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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조금 이상한 사람들
카렐 차페크 지음, 홍성영 옮김 / 민음사 / 1995년 8월
평점 :
절판
차페크는 미스터리 소재에 관심을 많이 보였다. 그런 그가 작심하고 쓴 이야기 모음집이 1929년에 출간된 <오른쪽 호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와 <왼쪽 호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이 책은 두 권에서 각각 18편씩 추려내어 전체 36편으로 단편들을 구성하고 있다. 당초 신문에 게재한 이야기들이므로 각 이야기들은 매우 짧은 분량을 지니고 있어 편당 서너 장을 넘기지 않는다.
차페크의 작품 경향에 공상과학이니 미스터리니, 다소 판타지 풍이 많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 이채롭다. 유독 그가 특히나 흥미를 보인 것은 다름 아닌 범죄의 수사와 재판에 관련된 소재다. 이 책에 수록된 이야기들의 대다수가 바로 이러한 유형에 해당한다. 그의 주요 작품들을 조감해 보면, <호르두발>이 이의 전형적인 사례이며, <유성>과 <평범한 인생> 역시 범죄는 아니지만 특정 인물의 삶을 추적해가는 과정을 다루는 점에서 유사성이 깊다. <마크로풀로스 사건>도 역시 재판과 관련된다. 그가 범죄 수사와 재판에 천착하는 이유는 뭘까.
인간의 본성은 평상시 외견상의 모습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평소 온화하고 친절한 사람일지라도 극도의 슬픔과 분노에서는 부동심을 유지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인간 본연의 적나라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순간인 것이다.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국외자는 겉에 드러난 외양과 결과만을 가지고 사건을 판단하기 마련이다. 일견 당연하다. 소위 객관적 증거는 사건 연루자 간의 내면적 심리상태를 중시하지 않으므로. 그래서 처음 순간에 사건 당사자를 매도하다가 후에 숨겨졌던 진실이 드러나면 모두 머쓱해하곤 한다. 때론 법과 정의조차도 진실을 대변하는 데 실패한다.
‘농장 사건’에서 재판장은 이렇게 말한다.
“이보게, 그 친구도 나나 자네처럼 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거야. 그것은 내가 소를 죽인 백정이나 흙두덕을 파는 두더지를 심판하는 것과 같아. 가끔 이건 우리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자네도 내 마음을 알거야, 법이나 정의의 문제가 아니야...”(P.142~143)
‘어린 백작 아가씨’에서 화자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이제 모든 것이 밝혀졌다.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 사건의 전체적인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모든 사실의 폭로, 가성, 처참한 사실, 실망, 고통스러운 경험. 이 모든 것들은 진실의 한 작은 부분일 따름이다. 전체적인 진실은 더 위대한 것이다...사랑에 빠진 사람은 정말 아름답고 놀라운 존재이다. 이것이 진실의 더 위대한 모습이다.”(P.214)
차페크는 일관되게 인간 본성의 발견과 회복을 주창한다. 그가 주목한 인간성은 거창한 것도 아니며 특별하지도 않다. 가장 평범하고 소박한 삶에 진실한 본성이 자리잡고 있다.
이는 초기작 에서 비롯하여 철학소설 3부작을 지나 <하얀 역병>까지 변함없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혼란기에서 그는 인간성에 대한 옹호만이 서구 문명의 파국을 막는 길임을 본능적으로 각성한 듯하다. 전쟁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가장 철저한 파괴가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그는 거짓과 진실이 교묘하게 섞여 있고 서로 충돌하는 현장에 주목하였으리라. 그것이 바로 이 책에 담긴 이야기들이다.
‘우표 수집’은 <평범한 인생>을 연상시킨다.
“내가 살아온 삶은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 내 자신의 삶은 펼쳐지지 않았다.”(P.288)
‘배심원’은 후일 <호르두발>의 3부를 예고한다.
“재판장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이 사건이 끝나지 않으리라 생각했을까?...그러는 동안 아무런 결론 없이 폐회되었다...거듭되는 시간 동안 사람들은 죽은 카다니크나 그의 결혼에 관해 얘기하지 않았다. 대신 나 혹은 다른 배심원 즉 우리 자신에 관해 얘기하고 있었다.”(P298)
개별 이야기는 자체로도 무척이나 흥미진진하여 재미가 넘친다. 때로는 작가의 위트와 유머가 반짝반짝 빛을 발하여 절로 웃음을 머금게 된다.
‘히르쉬의 실종’의 결론이다.
“이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품의 질이라는 사실이다. 만약 그 아르메니아인이 싸구려 염색의 카펫 대신 양질의 카펫을 밀수했다면 히르쉬를 해치운 사실이 그렇게 일찍 발각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엉터리 물건을 팔면 곧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다.”(P.259)
‘하브레나의 판결’의 서두 부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문을 읽을 때 먼저 사회란의 범죄 기사부터 읽는다. 도덕적, 법적 함양 때문인지 잠재적인 범죄성 때문인지는 잘 알 수 없다. 하지만 열성으로 읽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래서 신문에는 반드시 범죄 기사가 있어야 한다.”(P.266)
더욱이 단순히 재미의 전달을 넘어 쭉 읽어나가다 보면 아, 작가가 단편들을 통하여 말하고 싶은 게 무엇일지 어렴풋하게나마 느낌이 다가온다. 그것이 범상한 탐정작가들과 차페크의 차별점이다.
그런데 그것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진실일까?
※ 표제가 나중에 <단지 조금 이상한 사람들>에서 <단지 조금 이상해 보이는 사람들>로 변경되었다. 수록작 중에서 표제를 따온 것이라면 나중 표제가 보다 올바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