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감 - 랄프 왈도 에머슨의
랄프 왈도 에머슨 지음, 이창기 옮김 / 하늘아래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에머슨의 글을 한 권 읽었는데 난삽하여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좀 쉽게 정리된 책을 찾다 보니 이 책을 알게 되었다. 옮긴이는 에머슨의 두 권의 에세이집 가운데 일곱 편을 그것도 전문이 아니라 부분 발췌하여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단순한 역자가 아니라 편역자이다.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용이한 접근과 이해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자 에머슨 입문으로서의 역할은 충분하다고 본다.

 

오늘날 에머슨의 이름은 후기지수인 소로의 명성에 바래지고 있는 듯하다. 에머슨 당대와 이후 미국 사회와 문단에서 그의 영향력은 자못 지대하였다고 한다. 사상적으로는 수많은 강연과 연설문을 통해서, 문학적으로는 두 권의 에세이와 함께 시집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혹자는 오늘날 미국과 미국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만든 이가 바로 에머슨이라고 한다. 그런 만큼 에머슨의 글에 도전할 명분과 가치는 충분하다.

 

<자신감>. 또는 자기신뢰로 번역하기도 한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생각을 믿고 신뢰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글이다. 독불장군처럼 오만하라는 뜻이 아니라 타인의 의견과 이해관계 등에 흔들리지 말고 주체적이고 순수한 판단을 통해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마음의 태도를 견지하라는 언명이다. 쉬운 말이나 실천은 어렵다. 그래서 사회 일반은 자신감을 증오한다고 밝힌다. 참되려면 혼자서 가야함을 무릅써야 한다. 정신을 고양하기 위해 고립을 자초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에도 미래에도 구속받지 않고, 세인의 평판에도 흔들림 없이 오로지 현재에 순수하게 살아가야 함을 강조한다.

 

위인이란, 군중의 한가운데 있으면서 철저하게 온화한 태도로 고고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P.19)

 

에머슨의 현재 중시의 주장은 <경험>에서 반복된다. 많은 사람들은 삶의 바로 이 순간을 소홀히 여기고 항상 장래와 미래에 중점을 둔다. 그러고는 자신들의 삶이 덧없음에 한탄을 아끼지 않는다. 에머슨은 딱 잘라 말한다.

 

삶이란 지적인 것도 아니고, 비평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강인한 것이다. (P.45)

 

마음의 안정을 이룰 수 있는, 내가 아는 유일한 길은, 오직 현재라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P.47)

 

현재로서의 삶, 소소한 일상으로서의 찰나를 놓치지 말고 매순간 충실하게 영위하다고 보면 큰 지혜는 자연스레 따라오게 된다는 것이다. 호손의 <큰 바위 얼굴>과도 상통한다. 사실 우리는 생의 이후가 어떻게 전개되고 결말지어질지 알 수 없다. 현재를 외면하고 미래만 주시하는 것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오늘의 노력에 따라 내일의 모습은 전혀 다르게 변할 수 있다.

 

<보상>. 에머슨은 마음의 안정을 중요시한다. 순수한 자기신뢰에 근거한 항상심과 부동심을 가지고 세간에 흔들림 없이 현재의 소소한 삶에 충실한 것. 그가 보는 인생의 핵심은 이러하다.

 

인간의 참된 생활과 만족은, 지나치게 가혹하거나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경우를 피하고, 어떤 상황이나 환경 속에서도 태연하게 마음의 안정을 찾는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P.61)

 

에머슨은 사물과 현상은 모두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개별로 흩어지지 않고 유기적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자 하는 성향은 우주는 물론 인생에도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원인과 결과, 수단과 목적, 씨앗과 열매는 서로 분리할 수 없다. 결과는 이미 원인 속에서 꽃피기 시작했고, 목적은 수단 속에, 열매는 씨앗 속에 이미 들어 있기 때문이다. (P.63)

 

요행은 없다. 반드시 새로운 책임이 뒤따른다. 고통과 패배는 자체로 힘들고 괴롭지만, 그 속에서 뭔가를 깨닫고 배울 수 있다면 보다 큰 성공과 승리의 기틀이 된다. 늘 승리만을 거둔 자는 한 번의 패배로 나락에 떨어지지만, 자신의 약점에서 개선과 보완을 발견하는 자는 끝내 성취하게 된다.

 

<자연>. 에머슨은 자연을 사랑하였다. 그의 <자연론>에 감화되어 소로는 월든 호반에 은거하기로 결심하였다. 에머슨에게 자연은 다정하고 꾸밈없는 소박한 기쁨”(P.79)을 안겨주는 존재로서 결코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것이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덕, 가치에 대한 그의 찬미는 이어진다.

 

문학이나 시, 그리고 과학은......이 깊이를 알 수 없는 자연의 비밀에 바치는 인간의 경의이다. (P.82)

 

자연은 인간의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사랑을 받는다. 자연은 비록 사람이 살지 않는다 할지라도, 아니 오히려 그 이유 때문에 신의 도시로서 사랑을 받는다. (P.82)

 

자연은 언뜻 보아 비합리적인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소소하고 하찮아서 쓸모없어 보이는 현상도 편재한다. 성마른 사람들은 이런 관점에서 자연을 비판하지만 사실 자연의 비합리와 낭비와 무용성은 철저히 합목적적인 장치다. 이처럼 자연은 인간의 이해의 한계를 넘어서는 수많은 비밀을 감춘 채 찬연한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가르친다.

 

<정치>. 법과 정치에 대한 에머슨의 견해는 상대주의적이다. 그는 법은 하나의 비망록에 불과”(P.98)한 것으로 간주한다. 일국의 정치체제란 개인의 권리와 재산의 권리를 지키려는 동일한 요구의 반영이지만, “독특한 국민성”(P.104)에 좌우되므로 타국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민주정도 군주정도 나름의 존재가치가 있으므로 절대시할 수 없다.

 

우리가 전적으로 의지해야 할 것은 모든 법을 꿰뚫고 빛나는 자애로운 필연성에 있다. (P.109)

 

에머슨은 진리와 정의의 지배를 현자에 의한 지배”(P.110)라고 간주한다. 플라톤의 철인과도 상통하는 개념인 현자는 저절로 쉽게 태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불가피하게 합법적 절차를 마련하여 국민들이 이의 지배를 받도록 하고 있지만, 만약 현자가 나타난다면 사정은 바뀌게 된다.

 

합법적인 지배의 남용을 억제하는 해독제는 개별적인 인격의 영향, 개인의 성장이다. 그것은 곧 대리권을 폐지시키는 원리의 출현이며, 현자의 출현이기도 하다......(생략)......현자의 출현과 더불어 국가는 소멸한다. 인격의 출현은 국가라는 존재를 불필요하게 만든다. (P.113~114)

 

<역사>. 에머슨에 따르면 모든 개인들에게는 누구나 한결 같은 마음이 있다.”(P.117). 이 한결 같은 마음은 나와 남 사이를 소통하여 보편적인 마음이 된다. 그리고 이런 마음이 한 일들을 기록한 것이 바로 역사”(P.117)라고 한다. 보편적인 마음 내지 본성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발현되었는가를 살펴보는 게 이 장의 취지다. 그는 우리는 옛것의 숭배자”(P.72)라고 단언한다. 고대의 인물과 사상을 숭배하는 것은 단지 오래되고 낡은 것에 대한 찬미가 아니다. 그 보편적인 마음 내지 본성에 대한 찬미”(P.132)라고 해야 할 것이다.

 

<초영혼>. 여기서 에머슨의 유명한 초령내지 대령(大靈)’ 개념이 등장한다.

 

사람이란 모두 개별적인 존재라는 생각을 받아들이면서도, 인간이 아닌 다른 모든 존재와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 바로 통일이자 초영혼이며, (P.140)

 

인간의 마음속에는 우주의 영혼, 현명한 침묵, 모든 부분과 분자가 균등하게 서로 연관되어 있는 보편적 아름다움, 또는 저 영원한 하나가 들어 있다. (P.140)

 

우리의 영혼은 혼자이고 독창적이고 순수한 그 자신을, 역시 혼자이고 독창적이고 순수한 초월적 영혼에게 바친다. (P.158)

 

인간의 영혼들의 공통적인 본성이 그의 초영혼이다. 초영혼은 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몰개성적인 것, 곧 신 자체이다.”(P.145). 우리는 에머슨이 목사였다는 점, 이후 기독교 교리의 영역을 벗어나 자유로이 인간에 대한 고찰을 해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신은 여호와도 예수도 아니라 인간 영혼과 공통적인 본성에 근거한 일종의 정신적인 에너지라고 그는 파악하였다. 신은 초월적 존재가 아니고 인간에 근거한 것이므로 신을 찬미하는 삶의 방식 또한 달라져야 한다.

 

위대한 신에게 경배하고자 높이 오르는 영혼은 평범하고 진실하다......그저 열심히 일상의 날들을 살아가며 지금 이 시간에 안주한다. (P.153)

 

성실한 마음으로 신을 떠받드는 가장 소박한 사람, 그가 바로 신이다. (P.153)

 

인간이 자기를 신뢰하고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까닭은 이처럼 신적인 최고의 존재가 인간 자신에게 깃들여 있어서이다.

 

에머슨의 에세이에서 많은 인용과 사례들, 그리고 난삽하고 장황한 대목들을 제외하고 보니 남은 것은 도덕서처럼 되고 말았다. 그의 글들이 일종의 자기계발서로 거론되는 이유도 전혀 황당하지는 않다. 그는 강연과 글을 통해 당대 미국 사회의 여러 폐해를 지적하고 개선하고자 노력하였다. 19세기 초반의 미국은 정치적으로 독립을 쟁취하였으나 사회, 사상, 문화면에서는 여전히 구대륙의 유산에 충실하였다. 에머슨은 유럽과 차별되는 정신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우월한 사회 건설이 미국에서 가능하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주창한 것이다. 그리고 에머슨이 후대 미국 사회에 남긴 영향은 아래 인용으로 충분하다.

 

에머슨은 낙관적, 이상주의적, 민주적, 외향적, 개인주의적 등 미국 국민성의 여러 요소들을 대변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우리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급자족을 가르쳤다. (<평생 독서 계획>(클리프턴 패디먼 외), P.236)

 

한편 이 책은 부록 에머슨의 세상을 바라보는 눈으로 그의 글에서 뽑은 경구들을 수록하고 있다. 그는 영어 경구의 대가로 오늘날에도 명성이 자자하다고 하니, 촌철살인하는 듯이 의표를 찌르는 날카로운 표현의 재미를 누려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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