. 대체 어떤 삶을 살았고 얼마나 총체적인 삶을 살았던 것인가!”(P.221)

 

우리들 각자가 어떤 다른 가능성을 살기 때문에 우리는 똑같은 사람들이다...우리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면 우리 모두는 평범한 사람들이다.”(P.236~237)

 

그것이 진정하고 평범한 인생이며 가장 평범한 인생이다.”(P.237)

 

작품의 표제 평범한 인생은 이런 의미에서 일종의 역설이다. 그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가장 비범한 인생을 담고 있음을 지칭하는 것이므로.

 

차페크의 3부작을 통해서 이 소설의 의의를 되새겨 본다. 그의 추구는 삶에 있어 진실은 무엇인가에 있다. 즉 개인의 진정한 정체성의 존재와 발견 가능성에 대한 탐문이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개인의 삶이, 표면적으로 평범하고 단순한 인생일지라도 실은 그것이 자아의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구현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런 무한(無限)이 유한(有限)한 특정의 개인의 삶으로 수렴되는 것, 그것이 인생의 신비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작품 말미에 철학소설 3부작에 부치는 작가의 말이 7면에 걸쳐 수록되어 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내가 3부작에 읽은 것과의 차이 및 내가 놓친 것 등을 종합적으로 비교할 수 있어 매우 유익하다.

 

차페크의 예술적 극성기를 대표하는 3부작 가운데 가장 걸작인 동시에 핵심인 이 작품이 절판되어 시중에서 구할 수 없음은 너무나 유감스럽다. 조만간 새로운 판본으로 나오길 열렬히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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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을 지키는 사람들 창비아동문고 192
안미란 지음, 윤정주 그림 / 창비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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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회 창비 좋은 어린이책 고학년 부문 수상작

 

사회가 날로 복잡 다변화 되다 보니 동화에서 다루는 제재도 더 이상 과거의 그것과 같을 수는 없게 되었나 보다. 게다가 사회의 불안은 자연스레 미래 시점을 통해 역으로 현재를 반추하는 경향을 낳고 있다.

 

이 작품의 경우도 가까운 미래를 배경 삼아 소위 종자 전쟁이라는 잠재적인 생존 위협 요소를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씨앗, 즉 종자의 개량에 대한 독점적 특허권이 인정되고 로열티를 지불하지 않고는 우리 땅에 나는 식물이라도 마음대로 재배하고 거둘 수 없는 사회. 이는 여전히 중대성과 심각성이 막연하게 인식되는 영역이다. 뭐 설마 무슨 큰 일이 나겠어?

 

작가의 눈은 폭넓으면서도 예리하다. 시대적 배경을 장점 삼아 곳곳에 현대 사회의 당면한 문제점을 날카롭게 언급한다. 남아선호가 빚은 심각한 남초(男超) 현상. 인스턴트 음식과 과도한 농약과 비료로 죽어가는 몸과 땅. 컴퓨터 시스템에 의존하는 사회와 생활 시스템. 외국인 근로자의 수입과 다문화사회까지.

 

동화에서 다루기에는 너무 진지하고 무겁고 암울한 소재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어린이들도 사회 문제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으며, 더욱이 초등학교 고학년의 지적 수준은 어지간한 성인에 근접함도 부득불 인정해야 할 것이다. 모두 슬픈 일이다.

 

인류 사회의 제반 문제는 인간의 탐욕에서 연원한다. 안분지족을 모르고 더 큰 것,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를 갈구하는 끊임없는 욕망. 그것은 인간의 발전 동력인 동시에 인간을 구속하는 천형(天刑)이다.

 

과학기술이 인류 사회와 문화에 끼치는 영향은 나날이 커지고 있다. 한 가지 기술의 개발이 수백 년간 내려온 전통과 습관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것이 다반사가 되어가고 있다. 더불어 과학기술자들의 올바른 가치관과 도덕관에 대한 우려와 요구도 못지않게 커가고 있다. 무수한 재난 SF영화는 기본적으로 사악한 과학자의 비뚤어진 판단에서 출발하고 있지 않은가. 이 작품에서도 그러하듯이 과학은 과학일 뿐 그 외의 것은 과학자의 몫이 아니라는 안이한 인식은 자신은 물론 인류에게도 불행을 가져올 것이다.

 

씨앗은 곧 생명이다. 씨앗의 유전적 조작은 생명의 존엄에 대한 모독이고, 씨앗의 상품화는 생명의 상품화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작가는 외친다.

모두의 씨앗, 모두 함께 나눌 수 있던 앎이 이제는 한 사람이나 한 회사의 것이 되었다. 이게 옳은 일인가?” (P.138)

 

그리고 나직이 단언한다.

씨앗은 살아남을 자유와 앞날의 꿈을 품고 있다.”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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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에 없는 마을 - 제16회 창비 좋은 어린이책 대상작 창비아동문고 267
최양선 지음, 오정택 그림 / 창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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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나는 대로 동화에도 신경을 기울일 작정이다. 진작부터 그러한 생각을 품고 있었으며, 법정 스님의 글을 읽은 후 확고해졌다. 아무래도 검증된 작품이 시작 단계에서는 좋을 것 같다. 16회 창비 좋은 어린이책 대상작처럼.

 

사실 동화라고 통칭되는 장르는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 유아용에서부터 청소년 수준에 이르기까지 때로는 이러한 작품조차도 동화라고 분류되는 게 타당할까 회의적인 경우도 있다. 따라서 동화 장르에 대한 개념과 범주를 폭넓게 인식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다.

 

이 작품 <지도에 없는 마을>도 그러하다. 고학년 부문 수상작이니만치 주제 의식과 다루는 소재, 인물들의 행동 양식 등이 녹록치 않다. 사실 동화라고 가볍게 기분전환 차원에서 접근했는데 한방 제대로 먹은 셈이다. 아 이것이 요즘 동화의 일반적 흐름이구나 하는 새로운 이해도 얻게 되었다.

 

물건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마르크스와는 다른 의미에서 사람을 물화(物化)시키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새 제품이 나오면 참지 못하고 이를 구입하고 사용해야 하는 심리적 증후군을 소위 신상(新商)이니 얼리 어댑터니 하면서 우리는 나름 미화하고 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소비를 미덕으로 하며, 소비에 기반을 두어 산업 구조가 지탱되는 체계다. 과거와 같은 근검절약은 배척당한지 오래며, 물건은 도저히 못쓰게 될 때 교체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싫증나면 버리도록 권장된다.

 

바벨 쇼핑센터(바벨이라! 매우 상징적이다)가 소비 사회의 극단적 중추라면, 자작나무 섬의 거대한 고물상은 이의 대척점이다. 버려진 무수한 물건들이 모이는 곳. 거기에 버려진 것은 물품들만이 아니다. 인간성마저 버려지지 말란 법이 없다.

 

인어공주와 바다마녀가 현대 사회와 무리 없이 엮어지는 것 또한 동화의 미덕이다. 인간에 대한 교차하는 애증을 담고 있는 바다마녀. 그녀가 재조립하는 영혼이 담긴 물품은 양면성을 지닌다. 인성의 완전한 소멸과, 다른 방식으로 인성의 보전이라는. 그래서 우리는 바다마녀를 매도할 수 없다. 한편 마지막에 물건에서 풀려난 사람들이 해방에 대하여 행복할지 궁금하다.

 

대체적으로 탐정 소설적 기법을 취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다만 어른에 비해 어린이인 보담과 소라에게 지나친 비중과 능력을 실어준 것은 역시 동화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현대의 오류를 바로잡고 미래를 이끌 존재는 결국 어른보다는 어린이라는 뼈아픈 진실의 반영일까.

 

동화에는 삽화가 들어가야 제 맛이다. 그림은 글만의 상상력을 제한하기도 하지만 상상적 요소의 가시화를 통해 구체성을 부여하는 장점도 지닌다. 더욱이 책을 좀 더 화사하게 만드는 장식적 요소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에 들어있는 삽화는 잘 모르겠지만 판화 내지 실크스크린 수법을 사용한 듯하여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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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새와 천사의 알 이야기 - 체코 아름드리 어린이 문학 1
카렐 차페크 지음, 요제프 차페크 그림, 변은숙 외 옮김, 이오덕 우리말 다듬기 / 길벗어린이 / 199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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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렐 차페크는 또한 몇 편의 동화도 남겼다. 이를 한 권의 책으로 엮어서 1932년에 <아홉 편의 동화>로 출판하였고, 여기서 일부를 번역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작품 중 삽화는 역시 그의 형 요제프 차페크의 솜씨다.

 

수록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어느 의사 선생님의 길고 긴 이야기

어느 경찰아저씨의 길고 긴 이야기

작은 새와 천사의 알 이야기

집 없는 떠돌이 이야기

집배원 아저씨 이야기

물도깨비 이야기

 

모두 이야기라는 꼬리를 달고 있다. 화자가 청자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형식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들려주는 이야기의 내용이 어떠하며 그것이 청자에게 재미와 교훈을 잘 전달할 수 있는가가 관건이라고 하겠다.

 

동화는 아이가 읽도록 쓴 이야기글이다. 아이가 읽기 어렵다면 성공한 동화라고 할 수 없으니 동화에서 재미는 필수적 요소다. 한편 허무맹랑한 재미만을 안겨준다면 어른들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동화는 아이들이 바람직한 인생과 사회 적응을 위한 교훈을 담고 있다. 이 양자의 적절한 조화가 동화의 가치를 좌우하는데 차페크 역시 이를 놓치지 않는다.

 

그의 이야기에는 초현실적 존재들이 현실과 거리낌 없이 드나든다. 마법사, 요정, 괴물, 도깨비, 물도깨비 등. 그런 면에서 판타지에 가까운 그의 취향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사람과 동물이 자연스레 대화를 주고받고 사물이 생물처럼 돌아다니는 것은 차라리 동화답다.

 

첫 두 편은 이야기 속의 몇 편의 작은 이야기가 담겨 있어 <데카메론>이나 <캔터베리 이야기> 등의 유산을 짐작케 한다. 의사의 이야기에는 슐레이만 공주 이야기도깨비 꽥꽥이의 병’, ‘솔내에 사는 물도깨비의 병요정의 병이 들어가 있는데, 이들 짤막한 이야기는 하나의 독립된 소이야기이면서 전체로 본 이야기의 결말에 기여하는 교묘한 장치가 되어 있어 작가의 솜씨를 짐작케 한다.

 

반면 경찰의 이야기는 외견상 유사성과는 달리 순전히 각 경찰 개인들이 겪거나 들은 기이한 일화를 들려주어서 오히려 전통에 가깝다. 차페크는 환상성을 일상성에 위화감 없이 개입시킨다. 그래서 경찰은 파랑이 도깨비집을 빼앗은 다람쥐에게 법을 지킬 것을 명령하며, 머리 일곱 달린 괴물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여자를 납치한 비행을 호통 칠 수 있다.

 

자칫 진지한 이야기로 받아들일까 우려한 작가는 또 다른 장치를 만들었다, 그것은 연도, 면적, 길이, 인구, 화폐 등의 숫자를 터무니없이 과장되게 늘어놓아 절대로 비현실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동화는 따뜻해야 한다. 그리고 결말은 밝아야 한다. 비극적 동화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집 없는 떠돌이 이야기집배원 아저씨 이야기는 시련 끝에 진실과 성실이 보답을 받는 전형적인 구조를 지닌다. 잠시 맡은 물건을 끝까지 간직하는 사람이나 직분에 충실한 집배원 모두 올바른 인간형의 하나로 제시된다.

 

표제작인 작은 새와 천사의 알 이야기는 새들의 이야기다. 동화에서는 동물의 등장이 빈번하다. 우화와 마찬가지로 인간을 빗대어 말하기에는 동물이 용이하므로. 고향에 불만을 품고 떠난 참새와 비둘기가 그러하다. 한편 새 중에서 닭이 유일하게 날지 못하는 사유를 그럴 듯하게 지어낸 천사의 알 이야기는 자연을 이해하는 과학적 법칙 외에 상상력의 의의와 가치를 제시한다.

 

차페크의 글은 정통적인 동화 스타일은 분명히 아니지만 오히려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다. 작가 자신도 이런 글을 쓸 때는 창작의 산고가 아닌 행복을 누렸을 것이다.

 

번역에 대해서 말하자면 전체적으로 동화답게 매끈하게 다듬어져 있다. 옮긴이 외에 별도의 우리말 다듬이도 제법 기여했을 것이다. 그런데 옮긴이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지면과 인명을 대부분 우리네의 것으로 바꿔놓았다. 의도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대체로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예상되는 이 책을 읽을 아이들의 연령대를 감안하면 원작의 향기를 느끼게 고유명사 그대로 사용해도 좋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요즘 아이들은 오히려 우리 고유어보다 외국어에 더 익숙한 판국이다. 하긴 이 책의 초판이 나온 것이 1995년이면 요즘과는 사정이 다를 테지만.

 

나머지 이야기를 수록한 후편도 전편 출판 몇 달 후 나올 것으로 약속했는데, 애석하게도 그 약속은 사정상 이행되지 못한 듯하다. 여전히 시중에는 전편만 구할 수 있고, 출판사의 발행목록에도 후편은 찾을 길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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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숲 정원에서 온 편지
카렐 차페크 지음, 윤미연 옮김, 요제프 차페크 그림 / 다른세상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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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페크는 극작가, 소설가로서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다양한 활동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비평집, 대담집, 여행기, 서한집, 우화 및 동화 등등. 이 책은 이색적인 차페크의 면모를 알 수 있는 또 다른 기회를 부여한다.

 

이 책은 1929년에 발표된 <원예가의 열두 달>이다. 여기서 원예가라 함은 주택에서 조촐하게 취미삼아 화초를 심고 가꾸는 이들을 지칭한다. 그는 순전히 아마추어 애호가의 관점에서 열두 달을 기술하고 있다. 형식이나 내용 등을 감안하면, 잡지 게재물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솔직히 소설과 희곡의 스타일과 내용을 통해 이해한 차페크에게 원예가의 자질이 있다는 것은 의외이다. 이래서 작품과 작가를 섣부르게 동일시하는 것은 금물이다. 그는 화초에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다. 낯선 품종들을 구분하고 줄줄이 쏟아내는 것은 여간 공력이 아니다. 화초에 관한 한 전혀 무지한 나로서는 경이롭기조차 할 지경이다.

 

여기서 차페크는 어깨에 힘을 빼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헤친 채 원예에 심취한 이들의 전형적인 대변자이다. 본인이 직접 손대지 않으면 결코 이해하지 못할 원예의 즐거움과 어려움 등을 다소 해학적으로 묘사하여 읽는 이의 마음을 흐뭇하게 만든다. 게다가 형인 요제프 차페크의 우스꽝스런 삽화가 간간이 들어가 있어 글과 그림의 어울림도 제법 그럴듯하다.

 

1월부터 시작하여 12월까지 월별로 원예가가 바라보는 일 년은 통상의 열두 달과는 상이하다. 한겨울인 원예가는 1월에도 한가하지 않으며 새봄을 기다리며 철저한 준비에 매진한다. 이윽고 날이 풀려 꽃이 피어나는 계절이 오면 그의 몸은 한가할 틈이 없으며 하루가 부족할 지경이다. 비가 안 와도 또 많이 와도 고민하며, 여름휴가를 마지못해 떠나서도 머릿속에는 온통 정원에 대한 생각뿐이다. 이 대목에서 문득 법정 스님의 무소유가 떠오른다. 즐거움이 집착하는 변하는 것은 찰나의 순간.

 

마른 잎이 떨구어지는 시절, 이제 사람들은 한 해가 마무리된다고 하지만 원예가에게 가을과 겨울은 또 다른 봄이다. 땅속에서 봄철을 기약하는 무수한 생명의 약동을 감지할 수 있으므로. 이렇게 정신없이 열두 달을 보면서 원예가가 정원을 가꾸는 목적은 물론 아름다운 화초를 감상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정원일에 치이느라 막상 원예가는 감상할 여유도 시간도 갖지 못한다. 눈 덮인 한겨울이 되어야 비로소 여유가 생기지만...

 

원예가는 정원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자연은 시련을 줄지언정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자연을 벗하는 이들은 그래서 순박하다. 이는 간교함과 악으로 물들어 가는 사회에 대한 나직하지만 강력한 경고이다.

 

베이컨만큼 기름진 흙...이 흙들은 저마다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반면에 미끈거리는 흙...이런 흙들은 모두 추하고 한심하다. 인간이 지닌 냉혹함, 완고함, 사악함만큼이나 추하다.” (P.184)

 

정원은 결코 완성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정원은 인간 세상과 인간이 하는 모든 일과 유사하다.” (P.197)

 

정말로 정원에는 죽음과 같은 것이 전혀 없다. 잠과 같은 것도 없다. 우리는 단지 한 계절에서 또 다른 계절로 나아갈 뿐이다. 우리는 삶에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삶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P.212)

 

미래는 이미 우리 내부에 있다. 지금 우리 내부에 없는 것은 미래에도 역시 없을 것이다. 우리는 새싹이 땅 밑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보지 못한다. 우리는 미래가 우리 내부에 있기 때문에 미래를 알지 못한다...우리 내부에서 일어나는 미래의 은밀한 분주함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지난날에 대한 향수나 미래에 대한 불안 같은 것은 되잖은 헛소리라고,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것 중에서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이 되는 것, 즉 성장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할 것이다.” (P.219~220)

 

차페크는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어렵고 험난한 시기를 정면으로 살아간 작가이다. 미증유의 인재(人災)는 인간에 대한 신뢰와 인식의 밑바닥부터 뒤흔들어 놓았다. 그는 정원일을 통하여 인간에 대한, 나아가 생명에 대한 본질은 흔들림이 없음을, 따라서 여전히 미래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됨을 말하고 싶은 게 아닐는지.

 

차페크의 이 작품이 후에 헤르만 헤세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데, 연대적 배경을 감안하면 일견 당연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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