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풍선이 남작의 모험 비룡소 클래식 34
고트프리트 뷔르거 지음, 한미희 옮김, 도리스 아이젠부르거 그림 / 비룡소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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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 속에 말을 기둥에 매어놓은 후 깜빡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말이 교회 첨탑에 매달려 발버둥치고 있더라는 이야기, 늑대의 추격을 받아 전력으로 도망치는데 늑대가 말을 잡아먹고 대신 썰매를 끌더라는 이야기 등. 어릴 적 어디선가 읽어본 기억이 명백하다. 이때까지는 아마 그림형제 동화집일 거라고 막연히 추측했는데 이제 보니 뮌히하우젠 남작의 허풍담일 줄이야.

 

이 책에 나오는 일화들이 대개 그러하다. 사냥 중에 아니면 전쟁 중에 겪는 온갖 희한하기 그지없는 경험담 또는 모험담. 적정을 살피기 위해 대포알에 올라타고 왔다 갔다 하는 사례, 배고픈 사자에 쫓겨 도망치는데 앞에는 커다란 악어가 입을 쩍 벌리고 있다는 경우. 게다가 신기한 재주를 거느린 하인들 덕분에 당시의 터키, 즉 투르크 술탄의 보물 창고를 몽땅 털어올 수 있었다는 얘기. 남작의 입담은 인간계에 그치지 않는다. 달세계 탐험을 두 번이나 하지 않나 땅속 세상이 궁금하여 화산 아래로 뛰어들었다가 불카누스 신과 비너스 여신을 만났다는 등등.

 

누구라도 뮌히하우젠 남작이 들려주는 재밌는 이야기의 신빙성에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다. 단지 흥미로운 허풍일 뿐이라고. 이에 대해 남작은 적극적으로 진실성을 주창한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수시로. 물론 스스로도 진실성을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내가 겪었던 이야기를 잘난 체 뻐기지 않고 해 줄 때면 늘 그렇듯, 나는 사실을 정확하게 전하려고 무척 애쓰고 있어. 한 마디도 빼거나 보태지 않고, 이야기를 부풀리지도 않고, 되도록 뒷전에 서서 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말이야. (P.30)

 

미리 말해 두지만, 나는 절대로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아. 잘났다고 뻐기지도 않고. 그냥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고개를, 최대한 고개를 높이 들고 다닐 뿐이야.

얘들아, 몇 번이나 말했듯이, 나는 근본적으로 겸손하고, 거짓말을 털끝만큼도 안 하는 사람이야. 만약 통닭처럼 내 몸의 털이 다 빠지면? 그럼 다른 표현을 생각해야겠지. (P.52)

 

18세기 독일의 한 남작으로부터 파생된 황당무계한 일화담이 이렇게까지 인기를 끌었던 이유를 생각해본다. 교통, 통신이 발달하지 못했고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했던 당대에서 살던 고장 내지 국가 밖으로의 여행은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국적인 요소, 머나먼 미지의 세계로의 모험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받게 된다. 여기서 뮌히하우젠 이야기의 한 성격은 해명된다. 다만 단순한 허풍담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하는 문제는 남아있다.

 

자고로 우습고 재밌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인기를 끌었다. 서양만 해도 이솝 우화집, 가르강튀아와 라블레, 돈키호테 등에서 알 수 있다. 군주 곁에는 익살스러운 행동과 언조로 웃음을 자아냈던 광대가 항상 있었다. 민간을 면면히 흐르는 각종 민담과 만담, 재담 등의 대중적 우스개는 불변한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이 각박하고 냉엄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게 하여 험한 세상을 버티고 살아가게 도와주는 자양분과 같다. 게다가 상상과 환상을 창조하고 가공하는 능력은 나날이 중요도가 더해진다. 무엇보다도 남작의 이야기에는 재미 자체 외에 다른 불순한 의도를 지니고 있지 않는 순수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독자 모두는 대번에 알아차린다.

 

한 잔 술과 흥미로운 모험담(그것이 허풍일지라도)으로 껄껄하고 기분 좋게 웃다보면 문득 세상사가 하찮아진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 때문에 아웅다웅 하면서 조금이나마 남을 앞서려고 이겨보려고 바싹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 채 언제나 전전긍긍하는가?

 

아름다운 우리 지구를 내려다보며 나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해 생각했단다. 인간들은 왜 서로 욕하고, 왜 티격태격 싸울까? 왜 아름다운 우리 지구를 더럽히고 망가뜨릴까? 세상만사가 다 무의미한 것 같더라고. (P.58)

 

뮌히하우젠 남작의 모험담의 원전은 크게 두 가지다. 라스페가 영국에서 펴낸 판본이 하나 있고, 뷔르거가 후에 독일어로 재편집한 판본이 이것이다. 다만 이 책의 경우 뷔르거 판본을 저본으로 하여 발브렉커가 어린이용으로 다시 편집하고 체제와 내용을 가다듬었다. 따라서 뷔르거 판본과 어느 정도 차이점이 있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대략적 내용은 대동소이할 테지만 뷔르거 원작을 중시할 것인지 독자의 눈높이와 전달력에 초점을 둘 것인지는 아마도 판단의 사안일 것이다. 하긴 모험담 중에는 뮌히하우젠 남작의 일화 외에도 다양한 전래담을 그의 이름으로 끌어 모았다고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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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민요, 그리고 몇 편의 다른 시
윌리엄 워즈워드 지음, 김천봉 옮김 / 이담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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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워즈워스와 콜리지의 주요 시들은 모두 한번 이상씩은 읽어봤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다 공동시집인 <서정담시집>의 번역본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예의상 그 유명한 시집을 훑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두 시인의 작품집으로는 마지막으로 읽는다. 개별 시선집에 포함되지 않은 시들이 의외로 많은데 놀랐으며, 1798년판 <서정담시집>의 전모를 알게 된 점, 그리고 특히 워즈워스의 시적 사유가 관념적이기 보다는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 점 등은 특히 유익하였다. 앞서 읽지 않은 시작품들을 위주로 하여 간략한 소회를 남기는 게 도리인 듯하다.

 

<광고>는 이 번역본이 1798년 초판본에 근거한 것임을 알게 해준다. 2판부터는 워즈워스의 서문이 실려 있으므로. 이 책에 실린 글과 나중의 서문을 비교해 보면 여기에서는 아직 완전히 다듬어지지 않은 그의 시적 이념이 덜 의도적인 내용으로 표명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들은 주로 사회의 중간 및 하층 계급이 사용하는 대화언어를 시적 즐거움의 목적에 어느 정도까지 적용할 수 있는지를 확인해 보고자 집필되었다. (P.9)

 

여기에 과연 인간의 열정, 인간의 성격과 인간적인 사건들이 자연스레 묘사되어 있는지를 자문해보기 바란다. (P.9)

 

시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고전주의적 이지가 조화를 이룬 고상한 언어와 인물이 아니다. 일상의 언어로 일상의 사람들의 희노애락을 표현하고 때로는 인간에 내재한 비합리적인 면모도 드러내고자 한다.

 

먼저 <노수부의 노래>, <사이먼 리, 늙은 사냥꾼>, <우리는 일곱>, <충고와 대답>, <틴턴 애비 위쪽으로 몇 마일 거리에서 쓴 시>는 여기서 논의에서 제외한다. 이들에 대한 감상은 이전에 충분히 술회하였고 여전하다.

 

이어서 역시 읽어본 작품이지만 새롭거나 보완적 관점에서 이해가 가능한 경우도 있다. <유모의 이야기>에서 소년-청년은 사악하고 악마적으로 작중에서 평가되지만, 그의 친자연, 반종교적 태도와 자연과 합일되는 소박한 바램은 되짚어 볼 수 있다. 그가 신대륙에서 대자연 속으로 사라진 것은 거짓과 위선과 억압이 판치는 인간 세상에 머물기에는 그가 매우 순수하였음을 알게 해준다.

 

호수나 야생 대초원에서, 사냥으로 양식을 구하고,

벌거벗은 사내 되어, 자유롭게 이리저리

배회하면 얼마나 즐거울까하고 말이야. (P.107)

 

<나이팅게일>의 지저귀는 소리에 대한 상반된 입장, 즉 멜랑콜리 대 명랑한(merry), 즐거운(sweet) 감정은 인간의 주관적 자연관에 대한 비판이다. 시인은 사랑과 기쁨으로 충만한 자연의 고운 목소리”(P.123)로 받아들인다. 시 속에 등장하는 아주 늦은 저녁의 한 처녀가 나이팅게일 숲 속을 배회하는 것, 그리고 시인의 아기가 달빛을 보며 고요히 웃는 장면, 양자의 공통점은 자연의 경이와 즐거움에 매료되는 순수한 마음의 사례를 보여준다.

 

<여자 부랑자>를 통해 보면 워즈워스는 고답적인 시인이 아니다. 평민의 언어로 평민의 삶을 시로 읊었다면 그가 어찌 평민의 삶의 애달픔과 고통의 실상에 무지했겠는가? 그의 시는 웅변적으로 입증한다. 여기엔 가정과 고향을 박탈당한 이들에 대한 깊은 동정과 연민, 그리고 공감이 짙게 배어있다. 그의 시가 이후 한걸음 더 나아가지 못한 것은 시대적, 개인적 한계일 뿐이다.

 

모두, 모두 강탈당하자, 울면서, 나란히,

우리는 상처 없이 머물 만한 집을 찾아 나섰어요. (P.137)

 

고통스레 생각을 접었죠. 즐거운 집 생각들,

모든 희망으로부터 영원히 추방되었으니까요. (P.151)

 

! 어디로 가면 좋을까요? (P.161)

 

23연의 장시인 <가시나무><여자 부랑자>와 유사한 정서를 보여 준다. 시인이 마주친 늙은 가시나무 옆에서 정신을 놓고 오열하는 여인과 불행한 여인의 슬픈 사연, 사랑하는 남자에게 배신당함. 뱃속의 아기, 불쌍한 아이의 운명. 워즈워스는 도보 여행을 자주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여행을 통해 평민들의 삶을 목도하고, 행복보다 불행과 고통에 허덕이는 평민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체험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평민들의 언어로 시적 언어를 구사하려는 시도는 자연스레 평민들의 정서를 대변한다는 의미일 때, 표제의 ‘Lyrical’은 단지 아름다움의 의미보다 감성과 정서에 직접 다가섰음을 강조하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여인의 울부짖음을 되풀이하는 시인의 감정도 구경꾼의 그것은 아니다.

 

오 고통이여! 오 고통이여!

아 나의 비애! 아 고통이여!

 

<미친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타국 출신의 여인, 품에 아이를 안고 있는 미친 여인. 남편에게 버림받았으면서도 남편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가엾고 비참할 처지에 기도하는 고운 심성의 여인. 합리성의 기준에서 여인은 제정신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감성적 판단에서 이 어머니가 미쳤는가? 아니다, 아이와 아내를 버린 남자가 미쳤고, 여인을 미쳤다고 손가락질하는 세상이 오히려 미친 것이다.

 

예쁜 아가! 다들 내가 미쳤다지만,

아니다, 내 가슴 너무너무 즐거워,

수없이 슬프고 쓸쓸한 일들

마음껏 노래하면 행복하단다. (P.283)

 

전자와 달리 남성 화자가 등장하는 <마지막 양>의 근본 정서도 위의 작품들과 다르지 않다. 아이들의 식량을 구하기 위하여 애지중지 키운 쉰 마리의 양을 하나씩 팔아야만 하는 가난한 사내. 그것은 개인으로서는 극복할 수 없는 가난의 천형이자 그 속에서 절망의 나락에서 허우적대는 사람들의 삶의 고뇌는 형언할 수 없는 지경이다.

 

-허나 이제 이 튼실한 어린 양이

내 가축 중 유일하게 살아남았지.

그러니 이제는 우리가 죽어도,

가난해서 다 죽어도 상관없네. (P.271)

 

그래서 미친 듯이, 녹초가 되도록,

나는 일감을 찾아 돌아다녔지.

가끔은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네.

나에게는 참 비참한 나날이었으니. (P.275)

 

<여행하는 노인>에서 아들의 임종을 지켜주러 가는 노인과, <버려진 한 인도여인의 한탄>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여인의 정서는 이제는 고통을 초월한 체념과 평정마저 엿보인다. 그네들에겐 더 이상 삶에 대항해 대항하고 분투할 한줌의 여력마저도 고갈된 것이다. 그네들의 유일한 바람은 그저 죽기 전에 자식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보는 지극히 미약하고 소박한 소망뿐이다.

 

이제 영원히 나 홀로 남았는데,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리? (P.383)

 

나의 불쌍한 버려진 자식! 내가

한 번만 너를 꼭 안아볼 수 있다면,

행복한 마음으로 죽을 텐데,

내 마지막 생각들도 행복일 텐데. (P.385)

 

참고로 <버려진 한 인도여인의 한탄>에서 Indian’을 인도인으로 해석해야 할지 의구심이 든다. 아메리칸 인디언이 보다 적합한 게 아닐지? 시인은 첫머리에서 북극광 현상 언급하였으며, 여인이 죽어가는 곳이 차디찬 눈밭임을 서술하고 있는데, 인도보다는 북아메리카가 보다 자연 기후 면에서 온당하다.

 

<유모의 이야기>에서 보이는 자연 대 인간의 대립 구조는 <이른 봄에 쓴 시><지하 감옥>에서 한결같다. 사랑과 자비로 인간을 보듬는 자연의 방식, 반면 위선과 폭력으로 점철된 인간의 방식.

 

그간 인간이 인간에게 행해온 일들

문득 떠올린 내 가슴 너무도 슬펐다. (P.217)

 

이곳을 우리 선조들이 사람을 위해 만들었다!

이것이 우리의 사랑과 지혜를 처리하는 방식,

......(중략)......

이게 유일한 구제책인가? 자비로운 신이시여? (P.279)

 

그래서 시인은 <충고와 대답>의 후속작인 <입장전환>에서 이렇게 웅변하지 않는가.

 

봄의 숲이 베푸는 자극 하나가

자네에게 인간에 대해, 도덕적인

악과 선에 대해, 더 많은 가르침을

줄 수 있네, 숱한 현자들보다도. (P.369)

 

<우리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써서 작은 아들 편으로 시의 주인공에게 보낸 시>에서도 신춘을 맞이하여 온화한 날에 자연을 체험하고자 하는 시인의 열망이 강렬히 드러난다.

 

한 순간이 반백년의 지성보다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주는 지금, (P.181)

 

인간은 항상 비교와 선택을 강조한다. 내가 남보다 우월해야 안심하고, 내가 최선을 선택하도록 교육받는다. 어린 아들에게 농장과 해변 중에서 어디가 더 좋은지 반드시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아버지의 일화를 보여주는 시가 <아버지들에게 거짓말 기술의 습득과정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반복하여 질문하며 대답을 하도록 팔을 잡는 신체적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아이는 대증적 거짓말을 하게 된다. 이것은 곧 자연의 본성을 위배하도록 강요하는 셈이다.

 

자연의 본성은 겸손이다. 자연은 스스로 잘난 척하지 않으며, 남과 이웃을 경멸하고 무시하지 않는다. 겸손하면서 당당하고 가식 없이 있는 그대로를 영위하며 드러내는 것이 자연이다.

 

<황량한 물가였으나, 아름다운 경치가 내려다보이는 에스웨이트 호수 근처에 서 있는 한 주목나무아래 대좌에 남긴 시>에서 시인이 안타깝게 생각하는 대좌의 주인공이 그러하다. 시인은 대좌의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듣는 이가 조금 더 성숙한 인격을 갖추기 기대한다.

 

눈으로 계속 자기만

응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만 바라보지. (P.117)

 

진정한 지식은 사랑으로 이끌고,

진정한 위엄은 내적 사색의 고요한 시간 속에서

언제나 의심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언제나 자신을 존경할 수 있는 이에게만

깃든다는 것을 배우기 바라네. (P.117)

 

자연의 본성은 사랑과 연민이다. 자연은 일방의 이익을 위하여 타방이 피해를 보는 걸 원치 않는다. 구성원 모두가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자연의 희망이다. <구디 블레이크와 해리 길>에서 신은 해리 길에게 징벌을 내렸다. 해리 길이 커다란 죄악을 범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딱히 구디 블레이크를 두둔한 것은 아니다. 단지 최소한의 인간미, 즉 휴머니즘을 보여줄 것을 기대했던 것이다. 늙고 약한 가난한 이에 대한 동정심.

 

언제나 듣고 계시는 신이시여!

오 그에게 더없는 온정을 베풀게 하소서!

......(생략)......

젊은 해리는 그녀의 기도를 들었지만,

얼음처럼 차갑게 외면하고 말았네. (P.175)

 

<죄수>의 화자는 저녁 무렵 자연의 장관을 언급한 후 곧바로 지하 감옥으로 시선을 돌린다. 화자와 죄수의 시선의 마주침. 화자는 연민과 동정심으로 교감하고자 한다.

 

형제처럼 자네 슬픔을 나누려고 왔네. (P.393)

 

자연 속에 깃든 찬탄할 만한 덕의 인식을 노래한 시가 더 있다. <저녁에 리치몬드 근처, 템스 강 위에서 쓴 시>. 여름날 템스 강의 황혼을 바라보며 감상에 젖는 시인, 시인은 황혼의 색조들이 영속하길 바란다. 달콤한 꿈과 환상을 꿈꾸며. 가벼우면서 오싹한 슬픔을 모른 채. 이윽고 찰나의 황혼은 스러지고 저녁 어둠이 모여 든다.

 

-저녁 어둠이 사방에 모여 든다

덕의 아주 거룩한 힘들을 거느리고서. (P.359)

 

장편 발라드 <백치소년>은 전반부의 예상과 달리 밝은 결말로 매조진다. 엄마의 착한 심성, 엄마가 사랑하는 아들, 그럼에도 백치소년을 밤에 보낼 수밖에 없었던 불가피한 사유는 참으로 딱하다. 마을에서 떨어진 외딴 집, 급한 병자의 발생, 결국 가난이 원인 아니겠는가. 가난이 아니면 그들이 굳이 사람들과 떨어져 살 일이 없으리라.

 

오 리 내에는 집 한 채 없다.

난처한 그들을 도울 손길이 없다. (P.297)

 

밤새워 산속을 헤매었음에도 백치소년은 해맑기 그지없다. 백치소년의 순수성은 이성과 허위로 무장한 정상적인 인간에 대비되는 자연의 인간상을 그대로 투사한다. 그는 거짓이 없다. 그에게 올빼미는 수탉으로, 달은 해일 뿐이다.

 

<서정담시집> 1798년 런던 판은 23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었지만, 같은 해의 브리스틀 판은 한 편이 추가되어 총 24편을 담고 있다고 한다. 나중에 추가된 시가 <류티 혹은 체르케스인의 사랑가>로 콜리지의 작품이다.

 

과연 콜리지답게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하다. 한밤, 냇가에서 배회하는 화자, 그는 사랑하지만 자신에게 무심한 여인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이 가득하다. 배반의 상과 상냥한 상이라는 대조적 표현이 현저하다. 상념에 잠기다 강둑에 미끄러진 화자는 근심으로 죽은 자신을 상상하며 초췌한 모습에 그녀의 마음이 돌아선다면 기꺼이 죽으리라고 토로한다. 하지만 마지막은 그래도 내일에 대한 기대로 끝맺는다. 이 시에서는 류티의 사랑을 갈구하는 아래의 표현이 변형되어 반복되는 점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아니, 배반의 상! 내 마음을 떠나라

류티가 친절을 아니 베풀 바에는.

 

어쩌다보니 평균 이상으로 글이 길어져버렸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처음 읽는 시, 조명을 덜 비추었던 시에 한두 마디 언급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옮긴이의 해설에서 두 대목을 인용하며 <서정담시집>에 대한 감상을 정리하고자 한다.

 

이성과 질서, 정형화된 형식, 고상한 주제, 위트와 유머, 격식 등을 중시한 기존의 신고주의 시풍과는 확연히 다른 소재, 시의 전개방식, 사물을 바라보는 시적 화자의 자세와 태도 등으로 근대화의 새 물결에 걸맞은 새로운 감수성의 형성과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평가에서 기인한다. (P.431)

 

<서정민요>는 이러한 연민 혹은 공감의 원리를 문학적으로 실현한 최초의 시도이자 최고의 성과였다. (P.436)

 

이것으로 나름 오랜 시간을 단속적으로 투자한 워즈워스와 콜리지의 세계와 이별하련다. 전자의 <서곡>과 후자의 <문학평전>이 있음을 알지만, 전자의 단편을 읽어보니 내 역량으로는 이해가 어렵고 후자는 평론집으로 판단되어 대상에서 제외한다.

 

정말 마지막으로 책 자체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을 수 없다. 상업성이 전혀 없음에도 영한 대역의 성실한 번역과 반양장 본임에도 탄탄한 만듦새를 높이 평가한다. 다소 빈약한 주석과 해설이 마음에 걸리지만 시집에서 상세한 주석을 거의 본 적이 없기에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작품해설은 조금만 더 충실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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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 랭 사인 솔세계시인선 4
로버트 번즈 지음, 김명렬 옮김 / 솔출판사 / 1995년 9월
평점 :
절판


다시 번즈의 시집을 꺼내든다. 명분은 충분하다. 여기에는 30편의 단시와 4편의 장시가 들어 있어 태학사 판에 비해 이 책에 수록된 시편의 수가 더 많다는 점, 그래서 그의 다른 시작들을 감상할 수 있다. 게다가 그의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 발라드 <탬 오섄터>를 수록하였다는 점 등이다.

 

번즈의 시는 되풀이 읽어도 여전히 흥미롭고 일말의 지루함도 느낄 수 없다. 시 속의 화자는 시대를 달리하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자신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울리고 있다. 그들의 육성은 꾸밈없고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내고 있는데 그것이 현대인들에도 여전히 공감을 주는 것이다. 번즈 시의 특성, 즉 사랑, 노래, 향토색, 민중지향성, 해학미, 여성 화자 등에 대해서는 이전에 쓴 감상이 여전히 유효하다.

 

일단 새로 접하는 작품들 위주로 간단하게 언급하면, 여성 화자의 작품들이 눈에 띤다. <내 침실문 앞에 있는 이 누구예요?>에서는 여성과 구애하는 남성 간의 밀고 당기기가 독자의 미소를 자아낸다. <제이미, 나를 한번 시험해보세요>에서도 남성의 과감한 구애를 요구하는 여성 화자의 대담함이 흥미롭다. <탬 글렌>의 경우 언니에게 연애상담을 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답변을 노골적으로 권유하는 동생의 절실함이 오히려 풋풋하다. <오 스물하고 한 살만 되면, >에서는 아예 드러내놓고 자신이 성인만 되면 사랑을 위해 가족을 떠나겠다는 여성의 과감성이 두드러진다. <멋진 구혼자>는 여성판 <던컨 그레이>에 가깝다.

 

한편 사회적 약자로서의 여성의 위치를 발견할 수 있는 대목도 있다. <멀리 가 있는 멋진 머슴아>의 여성은 사랑을 위해 집에서 쫓겨나지만 뱃속의 아기와 함께 돌아올 연인을 기다린다. <그레고리 나으리>에서 귀족에게 순정을 바쳤고 그로 인해 집에서 쫓겨난 여성은 성문 앞에서 간절히 문을 열어주고 자신을 받아주길 애원한다. 한밤중, 폭풍우, 번쩍이는 번개와 천둥. 처절하고 암담한 상황에서 성문은 굳게 닫혀있다. 여성은 남성을 원망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잘못으로 행여 그가 다칠세라 오히려 용서한다.

 

번즈는 스코틀랜드 출신으로서 고향의 인물과 자연에 대한 애호가 남다름을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다. <맥퍼슨의 고별>은 배반당해 교수형에 처해지는 한 인물의 당당하고 의연함을 그리고 있다. 맥퍼슨이 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없지만 범상한 죄인이 아님을 짐작케 한다. 이 작품은 합창의 반영과, 반복적 후렴구 너무도 유쾌하게......”를 통해서 민요조의 노래 형식임을 알 수 있다.

 

, 죽음이 무언가, 숨 멎는 것밖에?

나 일찍이 수많은 싸움터에서

죽음 앞에 두려워한 적 없으니

여기서도 또다시 그를 비웃네!

너무도 유쾌하게...... (P.36)

 

<내 마음은 하이랜드에 있네>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다. 번즈의 애국심이 직접적으로 반영된 시작품은 <배녹번을 향한 로버트 브루스의 행군>이다. 브루스의 어조를 빌려 힘차고 통렬한 어조로 그는 애국심의 고취와 반잉글랜드 정서를 한껏 북돋운다.

 

압박의 슬픔, 질곡의 고통,

사슬 매인 자손들을 생각해보라!

우리는 있는 피를 다 쏟더라도

그들을 기필코 자유로우리! (P.104)

 

번즈는 일평생 가난에 시달렸다. 그의 시 속에서 가난의 고통스런 자취를 엿볼 수 있고, 가난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시인의 자세도 함께 살펴볼 수 있다. 더불어 물질적 면보다 정신적인 면을 중시하며, 강인한 평등사상을 품은 시인도 보게 된다.

 

평생 내내 고생이 내 팔자라 하여도

좋은 벗과 한 밤 지내면 그 모두 스러지네.

우리 여행 끝나는 즐거운 그때 되면

그 누구가 지나온 길 생각할 건가? (<적어도 만족하고>에서, P.108)

 

아무리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그날은 다가오네, 아무리 그래봐도,

온 세상의 모든 사람과 사람이

아무래도 결국은 형제 될 날이. (<아무리 그래도>에서, P.112)

 

이 선집에는 4편의 장시가 들어 있는데, <경건한 윌리의 기도>를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죽음과 혼북 의사>, <유별나게 선한 자들에게>, <탬 오섄터>-은 이번에 처음 읽게 된다. <유별나게 선한 자들에게>는 일종의 교훈시라고 하겠는데, 인간사를 너무 엄격하고 가혹한 정의 관념을 가지고 재단하지 말라고 요청한다.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인간의 속성으로 너그럽게 이해해달라고 한다. 솔로몬 전도서를 서두에 인용하여 올바른 것도, 똑똑한 것도 지나치면 바보짓과 다름없다며. 이 대목에서 문득 <주홍글자>가 떠오른다.

 

스코틀랜드 민간전승에 대한 시인의 열성적 관심이 초자연적 배경과 사건으로 반영된 작품이 <죽음과 혼북 의사><탬 오섄터>이다. 작품의 경향은 판이하다. 전자에서 화자는 죽음과 맞닥뜨리고 그와의 대화를 통해 의사 혼북의 놀라운 의술로 죽음이 매우 초라한 처지에 놓여 있음을 보게 된다. 곧이어 죽음의 입을 통해 독자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는데, 죽음이 관여한 자연사는 감소할지라도 의사 혼북의 의술 악용으로 인한 사망이 훨씬 늘어날 것임을. 시인의 창작 의도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당대 부적절한 의술에 대한 비판 의도는 확연하다. 다만 화자와 죽음 간 대화가 급작스럽게 끊어지면서 작품도 끝맺음으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다소간 미진함을 느끼게 된다.

 

<탬 오섄터>는 정직한 애주가 탬이 어느 폭풍우 치는 험한 밤에 겪게 되는 기상천외한 모험담을 보여준다. 온갖 마귀와 마녀들이 모여 한바탕 춤을 추며 노니는 장면을 목도하게 된 탬. 악마들의 기괴하고 섬뜩한 장면 묘사도 일품이지만, 탬이 한 젊은 마녀의 자태에 매혹되어 정체가 탄로 나는 대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인간 본성에 실소가 절로 나온다. 성난 악마들에 추격을 간신히 따돌린 탬, 덕분에 암말의 꼬리는 뭉텅이로 뽑혀버렸다. 시인은 말미에 짐짓 교훈조의 몇 마디를 덧붙이지만, 독자들은 모두 알고 있다.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마귀와 마녀들의 광란의 무도와, 젊은 마녀 내니를 바라보는 탬의 두 눈이라는 것을. 악마들이 최신 유행의 프랑스 춤이 아니라 스코틀랜드인들에게 익숙한 여러 춤들을 춘다는 기술은 그네들조차 스코틀랜드 마귀와 마녀이므로 응당 당연하면서도 해학적이다. 앞서 번즈 시의 특징 중 하나가 해학미라고 하였는데, 이 작품에서도 도처에 해학적 요소가 그득 담겨 있다. 술집에 연신 음주에 취해 흥청대는 탬의 모습에서부터 결사적으로 도망치는 탬과 그를 필사적으로 추격하는 내니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그리 행복한 것 보고는 환장하여

수심은 맥주 속에 빠져 죽어버렸지.

벌들이 꿀을 싣고 벌집으로 날아가듯

시간은 즐거움 속에 나는 듯 지나갔네.

왕이 축복받았다면 탬은 영광받았지,

인생의 불행쯤은 죄다 이겨버린 거라! (P.182)

 

, ! , ! 자넨 죄값 받게 됐네!

저들이 자넬 지옥에서 생선 굽듯 할 걸세!

자네 아낸 헛되이 자네 오기 기다리지!

그녀는 곧 슬픔에 찬 과부가 될 걸세! (P.200)

 

옮긴이는 작품 해설에서 번즈의 시가 당대에 성공한 몇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신선한 언어, 빼어난 형식 감각, 민요조의 운율 등. 그의 시는 비판처럼 분명 깊은 철학이나 심오한 사상은 부재한다. 역으로 시에서 이러한 요소들이 필수불가결한지 되묻고 싶다. 번즈는 오히려 시에 인간을 되돌려주고 있다. 박제화된 언어와 형식을 깨뜨리고, 시를 관념화하여 인간으로부터 멀리하게 만드는 일련의 행동에 대해 그는 온몸으로 저항한다. 시는 이성으로 해득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공감해야 하는 예술 존재임을. 그래서 오늘날 그의 가치는 더욱 빛난다.

 

수록 작품과 번역, 책 구성과 편집, 해설에 이르기까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어 번즈의 시에 관심 있으면 우선적으로 추천할만한 좋은 책인데 시중에서 절판된 게 무척이나 아쉽다. 참고로 알라딘의 역자 소개는 전혀 엉뚱한 인물을 소개하고 있다. 이 시집의 옮긴이는 당시 서울대 영문과 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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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감 - 랄프 왈도 에머슨의
랄프 왈도 에머슨 지음, 이창기 옮김 / 하늘아래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에머슨의 글을 한 권 읽었는데 난삽하여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좀 쉽게 정리된 책을 찾다 보니 이 책을 알게 되었다. 옮긴이는 에머슨의 두 권의 에세이집 가운데 일곱 편을 그것도 전문이 아니라 부분 발췌하여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단순한 역자가 아니라 편역자이다.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용이한 접근과 이해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자 에머슨 입문으로서의 역할은 충분하다고 본다.

 

오늘날 에머슨의 이름은 후기지수인 소로의 명성에 바래지고 있는 듯하다. 에머슨 당대와 이후 미국 사회와 문단에서 그의 영향력은 자못 지대하였다고 한다. 사상적으로는 수많은 강연과 연설문을 통해서, 문학적으로는 두 권의 에세이와 함께 시집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혹자는 오늘날 미국과 미국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만든 이가 바로 에머슨이라고 한다. 그런 만큼 에머슨의 글에 도전할 명분과 가치는 충분하다.

 

<자신감>. 또는 자기신뢰로 번역하기도 한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생각을 믿고 신뢰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글이다. 독불장군처럼 오만하라는 뜻이 아니라 타인의 의견과 이해관계 등에 흔들리지 말고 주체적이고 순수한 판단을 통해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마음의 태도를 견지하라는 언명이다. 쉬운 말이나 실천은 어렵다. 그래서 사회 일반은 자신감을 증오한다고 밝힌다. 참되려면 혼자서 가야함을 무릅써야 한다. 정신을 고양하기 위해 고립을 자초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에도 미래에도 구속받지 않고, 세인의 평판에도 흔들림 없이 오로지 현재에 순수하게 살아가야 함을 강조한다.

 

위인이란, 군중의 한가운데 있으면서 철저하게 온화한 태도로 고고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P.19)

 

에머슨의 현재 중시의 주장은 <경험>에서 반복된다. 많은 사람들은 삶의 바로 이 순간을 소홀히 여기고 항상 장래와 미래에 중점을 둔다. 그러고는 자신들의 삶이 덧없음에 한탄을 아끼지 않는다. 에머슨은 딱 잘라 말한다.

 

삶이란 지적인 것도 아니고, 비평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강인한 것이다. (P.45)

 

마음의 안정을 이룰 수 있는, 내가 아는 유일한 길은, 오직 현재라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P.47)

 

현재로서의 삶, 소소한 일상으로서의 찰나를 놓치지 말고 매순간 충실하게 영위하다고 보면 큰 지혜는 자연스레 따라오게 된다는 것이다. 호손의 <큰 바위 얼굴>과도 상통한다. 사실 우리는 생의 이후가 어떻게 전개되고 결말지어질지 알 수 없다. 현재를 외면하고 미래만 주시하는 것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오늘의 노력에 따라 내일의 모습은 전혀 다르게 변할 수 있다.

 

<보상>. 에머슨은 마음의 안정을 중요시한다. 순수한 자기신뢰에 근거한 항상심과 부동심을 가지고 세간에 흔들림 없이 현재의 소소한 삶에 충실한 것. 그가 보는 인생의 핵심은 이러하다.

 

인간의 참된 생활과 만족은, 지나치게 가혹하거나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경우를 피하고, 어떤 상황이나 환경 속에서도 태연하게 마음의 안정을 찾는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P.61)

 

에머슨은 사물과 현상은 모두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개별로 흩어지지 않고 유기적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자 하는 성향은 우주는 물론 인생에도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원인과 결과, 수단과 목적, 씨앗과 열매는 서로 분리할 수 없다. 결과는 이미 원인 속에서 꽃피기 시작했고, 목적은 수단 속에, 열매는 씨앗 속에 이미 들어 있기 때문이다. (P.63)

 

요행은 없다. 반드시 새로운 책임이 뒤따른다. 고통과 패배는 자체로 힘들고 괴롭지만, 그 속에서 뭔가를 깨닫고 배울 수 있다면 보다 큰 성공과 승리의 기틀이 된다. 늘 승리만을 거둔 자는 한 번의 패배로 나락에 떨어지지만, 자신의 약점에서 개선과 보완을 발견하는 자는 끝내 성취하게 된다.

 

<자연>. 에머슨은 자연을 사랑하였다. 그의 <자연론>에 감화되어 소로는 월든 호반에 은거하기로 결심하였다. 에머슨에게 자연은 다정하고 꾸밈없는 소박한 기쁨”(P.79)을 안겨주는 존재로서 결코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것이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덕, 가치에 대한 그의 찬미는 이어진다.

 

문학이나 시, 그리고 과학은......이 깊이를 알 수 없는 자연의 비밀에 바치는 인간의 경의이다. (P.82)

 

자연은 인간의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사랑을 받는다. 자연은 비록 사람이 살지 않는다 할지라도, 아니 오히려 그 이유 때문에 신의 도시로서 사랑을 받는다. (P.82)

 

자연은 언뜻 보아 비합리적인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소소하고 하찮아서 쓸모없어 보이는 현상도 편재한다. 성마른 사람들은 이런 관점에서 자연을 비판하지만 사실 자연의 비합리와 낭비와 무용성은 철저히 합목적적인 장치다. 이처럼 자연은 인간의 이해의 한계를 넘어서는 수많은 비밀을 감춘 채 찬연한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가르친다.

 

<정치>. 법과 정치에 대한 에머슨의 견해는 상대주의적이다. 그는 법은 하나의 비망록에 불과”(P.98)한 것으로 간주한다. 일국의 정치체제란 개인의 권리와 재산의 권리를 지키려는 동일한 요구의 반영이지만, “독특한 국민성”(P.104)에 좌우되므로 타국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민주정도 군주정도 나름의 존재가치가 있으므로 절대시할 수 없다.

 

우리가 전적으로 의지해야 할 것은 모든 법을 꿰뚫고 빛나는 자애로운 필연성에 있다. (P.109)

 

에머슨은 진리와 정의의 지배를 현자에 의한 지배”(P.110)라고 간주한다. 플라톤의 철인과도 상통하는 개념인 현자는 저절로 쉽게 태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불가피하게 합법적 절차를 마련하여 국민들이 이의 지배를 받도록 하고 있지만, 만약 현자가 나타난다면 사정은 바뀌게 된다.

 

합법적인 지배의 남용을 억제하는 해독제는 개별적인 인격의 영향, 개인의 성장이다. 그것은 곧 대리권을 폐지시키는 원리의 출현이며, 현자의 출현이기도 하다......(생략)......현자의 출현과 더불어 국가는 소멸한다. 인격의 출현은 국가라는 존재를 불필요하게 만든다. (P.113~114)

 

<역사>. 에머슨에 따르면 모든 개인들에게는 누구나 한결 같은 마음이 있다.”(P.117). 이 한결 같은 마음은 나와 남 사이를 소통하여 보편적인 마음이 된다. 그리고 이런 마음이 한 일들을 기록한 것이 바로 역사”(P.117)라고 한다. 보편적인 마음 내지 본성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발현되었는가를 살펴보는 게 이 장의 취지다. 그는 우리는 옛것의 숭배자”(P.72)라고 단언한다. 고대의 인물과 사상을 숭배하는 것은 단지 오래되고 낡은 것에 대한 찬미가 아니다. 그 보편적인 마음 내지 본성에 대한 찬미”(P.132)라고 해야 할 것이다.

 

<초영혼>. 여기서 에머슨의 유명한 초령내지 대령(大靈)’ 개념이 등장한다.

 

사람이란 모두 개별적인 존재라는 생각을 받아들이면서도, 인간이 아닌 다른 모든 존재와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 바로 통일이자 초영혼이며, (P.140)

 

인간의 마음속에는 우주의 영혼, 현명한 침묵, 모든 부분과 분자가 균등하게 서로 연관되어 있는 보편적 아름다움, 또는 저 영원한 하나가 들어 있다. (P.140)

 

우리의 영혼은 혼자이고 독창적이고 순수한 그 자신을, 역시 혼자이고 독창적이고 순수한 초월적 영혼에게 바친다. (P.158)

 

인간의 영혼들의 공통적인 본성이 그의 초영혼이다. 초영혼은 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몰개성적인 것, 곧 신 자체이다.”(P.145). 우리는 에머슨이 목사였다는 점, 이후 기독교 교리의 영역을 벗어나 자유로이 인간에 대한 고찰을 해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신은 여호와도 예수도 아니라 인간 영혼과 공통적인 본성에 근거한 일종의 정신적인 에너지라고 그는 파악하였다. 신은 초월적 존재가 아니고 인간에 근거한 것이므로 신을 찬미하는 삶의 방식 또한 달라져야 한다.

 

위대한 신에게 경배하고자 높이 오르는 영혼은 평범하고 진실하다......그저 열심히 일상의 날들을 살아가며 지금 이 시간에 안주한다. (P.153)

 

성실한 마음으로 신을 떠받드는 가장 소박한 사람, 그가 바로 신이다. (P.153)

 

인간이 자기를 신뢰하고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까닭은 이처럼 신적인 최고의 존재가 인간 자신에게 깃들여 있어서이다.

 

에머슨의 에세이에서 많은 인용과 사례들, 그리고 난삽하고 장황한 대목들을 제외하고 보니 남은 것은 도덕서처럼 되고 말았다. 그의 글들이 일종의 자기계발서로 거론되는 이유도 전혀 황당하지는 않다. 그는 강연과 글을 통해 당대 미국 사회의 여러 폐해를 지적하고 개선하고자 노력하였다. 19세기 초반의 미국은 정치적으로 독립을 쟁취하였으나 사회, 사상, 문화면에서는 여전히 구대륙의 유산에 충실하였다. 에머슨은 유럽과 차별되는 정신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우월한 사회 건설이 미국에서 가능하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주창한 것이다. 그리고 에머슨이 후대 미국 사회에 남긴 영향은 아래 인용으로 충분하다.

 

에머슨은 낙관적, 이상주의적, 민주적, 외향적, 개인주의적 등 미국 국민성의 여러 요소들을 대변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우리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급자족을 가르쳤다. (<평생 독서 계획>(클리프턴 패디먼 외), P.236)

 

한편 이 책은 부록 에머슨의 세상을 바라보는 눈으로 그의 글에서 뽑은 경구들을 수록하고 있다. 그는 영어 경구의 대가로 오늘날에도 명성이 자자하다고 하니, 촌철살인하는 듯이 의표를 찌르는 날카로운 표현의 재미를 누려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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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박공의 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2
너대니얼 호손 지음, 정소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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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 글자>의 강렬한 인상에 힘입어 후속작인 <일곱 박공의 집>을 꺼내든다. 이전에 이미 단편선집도 읽었으니 본격적으로 호손의 세계에 뛰어드는 순간이다. <주홍 글자>와는 달리 남은 세 편의 장편소설들은 국내에 별로 인기가 없다. 번역본도 달랑 한 종류씩뿐, 따라서 무얼 읽을지 선택의 고민이 없어서 좋은 면도 있다.

 

호손은 자신의 장편 소설을 로맨스로 지칭한다. 이른바 소설과는 분명한 선을 긋고 있는데, 아무래도 작품 제재와 전개방식에 있어서의 비현실성 내지 자유로움을 지향하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럴듯한 허구가 아니라 그럴듯하지 않은 허구로서의 로맨스라면 충분히 납득가능하다. 환상문학이 현대에 와서 강력하게 주류 문학으로서의 입지를 구축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마법사로 화형당한 매슈 몰의 저주, 대를 이은 핀천가 주인의 의문사, 앨리스 핀천의 불행한 죽음, 그리고 급작스러운 해피엔딩. 고딕적 괴기와 선혈 낭자한 범죄, 저주와 최면 같은 로맨스적 성격은 물론 흥미롭다. 권선징악적 해피엔딩은 진부하지만 독자의 기분은 불편하지 않다. 다만 이것이 전부라면 뭔가 미진하다. 독자의 정신을 쏙 빼놓을 정도로 몰입감이 좋은 편이 아니며, 말초신경을 자극할 짜릿함도 부족하다. 게다가 홀그레이브의 신분은 작중에서는 결말 부분에 공개되지만 눈치 빠른 독자라면 이미 중반부에서 추론이 가능하다.

 

기실 이 작품은 흥미로운 로맨스 소설이 아니라 전작과 마찬가지로 인간 성격에 관한 진지한 탐구로 접근해야 마땅하다. 전작은 죄와 죄의식, 그리고 양심이 주된 테마로 등장한 반면, 여기서는 위선과 인간상의 대비-탐욕적 인간상과 (동화 같은) 순수하고 이상적 인간상-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런 면에서 호손의 인간탐구 시리즈 제2부라고 불릴 만하다.

 

전작보다 훨씬 많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흐름은 느릿느릿하다. 성미 급한 독자라면 중반까지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책장을 살포시 덮고 치워버리기 딱 좋다. 작가는 느긋하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당대에서 이백여 년을 거슬러 올라간 식민지 초창기 시절에 벌어졌던 어두운 사건을 상세히 소개한 후 일곱 박공의 집의 현재로 돌아온다. 이 점에서 내내 과거에 머물렀던 전작과는 차이점을 보여준다.

 

독자는 곧 주요 인물들의 성격에 대해 알 수 있다. 헵지바의 괴팍한 외모와 선한 성격의 대조를 기술하는 장면을 통해 독자는 다소간 헵지바에게 연민을 품게 되고 이후 그녀의 무능력과 약점을 눈감아주게 된다. 클리퍼드는 살인범으로 수십 년간 지하 감옥 형기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선하고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라는 작가의 말로써 흉악한 인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반면 핀천 판사는 지역사회의 유지로 관대하고 친절한 언행으로 세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인데, 작가는 홀그레이브가 보여주는 핀천 판사의 은판 사진과 핀천 판사와 헵지바, 피비의 조우 장면으로써 겉보기와는 다를 수도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드리운다.

 

그것은 후손에게 상속하고자 하는 재산과 명예에 관련해 인간의 법이 확립하고자 했던 계승의 과정보다 훨씬 더 확실한 과정을 통해서 약점과 결점들, 악한 감정들이나 비열한 경향들, 그리고 범죄로 이어지는 도덕적 질병들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 내려진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P.162)

 

특히 이날 오전 핀천 판사의 친절한 면모가 지닌 따뜻함이 너무 도가 지나쳐, 적어도 마을에 도는 소문에 따르면 지나치게 쏟아지는 햇볕 때문에 생긴 먼지를 가라앉히기 위해 따로 물차가 따라다녀야 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P.177)

 

위 대목의 해학성에 주목해본다. 이미 전작에서 형식상 두드러진 특징으로 불성실한 화자로서 작가의 의도적 개입을 언급하였다. 이 작품에서도 작중 사건과 인물에 대한 작가의 시점은 대체적으로 전작과 유사하다.

 

그러면 이제, 곧 알게 되겠지만 아주 소박하게 우리의 이야기를 시작해 보도록 하자. (P.42)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이야기의 문턱에서 소심하게 어슬렁거리고 있을 뿐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헵지바 핀천이 이제 막 하려는 일을 들추어내기가 도무지 싫은 것이다. (P.49)

 

하지만 여기서는 정도가 더욱 현저하다. 작가는 전지적 시점으로 전개를 해나가다가 불현 듯 순진한 관찰자의 외투를 덮기도 한다. 마치 무성영화 시절의 변사처럼 소리 없는 영상 속 사건과 인물을 관객에게 설명해주는데 만담 풍으로 의도적으로 조소적, 해학적 촌평을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게다가 이러한 촌평의 분량이 짤막하지 않고 대체로 길다는 점이 흥미롭다.

 

, 불쌍한 클리퍼드! 당신은 결코 당신이 겪어서는 안 될 괴로움에 시달려 지치고 늙었구나. 당신은 반쯤은 정신이 나가고 반쯤은 바보가 되었다......(중략)......그러니까 할 수 있을 때 그 행복을 잡아라. 투덜대지 말고 의심하지 말고, 최대한 누려라! (P.213)

 

이러한 사례의 압권은 핀천 판사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소개하며 기술하는 제18장이다. 헵지바를 협박하여 그녀가 클리퍼드를 데려오길 기다리는 핀천 판사의 모습이 독자가 아는 마지막이다. 그리고 작가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독자도 마찬가지이길 기대하면서 조상 전래의 의자에 앉아있는 핀천 판사를 향해 이러저러한 대화를 건넨다. 다소 길고 반복적이지만 해학적 어조로 그의 죽음을 서서히 알리는 과정을 통해 독자는 핀천 판사의 진정한 면모, 즉 치밀한 일상과 맹렬한 야심을 비로소 확연히 알게 된다.

 

제발, 핀천 판사, 이젠 시계를 좀 봐요! 눈길도 안 주나요? 저녁 시간이 십 분밖에 안 남았는데!......(중략)......맙소사, 이 만찬! 그 진짜 목적이 뭔지 정말 잊은 건가요?......(중략)......그러니까 서두르십시오! 당신이 할 역할을 해요! 당신이 지금까지 얻기 위해 그렇게 노력하고 싸우고 기어 가며 어렵게 오른 데 대한 보상을 이제 바로 거머쥐기만 하면 돼요! 만찬에 참석해야 해요! 그 고귀한 와인을 한두 잔 마시고 가능한 한 나직한 목소리로 선서를 해야죠! 그러면 식탁에서 일어날 때 사실상 당신은 오래된 주의 영예로운 주지사가 되는 겁니다! 매사추세츠 추의 핀천 주지사!......(중략)......그러니까 일어나요, 핀천 판사, 일어나라고요! 하루를 다 낭비했고 곧 내일이 올 거예요. 늦지 않게 일어나서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그래요? 내일이라고요! 내일! 내일! 살아있는 우리는 내일 일찍 일어날 거예요. 오늘 세상을 뜬 사람에게 내일을 부활의 아침이 될 테고요. (P368~372)

 

해피엔딩의 주인공인 홀그레이브와 피비에 대해 빼놓을 수 없다. 일단 홀그레이브에 대한 작가의 평가는 주저하면서도 대체로 호의적이다.

 

삶의 초기에 가진 오만한 믿음이 마지막에는 훨씬 겸손한 믿음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중략)......그의 신념과 불충, 가진 것과 부족한 것 모두에서 그 예술가는 고국 땅의 많은 동료들을 대표하는 인물로 충분히 나설 만했다. (P.243~244)

 

반면 피비는 작품 내에서 가장 완벽한 미덕을 지닌 완벽한 인성의 보유자로 그리고 있다. 그녀가 일곱 박공의 집에 등장하는 것은 낡고 음습한 저택에 한줄기 빛이 비추는 것과 같다. 그녀의 존재는 헵지바와 클리퍼드를 돕고 위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홀그레이브마저 변화시킨다.

 

그녀는 실재였다. 손을 잡으면 무언가를, 따뜻한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어떤 실체이면서 온기를 가진 것. 그래서 부드럽기도 한 그 손을 꽉 붙잡고 있기만 하면 서로 공감하는 인간 본성의 전체 연쇄 속에서 자신이 확실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세상은 이제 단지 망상이 아닌 것이다. (P.189~190)

 

피비의 진정한 미덕은 그녀가 매우 실제적이라는 사실이다. 헵지바와 클리퍼드는 스스로를 유령이라고 탄식한다. 그들은 사실상 유령 같은 존재들이다. 오라버니는 타의에 의해 오랫동안 세상과 단절되어 지냈으며, 누이는 세상에 대한 반감으로 스스로를 세상과 단절시켰다. 그들은 모두 당대에 착근하지 않고 과거에 사로잡혀 세상을 부유하는 인물이라고 하겠다. 반면 작가의 표현처럼 피비는 여성적 품위와 유용성이 결합된 당대의 이상적 여성상에 해당한다.

 

여기에 이 작품의 또 다른 이야기가 드러난다. 귀족사회에서 공화주의 사회로 정치 체제가 변화하였고, 농경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경제 체제도 변모되는 사회에서 시대의 변천에 따른 귀족계급의 부침과 몰락, 대응이라는 전개 과정을 흥미롭게 살펴볼 수 있다. 독자는 작품 초반부에서 헵지바가 생활을 위하여 상점을 여는 것에 대한 그토록 끔찍하게 여겼던 것을 기억한다.

 

그것은 스스로 옛날 귀족층이라 칭했던 것의 최후 단계였다......그리고 우리는 귀족 부인이 평민 아낙네로 변신하는 바로 그 순간의 헵지바 핀천을 불경스럽게 훔쳐보게 된 것이다. (P.53)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삶에서 배제되고 회피한 헵지바와 클리퍼드는 과거의 인물들이다. 삶에 있어 보다 실제적이고 주도적인 피비와 홀그레이브는 분명 현재와 미래에 속하는 인물이리라. 그렇다면 핀천 판사는? 그는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파도를 타고 높이 비상하려고 했던 인물이었을 것이다. 다만 그는 다가오는 시대의 부정적 측면에 함몰되어 스스로를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게 만들었다.

 

우리는 핀천가에서 두 명의 억울한 인물을 찾을 수 있다. 앨리스 핀천과 클리퍼드 핀천. 핀천 대령의 청교도적 가면을 쓴 파멸적 욕망에 못지않게 앨리스 핀천을 죽음으로 몰고 간 목수 매슈 몰의 죄악도 크다. 인간의 영혼에 대한 존중을 저버린 점에서 그는 전작의 칠링워스와 닮은꼴이다.

 

작가는 세상의 정의에 대해 회의적이다. 부정의와 부조리를 없앤다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하다고 본 것일까. 어설픈 위로와 위안보다는 차라리 상처받은 이들이 아픔을 가슴속에 묻은 채나마 이전보다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게 낫다고 제언한다.

 

우리 인간 세상에서 정말 잘못된 일은, 내가 행한 것이든 당한 것이든 진정으로 바로잡히지 못한다는 것이 진실이다. 그리고 그것이 더 고귀한 희망을 암시하지 않는다면 또한 아주 슬픈 진실이 되기도 할 것이다......그보다 나은 치유는 고통을 당한 사람이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이라고 여겼던 그것을 뒤로 한 채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P.425)

 

작품 주제와 별로 연관성은 없지만 인상 깊은 대목이 하나 있다. 바로 클리퍼드가 기차 안에서 어떤 노신사에게 피력한 사상이다. 거기서 클리퍼드는 문명의 발전이 우리네 삶을 유목민의 그것으로 돌려놓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노매드로 불리는 21세기적 인간형과 세태에 대한 적확한 예견이 무척이나 놀랍다.

 

철도의 발견은, 속도에 있어서나 편리함에 있어서나 우리가 바라는 만큼 광범위하고 불가피하게 점점 향상되면서 가정과 난롯가라는 그 케케묵은 생각을 없애 버리고 그보다 나은 것으로 대체할 것입니다.......(중략)......놀라울 정도로 향상되었고 계속 향상하고 있는 교통시설이 분명 우리를 다시 유목민의 상태로 되돌려 놓을 거라는 게 제가 받은 인상입니다. (P.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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